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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87화 (187/298)

187화. 인군(仁君)이고 싶었다

지금 이불을 몸에 반쯤 걸치고 나를 쏘아보는 환자는 내가 알던 전 임금이 아니었다.

듬성듬성한 머리, 옆얼굴에 피어오른 검버섯, 쪼그라든 피부.

사람이 이렇게 빠르게 늙을 수가 있는 것인가.

“내가 너를 부른 사실이 그리도 놀랍더냐? 네놈은 늘 그렇게 감정을 숨기지 못하곤 했지. 조정에 들어오고 조금 나아졌나 싶었더니 도로 제자리로 돌아간 모양이로다.”

“…….”

“하긴 왕이 그 녀석이 조금 느슨했어야지. 신하의 버릇조차 잡지 못하는 유순한 놈 주제에 임금 노릇은 또 잘하는구나, 하.”

난데없이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상왕의 말에 당황한 낯빛을 감추지 못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경희궁의 침전으로 나를 부른 것도 모자라 이리 말을 건네올 줄을 누가 예상했겠는가.

위중한 병자가 불렀다기에 그저 임종 전 남길 말이라도 있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내 앞에 앉아있는 또 다른 임금은 얼굴은 병으로 초췌해졌을지언정 형형히 빛나는 눈빛은 그대로였다.

“앉거라. 언제까지 일어서서 있을 것이냐.”

순간 내 눈앞에 앉아있는 병자에 권위 가득한 임금의 모습이 겹쳐졌다. 창덕궁 후원에서 상아색 답호를 걸치고 나를 마주했던 그날의 임금이었다.

그저 죽기 직전의 단말마를 듣게 될 줄만 알았다. 허나 지금 이 괴상한 상황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관복 자락을 펼쳐 무릎을 꿇는 동안에도 병자의 시선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조각난 마패로 나를 위협하며 전해오던 그때의 그 시선 그대로였다.

“미치광이 주제에 잘도 내 기대를 배신했더구나. 어디 광인 하나가 왕이 녀석을 꼬여내 이 나라를 망가뜨릴 줄만 알았거늘.”

“아직도 제가 미치광이로 보이시는 겁니까. 물론 그날 제가 분에 못 이겨 뱉었던 말을 실없는 소리로 들으셔도 이상하지 않겠습니다만.”

“이제 내 앞에서 극존대도 자기낮춤도 하지 않겠다는 게냐, 건방진 놈. 그럼 미래에서 왔다는 말을 하는 자를 미치광이 말고 무엇으로 봐야 한단 말이냐?”

쿨럭. 목에 거친 핏줄을 세워가며 말을 토하던 상왕의 입에서 이번에는 마른기침이 흘러나왔다. 바람 새는 소리와 함께 한참을 쿨럭이던 상왕은 잠시 후에야 말을 이을 수 있었다.

“주상 전하께 상왕 전하의 옥체가 위중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힘에 겨우시거든 제가 나중에 다시 이 경희궁을 방문하오리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 이깟 기침이 나를 방해할 성 싶으냐.”

“…….”

“그래. 관복을 차려 입은 꼴을 보아하니 벌써 그 나이에 당상관을 단 모양이지? 그동안 잔뜩 맛본 권력의 맛은 어떠하더냐.”

당상관을 상징하는 내 붉은색 관복을 보고 상왕은 빈정거리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이제 판서까지 달았단 이야기를 하면 무슨 반응을 보이려나.

헌데 권력이라는 말을 상왕의 입에서 전해 듣자 어떤 장면 하나가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거사를 일으켰던 날 밤, 상왕이 나와 대면한 자리에서 늘어놓은 일장연설이었다.

권력이야말로 모든 정치의 이상, 목적, 시작, 끝이라고 했었던가.

권력을 손에 넣은 나와 세자는 반드시 타락하게 될 것이라며, 악을 써가며 저주하던 능양군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제가 아직 부족해서 그런지, 권력의 맛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허나 그 무게는 잘 알겠더군요.”

