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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191화 (191/298)

191화. 환영식

마차는 운하를 따라 난 길을 달렸다. 운하 가장자리에는 좁고 높은 네덜란드 특유의 집들이 가득 들어서 있었다. 가끔 그 집들 사이로 꽤 넓게 파인 운하에는 배들이 오가며 사람과 물건을 날랐다.

“스승님, 저런 물길, 한양에도 낼 수 있겠습니까?”

“저하, 이 지역은 원래 산이 없는 낮은 평지인 데다, 바다를 메워 만든 땅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한양에 같은 것을 내려면 성저십리의 백성을 전부 동원해도 긴 세월이 걸릴 겁니다.”

“그렇습니까……. 저는 이런 물길이 한양에도 있으면 좋겠다 생각했습니다.”

아쉬움을 표하는 세자를 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벌써부터 세자가 대규모 토목공사에 맛을 들리면 안 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그럴 일은 없겠지만.

하지만 다행히 세자의 질문은 그저 흥미 차원인 모양이었다. 차라리 한양 도성을 남쪽으로 확장해 한강에 닿게 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내 말에 세자는 고개를 끄덕여 응답했다.

“흠. 저하께서 암스테르담에 방문하시면 무척 놀라실지도 모르겠군요. 그곳의 운하는 수준이 다릅니다.”

“다르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통제사?”

“여기 덴 하그의 운하는 몇 줄기가 해자 대신 내성(Binnenhof)을 감싸며 흐르는 것에 불과합니다. 암스테르담의 운하는 시내를 수십 개의 섬으로 가르며 거미줄처럼 뻗어있지요.”

“오오, 그러하오?”

“조선으로 돌아가기 전 반드시 보여드리겠습니다. 암스테르담이야말로 이 공화국의 심장이라는 것을 저하께서도 알게 되실 겁니다.”

아니, 이 양반아. 세자의 가슴에 쓸 데 없는 꿈을 불어넣으면 어떡합니까.

라위터르가 늘어놓기 시작한 그놈의 암스테르담 부심 덕분에 세자의 눈망울만 점점 반짝거리고 있었다. 하긴 이 당시의 암스테르담은 세계에서 제일 잘 나가는 금융도시이자 무역의 중심지니 그럴 만도 하다만.

다만 세자가 저 말에 회까닥 돌아 보위에 오른 후 한양에 운하를 파겠다 나서면 심히 곤란했다. 오늘 밤 네덜란드와 조선의 차이를 주제로 한 특별 과외가 반드시 필요하지 싶다.

그렇게 십 리쯤 운행했을 때였나. 마차는 운하에 걸린 다리를 건너 라위터르가 비넨호프라 중얼거린 지역에 진입했다.

“오, 마침 슬슬 목적지가 보이는군요. 이곳에 오라녜 공의 저택과 공화국 의회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비넨호프…… 하란타어로 내성(內城)이란 뜻인가. 성벽 없는 성은 또 처음 보오.”

“제가 떠나기 전에도 여기에 방어용 성벽을 짓는다 하더니, 아직도 올리지 못한 모양이군요. 하긴 그럴 만한 자금이 부족하겠지만요.”

운하로 둘러싸여 육지의 섬처럼 된 구역에는 집들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전부 네덜란드 공화국에서 한가닥 하는 이들의 저택이라며 라위터르가 설명을 이어갔다.

설명을 듣는 사이 마차는 섬 한가운데, 딱 봐도 규모가 큰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붉은 벽돌과 푸른 지붕으로 지어진 고딕 양식의 건물들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다 왔군요. 여기가 기사회관(Ridderzaal)입니다. 원래는 의회로 쓰는 공간이나, 여러분들 같은 귀빈들을 맞이할 때 쓰기도 합니다.”

“통제사는 이곳에 와 보셨소?”

“포르투갈 독립전쟁에서 이기고 귀환했을 때 개선식이 여기서 열렸습니다. 앞으로 벌어질 일들은 꽤 볼 만할 겁니다, 저하.”

라위터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차가 멈추더니, 마차의 문이 활짝 열렸다. 광장 안에는 항구보다 더한 규모의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제 조국, 네덜란드 7개주 연합공화국에.”

