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복수
적은 라위터르가 지휘하는 함대의 공격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놈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데는 포탄 두 발씩이면 충분했다.
대장선에서 쏘아올린 포탄이 먼 거리에서 계속해서 세키부네들 사이에 떨어졌다. 라위터르의 배에는 개조된 화포가 네 문밖에 실려 있지 않았음에도, 배를 계속 돌려가며 신들린 듯이 연사해대는 포탄들이 쉴 틈 없이 적선들을 두들겨댔다.
“적이 거리 안에 들어왔다! 방포하라!”
“통제사께서 방포를 명하셨다!”
“방포!”
그것을 견디지 못한 적의 함대가 전황을 바꾸려 전진해오면, 대열을 단단히 유지하고 있는 나머지 전선들에서 천자총통을 쏘아댔다. 애초에 천자총통의 화력을 감당할 체급이 아닌 왜선들은 포탄 세례를 얻어맞고 추풍낙엽처럼 바닷속으로 사라져갔다.
김 갑사가 지휘하는 병력을 상륙시킨 후 대장선에 옮겨 탄 보람이 있었다. 라위터르 옆 일등석에서 세키부네들이 박살 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참으로 장관이었으니까.
‘코로스! 어째서 놈들은 우리 돌격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냐! 어째서!’
세키부네에 타고 있는 왜장 하나쯤은 이렇게 씹어뱉듯 외치지 않았을까. 아마 적은 돌격을 통해 아군의 지휘체계가 흔들려 빈틈이 생기는 것을 노렸겠지만, 우리 삼도수군통제사님이 그걸 용납하실 리가.
게임에서나 가능한 것 같았던 움직임이 재현되고 있었다. 병법의 기본을 한 치도 틀림없이 수행하면 백전백승이라더니, 그 말 그 자체를 보여주는 것 같은 지휘였다.
일부는 차단기동, 일부는 화포를 퉁퉁퉁퉁.
적의 행동에 따라 반응하는 함대의 움직임은 마치 생물의 몸놀림을 보는 듯했다.
각 전선의 성능이 다르고 병사들의 역량 또한 다를 텐데, 그것까지 고려해 지휘중인 라위터르의 신기(神技)는 내 눈을 의심케 했다.
“보십시오! 적이 패주하고 있습니다!”
“쫓지 마라! 이미 이 만(灣)은 사지로 변했다! 길목만 틀어막으면 적은 더 이상 덤벼들지 못할 것이다!”
대장선에서 누런 깃발이 오르자마자 적선을 추격하던 배들이 일시에 멈춰서는 모습을 보는 것 또한 장관이었다. 결국 한 번의 돌격을 더 실패한 적 함대는 다시 사거리 밖으로 멀어져갔다.
“화살을 쏴라!”
라위터르의 명령을 받은 사수의 활에서, 명령서를 매단 화살이 원양우후 이완의 배를 향해 쏘아졌다. 뒤이어 함대를 분리한다는 신호가 깃대에 오르자마자 약속되었던 대로 일부 전선이 전열에서 이탈했다.
전략 회의에서 미리 논했던 대로 분리된 함대는 사쿠라지마라고 불리는 화산섬의 반대편에 위치한 우회로를 틀어막으러 출발한 것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그 방향에서 터져 나오기 시작한 포성은, 왜군이 시도한 우회 전략마저 봉쇄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대단합니다, 통제사. 나는 함대가 이렇게 혼연일체가 되어 움직이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아닙니다. 적에 비해 뛰어난 배와 무기를 가지고 있고, 조선 수군 또한 훌륭한 정예병들인데 어찌 이것들을 가지고 질 수 있겠습니까. 과한 칭찬은 금물입니다.”
그럴 리가. 난중일기에도 이런 상황에서 수군 전체를 말아먹은 졸장의 기록이 나오지 않던가.
뛰어난 무기로 무장한 병력이 당연히 전투에서 유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수적인 열세까지 쉽게 극복할 정도로 유리함을 제공해주지는 않는다.
결국 승리는 일선 지휘관의 지휘에 달린 법.
