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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78화 (178/298)

178화. 오늘이 오늘이소서

사쓰마 정벌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현장에서 사쓰마 다이묘를 체포한 김 갑사의 말에 따르면, 끝까지 짧은 칼을 들고 자기 배를 가를 것처럼 협박해대는 다이묘를 제압하느라 시간이 조금 걸렸다고 했다. 결국 놈은 산 채로 잡혀 내 앞까지 끌려오는 처지가 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어서 네 부하들에게 외쳐라! 방금 내가 말한 것을 벌써 잊어버린 게냐!”

“…….”

“아니면 아직 뜨거운 맛을 덜 보기라도 한 건가?”

“하,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꽁꽁 묶여 내 앞에 당도하고도 놈에게 반항기가 조금 남아있기는 했다. 하지만 관자놀이에 닿는 총구의 서늘함은 무엇보다 강했다.

시마즈 미쓰히사라는 이름의 다이묘는 결국 순순히 내 명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주군의 항복 명령을 받은 가고시마 성이 그대로 저항을 멈추면서 전투는 끝이 났다.

“불만이라도 있나?”

“……아닙니다.”

사쓰마 병사들은 최소한의 것만 남기고 모조리 무장이 해제되었다. 가고시마 전역에서 모아들인 무기는 항구에 산처럼 쌓였고, 곧 스무 척의 예성선 갑판 아래로 사라졌다. 본국에 전리품으로 보낼 중요한 물건이다.

“번주의 인장과 수결을 남길 곳은 여기와, 여기다. 속히 시행하도록.”

“…….”

“착각하지 마라. 싸움에 졌으면 순응하는 것이 네놈들의 습성 아니었나? 네놈의 아비가 유구국에 강요했던 것은 이것 이상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네놈들 번은 망했어. 이 바다는 이제 조선이 지배한다.

이미 뼛속까지 새겨지도록 놈에게 힘의 차이를 알려준 터였다.

헤드에 못이 잔뜩 박힌 내 정의봉 2호기를 한 번 휘두르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어차피 말로 되지 않는 놈은 몽둥이가 약이라는 것은 남원 시절부터 깨달은 진리였다. 내 독기 서린 눈빛을 받은 놈은 금방 반항기를 거둬들였다.

“죄, 죄송합니다…….”

“주상 전하가 자비롭지만 않으셨어도 네놈들에게 항복 조건으로 더한 것을 강요할 수 있었다. 패자의 처지를 자각하도록.”

사쓰마 다이묘의 도장이 항복 문서에 꾹꾹 붉은 자국을 남겼다.

속국으로 지배하고 있던 류큐를 해방시킬 것, 다이묘는 삼 년에 한 번씩 조선에 입조할 것, 다이묘의 차자를 한양으로 볼모로 보낼 것, 그리고…….

“안 됩니다! 제발 그 도공들만은……!”

“안 되다니? 네놈의 할아비가 반백년 전 조선에서 잡아온 사람들이 아니냐? 다시 그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일을 방해라도 하겠다는 소리냐?”

***

그들이 고향을 강제로 떠난 지는 오십 년이 넘었다.

먼 남쪽 섬, 나에시로가와(苗代川)라는 낯선 곳으로 끌려온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의 명령을 받아 조선식 가마를 짓고 도자기를 구워내야 했다.

그러나 지금 내 앞에 있는 촌장은, 그 긴 세월 동안 적국의 포로 생활을 했음에도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정유년 왜란에 끌려온 사람이 세상을 뜨고 그 아들마저 명을 다했음에도, 조선인 포로들은 여전히 조선옷을 입고 조선말을 쓰고 있었다.

“어…… 어떻게 여기 우리 조선 사람들이 왔당게요…….”

“미안하네. 너무 늦게 와 버려서.”

억양이 이상하게 변해버린 호남 사투리가 귀에 흘러들자마자, 나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현 다이묘의 할아비인 시마즈 요시히로가 남원성 전투에서 잡아 온 도공의 후손이라 했다.

“아이고! 나리! 우째서 지들 같은 사람들에게 고개를 숙이씨요!”

