173화. 국문
“전하! 행차하셨사옵니까?”
“그래, 그동안 수고가 많았다. 지금부터 국문은 의정부 지사(知事)를 겸직하는 도승지가 행할 것이니, 나머지는 물러나도록 해라.”
임금의 명을 받은 금부도사들은 국문장에서 물러나 높은 자리에 앉은 임금의 곁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이제 내 차례였다.
오랏줄로 묶여 엉망이 된 왜구들 앞에 놓인 의자에 천천히 엉덩이를 붙였다. 내 지시대로 단 한 명, 고문을 받지 않아 멀쩡한 놈이 하나 있었다.
입을 다물고 나를 쏘아보던 놈의 입에서 웬 말 몇 마디가 흘러나왔다. 일본어는 현대에서 그래도 조금 들어봤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변 봉사(奉事), 저 왜인이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
“사투리가 조금 심해서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으음…….”
“사투리라? 구주 변방에 사는 놈이라 말도 다른가 보군.”
“그렇습니다. 음, 이제 알겠군요. 자신은 단순한 왜구가 아니고 번주의 가신이라며, 오해가 있었던 것이라는 말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영감.”
국문을 위해 의금부로 불려온 변승업이 내게 왜인의 말을 통역해 전했다. 그의 통역에서 나는 저 포로의 정체가 선대 사쓰마 번 다이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가 해적치고 고귀한 신분이라는 것은 옷차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물론 군데군데 찢겨나간 데다 그 사이로 드러난 살에는 멍이 들어 볼품없긴 했지만.
아, 요운이 녀석이 빠따를 휘둘러 적장을 사로잡았다더니, 이놈이 그놈이군.
“죄인, 이름을 말하라.”
“이 자는 전 살마번주 도진충항(島津忠恒, 시마즈 다다쓰네)의 십삼남이자, 도진 가(家)의 가신인 이세(伊勢) 가의 후계자, 이세정소(伊勢貞昭, 이세 사다아키)라고 합니다, 도승지 영감.”
다이묘의 떨거지 아들이 가신에게 양자로 들어간 건가?
임금의 흥미 어린 시선이 뒤에서 날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하긴 다이묘의 아들이 해적질이나 하고 다니는 상황이 조선인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좋아, 그렇게 잘나신 분이 왜 우리 조선의 교역선을 털려고 하셨는지, 어디 변명이나 들어볼까.”
손짓을 보내자 구석에 대기하고 있던 나장(羅將) 하나가 물이 가득 담긴 물동이를 들고 걸어 나왔다.
오늘도 물은 답을 알고 있을 터였다.
***
찰싹. 찰싹.
왜장은 뺨을 호되게 얻어맞고 눈을 떴다. 천천히 윗배에서 묵직한 감각이 올라오고 있었다.
“웁! 우욱! 우웨에엑!”
목구멍을 넘어오는 쓰고 시큼한 액체들 덕분에, 그제서야 두목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정신이 들자, 지금 보이는 저 항아리에 방금까지 머리가 처넣어졌던 것 또한 생각났다.
“정신이 드나? 이세 사다아키?”
앞에 앉아있던 고관이 하카타 사투리를 쓰는 역관의 입을 빌려 안부를 물어왔다. 아까도 똑같은 질문을 해오기에 침을 퉤 뱉었더니, 그대로 거꾸로 들려 물 항아리에 머리를 처박힌 판이었다.
“사…… 살려주십시오!”
“목숨 귀한 줄 알면 노략질을 하지 말았어야지.”
냉랭한 목소리와 함께, 왜장의 얼굴에 젖은 한지 한 겹이 덮어졌다. 도무지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물에 적신 종이가 한 장씩 얼굴 위에 더해지고 있었다.
“읍! 으읍!”