“무게라?”

“가벼이 여긴다면 한없이 가볍게 여길 수도, 무겁게 여긴다면 한없이 무겁게 여길 수도 있는 것이 권력이었습니다.”

“…….”

“그것이 전하께 어떤 무게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제게는 조선팔도를 합친 무게만큼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앞에 앉은 상왕에게서 코웃음이 흘러나왔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여전히 혓바닥 하나는 매끄러운 놈이로다. 권력의 무게라……. 왕이 녀석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지. 익선관의 무게가 그리 무거운 줄 몰랐다 했던가.”

“…….”

“만인지상의 자리는 가벼울 수 없는 법이지. 녀석은 그 사실을 이제야 안 모양이지만, 아직 모르는 것이 하나 있다. 내가 짊어졌던 익선관에 비하면 그 무게는 한없이 가볍다는 걸 말이지.”

“……그것은 전하께서…….”

“안다. 굳이 그리 들먹이지 않아도 된다.”

커억. 다시 상왕의 목에서 가래 끓는 소리가 진동했다. 눕지도 않고 나처럼 혈압을 높일 인물을 마주해도 정말 괜찮은 것인가.

“내가 조금만 더 생각을 달리 먹었더라면……. 왜 나는 가까운 곳에서 구르고 있는 옥은 알아보지 못하고 멀리 있는 돌덩이에만 손을 뻗으려 애썼던 것일까.”

“전하…….”

“혹시 아느냐? 내가 창덕궁 후원에서 널 처음 마주했던 자리, 그 자리에서 널 다그치는 대신 품으려 했다면 지금 네가 받드는 임금은 왕이가 아니라 나였을 수도 있지 않았겠느냐.”

글쎄……. 내 편견을 깰 정도로 당신이 어지간한 위엄을 보이지 않았다면 그것도 어렵지 않았을까.

하지만 상왕의 말에는 묘한 설득력이 있었다.

나를 높게 쓰려 했다는 한탄이 기억나서였을까, 아니면 세자 앞에서 마패가 고동치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떠올라서였을까.

당신이 내 생각보다 훨씬 임금다운 임금이었다면 그랬을 수도. 지금의 임금처럼 말이지.

그랬다면 삼십대 중반의 세자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네덜란드에 방문할 수 있었으려나.

“하긴, 놓쳐버린 옥은 네놈뿐만이 아니었지. 완성부원군, 부제학, 또…….”

허나 내가 회상에 빠져 있는 사이 상왕은 상왕대로 놓쳐버린 다른 충신들의 추억 사이를 헤매고 있었다. 그들은 먼저 타계해 이 세상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아, 아버지…….

“왕이가 내 옥좌를 물려받고 단기간에 참으로 많은 것을 이루어냈다고 들었다. 그날 부제학의 말이 옳았다. 자식이 품은 뜻을 펼치는데 아비가 그 앞길을 막아서는 아니 된다 했었던가…….”

“…….”

“네놈의 반응을 보니 부제학이 정말로 네게는 아버지 같은 존재였나 보구나. 그가 세상을 뜬 지도 꽤나 세월이 흘렀는데, 아직도 그런 반응이라니.”

“……당연하고 마땅한 일입니다. 어찌 자식이 아비를 잊겠습니까.”

“망할 놈. 왕이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은 말을 하다니. 네놈들은 대체 무슨 사이더냐? 정말로 평범한 군신 관계는 한참 전에 벗어나 버렸지 않느냐.”

소름이 돋는다는 듯이 목덜미를 벅벅 긁은 상왕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몇 년을 거르지 않고 매일같이 닫힌 문을 향해 문안을 올린 임금도 상왕에게 같은 말을 했던 모양이었다.

허나 내가 그런 모욕에도 불구하고 표정을 바꾸지 않자, 상왕은 슬그머니 내게서 시선을 거두더니 다른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에 알 수 없는 묘한 감정들이 차오르는 것이 보였다.