“자네들을 더 일찍 구하러 왔어야 했는데, 이제야 온 우리를 용서하시게.”

“아니지라! 아니지라! 퍼뜩 고개를 드시랑게요!”

내 몸에 손도 대지 못한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이의 이름은 심도길(沈陶吉)이었다. 처음 가고시마로 끌려온 도공 심당길의 손자.

가고시마에서 생산하는 도자기를 총괄할 정도로, 그는 사쓰마 번에서 대접을 꽤 잘 받고 살아온 모양이었다. 다이묘 역시 이들에게 논밭과 도자기 수익을 떼 줄 정도로 포로치고는 각별한 대우를 해준 듯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십 년의 세월을 건너 찾아온 조선군을 마주한 그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만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우리 할마씨가 그랬지라.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날은 반드시 올 테니, 죽어도 네가 조선사람임을 잊지 말라고……. 나리, 그날이 오늘이어라?”

“그렇네. 자네들이 원하면 고향으로 돌려보내주겠네. 가서도 도자기를 구울 수 있도록 힘을 써 주겠네. 그러니…… 함께 돌아가세.”

“……돌아가다니, 분명 조선을 말씀하신 것이지라?”

“그래. 집으로 말일세.”

그 말을 들은 심도길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소리를 내어 울어대기 시작했다. 그 소리를 들은 마을사람들은 하나둘씩 우리가 서 있는 마을 어귀를 향해 몰려들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 역시 눈가가 매워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어느 하나 한복을 걸치지 않은 사람이 없었고, 상투를 틀고 쪽을 찌고 댕기를 드리우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내 기억으로는 원 역사에서 이 사람들은 메이지 덴노의 치세까지 이 생활을 유지했다고 했다.

지금 내가 사쓰마 번을 치지 않았더라면 이들과 이들의 후손은 얼마나 큰 한을 품고 살아갔을 것인가.

“여기…… 여기에 돌아가신 어르신들을 다들 모셔놨지라…….”

어느새 눈물과 콧물 범벅이 된 심도길은 나를 마을 구석에 있는 사당으로 안내했다. 옥산궁(玉山宮)이라는 현판이 달려있는 사당에는 누가 봐도 단군임이 분명한 신상이 서서 이 장소를 지키고 있었다.

여기서는 조선식으로 죽은 이를 매장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고 했다. 일본에서 보통 그러하듯 화장하고 남은 유해를 납골함에 담아 모셔놨다는 심도길의 말을 듣고, 더는 참지 못한 눈물 한 줄기가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말았다.

“여기 계신 분들도 마땅히 모셔가야 할 것일세. 이분들 역시 얼마나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국에 묻히고 싶어 하셨겠는가.”

“나리…….”

심도길은 고개를 깊이 숙인 채 한참을 들지 못했다. 어느새 구름처럼 몰려들어 내 뒤를 따르던 조선인 무리 사이에서도 통곡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도, 나를 호위하던 총통위 병사들도, 사쓰마에 납치된 사람들도 그랬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눈물을 흘리지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이 자리에 함께한 모두는 분명 조선인이었다.

***

“오늘이…… 오늘이소서…….”

“무엇인가? 이 노래는? 어디서 들은 기억이 나네만.”

“저물지도…… 새지도 말고…….”

“고향에서 부르던 노래라 들었지라, 나리. 마을 잔치가 있거나 하면 다들 모여서 이 노래를 부르곤 했당게요. 특히 할배, 할매들은…….”

“새로이 매양…… 같은 모습의…….”

“이 노래를 부를 때면 다들 해안 언덕으로 나가서 바다 너머를 바라보며 울부짖으셨지라. 매번 질리지도 않으시고는…….”

“……기억이 났네, 내가 남원에 어사로 나갔을 적 들었던 적이 있는 노래일세.”

“오늘이…… 오늘이소서……”

“역시…… 저희는 조선 사람이 맞았어라. 얼마 전 돌아가신 아부지께서 조금만 더 살아계셨더라도…….”

“평화로운 날이 새지도 저물지도 않고 늘 지속되길 바라며 부르던 노래네. 그분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먼 이국에서 고향의 노래를 불렀는지, 그 심정이 짐작도 되지 않는구만.”

