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저지대 거지와 섬나라 해적
로버트 블레이크? 영국 로얄 네이비의 아버지이자 넬슨이 가장 존경한 해군 제독인, 그 로버트 블레이크?
바다에서는 민감하기 이를 데 없는 라위터르의 표정이 굳는 것을 보니 내가 떠올린 인물이 맞는 모양이었다. 하필 네덜란드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에서 거물과 마주치고 말았다.
“예판, 귀찮은 섬나라 놈에게 걸린 것 같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제너럴 엣 시’라는 것을 보니 해상사령관쯤 되는 모양이군요. 하필이면 이런 곳에서 남의 나라의 싸움에 말려들 줄이야.”
“예판은 영어도 할 줄 아시는 겁니까? 대체 당신은…….”
“대강 의미를 때려 맞췄습니다. 헌데 통제사께서는 저 자에 대해서 조금 아시는 모양입니다? 표정이 굳으셨습니다.”
나에게는 무얼 숨길 수가 없다며, 라위터르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는 네덜란드 연락선에게서 받은 나머지 정보가 흘러나왔다.
“……연락선에서도 단순히 참고하라며 넘겨준 정보였는데, 이걸 여기서 쓰게 될 줄이야.”
“그러니까 저 블레이크라는 자가 의회파가 정권을 잡고 임명한 수군 사령관 네 명 중 한 명이라는 말씀이군요. 영길리에서는 지금 급격히 수군의 규모를 늘리고 있고요.”
“지금 앞을 막고 있는 전열함들만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공화국은 함대를 늘리기는커녕 기존 전선들도 해체하고 상선들만 만들고 있는 판에…….”
앞을 가로막은 거대한 전열함을 보며 라위터르는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아직 네덜란드 영토에 발을 디디지도 못한 상황임에도, 조국의 암울한 현실이 벌써부터 그를 내리누르는 듯했다.
그렇게 된 원인은 나도 대강은 알고 있다.
네덜란드 공화국은 날 때부터 기형적인 형태로 태어날 수밖에 없었던 나라다. 강대국들과 육상으로 접한 데다 인구까지 적어 해양 전력에 국력을 온전히 집중시킬 수 없다.
물론 지금의 네덜란드는 해양 세력의 공백을 이용한 무역으로 황금기를 누리고 있긴 하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네덜란드의 황금기가 오래가지 못한 이유가 다 있었다.
“뭐냐? 그 괴상한 ……은? 저지대 놈들의 배가 ……했다고 들었는데? 네놈들은 ……?”
“나는 일단 당신이 말하는 네덜란드 사람이 맞소. 허나 여기 함께한 사람들은 멀리 동쪽에서 온 사람들이고, 섬나라 말은 하지 못하니 가능하면 우리말을 써주시오.”
“내가 왜? ……한 저지대 놈들 ……니. 좋아, 이번 한 번만 아량을 베풀어 주지.”
“고맙소.”
살다 살다 영어 대신 네덜란드어가 더 깨끗하게 들릴 줄이야.
어쨌건 다행이었다. 가뜩이나 억양과 발음이 이상한 17세기 영국 영어를 더 알아듣기는 불가능했으니까.
여기까지 와서도 영어 공부를 또 해야 하나, 하.
“다시 묻겠다. 너희는 누구냐?”
“동쪽에 있는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왔소. 당신네 나라 말로 ‘차이나’와 ‘재팬’이라 불리는 나라들 사이에 있는 곳이오.”
“뭐야? 그런 나라는 들은 적이 없는데? 하긴, 극동의 사람들은 눈코입이 작고 머리와 눈동자가 검다더니 그대로긴 하군. 헌데 그렇게 멀리서 왜 이곳까지 기어들어온 거냐?”
“표류한 네덜란드인을 고향으로 데려다주는 길이오. 헌데 언제까지 그런 무례한 말투를 사용할 것이오? 엥겔란드의 ‘매너’는 본래 그런 것이오?”
앞을 가로막은 중년 남성의 입은 걸었다.
물론 겉보기로 따지면 나는 물론이고 라위터르보다 그가 훨씬 나이 들어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연장자라지만 무례가 도를 넘어섰다.
매너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그쪽 격언 아니었나?
“그건 네놈들의 주장에 불과한 것이지. 그걸 어찌 순순히 믿겠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에게 보일 매너는 없다.”