“네놈이 왕이와 손을 잡고 이뤄낸 것들, 이 외진 이궁까지도 흘러들어오더구나. 십 년도 안 되는 사이에 그토록 많은 일을 해내다니.”

“그저 닥쳐오는 일들을 하나하나 해결하기에 바빴을 뿐입니다.”

“겸손은 그쯤 떨어 두거라. 건방진 놈 같으니라고. 임진년에 쌓인 한을 조금이나마 푼 것부터 시작해서, 여기 내 침전에도 네놈이 안민(安民)을 행한 결과가 올라와 있거늘.”

상왕의 손끝이 머리맡에 있던 자리끼 그릇을 향했다.

그것으로 마른입을 적신 이의 입에서 달다는 감탄사가 새어나오자마자, 나는 자리끼 그릇에 담겨있는 내용물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국초에는 왕비가 맛보고 싶어도 때가 맞지 않으면 맛볼 수 없던 물건이다. 임금조차 자기 어미의 영전에 올리기 위해 몇 년을 기다려야 했던 물건이고.”

“……문종대왕의 일화군요.”

설탕을 즐기던 세종의 왕비, 소헌왕후가 와병 중에 설탕을 먹고 싶어 했음에도 구할 수 없었다는 일화 이야기였다. 후에 왕위에 오른 문종이 뒤늦게 설탕을 구해 눈물을 흘리며 모친의 영전에 바쳤다는 슬픈 일화를 어찌 잊겠는가.

“네놈도 알고 있던 이야기더냐? 하. 헌데 지금은 어떠하냐. 아무나 맛볼 수 없는 가격이라고는 하나, 대가만 지불하면 누구나 때에 구애받지 않고 맛볼 수 있는 물건이 되었다지?”

“예. 지금 추진 중인 대업이 성공한다면 이 땅의 누구나 맛볼 수 있는 물건이 될지도 모릅니다.”

“허어! 이 불충한 놈! 여기까지 와서 또 내 기를 죽이려 드느냐?”

대만 개척이 성공하면 설탕은 당연히 지금보다 더 흔한 물건이 될 것이다. 그것이 상왕에게는 큰 충격인 모양이었다.

“네놈이 내 어전에 바쳤던 마령서라는 작물도 백성들의 굶주림을 결국 거의 해결해놓았다지. 이제야 알겠구나.”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네놈이 미래에서 왔다는 소리가 아주 허튼소리는 아니었다는 걸.”

그릇에 담긴 설탕물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탐하면서, 상왕은 내게 뼈있는 말을 던져왔다.

나를 미치광이 취급하던 주제에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인가.

“그날 저를 광인(狂人)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방금도 그리 부르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그때는 그랬었다. 하지만 그날, 왕이가 네놈을 변호한답시고 주워섬겼었지. 네놈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일을 보여주었고, 직접 본 사람이 아니면 그것을 알지 못한다 했던가.”

“…….”

“이제 그 말뜻을 알겠다. 내가 저지른 가장 큰 실책이 무엇이었는지도. 네놈을 시험하는 대신 어떻게든 처음 본 자리에서 품었어야 했던 것인데.”

설탕물을 게걸스럽게 삼킨 상왕이 그릇을 바닥에 내던졌다. 잘 구워진 도자기였는지 그릇은 깨지는 대신 맑은 소리를 내며 팽이처럼 바닥을 굴렀다.

“……헌데 네놈, 미래에서 온 것이 정말이라면 그 방법 또한 알고 있느냐.”

상왕의 핏줄선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

“네놈만 과거를 고칠 수 있을 리가 없다. 내게도 그런 기회가 주어져야 공평하지 않겠더냐?”

“…….”

“나도 미래를 안 채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번에는 실수하지 않을 자신이 있느니!”

흥분한 노인네의 입에서 길게 침이 비어져 나왔다. 상왕의 이빨 사이사이에 그전까지 없었던 빈자리가 생긴 것이 눈에 띄었다.