술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잠시 술기운에 명치가 뜨거워졌지만, 그 열기는 좀처럼 가라앉으려 들지 않았다. 분명 기쁜 날 모두가 모여앉아 잔칫상을 마주하고 있었음에도, 먹먹한 가슴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

반백 년을 기다린 귀향이었다. 더는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연락선과 벽란선 몇 척을 제주로 보내 보급선들이 전부 가고시마로 향하도록 명을 내렸다. 보급선에 실린 물자를 함대에 나눠 싣고, 빈자리에는 조선인 포로들을 전부 싣고 귀국할 예정이었다.

귀국을 앞둔 조선인들은 급히 재산을 처분하고 귀국할 준비를 서두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리 서둘러도 생쌀이 밥이 되지는 않는 법. 그들이 귀국을 준비할 동안 조선 함대는 따로 할 일이 또 있었다.

“정말 우리를 사쓰마 놈들의 손아귀에서 해방시켜준다는 말입니까?”

“물론입니다. 여기 놈들의 우두머리도 동행시켰고, 인질로 잡혀 있던 왕자까지 데려왔지 않습니까.”

어느 날 갑자기 수평선 너머로 나타난 함대로부터 커다란 선물을 받은 류큐 국왕은 아직도 현실이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가고시마에서 볼모 생활을 하던 왕자와 손을 마주 잡은 국왕은, 마치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짓다 다시 볼을 꼬집기를 반복했다.

이제 류큐는 가죽까지 벗겨갈 기세로 거둬가던 인두세 때문에 무인도까지 건너가 쌀농사를 지을 이유가 없었다. 아낙들이 엉덩이가 짓무를 때까지 베틀에 앉아 포를 짤 필요도 없었다.

“이 근처에 들끓는 해적들을 처리하고 조선 교역선의 항로를 보호하는 비용을 조금 도와주셔야 겠지만, 그 이외에는 무거운 세금을 매길 생각은 없습니다. 이것은 조선 국왕 전하의 뜻입니다.”

“그 비용이라는 것이 혹시…….”

“아,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조선의 원양함대가 유구국에 정박하게 되면 숙식을 책임져 주시고, 물과 식량을 보급해주시는 정도면 되겠습니다. 그리고 귀국의 특산물을 조선에서 전담해서 사가는 것 정도일까요.”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라며, 나와의 사이에 둔 명국어 통역관이 당황할 정도로 류큐 국왕은 말을 속사포처럼 뱉어냈다. 조금만 더 있었다가는 내 손이라도 덥석 잡을 기세였다.

사쓰마 번에서 보호비 명목으로 뜯어가던 세금이 말도 못할 지경인 모양이었다. 하긴, 류큐의 왕궁인 슈리성까지 오는 길만 봐도 말라비틀어진 백성들이 한둘이 아니었었다.

“정말 그것으로 괜찮겠습니까? 저희 입장에서도 너무나 가벼운 대가입니다.”

“귀국은 사탕수수로 흑당(黑糖)을 제조하고 계시던데, 그것을 조선에 적당한 가격에 팔아주시면 그것으로 사례를 갈음하겠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신지?”

“물론, 물론입니다! 어차피 사탕수수가 흔한 명국에는 갖다 팔지도 못하는 물건, 백성들이 먹을 식량으로만 바꿔다 주신다면 바랄 것이 없습니다!”

류큐 국왕이 그보다 명나라 안에서의 서열이 낮은 내게도 꼬박꼬박 존대를 붙일 정도로, 류큐에게 이 제안은 정말로 구원 그 자체인 모양이었다.

사쓰마 번 놈들, 도대체 그동안 얼마를 뜯어갔기에 일국의 국왕이 이렇게 저자세를 보이는 것인가.

류큐가 이렇게 협조적으로 나오게 된다면 조선도 얻을 것이 많았다.

벽란항, 성산포에 이은 세 번째 기항지를 류큐에 마련했을 뿐더러, 슬슬 국내의 수요가 늘어나기 시작한 설탕의 수급처도 구한 격이다.