“고통스러운가? 평화롭게 살고 있던 류큐를 침공하고, 남의 나라 상선과 백성에 손을 댔으면 그 정도 각오는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방금까지 인두로 생살이 지져지는 부하들을 보면서 각오를 했건만, 이것은 더한 고통이었다. 유학의 나라라 능지형이나 팽형도 함부로 내리지 않는다던 조선이 이럴 줄이야!
젖은 종이가 얼굴 위에 한 겹씩 더해질수록, 공기를 받아들이지 못한 가슴이 조여져 터질 것만 같았다. 눈마저 가려져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조금씩 공기가 차단되는 공포는 어찌 보면 죽음보다 더했다. 흰자위에 혈관이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만!”
왜장의 시야가 거의 흐릿해졌을 무렵, 구원과도 같은 명령이 내려왔다. 공기와 코를 차단하고 있던 한지가 일거에 벗겨졌다.
왜장은 목구멍에서 괴상한 소리를 내고 몸부림을 쳐가며 가슴에 한껏 공기를 빨아들였다. 그는 자신이 형틀에 묶인 채로 바닥을 구르고 있단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시키는 건 뭐든지 할 테니 살려주십시오!”
“일본의 무사는 고작 이 정도냐? 방금까지 당당하게 죽일 테면 죽이라고 일갈하던 자는 어디 간 게냐?”
“흐엑! 제발 물만은……! 읍!”
바닥을 구르던 왜장을 굵은 팔뚝들이 일으켰다. 다시 한 번 그의 얼굴에 젖은 종이가 한 장씩 덮이기 시작했다.
얼굴에 찰싹 달라붙은 한지를 떨어뜨리기 위해 왜구의 두목은 열심히 몸부림을 쳐봤지만, 그럴수록 종이는 더 끈끈하게 달라붙어올 뿐이었다.
“내 원래 혈육의 죄에 연좌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으나, 그걸 빼고도 네놈이 저지른 죄는 목을 베어도 모자랄 터.”
“우그윽…….”
“사쓰마와 네놈의 할아비가 반백년 전 우리 강토에 끼친 해악을 우리가 잊었다 생각했느냐? 이 땅을 침범한 것으로 모자라 너희 사쓰마 놈들이 잡아간 백성이 삼만을 헤아리며, 그들을 제대로 돌려보내지도 않았었지, 아마?”
“욱…… 우욱……!”
“그걸 생각하면 이 정도 고통은 수만 번을 가해도 모자란다. 이렇게 가벼운 형벌을 내리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도록.”
왜장의 할아비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정유년에 일어난 조선 정벌 때 원정군의 일익을 담당했던 다이묘였다. 그가 사천(泗川)이라는 곳에서 조명 연합군 4만을 격파한 일은 시마즈 가문 내에서도 자랑스레 내려오는 역사였다.
게다가 요시히로는 정벌에 실패하고 열도로 귀환할 적에 더 큰 공을 세웠다. 입에서 불을 토하는 조선의 장군이 탄 채로 무서운 기세로 쫓아오는 깃카이센(亀甲船)을 시마즈의 함대가 막아 세운 것도 자랑 중의 자랑이었다.
왜장은 할아비가 조선제일장군의 목숨을 거뒀다며 죽은 아비가 자랑스레 이야기하던 것까지 떠올려냈다. 그 무서운 장군의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이순…….
“허억! 허억! 후어어억!”
왜장은 그제서야 자신이 죽기 직전 주마등을 체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아직 살아있다는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자신의 고통이 계속되리란 사실 또한 깨달았다.
그 정도의 장군이면 조선에서는 성웅(聖雄) 취급을 받을 것이다. 자신은 조선에게 세대를 뛰어넘은 철천지원수 취급을 받아도 모자란데, 하필이면 조선의 교역선을 노략질하려다 대패하고 끌려왔다는 것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아직 원수의 기가 덜 죽었구나. 한 차례 더 시행하라.”
“살려주십시오! 이 천한 놈의 선조가 죄를…… 훕!”
그날 노략질을 나가지 말았어야 했다. 또 다시 숨이 막혀오는 와중에도 왜장은 생각했다.
