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포모사에서 온 편지
녀석이 이토록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중전의 심복 역할에 신작 집필까지 쉬지 않으며 요안이 역시 몸이 고달팠을 텐데, 내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생긋 웃기만 하던 녀석이었다.
그렇게 내게 매달려 감정을 터뜨리는 녀석을 보며 내 의지 역시 더 단단하게 굳어졌다. 요안이 나를 선택하며 포기했던 것만큼, 녀석이 날개를 더 크고 튼튼하게 펼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내 몫일 테니까.
“고맙…… 습니다. 선생님…….”
“소리 없이 눈물 흘리는 것은 어릴 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구나. 괜찮다. 오늘은 마음껏 속에 맺힌 것을 풀어놓아도 된다.”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정말 평생 한이 맺힌 채로 살았을 거예요……. 정말 고맙습니다…….”
문득 먹물에 뒤덮여 우는 녀석을 보았을 때, 머리를 쓰다듬어주려다 멈칫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제는 그래도 내게 안겨 우는 녀석의 등을 토닥거릴 수는 있게 되었구나.
그날 녀석과 마주했던, 이제는 이사 나온 예전 박연의 집 부엌에는 아직도 내 키와 녀석의 키를 칼로 새긴 기둥이 남아있을 것이었다. 이제는 내 키를 꽤나 따라잡은 요안을 보며, 세월이 참으로 많이 흘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허! 선생! 그래도 여기는 내 사랑방인데!”
갑작스레 흘러든 박연의 호통에 과거를 헤매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 금발벽안 판관이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은 처음이었다.
***
총통위가 사용하던 건물에서 군관도감이 첫발을 내디뎠다.
한창 창의문 근처에 지어지고 있을 군관도감 시설이 완공되면 그리로 옮겨갈 테지만, 몸이 달아오른 임금의 어명 탓에 소수나마 1기 생도를 입학시켜야 했던 것이다.
“충성을 다하겠사옵니다, 전하!”
생도대표로 맨 앞에 선 서얼, 신무가 임금에게 대표로 사배(四拜)를 올리며 충성을 다짐했다.
사쓰마 정벌에서도 세키부네 여러 척을 격침시켜 큰 공을 세운 신무는 고민 끝에 결국 무관의 길을 택했다. 사실 누가 옆에서 무관으로 근무하면서도 문과를 볼 수 있다며 헛바람을 넣은 결과이긴 한데.
신무의 옆구리를 찔러댄 요운도 원래는 이번 증광시에 급제하지 못하면 군관도감에 입학할 예정이었다. 허나 얄밉게도 이번 증광시에서 을과로 급제해버리며 본인의 말을 증명해버리는 바람에, 생도대표 자리는 신무에게 돌아갔다.
헌데, 나는 왜 예조판서 주제에 군관도감의 행사에 참가하고 있는가. 아직 병조의 인선이 마무리되지 않았다는 핑계로 임금이 은근슬쩍 대리를 시킨 결과였다. 왠지 네덜란드로 떠날 때까지 후임 병판이 정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쳤다.
“아주 훌륭합니다, 예판. 내 홀란드에도 군관도감 같은 관청을 세우라 벗에게 건의해야겠습니다. 하하.”
“이 고생을 감당할 사람이 하란타에도 있겠습니까? 통제사가 하란타에서도 힘을 쓰실 것은 아닐 테고요.”
“이번에 이야기를 해 두면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중에 언젠가는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양질의 군관을 양성하는데 이만한 제도는 없습니다. 반드시 홀란드에도 도입해야 합니다.”
행사를 마치고 내 뒤를 따르던 라위터르가 말을 걸어왔다. 임금이 기념으로 내려준 어식(御食)을 맛보러 식당으로 이동하던 도중이었다.
글쎄, 지금 한창 군비를 축소 중일 네덜란드가 그런데 돈을 쓰려나. 하지만 몇 년 동안 고국을 떠나있던 라위터르가 그런 사정을 알 리가 없었다. 그저 해전(海戰) 교범을 완성했다는 사실에 기뻐 실실거릴 뿐.
군사를 키우는 데 돈을 아끼지 않는 조선에 있다가 네덜란드로 돌아가면 라위터르도 조금 느끼는 것이 있을 것이다. 자신이 없으면 네덜란드는 힘들 것이라는 사실을 부디 깨달아야 할 텐데.
“이렇게 단시간에 훈육 체계를 갖추는 것은 하란타에서도 불가능한 일이라는데 엽전 마흔 냥 정도는 걸 수 있습니다. 통제사처럼 하실 수 있는 사람은 정말로 드무니까요.”
