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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75화 (175/298)

175화. 가고시마만 전투

“급보! 급보입니다!”

갑작스러운 소음에 사쓰마 번의 다이묘, 시마즈 미쓰히사는 낮잠에 빠졌던 눈을 부릅떴다. 중간에 깬 덕분에, 다이묘의 얼굴에는 불쾌함이 몰려들었다.

잠을 방해한 것이 웬 잡놈이면 그대로 베어버리거나 금광에 처박을 생각까지 한 미쓰히사였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익숙한 가신이었다.

“성에서 웬 소란이냐? 급보라니? 공사 중이던 나가노의 금광이라도 무너졌단 말이냐?”

“도노사마! 남쪽 해상에서 정체불명의 선단이 관측되었습니다! 빨리 일어나셔야 합니다!”

“이상한 선단? 류큐 놈들이 또 거래를 빙자해 구걸하는 배를 보내온 것이 아니냐?”

“아닙니다! 화란(和蘭, 네덜란드) 놈들의 배와 닮았는데, 놈들은 저렇게 많은 배들을 이 근방에 몰고 온 적이 없습니다!”

화란? 놈들은 저기 타이완 섬 근방에서 후쿠마쓰(정성공)의 눈치를 보느라 바쁠 텐데?

미쓰히사는 지금 상황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다. 일단 갑자기 큰 규모의 함대가 이 근방에 날아들 거리로 떠오르는 것이 하나도 없었으니까.

“도노사마! 급보입니다!”

“또 무슨 일이냐!”

또 다른 가신 하나가 방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리 크지 않은 가고시마 성이 점점 소란스러워지자, 다이묘의 짜증 또한 짙어지고 있었다.

“그 이상한 함대의 정체를 밝히려 출항한 세키부네들이 포격을 당했습니다! 지금 이렇게 누워계실 때가 아닙니다!”

“뭣이? 지금 그놈들이 우리를 치러 왔다는 것이냐?”

“그런 것 같습니다! 게다가 겨우 생환한 생존자가……! 그놈의 말로는……!”

숨이 찼는지, 아니면 그만큼 지금의 상황이 당황스러운 것인지, 방금 뛰어 들어온 가신은 갑자기 차오른 숨에 말을 더듬고 있었다.

다이묘의 호통이 떨어지자, 그제서야 가신은 말을 이었다.

“저 함대가 저번에 제주 근방에서 마주친 조선의 함대와 무척 닮았다고 합니다!”

조선 함대가 여기까지?

그제서야 다이묘의 머릿속에는 조선에서 보냈던 국서가 떠올랐다. 국서에 찍혀 있던 조선 국왕의 도장이 새빨갛게 달궈져 머릿속에 찍히는 듯했다.

***

“그 퍽퍽하고 텁텁한 것을 잘도 먹는구나. 아직도 물리지 않는 게냐?”

“이 땅콩 범벅 말인가요? 사부님과 만나기 전에는 곡기도 구경하기 어려웠는데, 이런 고급 음식에 불만을 가지면 사람의 도리가 아니죠.”

“네가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보름 가까이 같은 음식만 먹어야 하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지 않느냐.”

“수군 아저씨들도 그닥 불만은 없어 보였어요. 말린 청어에 찐쌀만 먹던 예전보다는 훨씬 낫다더라구요.”

아마 이번이 해안이 보이기 전 마지막 식사일 것이다. 페미컨 조금과 김치, 그리고 미숫가루를 땅콩버터로 반죽한 것이 수군들의 전투식량이었다.

땅콩은 감자와 고구마가 들어올 때 같이 들어왔으나 조선 내에서 소비가 잘 되지 않고 있었다. 그 땅콩을 어디에 쓸까 고민하다가 발견한 묘안이 이것이었다.

볶은 땅콩을 기름 조금, 설탕 소금 조금과 함께 갈기만 하면 완성되는데다, 고열량에 보존성도 좋으니 이만한 전투식량이 어디 있을까. 맛도 훌륭하니 수군들은 식사에 대해선 거의 불만이 없는 모양이었다.

“든든히 먹어두어라. 전투가 벌어지면 언제 끝날지 모르는 법이니.”

“저는 갑판 위로 나오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별일이야 있겠어요?”