“그나저나, 슬슬 날이 저물고 있군요. 낯선 곳에서 야간에 작전을 수행하긴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적지 한가운데에서 적을 앞에 둔 채로 긴장을 풀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다행히 계산했던 대로 오늘은 보름달이 떠 시야가 양호하니, 속전속결로 밀어붙일 생각입니다.”
“하긴 손자병법에서도 정교하고 늦은 것은 졸렬하고 빠름만 못하다(巧遲不如拙速)고 했지요. 더구나 우리는 원정까지 나온 상태이니 통제사의 판단이 맞을 것입니다.”
“예. 게다가 적은 우리가 이곳 지형에 익숙하지 않으니 밤을 틈타 움직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허를 찔러 주는 것이 장수의 도리겠지요.”
마침 서쪽의 해안에서 불덩이 하나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하늘로 오르는 것이 보였다. 김 갑사가 지휘하는 병력이 보낸 신호였다.
해안에서 아군 전선의 접근을 방어하는 시설을 제압했다는 신호를 알리며, 불덩이를 매단 연은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 위에서 춤을 췄다.
연을 본 라위터르의 입꼬리에 미소가 올라붙었다.
“생각보다 더 빠르군요. 상륙해 나아간 총통위 군사들이 적의 퇴로를 틀어막을 테니, 작전 개시 시각을 조금 앞당겨도 되겠습니다.”
“충무포(忠武砲)를 적의 심장에 직격시킬 때가 왔군요.”
개량된 홍이포는 충무포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라위터르가 첫 왜구 소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개선해 임금과 마주한 자리에서 제안한 이름이었다.
지금 멋쩍어하며 콧수염을 쓰다듬고 있는 충무공 매니아의 제안이 아니었으면 하란타에서 들어왔다 하여 난포(蘭砲)라 불렸을 물건이었다. 물론 임금이 라위터르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는 전혀 없었고.
“충무공을 저격한 놈들의 심장부에 그분의 이름을 딴 화포를 박아 넣는다. 제가 도승지에게 이 작전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꿈꿔 오던 장면입니다.”
***
해가 뜨기 직전, 가장 어두운 밤.
라위터르가 이끄는 조선 함대는 가고시마 항을 급습했다. 서쪽 하늘로 이지러지는 보름달 빛 대신, 불화살을 맞아 불타오르는 왜선들이 함대의 앞길을 밝혔다.
적은 조선 수군이 멀리 원정을 와 지쳐 있으니, 야간에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 속단한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정찰선 몇만 세운 채로 함대를 멀리 후퇴시켰을 리가 없다.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적의 함대가 습격당한 항구를 구원하러 접근했지만, 낮에 벌어졌던 상황이 되풀이될 뿐이었다. 일제히 불을 토하는 천자총통에 눌려 배를 잃고 후퇴하는 왜군의 모습이 처량해 보일 정도였다.
게다가 이완이 이끄는 별동대가 사쿠라지마 섬을 돌아 접근하려는 움직임을 취하자, 다시 적의 함대는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고 말았다. 잘못 접근했다가는 양쪽에서 협공당하는 상황을 우려한 듯했다.
“어차피 수군만 가지고는 뭘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아마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작전을 준비해왔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겁니다.”
이제 대장선은 해안에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적의 선단이 보이는 방향은 벽란선들이 나아가 대열을 이루고 좁은 해협을 틀어막은 상태.
“저는 그럼 가보겠습니다. 뒤를 부탁합니다, 통제사.”
“무운을 빌겠습니다, 도승지.”
이미 예성선 몇 대가 해안으로 접근해 남은 총통위 병력들을 내려놓고 있었다. 김 갑사가 지휘하는 병력은 적의 후방으로 침투해 퇴로를 막을 것이고, 이제 남은 일은 내가 직접 나아가 적의 성에 조선의 깃발을 꽂는 일뿐이었다.
“충무포 장전!”
“장전!”
나는 호위 몇과 함께 작은 배를 타고 대장선에서 점점 멀어져 해안으로 향했다. 그런 내 뒤로 라위터르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목표는 내 전방에 위치한 시마즈 가문의 본거지, 가고시마 성.
저 성이 해안에서 채 일 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지 않았더라면, 사쓰마 정벌이 이리 순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방포하라!”