“허허, 쌀을 한 섬이나 걸다니 확신이 대단하시군요? 이런 일은 뱃일에 비하면 그리 고되지 않은 데다, 저는 조선에 온 이후로 자꾸만 저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느껴질 뿐인데요.”
그거야 당신이 본받으려는 분이 말도 안 될 정도의 위인이니 그런 거지. 오랜만에 아버지에게서 느껴졌던 벽을 느끼며, 나는 지금까지 해야 했던 일을 떠올리면서 혀를 내둘렀다.
나도 강선총을 운용하는 조총수 부대의 전술교범과 훈련교범을 열심히 작성하긴 했다. 덕분에 눈 밑이 시꺼멓게 변했고. 헌데 그보다 더한 양의 교범을 저술한 라위터르는 그저 쌩쌩할 뿐이었다. 도대체 이 인간은 정체가 뭐지?
“그 좋아하던 술도 끊으시고 저술에 열중하셨으면서. 말과 행동이 다른 것 아닙니까, 통제사 영감?”
“아, 그것은…….”
“도움을 드리겠다 해도 한사코 거절하시더니 말입니다. 하란타에 영감 같은 사람이 또 없다면 그곳에 군관도감을 설립하는 일은 어려울 겁니다.”
병사식당 의자에 털썩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라위터르의 오른팔 이완이 덧붙인 말이었다. 라위터르가 자리를 비우게 되면 이 사람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원양수군을 지휘할 것이었다. 그가 그동안 라위터르를 가장 가까이서 흡수한 장수기도 했고.
고개를 끄덕여 그 말에 동의를 표하자마자, 식당에 딸린 부엌에서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처음 나온 접시에는 임금이 내린 성은이라기엔 다소 초라한 음식이 담겨 있었다.
“땅콩 범벅?”
“이건 하란타 사람들이 먹는 밀떡이 아닌가?”
멀리 원정을 나가면 먹는 보존식량이 어식이랍시고 나왔으니 모두가 벙찔 만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나만은 임금의 본의를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이 양반이 정말.
“……그렇다. 이 땅콩범벅은 너희가 조선을 지키기 위해 먼 바다로 나가면 반드시 먹어야 할 식량이다. 너희의 무관 생활이 시작되는 이 자리에서 초심을 잊지 말라는 의미…….”
임금은 짧은 격려를 전하고 몸소 땅콩버터를 빵에 발라 한 입 베어 물었다. 모범을 보이는 임금을 보는 신입 생도들의 눈에는 감동이 가득 차올라 있었다.
이미 주상 전하께서 쌀을 아끼고 땅콩 소비를 촉진시키기 위해 하루 한 끼는 무조건 땅콩버터를 바른 빵을 먹는다는 소문이 백성들 사이에서 퍼져 있었으니까. 아마 여기 있는 생도들 역시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소문의 실체는 사실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아마 중전께서 적당히 왜곡해 퍼뜨리신 것 같단 말이지.
‘이건 너무한 처사가 아니오! 내가 이 조선의 지존인데 먹는 것 하나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다니!’
‘수라를 드시지 않고 그놈의 땅콩범벅인지 뭔지만 계속 입에 달고 계시니 저 아니면 누가 이런 고언을 드리겠습니까? 앞으로 땅콩범벅은 사흘에 한 번으로 엄히 제한하겠습니다!’
‘중전!’
아마 그 자리에 있던 나와 상선, 그리고 당사자들 말고는 소문의 실체를 아는 사람은 조선에 없을 것이었다. 매번 식사가 귀찮다며 설탕이 듬뿍 들어간 땅콩버터를 바른 빵으로 끼니를 때우던 임금이 중전에게 딱 걸린 것이다.
뭐, 솔직히 말해서 임금의 뱃살이 땅콩버터 때문에 두둑해지는 건 조선의 국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니, 나 역시 임금을 갈구는 중전에게 앞장서서 힘을 더할 수밖에 없었다.
수라는 골고루 드셔야지요, 전하.
심양에서 세자 시절부터 내가 만든 사이비 피자를 즐길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나. 세자가 임금의 입맛을 이어받았다면, 아마 네덜란드에 가서도 음식 투정은 안 할 것 같다.
***
그렇게 군관도감에서의 행사를 마치고 궁으로 복귀하고 나서도 나는 예조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게 승지 시절에 비하면 책임만 늘었지 대체 무엇이 다른가 모르겠다.
하지만 편전에 들어있는 사람을 보자, 내 불만은 바로 사그라들었다.