에도의 막부에서 올해는 명으로 조공을 보내지 말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 이상을 감지했어야 했다. 그의 이복형, 사쓰마 번의 다이묘인 시마즈 미쓰히사(島津光久)가 아무리 재물을 구해오라 닦달을 하더라도 병을 칭해서라도 육지를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올해 조공을 바칠 수 없게 되었으니 나가노(永野)의 금광을 개발하는데 들어갈 비용이 부족하다며, 그의 이복형은 부하들을 연신 바다로 내몰아댔다.
결국 해적질을 할 곳은 한 곳뿐이었다.
강한 함대가 버티고 있는 명의 해안을 약탈할 수는 없고, 해금령이 내려진 청의 해안에는 약탈할 것이 없다.
남은 것은 조선뿐이었다.
“이 나라가 언제까지 당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더냐? 건방진 도적놈들 같으니라고.”
“웁! 우우웁!”
“감히 조선을 약탈하려 시도해? 그걸 여러 번 격퇴당했음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또다시 큰 규모로 노략질을 해왔단 말이지?”
마침 조선이 명과 활발하게 교역을 하고 있으며, 그 중간기지로 제주라는 섬에 항구까지 마련했다는 소문이 나가사키로부터 흘러들어왔다.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조선 수군은 근해를 벗어나면 허수아비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제주를 향해 출발했던 해적선들은 무사히 돌아오지 못했다.
나아갈 때마다 연전연패.
타이완 섬에서 활동하는 화란인들의 것과 비슷한 배에게 혼쭐이 났다는 보고가 연이어 들어왔다. 누가 생각해도 나가사키를 오가던 화란인들이 사쓰마 번의 왜구들과 싸우는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놈들이 언제까지고 본진에서 먼 바다에서 버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때를 기다렸다가 놈들이 타이완으로 돌아간 사이 조선을 쳐라!’
다이묘는 답이 나왔다는 듯 우쭐해서 왜장에게 명을 내렸다. 하지만 그렇게 호기롭게 나선 길, 왜장은 적의 함대를 바로 마주치고 말았다. 그들은 마치 이 근처의 해류를 몽땅 읽고 있다는 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도 마주친 것은 고작 다섯 척의 함대, 배의 크기가 조금 크긴 했으나 스무 척이 넘는 세키부네를 끌고 갔으니 속도로 승부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는 싸움이라 판단했다. 그런데…….
‘포탄을 맞은 곳에서 물이 솟구칩니다!’
‘으아악! 내 다리! 다리가!’
‘적선이 접근합니다! 키가 말을 듣지 않습니다!’
문자 그대로 참패였다.
사정거리 밖이라 안심하고 있던 사이 갑자기 적군의 포격을 맞아 세키부네들은 혼란에 빠졌으며, 우왕좌왕하던 사이 적의 함대는 해류를 타고 위치를 바꿔가며 전후좌우에서 계속해서 포격을 가해왔다.
결국 다수의 세키부네는 침몰하고, 일부는 도망치는데 성공했지만 왜장의 대장선은 도망치지 못했다. 가까이서 쏘아대는 산탄에 배는 걸레짝이 되어 전투력을 상실했고, 그렇게 적의 대장선이 다가오자 할복을 각오하고 무기를 들었더니 뒤통수가 번쩍!
어째서 조선 장군이 입에서 불길을 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는지, 당해보니 알 것 같았다.
“허어어억! 허억! 허억!”
이번 고문이 겨우 끝난 모양이었다. 이놈의 주마등은 언제까지 겪어야 하는가.
격하게 숨을 쉬는 왜장의 몸이 기우뚱 기울어지더니, 그대로 얼굴부터 쓰러졌다. 남아있던 물과 침, 그리고 흙으로 그의 얼굴이 엉망진창이 되었지만, 숨을 고르는데 여념이 없는 왜장은 그조차도 깨닫지 못한 듯했다.