“방포!”
쾅, 쾅.
거의 동시에 울린 두 번의 폭음 이후, 대장선에서 발사된 포탄 두 발이 날아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포탄의 목적지는 높이 솟아있는 가고시마 성, 그곳이었다.
“앞으로 나아가시오, 도승지! 적의 심장에 비수를 박고 오시오!”
뒤이어 날아온 라위터르의 외침이 내 마음에 울린 그 순간.
대장선 갑판을 박차고 포효한 충무포 두 발은 그대로 사쓰마 번의 심장부를 직격했다. 사이에 놓인 시가지도, 높은 축대도, 깊게 파인 해자도 그것들을 막지 못했다.
***
“지금이라도 이웃한 구마모토 번에 구원을 요청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병력만으로는 조선의 함대를 막을 수가 없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평소에 구마모토 번과 으르렁거리던 사실을 잊었나? 지금은 버티는 수밖에 없다! 적의 함대가 아무리 강대하다곤 하나 먼바다를 건너와 지쳐 있지 않나!”
“하지만 버틸수록 피해는 계속해서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보십시오! 단 하루 동안 일어난 해전으로 우리 수군의 절반 이상이 수장되었습니다! 여기서 어떻게 더 견디란 말씀이십니까!”
“적의 보급이 고갈될 때까지 여기 가고시마 성에 들어앉아 버티면 되지! 배는 육지로 오를 수 없다는 법도 모르나? 놈들이 배를 버리고 상륙하면 그때 함대로 들이쳐 배들을 불태우면 되는 일이다!”
가고시마 성에서 제일 큰 방. 이곳은 밤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었다. 사쓰마 번의 다이묘와 그의 가신들이 갑자기 들이친 조선 함대에 대한 대책을 짜느라 밤을 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뾰족한 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시마즈 미쓰히사는 스트레스로 관자놀이가 울끈거리는 것을 느끼고 미간을 찡그렸다. 가신 놈들이 아무리 논의를 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 탓이었다.
“하지만 방금 들어온 보고로는 정체불명의 군대와 근방에서 교전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시체 틈에 섞여 겨우 목숨을 건진 아시가루 하나가 보고한 정보입니다!”
“뭐야?”
갑자기 들어온 새로운 정보에, 미쓰히사의 눈이 번쩍 떠졌다.
적이 수군만 이끌고 온 줄 알았는데, 육군까지 투입했다고?
충격적인 정보 탓에 좌중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은 것이 느껴졌다. 뒤이어 그 정보를 입증하기 위해 방안으로 불러들인 아시가루는 더 충격적인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백오십 명이 전멸하는 데 시간이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더욱 무서운 것은 그렇게 정확하게 조총을 쏘아대는 적 병력은 잘 보이지도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냐? 조선군이 닌자의 인술이라도 익히지 않고서야 가능할 리가 없지 않느냐!”
“전투가 벌어진 진지 남쪽 이백 보 거리에 무성한 숲이 있긴 했습니다! 헌데 그 거리에서 표적을 정확히 쏘아 맞추는 조총이 있다는 소리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미쓰히사는 두통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사쓰마 번의 휘하에는 삼천 명이 넘는 병력이 있지만, 지금은 대다수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간 상황. 적은 함대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해 전력을 바다로 집중한 것이었는데.
얼마 없는 지상 병력 중에서 백오십 명을 너무나 허무하게 잃었다. 게다가 그 아시가루의 말이 사실이라면, 남은 병력을 모두 끌어모은다 해도 승산이 너무 낮지 않은가.
사쓰마 번은 막부에 반항하지 않겠다는 증거로 선대 다이묘가 성을 작게 지었고, 대신 여러 거점에 병력을 분산해 방어선을 갖췄다. 그러니 이렇게 적이 심장부로 바로 찔러 들어오면 속수무책일 수밖에.
당장 원군이 언제 도착할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더더욱 문을 걸어 잠그고 버텨야 한다! 조선군이 아무리 뛰어난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하나 해자를 뛰어넘고 성벽을 날아오르지는 못할 것이 아니냐!”