“최명길! 성이성! 김육! 그리고 너, 안한수! 지금의 나라면 모두 중용해 더 나은 나라를 만들 수 있다! 왕이보다 더한 결과를 낳을 자신이 있단 말이다!”

“상왕 전하…….”

“이것이 노망으로 보이기라도 하는 것이냐? 네놈이 정말로 역사를 바꾼 것이 사실이라면 , 내 심정을 이해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

안다. 역사를 아는 이라면 조선의 몰락이 시작된 지금 이 시기를 어찌 안타까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여기 흥분한 노인네가 자신의 타락이 시작된 당시를 어찌 여기는지 그 마음이 전해지지 않을 리가.

“어서 방법을 안다면 가르쳐다오! 한강수 어딘가에 몸을 던지기라도 하면 되는 것이냐? 달리는 말에 뛰어들어 치이기라도 하면 가능한 것이냐? 어서!”

“…….”

“나만큼 고치고 싶은 과거가 많은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이이첨! 이괄! 그 빌어먹을 흑환 놈! 모두 제자리로 돌려놓고 역사에 맑은 이름을 남길 수만 있다면야!”

이제는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상왕이 오히려 미치광이로 보일 정도였다. 광기에 가까운 그의 모습을 보니, 입을 열기가 쉽지 않았다.

“말해라! 어서! 그 방법이 무엇이더냐!”

“……인간의 의지로 과거를 마음대로 덧댈 수 있다면, 어느 누가 생애를 온 힘을 다해 살아가겠습니까. 그저 과거를 고쳐 놓기 전 참고할 지남철(指南鐵, 나침반) 정도로 여기겠지요.”

“허튼 소리! 네놈 혼자 그런 특전을 독점하려 드는 게냐! 어서! 어서 이 오욕에 얼룩진 생을 고쳐놓을 방도를 내놓으란 말이다!”

꿇어앉은 나를 향해 양팔을 거칠게 휘두르던 노인이 방바닥에 쓰러졌다. 이미 상왕의 하체는 주인의 말을 듣지 않는 상태인 듯했다.

이불 틈으로, 주인의 명을 거역하는 부하에게서 스며 나온 오물의 악취가 새어 나와 코를 찔렀다.

“……나도! 나도 역사에 명군이자 인군으로 남고 싶었다! 어째서 내게는 네놈처럼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지지 않는다는 게냐! 어째서!”

“…….”

“이 피도 눈물도 없는 후레자식 같으니라고! 네놈은 이런 나를 보고도 동정심 한 자락도 들지 않는 게냐! 어서 네가 아는 모든 것을 말하지 못할까……!”

동정이 들긴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몰려온 것은 추레해진 노친네가 보이는 노욕(老慾)이 불러오는 불쾌함이었다.

죽음의 손길이 느껴지기 시작하자 생애 동안 저질러온 짓들이 드디어 후회되기 시작하는가.

“어명이다! 어서 네가 아는 모든 것들을 털어놓아라! 이놈!”

“……상왕 전하. 전하는 이미 원래 역사에 새겼던 오명보다는 훨씬 덜한 것들을 남기게 되셨습니다.”

“원래 역사에 새겼던 오명이라니! 어찌 여기서 더 추악한 짓을 저지를…….”

“전하는 권력에 눈이 멀어 전하의 손으로 며느리와 손자들의 목숨을 거두십니다. 차자(次子)를 억지로 왕위에 올린 여파는 후대의 왕권마저 뒤흔듭니다.”

“뭐, 뭐야?”

몸부림치던 늙은이의 움직임이 멎었다. 상왕은 마르고 비틀려가는 몸을 겨우 양손으로 마룻바닥에서 떼어놓으며, 검은자위를 내게 고정할 뿐이었다.

“이 시기에 한 번 펄럭인 나비의 날갯짓이 결국 이 나라 조선을 멸망으로 몰아갔다 보는 것은 제 지나친 과장일까요. 전하께서는 어찌 생각하십니까.”

“으…… 으으…….”