“이 천한 놈이 큰 죄를 지었습니다! 대왕님! 부디 한 번만 자비를!”
“자비? 우리 백성들에게 칼날을 들이민 놈들에게 자비를 베풀란 말이냐?”
“속죄를 위해 시키시는 일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대왕님께서 제 형과 맞서 싸우라 명하시면 그대로 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목숨만은…….”
“개수작 부리지 마라. 너희 왜놈들을 어찌 믿는단 말이냐. 다시 형을 시행하라!”
왜장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동안 당한 고문의 여파가 통째로 그의 정신을 흔들었는지, 뜻 모를 소리를 마구잡이로 뱉으며 흙바닥을 구르는 왜장이었다.
“잠깐!”
몸부림치는 왜장을 들어 세우던 나졸들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 위엄 있는 목소리는 저 높은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대왕님!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이세 사다아키! 살려만 주신다면 영원히 충성를 다하겠나이다!”
“전하께서 네놈들의 충성은 믿을 수 없다고 하신다. 우리가 네 무엇을 믿고 살려줘야 한단 말이냐.”
“신발을 핥으라면 핥겠습니다! 궁궐의 마구간지기가 되라면 되겠습니다!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제발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말이 효과가 있기라도 했던 걸까, 통역이 멈추었다. 상황이 조금 바뀔 기미가 보이자 왜장은 다시 몸부림을 쳐대며 자비를 구걸해댔다.
“……조선의 개가 되라면 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그 입 닥치지 못할까. 네놈과 네놈의 가문이 지은 죄는 하늘을 뒤덮고도 남으나, 주상 전하께서 하해와 같은 자비를 내리시어 네놈에게 특별대우를 고려해보라 명하셨다.”
“특별대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왕님!”
바닥을 뒹굴던 왜장은 형틀이 몸에 매달린 채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아댔다. 참으로 절박하기도, 우습기도 한 장면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포로로 잡힌 왜구들을 모조리 목 베어 임진년 난 도중 산화하신 호국영령들께 바치고 싶으나, 네놈이 앞으로의 일을 약속하기에 따라서 간신히 목을 붙여주는 것을 고려해 보겠다.”
“무슨 일이든 시켜주십시오! 뭐든지 따르겠습니다!”
“그럼, 네놈의 이복형, 시마즈 가문의 당주이자 사쓰마 번의 다이묘에게 주상 전하께서 내리는 국서를 온전히 전달할 수 있겠느냐?”
고개를 박은 채로 왜장은 절실하게 고개를 끄덕여댔다. 목숨을 살려주는 대가로 문서 몇 장 나르면 된다니, 이만큼 좋은 조건이 있을 리가 없었다.
“쉬운 일이라 생각하느냐? 그 국서의 내용이, 네놈들이 정벌한 류큐를 해방하라는 것임에도 전달할 수 있겠느냐?”
“류큐…… 말씀이십니까? 그것은 조금…….”
“이 더러운 놈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구나. 이놈을 당장……!”
“하겠습니다! 하겠습니다, 대왕님! 하지만 제 이복형은 성질이 급하고 잇속에 밝은 자라, 대왕님의 고귀한 명령이 내려왔음에도 그것을 순순히 따를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고문이 재개될 여지가 보이자, 왜장은 급박한 나머지 알고 있는 정보를 고스란히 토해내기 시작했다. 목숨을 건질 희망이 보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너의 역할은 주상 전하의 고귀한 뜻을 전달하는 것까지다. 너희 다이묘에게 전해라.”
“예……! 예!”
“첫째, 당장 대명의 번국이자 조선의 아우국인 류큐를 해방하고 그들에 대한 압제를 거둘 것. 둘째, 그동안 자행한 노략질에 대해 다이묘가 조선에 입조해 사죄하고 도공을 비롯해 잡아간 백성들을 반환할 것.”
“입조…… 라고 하시면…….”