“전투가 시작되면 계속해서 발사되는 화포 때문에 배가 흔들리고 연기가 바다를 뒤덮을 게다. 그런 상황에서 제정신을 차릴 수 있겠느냐. 속이나 안 게워내면 다행이겠지.”

“하지만…….”

“전쟁은 애들 장난이 아니다. 네가 우겨서 경험이나 쌓게 하려고 동행시킨 것이지, 딱히 네 도움이 필요해서 데리고 온 것이 아니란 사실을 명심하도록.”

사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길산이 녀석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방금 마주친 세키부네 선단을 향해 천자총통이 일제히 불길을 뿜었을 때, 누구보다 먼저 얼굴이 파랗게 질린 녀석이었으니까.

순식간에 단 한 척을 제외한 세키부네가 전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음에도 녀석의 안색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은 조금 시간이 지나야만 했다.

아직 길산이에게 전쟁터는 아직 너무 일렀나.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사부가 더 걱정되는걸요. 대감 소리를 듣는 분이 몸소 전장에 나가시다니, 큰어머니께서 밤마다 걱정하실 거예요.”

“나라를 위한 일에 대감과 아이가 따로 있겠느냐. 조선에서 총통위 병사들을 가장 잘 지휘할 수 있는 사람은 나다. 그렇기 때문에 자원한 것이고.”

“그래도 몸조심하세요, 사부. 사부의 몸은 사부 혼자만의 것이 아니니까요.”

“알고 있다.”

하지만 길산이 녀석의 잔소리에 어울려주는 것도 잠시였다. 슬슬 곧 전투가 벌어질 것 같은 기미가 보이고 있었으니까.

“도절제사 대감! 신호가 올라왔습니다!”

관측을 맡은 군관이 대장선에서 붉은색 깃발과 보라색 깃발이 올라왔다며 나를 향해 뛰어들었다. 라위터르와 한 약속대로라면 앞의 것은 적선 발견의 신호, 뒤의 것은 임무를 그대로 수행하라는 신호일 것이다.

뱃전 너머로 펼쳐진 수평선을 보니, 이미 두 줄로 늘어서 만의 입구를 횡으로 틀어막은 벽란선들이 대열을 유지한 채 전진하고 있었다. 맞은편에는 개미떼처럼 다시 몰려온 세키부네들이 가득했다.

쾅!

대장선에 실려 있는 화포 두 문이 동시에 불을 뿜었다.

아직 적 함대와는 꽤나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한 발이 선두에 서 있던 세키부네에 정확히 명중했다.

적은 그 거리에서 포탄이 날아올 것을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멀리서도 세키부네 대열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감지되고 있었다.

“이야, 저걸 정말로 실전에서 쓸 줄이야. 박 판관이 고생한 보람이 있습니다요.”

“지금 그렇게 여유부릴 때가 아니네. 통제사가 호언장담한대로 적들을 만 안쪽으로 밀어내고 있으니, 이제 우리가 맡은 임무를 수행해야지.”

대장선인 벽란대선에는 박연이 배에 맞게 심혈을 기울여 개량한 홍이포 네 문이 실려 있었다. 크기는 원본에 비해 조금 작아졌지만 반동은 줄고 정확도는 올라간 대포다.

아, 이젠 홍이포가 아니다.

네덜란드와 정식 수교가 맺어져 이제 더 이상 그들을 붉은 머리 오랑캐, 홍이(紅夷)라고 부르면 안 되니 임금이 새로운 이름을 하사한 것이다. 저번 토벌에 공이 높은 라위터르의 입김이 짙게 묻은 이름이었다.

대장선을 선두에 세운 조선 함대는 다시 천천히 전진하기 시작했다. 만 안쪽을 채운 적 함대는 아군에게 쫓겨 사냥당하는 초식동물처럼 후퇴하기에 바빴다.

적의 일부는 그 혼란 사이에서 우회기동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움직임을 예측한 듯이 먼저 날개를 펼친 아군 벽란선에 의해 천자총통 몇 발을 맞고는 뒤로 물러서야 했다. 명백히 아군의 움직임이 한 수 빨랐다.

게다가 라위터르의 함대가 얕은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을 효과적으로 끼고 싸운 탓에 적도 뾰족한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일부에 국한된 병력으로는 더 이상의 전략을 짜내지 못하고 허겁지겁 후퇴하는 수밖에.

