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89화 (189/298)

189화. 멋진 신세계

“어기야 디여차…… 어기야 디야 어기여차…….”

머리 위, 갑판 너머로 선원들의 뱃노래가 들려온다. 때맞춰 좋은 바람이 부는 것 같더니 밧줄을 풀어 돛을 양껏 펼치고 있는 건가.

처음 접하는 노래도 아니었건만, 항해 초기에 들려오는 뱃노래는 소음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배를 얼마나 오래 탔으면 저렇게 목청 터져라 외치는 노래에도 익숙해진 건지.

“스승님, 집중이 되지 않아서 그러는데……. 서연을 잠시 중단하면 안 되겠습니까?”

허나 지금 내 앞에서 한창 네덜란드어 단어를 외우고 있는 세자에게는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몇천 년 전 조상들이 한 말이 틀리지가 않다.

정말 요새 학생들은 근성이 부족하지 않은가.

“저하, 제가 분명 저번에도 말씀드렸을 텐데요. 한여름 매미소리가 시끄럽다 하여 학문을 닦는 일을 중단할 수 있습니까?”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선원들의 뱃노래는 우리를 목적지까지 빠르게 인도하기 위한 수고가 담긴 노래입니다. 고작 짝을 찾는 미물의 노래보다 훨씬 고귀한 것일진대, 어찌 그것에 정신이 흐트러진단 말씀이십니까.”

일침이 제대로 들어갔나. 세자의 눈은 갈 곳을 잠시 잃었다 다시 책장으로 향했다.

사실 이 흔들리는 배에서 글자를 눈에 담으면서 속을 게우지 않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대단한 일이긴 하다. 하지만 일국의 세자라면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다.

“우욱……. 사부, 저는 잠시…….”

얼굴이 하얗게 질린 길산이가 입을 막고 뛰쳐나갔다. 석주와 만중도 내색하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었으나, 표정이 변한 것을 보면 속이 뒤집히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들어라. 지금 갑판 위에서는 선원들이 우리를 편안히 하란타로 보내기 위해 뙤약볕에 몸을 태우고 거친 밧줄에 살갗이 쓸려가며 일하고 있다.”

“예판 대감, 허나…….”

“너희는 그들의 수고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가야 할 사람들이다. 위정자를 단순히 남들의 머리 위에서 몸이 편한 존재로 여겨서는 안 되느니.”

“고숙(姑叔, 고모부) 말씀이 옳습니다. 참아 보겠습니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멀미도 꽤 버틸 만해지지 않았더냐. 어차피 하란타로 가는 동안 배에서 보내야 하는 시간이라지만 이 또한 쉬이 흘려보내서는 안 되는 시간이다. 어서 책장을 잡거라.”

그래도 내 말을 듣고는 혀를 씹으며 다시 마음을 다잡는 것을 보니, 이 녀석들을 가르치는 보람은 있었다.

생각해보니 어느새 배 안에서 이 짓을 한 지도 반년이 넘었다.

벌컥. 갑자기 선실 문이 열린 것은 그때였다.

후련한 표정을 하고 있는 길산이를 앞세우고 한 남자가 선실로 들이닥쳤다.

“대군 대감?”

“예판은 오늘도 저하를 가르치는데 여념이 없으신 겁니까? 잠시 시간을 내 주십시오. 안 그래도 통제사가 예판을 찾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일입니까? 지금은 정해진 서연 시간인데…….”

“얼마 전 머물렀던 기항지까지 하란타 연락선이 마중 나오지 않았었습니까. 그때 얻은 정보 중에 지금 알려야 할 것이 있는 모양입니다.”

세자 앞이라고 내게 존대하는 봉림대군이 아직도 조금 낯설긴 했다. 하지만 라위터르가 나를 찾아다닌다는 소리는 그런 낯섦마저 머릿속에서 금방 치워버렸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와중에 옆에서 안도의 한숨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했다.

기뻐하지 마라, 공부는 미뤄진 것이지 취소된 것이 아니니까, 애송이들아.

“……하란타 해군이 우리를 마중 나온다고요? 고작 이국의 사절단을?”

“아, 예판이 생각하는 그 목적은 아닐 겁니다. 우리가 지나갈 항로의 정세가 급변한 모양이더군요.”