분명 이 사람은 예조판서인 내 관할이 맞았다.
“조선의 외교를 총괄하시는 분께서 이리 홀란드 말에 능숙하시다니,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여기 포모사의 홀란드 총독이 조선국 국왕 전하께 올리는 답서입니다.”
대만의 네덜란드 거점, 질란디아 요새에서 온 네덜란드의 사절이 임금에게 절을 올리고는 용건을 전해왔다. 얼마 전 벽란항에 들어온 예성선을 타고 온 사람인가.
이번에 보낸 교역선들은 남경에서의 교역 외에도 또 다른 임무를 띠고 있었다. 남경과 대만, 그리고 류큐를 잇는 새로운 무역로를 개척하라는 임무였다.
여기 대만 총독의 특사가 잘 도착해 있는 것을 보면 임무는 성공한 모양이다. 류큐에서 들어온 설탕이 곧 풀리면 한양의 설탕 가격이 내려가겠군.
“흠, 우리 조선의 사절단이 곧 출발할 것이라는 소식과 함께 명단을 첨부해서 말라카에서 하란타 본국으로 향하는 배편에 실어 보냈다……. 예판, 네가 받은 원문에도 같은 내용이 적혀 있느냐.”
“그렇습니다, 전하. 다만 아래에 신경 쓰이는 글귀가 하나 있습니다. 전하께서 읽으시는 한문본에도 적혀있겠군요.”
“중대한 일이라 사절에게 구두로 들으라 한 것 말이더냐? 대관절 무슨 용건이기에?”
임금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 떠올랐다. 허나 나라고 해서 짚이는 것이 딱히 있지는 않았다. 끽해야 떠오르는 것이라고는 혹시나 정성공의 세력이 대만까지 뻗치게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 정도.
“아, 그들의 손에 답서가 들어갈까 염려한 것은 맞지만, 아직 그 정도는 아닙니다. 명국이 차지하고 있는 드넓은 대륙에 비하면 포모사 섬은 별 장점이 없는 부스러기에 불과하니까요.”
“슬슬 청과 명의 전투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첩보는 우리도 확보했소. 그래서 명국의 함대가 대만을 칠 것을 염려했던 것인데, 그렇다면 전하께 말씀드리려는 중대한 일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이오?”
네덜란드 사절이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들었다. 대륙의 남부와 대만, 류큐, 일본의 규슈, 그리고 제주도까지 들어 있는 지도였다. 이리저리 어지러이 그어진 선들은 아마 항로를 표시한 것이겠지.
“조선이 류큐에 유구출장소라는 관청을 설치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조선국 국왕께서 요청하신대로 포모사 총독은 류큐와의 교류를 확대하고 필요할 때는 지원도 아끼지 않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어쨌건 조선과 대만 사이의 기항으로 쓰기 좋은 섬이니, 하란타 입장에서도 나쁜 선택은 아닐 거요. 헌데 그것만이라면 굳이 구두로 전할 필요가 있었소?”
“물론 아닙니다. 총독의 전언을 계속 전달하겠습니다.”
류큐를 가리키던 사절의 손끝이 대만 섬의 북부, 그리고 남부로 연달아 향했다. 왠지 큰 그림이 그려지는 모양새에, 입에 침이 천천히 마르는 것이 느껴졌다.
“여기 포모사 북부에는 우리의 거점, 안토니 요새(타이베이)가 있고, 남부에는 질란디아 요새(타이난)가 있어 이 근방을 총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조선 측에서도 알고 계신 정보일 겁니다.”
“우리 배들이 이미 두 거점을 여러 번 오갔었소. 이번에 보낸 예성선들도 남경에서 유구국으로 향하기 전에 그곳들에 들렀을 텐데?”
“그렇습니다. 지금부터 드릴 말씀은 이제 어느 정도 조선과 포모사 사이 항로가 안정되었다고 판단한 총독이 조선국 국왕께 올리는 요청입니다.”
말을 마친 사절이 임금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임금의 얼굴에 얼핏 당황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부디 저희의 거점에도 류큐처럼 조선국에서 출장소를 설치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그리고?”
“저희는 질란디아 요새보다 더 내륙으로 포모사의 중심을 옮길 예정입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희 홀란드는 늘 이 극동의 땅에서 인력이 부족했습니다.”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던 사절이 다시 한번 임금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이미 전번에 지나가듯 언급이 되었던 이야기라, 나 역시 사절의 입에서 이어질 이야기를 예측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이라 포모사를 저희 동인도회사 홀로 개척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니 조선에서…… 사람을 지원해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