“아군이 적들을 몰아넣고 있다! 준비를 마친 배부터 상륙에 돌입한다! 깃발을 올려라!”

“예! 도절제사 대감!”

내 지휘선에서 오른 신호를 본 배들이 일사불란하게 해안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원래 교역선으로 쓰던 예성선에 무장을 갖춘 배니만큼, 기동력 하나는 벽란선보다 뛰어났다. 그들은 그 기동력을 살려 해안에 빠르게 총통위 병력들을 상륙시킬 것이다.

상륙 과정에서 화약이 젖지 않도록 신신당부를 한 후, 김 갑사 역시 배에서 내릴 준비를 했다. 이제 나는 해안을 따라 가고시마로 진격하는 총통위 병력들을 해상에서 엄호하며 라위터르의 뒤를 따를 것이다.

“부탁하네, 김 별장.”

“맡겨 주십쇼. 내려주신 두 가지 임무에 온 힘을 다하겠습니다요.”

“자네들의 앞길을 막는 적에게는 이 천자총통들이 불을 뿜을 것일세. 믿고 앞으로 나아가게. 그리고 무사히 임무를 수행한 후, 목적지에서 다시 만나세.”

어느새 전투준비를 끝마친 김 갑사는 내게 인사를 올리고는 제일 먼저 뱃전 너머로 사라졌다. 나가사키를 통해 내통해온 왜장, 이세 사다아키가 제공해온 지도를 품에 넣은 채였다.

여기까지 오며 잡은 포로들에게 검증까지 거친 정보를 받았으니, 김 갑사라면 충분히 임무를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줄무늬 갑옷을 등에 짊어진 병사들 역시 줄줄이 그의 뒤를 따라 해안에 상륙했다.

***

사쓰마는 외진 고장이다.

규슈의 최남단에 위치해 있고, 자랑이라고는 아직도 가끔씩은 연기를 뿜어대는 화산과 그 재가 쌓인 땅에서 나는 채소 정도다.

그렇기 때문에 이 척박한 땅에서 태어난 사내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바다로 나가야 했다. 힘을 길러 남의 것을 빼앗아 생계를 이어나가는 것이 이 땅에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헌데 지금 이 상황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 땅을 공격해오는 자들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시절에도 전해지지 않았다.’

대대로 사쓰마 번의 친위대를 키워온 아시가루 다이쇼(足軽大將, 경보병대장)는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요새야 속국으로 삼은 류큐에서 꽤 많은 수입이 흘러들어오고 있다지만, 그 전까지는 잃을 것이 없어 해적이 되어 날뛸 수 있었던 곳이 사쓰마였기 때문이었다.

다이묘의 명을 받고 구색을 맞춰 설치해놓은 해안포 진지에 주둔중이긴 하나, 이것이 적을 막는데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임진년 출병 당시 조선에서 노획해왔다던 화포 열 문 가량이 덩그러니 바다를 향하고 있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다이쇼 사마! 이거 큰일 아닙니까?”

“칙쇼! 경거망동하지 마라. 네놈들이 작전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논한단 말이냐!”

사실 병사인 아시가루들을 안심시키고자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에도 바다에서의 패색은 짙어보였다. 본래 세키부네의 빠른 기동력을 살려 적을 둘러싸고 배에 기어올라 백병전을 벌이는 것이 그들의 주 전략이었는데, 아예 통하지 않고 있었다.

적의 배는 거대한 몸집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세키부네만큼이나 빨랐다. 그들이 미처 소식이 닿기도 전에 빠른 속도로 진군해와 가고시마만의 입구를 봉쇄한 탓에, 사쓰마 수군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만 안에 갇혀버린 것이다.

가고시마만은 바다가 육지 쪽으로 좁고 깊게 파고든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 지형 탓에, 세키부네들은 머릿수에서 크게 앞서는데도 불구하고 포위진을 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적의 함선이 훨씬 뛰어난 데다, 훈련도 잘 되어 있다. 거기에 원거리에서 쏘아대는 화포 탓에 구석으로 몰리고 있는데다, 포위를 시도한다고 해도 저렇게 날렵한 적의 함선이 포위를 허락하겠는가.’