“현 주상께서는 더 이상 청에서 온 사자에게 굴욕스러운 모습을 보이시지 않게 되셨습니다. 훗날 주상께서 붕어하신 뒤 장자 대우를 해야 한다, 차자 대우를 해야 한다는 쓸 데 없는 논쟁으로 조정의 힘을 소모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런 일들이…….”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상왕 전하. 전하께서 그나마 마지막에 선위(禪位)하겠다 내리신 맑은 결정이 조선의 미래를 밝게 돌려놓았나이다. 모자라겠지만 그것으로라도 족하시면 마음이 편해지시지 않겠나이까.”

나는 천천히 인조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두 번 올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았다.

이렇게 나약해진 인조의 모습을 눈에 가득 담고 나니, 더는 그에게 야박하게 굴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차라리 노친네 마지막 가는 길, 편하게 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나을지도.

그런 와중에도 상왕의 눈은 내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치 혼이 빠져나간 듯한 눈동자와 함께였다.

“그리고, 적어도 전하께서는 최후까지 함께하려던 충신이라도 존재하지 않았사옵니까. 목을 매달기 직전 명의 황제도 갖지 못했던 충직한 신하 말이옵니다.”

“부제학 이야기더냐. 네 아비라 칭하던 성이성…….”

“이제 그분께 낯이라도 들 수 있다 생각하시옵소서. 상왕 전하께서 그분의 고언을 받아들여 주상 전하께 양위하신 덕분에, 당신의 아들들이 이토록 훌륭한 일들을 해냈다 전해주시옵소서.”

“저승 같은 것은 불씨의 잡변에나 나오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늙은이의 말에 아버지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셨던 말이 어찌하여 겹치는가.

세상의 이치란 정말로 알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하, 하직 인사를 드리기 전에 방금 제게 말씀하신 질문에 답하겠나이다. 들을 준비가 되어 계시옵니까.”

“그, 그래! 과거를 올바르게 돌려놓는 방법 말이더냐?”

“그것이 아니라, 제가 전하께 충성을 다했을 수도 있었겠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옵니다.”

혜성이 조선 하늘에 다시 한번 나타난다면 이 늙은이의 노욕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모를 일이다.

“전하의 말씀이 옳사옵니다. 전하께서 제 편견과 달리 정말로 임금다운 모습을 보여주셨다면, 아마 말씀대로 섬기는 사람이 달라졌을 수도 있었겠지요.”

창덕궁 후원에서 촛불 하나만을 사이에 놓은 채 마주했던 그 날, 능양군이 그의 가슴에 품었던 용 문양만큼이라도 임금의 위엄을 보여주었다면 나 역시 생각이 달라졌을지도.

“여. 역시…….”

“하오나 이것 역시 흘러간 과거이옵니다. 부디 전하께도 저와 같은 행운이 일어난다면, 다음번에는 그 기회를 놓치지 마시옵소서. 제가 신하로서 드리는 마지막 고언이나이다.”

공신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굳센 왕이 되길.

의심 없이 아랫사람을 볼 수 있는 주군이 되길.

타국의 정세를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임금이 되길.

그리고, 자신보다 백성을 먼저 사랑하는 인군(仁君)이 되길.

내가 언제나 현 임금에게 강조하던 덕목이었다.

만약 내가 눈앞의 이 늙은 남자를 조금 일찍 만났다면, 나는 이 사람을 이렇게 바꿔놓을 수 있었을까?

잠시 침전 안에 적막이 흘렀다.

미동도 없는 늙은이를 앞에 두고 다시 한번 나는 인조에게 큰절을 올렸다.

이번에는 이별을 의미하는 절이었다.

***

상왕의 붕어(崩御) 소식을 들은 것은 조금 훗날의 일이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다시 조선 땅을 밟고 한양으로 향했던 날, 나는 상복을 입은 채 마중 나온 사람들을 보고 그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원역사보다 조금 다른 삶을 살다간 암군은 과연 저승에서 원하는 바를 얻어냈을까.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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