“그렇게 성에 틀어박힌다면 항구를 비롯한 민가들은 어찌 하시려는 겁니까! 적은 보급을 유지하기 위해 농가를 약탈할 것이고 항구에 세워져 있는 어선들은 불태울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그럼 도노사마께서 나아가 조선군에게 항복이라도 하란 말이냐! 코노야로!”
“누적되는 피해를 보고만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방금부터 조선군을 상대할 대책으로 갈등을 빚던 가신 두 명이 벌떡 일어났다. 아무리 갑갑한 상황이라고는 하나 무엄하게도 허리에 찬 칼에 손까지 댄 채였다.
“이 무례한 놈들! 여기가 어디 안전이라고…….”
가신들의 행동에 열이 머리끝까지 오른 다이묘가 막 호통을 내지르려 한 순간이었다.
웬 폭발음과 함께 방 안이 뒤흔들렸다. 천장에서 오래 묵은 먼지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으악! 무슨 일이냐!”
“지진…… 지진인가?”
성이 통째로 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에, 자리에 있던 모두가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하지만 그 흔들림은 지진과 달리 금방 멈추고 말았다.
“아닙니다! 이것은 포탄이 떨어진 진동입니다!”
“포탄이라니! 조선군이 이 성 앞까지 포를 끌고 왔단 소리냐? 이 짧은 시간 안에 그럴 수는 없지 않느냐!”
“포탄이 맞다면 빨리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도노사마! 잠시 후 또 다른 포탄이 들이칠지도 모릅니다!”
방금까지 오가던 조선군 대책 따위는 다이묘의 머리에서 지워진지 오래였다. 만약 정말로 조선군이 포를 쏜 것이 맞다면, 당장 포격에 노출되기 쉬운 높은 건물에서부터 벗어나야 했다.
“아니……?”
그렇게 가신들을 이끌고 방을 박차고 나간 미쓰히사의 눈에 상상치도 못한 광경이 들어왔다. 복도 건너편에 위치한 방이 포탄을 맞아 완전히 박살난 모습이었다. 기울어진 장지문과 찢겨진 다다미 너머로 뻥 뚫린 외벽이 눈에 들어왔다.
“조선군이 포를 쐈다면 어째서 전투가 벌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게냐? 그렇게 가까이 접근했다면 분명 우리 지상 병력과 전투가 벌어졌을 터!”
“그것이…… 저도…….”
가신들끼리 또다시 입씨름이 벌어졌으나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조선군은 정말로 몸을 숨기는 인술이라도 개발한 것인가? 답을 얻지 못한 다이묘가 밖을 관찰하러 박살난 벽에 다가갔을 때였다.
“도노사마! 위험합니다!”
위험하다 외치면서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는 가신들을 속으로 비웃는 미쓰히사의 눈에 이상한 것이 잡혔다. 저 멀리 가고시마항 앞바다에 떠 있는 적의 배에서 불꽃 두 개가 튀는 모습이었다.
씨잉─
미쓰히사는 분명 보았다.
적의 대장선임이 분명한 큰 배에서 발사된 포탄이 이번에는 가고시마 성을 다행히도 비껴갔음을. 뒤이어 들려오는 파열음은 포탄이 성 뒤에 위치한 숲에 떨어졌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털썩.
다이묘는 자신도 모르게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풀린 다리에는 좀처럼 힘이 돌아오지 않았다. 조금만 더 포탄이 낮게 날아왔다가는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번쩍.
선체를 180도 돌린 대장선에서 다시 한번 불꽃이 튀었다.
“도노사마! 여기서 벗어나셔야 합니다! 어서요!”
어느새 다가온 가신이 자신을 들쳐 멨지만, 한 번 나간 정신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이건 꿈일 거야. 조선이 갑자기 저런 무기를 들고 이 촌구석까지 나타날 리가 없어.’
쾅! 쾅!
다시 폭음이 울리고 뒤이어 충격이 가고시마 성을 덮쳤다.
“으악!”
“모두 이 건물에서 벗어나십시오! 위험합니다!”
등에 업힌 채로 바닥을 구른 탓일까. 조금씩 멀어지기 시작한 미쓰히사의 의식 속에서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조선에 포로로 잡혀갔다 겨우 돌아온 이복동생의 얼굴이었다.
놈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