“뭐요?”
“순순히 플리머스로 따라오도록. 너희에게 매너를 지킬지 말지 판단하는 것은 그 후의 일이다.”
누가 영국을 신사의 나라라 했나. 아무리 전장에 가까운 바다 위라지만 이건 너무한 처사였다.
게다가 플리머스라니, 그들의 군항으로 우리 배를 나포(拿捕)하겠다는 뜻이 아닌가.
참다못한 라위터르가 끼어들었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사람이 화를 내는 것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그럴 수 없소! 이들은 우리 공화국의 초청을 받아 온 사람들이오! 당신네 나라가 우리를 적대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소!”
“하, 너희 저지대에게는 그렇겠지, 왕당파 놈들의 목을 전부 따기 전까지 말이다. 하지만 여기 정체모를 나라와는 회담이고 조약이고 맺은 기억이 없는데?”
“이들은 공화국과 친선 관계를 맺은 나라요! 외교적 마찰을 원하지 않는다면 순순히 우리를 보내주시오!”
“그렇다고 그들이 우리 잉글랜드와 조약을 맺은 나라는 또 아니지 않나? 네 말대로 보내주겠다. 우리 땅에서 충분한 조사를 마친 후에 말이지.”
블레이크가 발로 갑판을 두어 번 굴렀다. 갑판 아래 포구로 비어져 나온 대포의 아가리가 햇빛을 받아 반짝 빛났다.
어림잡아 이 배에만 저런 함포가 수십 문은 실려 있겠지.
힘의 차이는 명백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좌절감이었다.
“하, 알겠소. 허면 조사만 마치면 우리를 풀어주는 것이오?”
“아니. 그건 우리 ‘로드 프로텍터(Lord Protector)’의 판단에 달렸지. 너희에게 선택권은 없다. 순순히 따라오도록.”
호국경 올리버 크롬웰 이야기인가.
희망봉까지 돌아 먼 길을 왔는데 네덜란드의 문턱에서 이렇게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분명 영국 놈들의 패악질을 생각해보면 몇 개월 정도는 가볍게 버리게 될지도.
“말이 다르지 않소! 이건 지나친 처사요!”
“지나치고 자시고 여긴 우리의 바다다. 잉글랜드의 영해에 들어왔으면 잉글랜드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옳지 않나?”
“……!”
“아니면 잘 쳐줘야 프리깃 한 척으로 우리 함대에 반항하겠다는 건가? 어디 동방의 원숭이 놈들 따위가…….”
Manners, Maketh, Man.
이 격언은 틀리지 않은 모양이다.
실제로 저 브리튼 섬에는 사람 새끼라는 게 없는 것 같았으니까.
그렇게 나도 모르게 허리춤에 찬 권총으로 가는 손을 겨우 막아 세우고 있던 찰나였다. 앞에 떠 있는 섬나라 놈들의 기함이 갑자기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뭐야? 무슨 일이냐! 이 ……들아!”
“선장! 저 수평선 너머를 보십시오! 저기 저 그림자가!”
돛대 위에 올라가 있던 견시병이 치켜세운 손가락 방향으로 내 시선이 향했다. 그 끝에는 웬 함선 여러 척의 그림자가 비치고 있었다.
“오우……. 마침 때맞춰 왔군요. 기가 막힙니다.”
어느새 품에서 망원경을 꺼내든 라위터르가 중얼거렸다. 그에게서 건네받은 망원경 끝에서, 나는 용기, 신앙, 충성을 상징하는 적백청의 깃발을 볼 수 있었다.
***
“하마터면 큰 봉변을 당할 뻔하셨군요. 마침 시간이 겨우 맞아서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귀국 해군이 저희를 맞으러 나오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저들의 본부로 잡혀갈 뻔 했습니다.”
인사를 위해 올라탄 네덜란드의 대장선, 아니 기함(旗艦) 브레데로데(Brederode) 위에서 나는 네덜란드 해군의 우두머리를 마주했다. 이 사람이 없었으면 아마 꼼짝없이 영국으로 끌려갔을 것이다.
선실에 들어서자마자 감사를 담아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그 인사를 전해 받은 희끗한 수염을 단 남자가 껄껄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웃는 모습이 라위터르와 묘하게 비슷했다.