쓰시마의 다이묘가 그랬던 것처럼 조선의 신하가 되란 이야기인가? 왜장은 당황한 나머지 명령을 전하는 말허리를 끊어놓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에 분노했는지, 앞에 앉아 고문을 지시하던 고관의 목화(木靴)가 왜장의 앞으로 다가왔다. 뒤이어 억센 손길이 떨고 있던 왜장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닥쳐라. 네놈에게 반문을 허락한 기억은 없다. 저 두 가지 조건을 사쓰마 번이 이행한다면, 네놈과 네놈의 가문이 그동안 조선에 저지른 죄는 불문에 붙이고 나가사키로 보내던 무역선 일부도 가고시마로 보낼 것이다. 허나 그렇지 않으면…….”
“잘못했습니다! 반문하지 않겠습니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기억해라. 그때는 함대를 이끌고 무술년 노량 앞바다에서 뼛속까지 맺힌 한을 갚으러 갈 것이다. 내가 직접 말이지.”
“……!”
왜장은 평생을 무사로 살아오면서 상대의 전력(戰力)을 파악하는 눈을 가졌다 자부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멱살을 잡은 상대만큼 강해 보이는 사람은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몰려드는 공포로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왜장은 조선에서 내린 명령을 절대로 거부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
나머지 왜구들은 전부 참수당해 목이 성벽에 내걸렸다. 살아남은 것은 사자로 지목되어 간신히 목숨을 붙인 왜장뿐이었다. 그렇게 사쓰마 다이묘의 동생, 이세 사다아키는 국서를 든 채 나가사키로 향하는 배에 실려 조선을 떠났다.
조선 국왕의 옥새가 찍히고 명나라 도독동지 겸 조선 도승지가 작성한 국서.
선명하게 찍힌 두 개의 인장은 그 문서의 무게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반드시 네놈의 형에게 이것을 그대로 전해야 할 것이다. 성벽 위에 내걸린 저 대가리 꼴이 되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하…… 하잇!”
내 말에 사색이 된 왜장은 끊임없이 머리를 조아려댔다. 그러나 놈들은 겉과 속이 다르기로 유명한 족속, 이러한 행동을 믿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겁을 주는 건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어차피 해적질이나 하고 다니는 놈들, 앞으로 취할 행동이 대충 예상이 갔다.
근본도 없는 놈들이 국서를 받는다 해서 순순히 숙이고 들어오겠는가. 어떻게든 시간을 끌거나, 류큐를 거짓으로 해방시킨 척 하고 위기를 넘기려 들겠지.
하지만 사쓰마 번에게만 시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목표가 확실해졌고 명분까지 챙겼으니, 조선 역시 원정군에 걸맞은 힘을 키울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리 최고의 제독과 훌륭한 함선이 있더라도 다섯 척만으로는 멀리 정벌을 나가기 어려울 테니까.
지금 국서를 쥐어 보낸 놈에게 주입한 공포는, 곧 혼란으로 변해 사쓰마 번을 덮칠 것이다. 그럼 조선이 원정을 준비하며 소모하는 시간은 더 값져지겠지.
※ 작가의 말
임진왜란으로 조선에 엄청난 피해를 입힌 일본이었으나, 전장에서 접한 조선군의 맹장들은 그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각인되어 후대에도 전해 내려갔습니다.
진주성 전투에서 열 배가 넘는 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김시민의 경우에는 그의 관직인 진주 목사(牧使)를 일본어로 부른 ‘모쿠소(木曾)’라는 이름으로 소설과 가부키 연극에 등장하여 지금까지 전승되고 있습니다.
충무공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거북선을 복카이센(沐海潛, 목해선)이라 부르며 가토 기요마사가 퇴치한다는 가부키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당연히 일본 측 서적에도 충무공은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데, 19세기에 간행된 ‘조선정벌기’라는 책에는 전투 중 팔에 맞은 유탄을 스스로 칼로 째 제거하는 충무공의 삽화가 들어갔을 정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