***

아치형으로 지어진 기사회관 내부는 상당히 넓었다. 평소 조회가 열리는 창덕궁 인정전의 두 배는 족히 되는 넓이였다.

넓은 채광창으로 비치는 햇빛이 흰색으로 단장한 깔끔한 실내를 빛냈다. 야간에 쓰이는 샹들리에 역시 태양빛을 받아 금색으로 반짝였다.

“오오……. 숙부님, 이것은…….”

“자금성보다 규모가 크진 않지만, 하란타만의 아름다움이 묻어나는군요. 긴 여행을 견딘 보람이 있습니다, 저하.”

내 앞을 걷는 세자와 대군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대화였다. 배에서 내리기 전 곤룡포와 관복으로 갈아입은 이들의 고개는 분주한 시선을 따라가느라 바빴다.

허나 나는 익숙한 고딕 양식의 실내장식들보다 앞에서 조선 사절단을 마주하는 네덜란드 고위층의 모습에 더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사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균열이 높으신 분들 사이에서 보이고 있었으니까.

“대군 대감, 실내장식보다는 우리를 맞는 이들 사이의 분위기에 집중해 주십시오.”

“그게 무슨 말이더냐, 예판?”

“전번에 하란타는 당파 사이의 분열이 꽤나 깊은 나라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옛 산당과 한당의 대립 이상의 갈등이라 생각하셔야 합니다.”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내 말을 들은 대군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제 저들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대군의 눈에도 조금은 보이려나.

네덜란드는 이미 한 번 크게 벌어진 갈등을 겨우 얼기설기 봉합한 나라였다.

네덜란드의 국부 침묵공 빌렘 1세의 사망 이후 스타드허우더(stadhouder), 즉 세습 총독에게 권력을 집중할 것이냐, 아니면 공화국 의회에 권한을 나눌 것인지를 놓고 갈등이 벌어져왔다.

침묵공의 아들이자 유능한 육군 지휘관 마우리츠 공이 의회의 수장 올덴바르네벨트를 처형한 이후로 지금까지는 세습총독을 지지하는 오라녜 파가 17세기의 전반부를 지배해온 상태다. 하지만 현재 상황은 꽤 달라져 보였다.

“무언가 분위기가 다른 집단이 두 개 있구나……. 고풍스러운 복장을 한 자들과, 그렇지 않은 복장을 한 자들, 맞느냐?”

“예, 아마 맞을 겁니다. 제가 하란타에 대해 말씀드렸던 지식들을 이 자리에서 절대 잊으셔서는 안 됩니다.”

대군의 넓은 어깨 너머로 그의 고개가 끄덕거리는 것이 보였다. 장신이 드글드글한 네덜란드에서도 나와 대군의 덩치는 그들에게 밀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나는 이날을 위해 배가 헤이그 항에 닿기 며칠 전부터 대군과 세자에게 네덜란드 관련 지식을 요약해 때려 박아왔다. 라위터르에게 교차 검증까지 받아 가며 확인한 정보였다.

“어서 오십시오. 동방의 이방인들이여!”

대열의 맨 앞에서 사절단을 맞이한 오라녜 공 빌렘은 젊었다.

부친에게 총독직을 물려받은 지 채 3년도 되지 않은 20대 중반의 공작이라 했다. 허나 나는 그 싱싱한 젊음에서 가시처럼 쓰윽 올라오는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아, 그거군. 정성공과 처음 마주했을 때 느낀 그것.

현 네덜란드 총독, 후세에는 빌렘 2세라 알려질 오라녜 공의 얼굴에 흐르는 감정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오만함.

오라녜 공을 마주하자마자 대군 역시 짧은 시간 동안 내 쪽으로 눈빛을 보내왔다. 대군 역시 비슷한 생각인 모양이었다.

“이거 봐라, 동방의 사절단이라니. 위대한 조부님도, 전설적인 장군인 숙부도 이루지 못한 업적이 아니냐.”

“예, 맞습니다. 공작 각하.”

이 자는 우리가 네덜란드어를 할 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건가. 오라녜 공은 이런 자리에서 벌써부터 측근에게 고개를 돌려 쓸 데 없는 사담을 나누는 중이었다.