“섬나라 해적 놈들이 처음 보는 나라의 분들에게도 저리 행패를 부릴 줄이야. 혹시나 해서 와 본 것이었는데, 마중 나오길 정말 잘했군요.”
수평선 너머로 네덜란드 함대가 나타나자마자 블레이크의 표정은 바닥에 찍어 누른 것처럼 구겨졌다. 그렇게 욕지거리 비슷한 것을 남기고 그가 배를 네덜란드 함대 방향으로 돌린 후에야, 나는 뛰던 가슴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 후 양국 대장선 사이에서는 잠시 동안 대화가 오갔다. 그 결과 우리는 섬나라 놈들의 마수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귀국의 이름을 댔는데도 저들이 저렇게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엥겔란드는 내전 중이라고 들었는데요.”
“내전 중이기 때문에 싸움 없이 당신들을 풀어준 겁니다. 안 그랬으면 어떤 시비 거리를 잡아왔을지 모르는 일이지요.”
“두 나라 사이가 그리 좋지 않은가 봅니다?”
“세계 각지에서 우리의 상품이 놈들의 상품을 밀어내는 상황이 엥겔란드 놈들에게 유쾌할 리가 없지요. 아마 조만간 저들과 크게 격돌할 일이 반드시 있을 겁니다.”
제독의 눈에서 익숙한 적개심이 흘러나왔다. 라위터르가 영국 국적의 배와 있었던 일을 풀어놓으며 보였던 그 눈빛이었다.
영국과의 갈등은 역시 그것 때문인가.
몇 해 전, 뮌스터에서 맺어진 조약으로 네덜란드가 스페인을 상대로 벌인 독립전쟁은 끝이 났다.
그와 함께 스페인의 경제 봉쇄가 풀리면서 네덜란드의 무역경쟁력은 급격히 상승했다. 반면 이들에게 밀려 경제적 피해를 고스란히 받은 나라가 영국이었다.
이미 갈등의 씨앗은 잉태되고 있었다. 제독이 한 말은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인데도 의회는 해군 규모를 줄이려고만 하고 있으니……. 아, 실례했군요. 저는 네덜란드 공화국의 해군대장(Lieutenant admiral), 마르턴 트롬프라고 합니다.”
어쩐지 방금 배를 갈아탈 때 라위터르를 어린애 취급하더라니. 그때부터 알아챘어야 했다. 이 아저씨도 네덜란드 해군의 전설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라위터르의 전 상급자이자 스승이기도 했고.
네덜란드의 기함으로 옮겨타자마자 라위터르가 입을 꾹 다문 이유가 있었다. 어지간히도 트롬프를 대하기 까다로운 모양이었다. 이런 모습 또한 처음이었다.
“미힐이 귀국에서 해군대장 직을 받았다면서요? 제가 보기에는 아직 한참 모자란 녀석인데, 귀국에게 민폐나 끼치지는 않았을는지 그것이 걱정입니다.”
“아닙니다! 저는 조국의 삼색기에 먹칠을 할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네 배의 선원들을 보면 잘 훈련받은 것이 분명하니, 나름 해낸 것은 있겠지. 허나 저런 스쿠너 몇 척으로 무얼 더 할 수 있었겠나? 극동의 바다에는 전열함이 없다는 이야기는 듣긴 했다만.”
“그래도 우리 통제사의 지휘 덕에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희생이 엄청나게 줄어들었습니다. 통제사의 전공은 그리 폄하당할 만한 것이 아닙니다.”
통제사라는 낯선 단어를 입안에서 굴려보던 트롬프가 라위터르를 향해 쓴웃음을 날렸다.
아, 저 표정, 아버지가 홍문관에서 갈리던 나를 보며 짓던 표정이다.
“미힐이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배운 것이 많은 모양입니다? 해군을 뛰쳐나가 어디 무역선 선장이나 하고 있다기에 바다 사나이의 길은 아주 저버린 줄만 알았는데요, 허허.”
“선장보다 훨씬 대단한 스승을 모셔 보고 왔습니다. 나중에 제가 따로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뭐야? 나보다 더?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미힐. 그런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이냐.”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촌극을 감상하는 내 입가에도 쓴웃음이 올라붙었다.
지금의 라위터르는 모르겠지. 원역사의 트롬프 역시 최후의 해전에서 저격을 맞고 쓰러져 자신의 죽음을 숨겼다는 것을.