네덜란드가 인도네시아 근방에서 주로 생산하는 설탕은 기본적으로 유럽에 가져다 팔기 위한 물건이었다. 그것으로 조선에서 새로 생긴 수요를 갑자기 감당하기에는 어려웠고, 그래서 조선에 들어오는 설탕은 적고 가격은 비쌀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금 이 시기에 설탕이 가져다주는 단맛만큼 사람의 스트레스를 줄여줄 물질은 없었다.

추가로 백성들이 누리고 있는 삶의 질을 올릴 수도 있고, 남으면 일본이나 청에 가져다 팔 귀중한 교역품이 하나 생긴 셈이기도 하다.

“식량이라…… 마침 저희 국왕께서 유구국 중산왕께 선물을 하나 드리라 말씀하셨는데, 식량으로 삼을 수 있는 새로운 작물은 어떻습니까?”

“새로운 작물이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감저라는 녀석입니다. 여기보다 날이 따뜻하지 못한 조선에서는 잘 자라는 장소가 적은데, 유구국에서라면 잘 쓰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다음에 설탕을 수입하러 오는 배편으로 류큐에 고구마 모종을 보내줄 생각이었다. 고구마의 쓰임새와 쉬운 재배 난이도, 그리고 무지막지한 수확량을 들은 류큐 국왕의 입은 주먹이 드나들 정도로 벌어졌다.

“……아니, 말씀만 들어도 엄청난 작물이 아닙니까? 그걸 조선에서 왜 굳이 우리에게……?”

“유구국의 땅은 좁고 사람 또한 적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는 조선에서 키우기 어려운 특용작물들을 유구국에서 재배해 주시길 바라는데, 그러려면 귀국의 식량상황을 먼저 해결해 드릴 필요가 있겠지요.”

사람이 먹고사는 것이 해결이 되어야 다른 작물을 재배할 여유가 생기는 법이다. 그러니 굳이 류큐에 식량을 수출해 얻을 수 있는 이득을 포기하고 고구마를 전래해주기로 한 것이다.

사실 아직 조선의 식량 사정이 타국에 수출할 정도로 넉넉한 편은 아니기도 했고.

사탕수수 말고도 담배, 목화 등등 류큐에 재배를 위탁할 작물은 끝이 없었다. 조선의 세력이 더 뻗어나가면 다른 지방에서 수입한 모종이나 씨앗도 류큐에서 재배할 수 있겠지.

파인애플의 원산지가 브라질인 것이 정말 다행이었다. 어쩌다보니 역사를 뒤틀어 피자까지 만들어 놨는데, 악마를 최초로 소환한 장소가 조선이 되면 참으로 곤란했다.

“너무나 엄청난 선물입니다! 말씀하신대로라면 제가 조선으로 입조해 귀국 국왕께 인사를 드려야 할 정도로요! 저희가 배반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이런 은혜를 베푸시는 겁니까?”

“배반이요? 중산왕께서 설마 그럴 분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나는 슬쩍 옆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 곳에는 사쓰마 번의 다이묘가 영혼이 빠져나간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류큐까지 끌려와 더 이상 이 땅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서약서에 도장을 찍고 하늘에 맹세까지 해야 했던 시마즈 미쓰히사였다.

김 갑사에게 포로로 잡혀왔을 때는 할복을 할 기세로 날뛰던 놈이, 조금씩 반항기를 보이기에 손을 봐준 결과였다. 상하관계를 뼈에 새겨주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으니까.

“다시 살마주의 속국이 되고 싶으시면 조선의 은혜를 저버리는 길을 택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된다면 다시는 조선이 유구국의 일에 간섭하지 않을 테니까요.”

“아니……. 저희가 그러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감사의 표시로…….”

“알고 있습니다. 유구국에서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을 알고 있기에, 저 역시 굳이 농담처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중산왕 전하. 설마 다시 착취당하는 길을 택할 머저리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 그건 그렇지요. 하, 하하!”

“게다가 살마주 따위는 단기간에 정벌한 우리 함대를 적으로 돌릴 바보도 없을 테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류큐 국왕의 얼굴에서 조금씩 혈색이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이 정도로 말해 놨으면 잘 알아들었을 것이다.