왜 조선에 고귀한 혈통이 포함된 사절단을 그리도 요구했는지 알 것 같았다. 공작 스스로가 젊고 아직 이룬 것이 없기에 모자란 권위를 조선의 사절단으로부터 얻으려는 것이었나.

조부는 네덜란드 독립의 시작이자 국부와도 같은 존재, 그 뒤를 이은 숙부는 천재적인 육군 지휘관이자 전술가, 그리고 그의 부친은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을 끝내고 신생 공화국을 출범시킨 총독.

젊은 공작이 권위에 목말라 애가 탈 만도 하군.

그렇게 세자와 빌렘이 대표자로서 인사를 나눴다.

아직 그리 유창하지 못한 세자의 네덜란드어를 박연이 보조하는 것을 보는 사이, 어디선가 따가운 눈빛이 느껴졌다.

“……젊은 나이에 후계자가 되셨군요. 제 동생 알베르틴이나 헨리에트와 비슷한 나이이신 것 같습니다.”

“하란타 공께서도 대단하십니다. 그 나이에 한 나라의 우두머리라니…….”

그 눈빛은 오라녜 공 빌렘의 반대편, 깔끔한 옷을 입은 무리에서 날아오고 있었다. 아마 저쪽이 공화국 의회 의원들로 이루어진 공화파 집단인 모양이군.

헌데 조금 시간을 두고 관찰한 결과, 시선은 나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창백한 얼굴을 한 젊은 남자의 눈동자는 내 옆에 있는 라위터르에게 꽂혀 있었다. 통제사의 구군복 복장을 한 라위터르가 신기하기라도 한 건가?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라녜 공의 인사는 대군에게로 옮겨갔고, 그렇게 환영식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한 가지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빌렘이 조선 사절단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이쪽으로 접근하는 의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오라녜 공 주도로 이루어진 환영이 모두 끝나고 그가 자리를 비우고 나서야 마치 장애물이 사라졌다는 듯이 이쪽을 향해왔다.

네덜란드의 두 세력 사이에 갈라진 골은 생각보다 훨씬 깊었다.

마치 곧 폭발하기라도 할 것처럼.

***

그렇게 기사회관에서 벌어진 환영식이 끝이 나고, 조선 사절단 일행은 근처에 위치한 총독 관저로 안내받았다. 이곳의 손님방에 사절단을 위한 숙소가 마련되어 있다고 했다.

먼 길을 왔으니 저녁 연회까지 먼지를 씻어내고 휴식하라는 네덜란드 측의 배려였다.

하지만 내 휴식은 전혀 보장되지 않았다. 간단한 세신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웬 불청객이 내 방에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오실 줄 알았습니다. 대감께서도 생각이 복잡하셨겠지요.”

“저녁 연회를 마치면 그때부터 본격적인 외교에 들어가지 않겠느냐. 그 전에 네 의견을 물으려 왔다. 네가 아까 그 자리에서 말한 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방 한쪽에 놓인 탁자에서는 봉림대군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환영식 자리에서 목격한 네덜란드 정세에 대해 질문이 있어 온 것이지 싶었다. 대군의 눈에도 갈등이 선명하게 보인 것인가.

그렇게 대군은 내게 네덜란드 정세에 대해 한참 질문을 던져댔다. 꽤나 날카로운 질문이 여럿 섞여있었지만 나도 환영식 자리에서 되새김질을 했던 터라 대답은 어렵지 않았다.

“……이전에 이야기한 것에 비해 내용이 조금 상세해졌구나.”

“더 자세히 말씀드려야겠다는 판단이 서기도 했고, 방금 목격한 것 덕에 확신하게 된 것도 있으니까요. 이제 이해가 조금 되셨습니까?”

“사실은 오늘 내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하란타에는 왕이 없고 군사를 총괄하는 총독과 상인 대표들이 협의해 나라를 운영한다는 것을. 이런 나라가 어찌 제대로 다스려질 수 있단 말이더냐.”

“일본만 해도 그들의 땅에서 쇼군이라 불리는 자가 국정을 좌지우지하지 않습니까. 하란타는 아직 독립한지 오래되지 않은 나라고 이곳에는 이곳의 법이 있는 법이니, 함부로 재단해서는 아니 됩니다.”