“정세라고 함은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혹시 저번에 접촉한 연락선에게서 무슨 정보라도 받으신 겁니까?”

“정확하십니다. 알고 계신지 모르겠지만, 홀란드 직전의 항로는 좁은 해협을 지나갑니다. 엥겔스(잉글리시) 해협이라 불리는 곳인데…….”

지금 사절단이 탄 배는 스페인의 이베리아 반도에서 프랑스의 브르타뉴 반도 사이 어딘가를 항해 중이다. 지난번 기항지, 라코루냐라고 불리는 항구에서 우리를 기다리던 네덜란드 연락선과 접촉한 적이 있었는데, 라위터르는 그때 입수한 정보를 풀어놓는 듯했다.

“그러니까 이 근처에서 영길리 수군이 출몰한다는 말씀이군요. 그들과 하란타 사이의 관계가 좋지 않으니 항해 도중 주의하라는 권유를 받은 것이고요.”

“정확히 말하자면 엥겔란드, 아니 놈들 말로 잉글랜드라 부르는 편이 낫겠군요. 그 땅은 지금 내전 중입니다.”

“내전이라고요?”

“왕당파와 의회파가 전쟁을 벌인 지가 꽤 되었습니다. 하나, 둘…… 벌써 8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겠군요.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잉글랜드의 왕은 전투에서 져 목이 달아났고요.”

권리청원을 무효화하려고 내전을 일으켰다가 국가반역죄로 처형된 찰스 1세 이야기인가?

통역을 전해들은 대군이 어찌 그리 불충한 놈들이 있냐며 중얼거렸지만 애써 무시했다. 이따 밤에 대군에게 이쪽 동네의 왕과 신하의 관계는 계약에 가깝다는 이야기를 가르치려면 고생 좀 하지 싶었다.

“헌데 그것과 우리가 주의해야하는 것이 상관이 있습니까? 오히려 자기들끼리 치고받느라 타국에는 신경을 못 써야 정상이 아닙니까?”

“하필 그 치고받는 장소가 우리 항로와 가까운 것이 문제입니다. 제가 아까 말한 엥겔스 해협의 입구, 그러니까 잉글랜드의 남서쪽 콘월이라는 곳에 왕당파 해군이 집결해 있다는군요.”

머릿속에 유럽 지도를 떠올려보았다.

잉글랜드가 위치한 브리튼 섬과 프랑스 사이에 펼쳐진 해협이 라위터르가 말한 엥겔스 해협, 즉 영국해협이다.

영국해협의 동쪽 끝에 그 유명한 도버 해협이 있고, 거꾸로 서쪽 끝인 해협의 입구에는 라위터르가 말한 콘월 지방이 위치하고 있다.

그곳에서 왕당파와 의회파 사이의 해전이 벌어진다면 이쪽에도 불똥이 튈 확률이 높을 것이라는 예상은 지극히 옳았다. 이미 몇 달 전 아일랜드와 포르투갈에서 왕당파 함대와 의회파 함대간의 해전이 벌어졌다며 라위터르가 덧붙였다.

“홀란드는 의회파에게 줄을 대고 있는 모양입니다. 아직 왕당파에 선전포고는 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곧 할 수도 있다는 귀띔을 받았습니다. 차라리 놈들과는 아예 안 엮이는 것이 나을 텐데…….”

“영길리의 왕당파 수군과 마주치면 꽤 귀찮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군요. 배 한 척으로 함대와 해전을 벌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마 충무공이 살아 돌아오셔도 그건 불가능한 일일 겁니다. 그들의 전선은 느리지만 훨씬 크고 강하거든요. 운이 좋길 바라야지요.”

라위터르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이 명장은 감돌기 시작한 전쟁의 냄새를 예민하게 감지한 모양이었다.

아마 이 내전이 끝나자마자 의회파의 수장, 호국공 올리버 크롬웰이 네덜란드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1차 영란전쟁을 일으키던가. 생각해보니 영란전쟁의 주요 무대도 라위터르가 말한 영국 해협이었다.

“음, 괜히 우리 탓에 전투라도 벌어지지는 않을까 그것이 우려되는군요.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그렇게 큰 걱정은 필요 없습니다, 예판. 만에 하나를 생각해 훈련을 겸해 함대를 출동시킨다는 것이니까요. 이미 전황도 의회파 쪽으로 꽤나 기울어진 상황이라 들었습니다.”