만약에 죽음을 각오하고 접근전을 벌인다면? 그래도 승산은 높지 않아 보였다. 일자진을 세운 채로 전진하는 적의 전선들 뒤로 중형선 함대가 한 무리 더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급이나 정찰을 겸하는 배일까? 중형선 치고 몸놀림이 유난히 가벼워 보이는 것을 보니 그 짐작은 맞는 모양이었지만, 그 갑판에 올라와 있는 화포의 위력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더 접근했다가는 말 그대로 포탄의 비가 쏟아지겠지.

이미 아군은 전의를 상실한 듯했다. 다른 움직임을 보이기는커녕 멀리서 일방적으로 날아드는 포탄을 피해 계속해서 뒷걸음치기 바빴다.

‘게다가 저 화포는 대체……. 포탄이 오백 보는 족히 날아가지 않는가. 여기 있는 조선제 화포가 그렇게 멀리 포탄을 날린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적의 대장선이 분명한 커다란 배에서는 계속해서 포탄을 쏴 가며 아군 세키부네들을 몰아붙였다. 말도 안 되는 화포의 사정거리 탓에 후퇴를 거듭하고 있는 세키부네들은 어느새 가고시마 항에 가까운 위치까지 다가와 있었다.

어느새 해안포 진지까지 가까이 다가온 전장을 보고, 다이쇼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아군 함대가 더 이상 반항할 수 있는 수는 그에게도 떠오르지 않았다.

“장전! 모든 포를 빠르게 장전한다!”

“하잇!”

여기서라도 아군을 도와야 한다.

그나마 이쪽을 향해 포탄이 날아오지 않은 것을 보니 아직 적은 이 해안포 진지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속절없이 밀려나고만 있는 이 상황을 어떻게든 이 화포를 이용해 타개해야 했다.

탕! 탕! 탕!

그 순간, 바다를 노려보고 있던 아시가루 다이쇼의 오른쪽 귀에 총격음이 세 번 울렸다.

분명 이 해안포 진지의 우측에 위치한 것은 작은 언덕과 수풀뿐일 텐데.

“부관, 방금 총소리, 나만 들은 건 아니겠지?”

“더 전방에서 적 함대를 정찰하고 오라며 아시가루 몇을 보내긴 했는데……. 끄윽!”

부관의 말은 끝을 맺지 못했다. 다시 한번 같은 총격음이 난 직후였다.

갑자기 바닥에 엎어진 채 꿈틀거리는 부관을 바라보며, 아시가루 다이쇼는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점점 움직임이 멎어가는 부관의 가슴팍에서 흘러넘치는 피가 땅을 적시고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날아온 총탄인가? 조총의 사정거리 안에는 적군은커녕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천천히 총탄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움직이던 다이쇼의 눈동자는 드디어 낯선 줄무늬 갑옷 하나를 분별해냈다.

“저리도 멀리서? 이백 보는 족히 될 거리가 아닌가!”

“다이쇼 사마?”

“이놈들! 지금 바다를 보고 있을 때가 아니다! 어서 무기를 들고 대열을 갖춰…… 아…… 아……!”

지휘를 위해 허리춤에 찬 카타나를 뽑아들었던 다이쇼는 말을 잇지 못했다. 수풀 사이로 드러나기 시작한 줄무늬 갑옷은 한 벌이 끝이 아니었다.

“몸을 숨겨라! 총탄이 날아든……!”

어느새 말을 잊은 아시가루 다이쇼의 손에서 카타나가 미끄러져 떨어졌다. 뒤이어 비 오듯 쏟아지기 시작한 총탄들은, 그 자리에 있는 모두의 목숨을 거두고서야 멈추었다.

※ 작가의 말

독자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백지도에 조선군의 진격로를 그려 첨부합니다. 가고시마가 위치한 규슈 남부의 지형입니다.

최초로 조선군이 사쓰마의 세키부네를 향해 발포한 것은 빨간 표식 부근입니다. 지금은 이부스키(指宿)라 불리는 도시 앞바다죠.

백지도에서는 가고시마 앞바다에 떠 있는 큰 섬, 사쿠라지마와 규슈 본섬이 육로로 연결되어 있지만, 그것은 20세기에 일어난 화산 분화로 인해 지형이 바뀐 결과입니다. 17세기 당시에는 섬의 오른편에도 만 최심부로 향하는 통로가 뚫려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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