반항하지 않으면 착취 없는 보호가 제공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시에는…….

“더구나 조선이 유구국을 보호하는 것은 대명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든 결과라는 것도 잘 알고 계시지요? 곧 남경에 조공을 다시 올리시게 될 것인데, 그것에 차질이 생겨서도 안 될 것입니다.”

“물론, 물론입니다! 그저 농담일 뿐인데 도독동지께서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신 것 같습니다! 하하하!”

“저도 농담이었습니다, 중산왕 전하. 조선과 유구국의 친선이 영원하길 바랍니다.”

이번에는 류큐 국왕을 향해 진심을 다해 미소를 보냈다. 부디 그가 내 진심을 알아주면 좋으련만. 사실 필요 이상으로 겁을 준 것 같긴 한데 말이지.

결국 류큐 국왕이 말을 더듬지 않고 나를 대하게 된 것은 조선 함대가 류큐를 떠나는 날이 되고 나서였다. 떠나기 직전, 류큐 백성들 앞에서 그동안 갑질을 일삼아온 사쓰마 번의 부교(奉行)를 잡아다 내가 직접 몽둥이질을 한 후의 일이다.

***

류큐에서의 일을 마치고 가고시마로 다시 돌아가자 조선에서 온 보급선들이 도착해 있었다. 사쓰마 번에 붙잡혀 있던 조선인 포로들을 데려오기 위해 임금은 중대하지 않은 무역을 전부 중단하고 남는 배를 전부 가고시마로 보냈다고 했다.

함대가 가고시마를 떠나 제주에 정박했을 때, 오십 년 만에 다시 조선 땅을 밟은 조선인들은 눈물을 흘리며 노래를 불러댔다. 벽란항이 점점 가까워져오고 조선 본토가 보이기 시작했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새로이 매양 같은 모습의…… 오늘이 오늘이소서…….”

마침내 조선인 포로들은 땅을 밟고 꿈에도 그리던 고향에 돌아왔다. 고대하던 조국에 돌아온 사람들은 땅바닥에 엎드려 고향의 흙을 온통 눈물로 적셨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중 나온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벽란항은 순식간에 눈물에 잠겼다.

모두가 온통 얼굴을 적신 채 한 덩어리가 되어 이 순간을 만끽했다.

슬프되 슬프지 않았다. 기쁘되 기쁘지도 않았다.

미처 풀어내지 못한 한이 풀린 이 순간, 이 자리에 가득 찬 감정은 참으로 기묘하기 이를 데 없었다.

※ 작가의 말

교토대학 문학부 언어학연구실에는 가고시마의 나에시로가와라는 장소에서 1920년에 채록한 <조선가>라는 노래를 담은 책이 있습니다.

<조선가>는 정유재란 도중 남원성 전투에서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잡혀 사쓰마 번까지 끌려간 조선인 포로들이 수백 년의 시간을 넘어 보존해왔던 귀중한 노래입니다. 조선어가 그들 사이에서 더 이상 쓰이지 않아 구전되는 과정에서 문법이 훼손되었을지언정, 그들은 조상들이 가르친 노래를 잊지 않았습니다. 작중에 실린 노래가 그것입니다.

5만에서 6만 명이 왜란 도중 일본으로 잡혀간 것으로 추정되지만,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은 대략 7500명에 불과합니다. 그중에서 일본에게 대접받은 일부를 제외한 피랍조선인들은 타향에서 설움을 씹으며 수백 년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중에서 묘사한 것처럼 그들은 정체성을 잊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나에시로가와에 정착해 마을을 이룬, 남원에서 잡혀 온 도공들은 조선의 풍습을 오랜 기간 동안 유지했으며, 1886년에서야 조선식 성을 일본식으로 바꿀 정도로 자신들이 조선인임을 잊지 않으려 했습니다.

작중에 등장하는 심도길은 실존 인물로, 잡혀간 도공 심당길의 손자입니다. 그들의 후손은 심수관(沈壽官)이라는 이름을 이어가며 아직도 일본에서 도자기를 굽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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