라위터르는 그렇게 나를 안심시키려 애썼다. 하지만 내게서 불안감을 지워내기에 그 말은 조금 부족했다. 원래 영란전쟁은 영국해협에서 양측 함대가 마주쳤을 때, 네덜란드 함대에 잉글랜드 함대가 경례를 요구했다가 발발했던 것이 아닌가.

내전 중인 잉글랜드가 설마 네덜란드를 도발해 양면 전선을 감수할 멍청이들은 아니겠지만, 무언가 불길했다.

아직 지금 시대의 바다는 야만과 낭만이 흘러넘치는 곳이었으니까.

***

“이런 젠장! 돛을 전부 펼쳐라! 전속력으로 달린다!”

“예! 통제사!”

“염려는 거둬라! 바람은 우리 편이다! 저 느림보들은 우리를 따르지 못할 것이다!”

왜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질 않나.

우리 함선이 영국 해협에 접어들자마자 우려하던 사태가 터지고 말았다.

라위터르는 견시병의 외침을 듣고 수평선 너머를 확인하자마자 방향타를 잡으러 뛰쳐 올라갔다. 급히 눈에 댄 렌즈 너머로 스튜어트 왕가의 문장이 펄럭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미리 스페인에서 접촉한 네덜란드 연락선에게서 망원경을 받아놓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했다. 최신기술이라 으스대는 것 치고는 간단한 굴절형 망원경에 불과했지만 말이다.

“혹시나 해서 위험 구역에 진입하자마자 경계를 강화하길 잘 했군요. 정말로 저놈들이 바다를 돌아다니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다행히 놈들이 우리를 발견하기 전에 구역에서 이탈했나 보군요. 통제사가 아니었으면 큰일이 날 뻔했습니다.”

“허허, 예판과 함께 홀란드로 오길 잘한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지형에 익숙한 베테랑 선장이 아니고서야 대처하기 어렵지요.”

왕당파 해군 함대를 따돌리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행이 때맞춰 불어온 남서풍 덕에 빠르게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다 했던가.

불행은 꼭 한 번만 찾아오는 법이 없었다.

“……젠장.”

빠른 속도로 동쪽을 향해 나아가던 찰나, 망원경으로 수평선 너머를 들여다보던 라위터르의 입에서 욕설이 내뱉어졌다. 지금까지 왜구를 상대로 한 토벌전에서는 본 적이 없는 모습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통제사?”

“이번에도 잉글랜드 놈들입니다. 다행히 의회파 놈들이긴 한데, 어쨌건 저놈들과 마주쳐서 좋았던 기억이 없거든요.”

라위터르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유럽을 비롯한 세계의 제해권을 놓고, 그리고 식민지 무역에서 오는 이득을 놓고 사사건건 충돌을 거듭했던 것이 영국과 네덜란드 두 나라니까.

마음 같아서는 우회해 피하고 싶었던 모양이나, 넓지 않은 바다를 간격을 두고 함대들이 틀어막은 탓에 피해갈 곳도 없어 보였다.

라위터르가 이를 악무는 모습이 보였다.

“별 일 없을 것입니다, 통제사. 그래도 나름 협력하는 관계라 하지 않았습니까.”

“겉으로는 그렇지요. 허나 저 섬나라 놈들이 얼마나 간악한지를 예판이 몰라서 그렇습니다. 조선의 옆 섬나라도 비슷한 놈들이 아니었습니까.”

“그 정도 입니까? 허어.”

아, 하긴. 국제 문제에 대해 잘 모를 때 대충 영국을 욕하면 90%는 들어맞는다던가. 놈들의 인성질은 이때도 다를 바가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제 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지금 여기서 뱃머리를 돌리는 순간 앞을 가로막은 함대의 의심을 살 테니까. 후퇴해봐야 뒤는 왕당파 해군이다. 배가 나포라도 된다면 네덜란드 방문은 첫 단추부터 꼬일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해협을 틀어막은 함대는 우리 배에 적의를 보이지 않았다. 돛대에 나부끼는 낯선 깃발을 확인했기 때문일지도. 우리 배 돛대에는 조선 왕가를 상징하는 자주색 태극팔괘도가 걸려 있다.

“지금 저쪽 배에서 무슨 수신호를 보내고 있는 겁니까?”