그렇게 오랜만에 만난 선장과 부하, 스승과 제자는 내 존재도 잊은 채 티격태격거렸다. 라위터르가 스승을 저리 대하는 것이 우습긴 했다. 훗날 트롬프의 시신을 안고 신에게 그 대신 본인을 데려가라며 울부짖은 주제에.
“……선장이 아니었으면 함께 ‘덴 하흐’로 향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도대체 왜 조선의 외무장관 앞에서 저를 그리 함부로 대하시는 겁니까?”
“남의 앞이라고 평소와 다르게 대하는 것이 더 우습지 않나? 헌데 미힐, 아직도 ‘백작의 정원’을 꺼리는 이유가 뭐냐? 내 저번부터 파벌 따위는 초탈하라 그리 말했을 텐데.”
“그곳에 선장 같은 사람들만 그득했으면 피할 이유도 없지요. 헌데 아니지 않습니까? 가뜩이나 그들이 가장 싫어할 만한 사람이 제 친구인데요.”
“그놈의 파벌이 뭔지 답답하긴 하지. 지금은 저 섬나라 해적놈들에 맞서 일치단결해야 할 시기인데 말이다.”
트롬프의 입에서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총독과 육군원수를 겸하는 오라녜 공 가문을 지지하는 오라녜 파와, 공화국 의회를 지지하는 공화파 사이의 갈등이 생각보다 심각한 모양이었다.
헌데 이들이 말하는 장소가 귀에 낯설었다. 네덜란드 지명은 여럿 들어본 적이 있는데 ‘덴 하흐’라는 지명은 처음이었다.
“아,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 사이에 있는 도시입니다. 엘세라크 상관장이 좋아죽는 치즈가 나는 하우다도 바로 옆이지요. 그곳에 공화국 의회와 총독의 저택이 있습니다.”
“미힐, 이국에서 오신 분께 그렇게 말하면 알아듣겠나? 우리 공화국의 심장부라고 말씀을 드려야지!”
“공화국의 심장은 암스테르담입니다!”
병사를 다룰 때는 엄격하기 이를 데 없는 분들이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풀어지시는 건지.
한편 이들의 대화에서 나는 우리의 목적지를 정확히 유추할 수 있었다. 한국에는 네덜란드어가 아닌 영어 발음으로 알려져 있어 낯선 곳이었다.
“혹시 섬나라 해적놈들이 저희가 가려는 곳을 헤이그라 부르지 않습니까?”
“아니, 예판. 그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예판은 묘하게 엥겔란드 놈들 사정에 밝은 것 같습니다?”
라위터르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어왔지만 내 비밀을 대답해줄 생각은 없었다.
모를 수가 없는 장소다.
250년 쯤 후, 망국의 마지막 희망을 품고 파견된 특사가 절망에 빠져 자결한 도시니까.
***
그로부터 일주일 쯤 뒤, 나는 처음으로 유럽 땅에 공식적으로 발을 디딘 조선인이 되었다.
헤이그 항의 부두는 지구 반대편에서 온 사람들을 구경하려는 네덜란드인들로 북적거렸다. 특히 조선인 사절단이 몸에 걸친 의상과 장신구들에 대한 대화가 구경꾼들 사이에서 오가는 것이 자주 들려왔다.
“선생님! 여기…… 여기는 정말 아버지의 나라가 맞나 봐요! 다들 아버지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들뿐이에요!”
일곱 살 이후 처음으로 밖에서 장옷을 벗어던질 수 있었던 요안은 신이 날대로 난 상태였다. 그렇게 긍정적인 주목을 받아본 것은 생전 처음이었을 테니 당연한가.
녀석의 머리에 걸쳐진 장신구들이 햇빛을 만나 빛을 발했다. 정2품 정부인(貞夫人)을 상징하는 화려한 첩지머리에, 튀지 않는 옆꽂이, 그리고 비녀가 조화롭게 요안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었다. 타국에서도 꿀리지 말라며 하연이 챙겨준 물건들이다.
“조선에서 오신 분들이군요. 어서 오십시오. 공작 각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앞에는 말 여섯 마리가 끄는 커다란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조선의 사절단을 모시러 온 오라녜 공의 마차인 듯했다.
이제부터 시작인가.
마차에 오르며 이국의 공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셨다.
낯선 곳에서 느껴지는 흥분이 내 심장을 두드리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