“예. 맞습니다. 적대하는 선박이 아니라면 가까이 접근하라는 신호군요. 어찌하시겠습니까. 예판.”

“방법이 없군요. 요구에 따르는 수밖에.”

라위터르가 전에 언급했던 대로 잉글랜드 함대를 구성하고 있는 전열함들은 크고 강해보였다.

배의 측면에 빼곡히 실린 대포가 그들의 전투력을 방증했다.

아무리 최신 선박이라고 해도 우리 배의 원형이 된 스쿠너는 근본이 상선이다. 일대일로 붙어도 잉글랜드 해군의 전열함을 이길 수는 없다. 적어도 의심 없이 우리를 보내주길 바라는 수밖에.

“접근한…… 소속을…… 시오!”

“우리는 동쪽…… 조선국…… 다! 문제…… 가?”

“조선? 그게 어디…… 나라……?”

하, 대학에서도 영어 하나는 자신 있었는데.

이 시기 영어도 분류하자면 현대 영어로 들어갈 텐데 반 이상을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17세기 네덜란드어를 배우지 않았더라면 저것마저도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라위터르는 능숙한 영어로 계속해서 날아오는 질문에 대답을 하고 있었다. 하긴 그는 조선에 오기 전 잉글랜드 선박이 드글거리는 서인도제도를 상선으로 왕복하며 돈을 벌었다 했었으니 익숙한 상황일지도.

“책임자를 불러 달라 했습니다. 저 수병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이해를 못하는 것 같군요.”

“처음 듣는 나라에서 온 배에 하란타 사람들이 타고 있으니 오죽하겠습니까. 그래도 아주 경계하는 상황은 아닌 것 같아 다행입니다.”

“모르는 일입니다. 놈들 함대의 근본은 해적이라 언제 돌변할지 알 수 없거든요.”

하긴 잉글랜드 해군의 전설 프랜시스 드레이크도 해적 겸 해군 제독이었으니 라위터르가 그렇게 말할 만도 하지.

그렇게 의견을 나누는 사이 어느새 함대의 지휘관인 듯한 사람이 갑판에 올라왔다. 누런 색 선장 옷에 붉은 망토를 가슴을 가로질러 멘 사나이였다.

그는 천천히 뱃전 너머로 라위터르와 나를 번갈아 쏘아보더니 입을 열었다. 거침없이 손가락질을 하는 모습에서 무례하고 성질 급한 성격이 그대로 묻어나고 있었다.

그래도 방금 계속해서 들었던 영어 탓인지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는 조금 늘어났다. You가 들어갈 자리에 ‘도우’라는 단어가 들어가는 게 거슬리긴 했지만.

“나는 전직…… 이자 잉글랜드…… 의 해상사령관 로버트 블레이크다! 나를…… 한 저지대 놈이 너냐?”

※ 작가의 말

이즈음, 그러니까 원 역사에서 17세기 중후반의 서유럽은 꽤나 흥미로운 시기입니다.

네덜란드는 막 스페인에게서 독립을 확정지어 황금시대를 영유하고 있었고, 영국은 잉글랜드 내전이 일어나 찰스 1세가 처형되고 역사상 유일한 공화제를 시행하던 때였으며, 마지막으로 프랑스는 곧 태양왕 루이 14세가 섭정 대신 집권하게 되는 시기죠.

곧 이 세 나라를 중심으로 수차례의 전쟁이 벌어지게 되는데, 그 결과 서유럽 강대국의 지위가 영국과 프랑스로 옮겨오게 되었습니다. 잠시 흥했던 네덜란드는 결국 체급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고요.

로버트 블레이크는 이 시기와 1차 영란전쟁 당시 영국 해군의 대표적인 제독입니다. 해상사령관은 당시 그가 임명된 계급인 ‘General at the sea’를 번역한 용어고요. 당시 콘월 지방의 실리 제도라는 섬에 주둔 중이던 왕당파의 함대와 블레이크의 의회파 함대가 일촉즉발의 대치 구도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현대영어는 16세기부터 19세기에 통용되었던 영어를 뜻합니다. 문법은 현재와 비슷하게 정립되었으나 발음에는 아직 차이가 있었습니다. 주인공이 중얼거린 ‘도우’라는 단어는 thou로 이 시기에 you 대신 쓰이던 이인칭 단수명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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