해적들의 섬나라는 왕의 목도 날렸다는 이야기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사라졌다. 대군은 여전히 이 나라의 정치 체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잠시 침묵을 지키던 대군이 입을 연 것은 잠시 후였다. 그 사이 머릿속이 어느 정도 정리된 모양이었다.

“형님께서 우리에게 내린 임무는 두 가지였지. 하란타 본국과의 친선 증진, 그리고 새로운 문물의 도입 말이다. 헌데 지금 하란타 내부의 갈등이 생각보다 심한 것을 보면…….”

“최악의 경우에는 두 세력 중 한 곳을 택하라 강요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그런 일이 벌어지고 나서 염려할 문제겠지만요.”

“예판, 지나치게 앞일을 낙관하는 것이 아니냐? 환영식 자리의 저 무거운 분위기를 보고도? 분명 이 나라는 얼마 되지 않아 두 세력 간의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대군의 예상은 옳았다.

젊은 오라녜 공 빌렘은 죽은 아버지로부터 총독직을 이어받은 이후 기를 펴지 못하고 있었다. 그 틈을 타 의회는 비용을 이유로 들어 빌렘의 기반인 육군을 감축시키려 시도했다. 의회 역시 해군을 감축하고 있었기 때문에 명분은 충분했다.

원역사대로 그대로 흘러간다면 아마 끝은 정해져 있을 것이다. 근시일 안에 오라녜 공 빌렘이 헤이그에 거주 중인 의원들을 체포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암스테르담으로 진격하겠지.

물론 나는 반정 전문가답게 그 쿠데타의 결과를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토록 침착할 수 있는 것이다.

“예. 저도 하란타 공의 생각이 대강 짐작이 갑니다. 우리에게 호총을 수입해가고 군사 교류를 요청했던 것이 하란타 공 세력이었다는 것이 오늘 명확해졌으니까요.”

“……혹시 예판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느냐. 무기를 준비하는 이유는 보통 곧 그것을 쓰기 위함일 테지.”

“예. 상황이 이대로 이어지면 하란타 공이 최후의 수단을 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는 길에 마주한 엥겔란드는 내전 중이고, 당분간 하란타 외부의 적은 없을 거라고 했었지. 역시…… 그 또한 거사를 준비하고 있었나.”

“나이 차도 별로 나지 않는 마당에 이런 말을 해도 좋을지는 모르겠으나, 현 하란타 공은 지나치게 혈기왕성한 이입니다. 그리고 전 하란타 공들이 세운 업적에 자격지심을 품고 있는 것 같고요.”

내 말에 대군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지금 상황에서는 극단적인 추측이긴 하나, 대군은 내가 반정을 일으키는 모습을 목격했던 적이 있으니 그렇게 추측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대군 대감께서도 들으셨다시피 원래 우리 사절단을 먼저 원한 것은 공화국 의회의 의원들이라 했습니다. 조선과의 대외무역을 주도하고 있는 쪽은 그쪽이니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런데 그 초대에 뒤늦게 숟가락을 얹은 쪽이 하란타 공이었다. 왜 사절단에 관련된 국서가 시간 차이를 두고 두 장이 날아왔는지 이제야 알겠더구나.”

“명목상 국가원수는 총독인 하란타 공이니 의회에서도 그의 명의로 국서를 보낸 것이겠지요. 갑자기 국서 한 장이 추가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긴, 강선총을 수입해간 줄리스테인 백작도 오라녜 공의 이복형이었다. 아마 의회에는 병력 감축을 핑계대고 질 좋은 무기를 수입할 명분을 마련했으려나. 이미 특사로 그의 혈육을 보낼 때부터 빌렘의 머릿속에서는 쿠데타 계획이 짜여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예판 네 말을 종합해보면, 결국 하란타 공은 의회에게 넘어간 권력의 추를 어떤 방법을 써서든 자신 쪽으로 돌리고 싶은 모양이로군. 그럼 의회 쪽의 속내는 어떨지 짐작이 가느냐.”

“의회는 하란타 공의 영향력이 낮은 틈을 타 휘어잡은 권력을 유지하려 하겠지요. 딱히 우리 사절단의 방문으로 무엇을 꾀하려는 생각은 읽히지 않았습니다.”

“그럼 결국 우리 임무에 방해되지 않는 선이라면 지켜보자는 것이 네 의견이냐. 하긴, 이 갈등 국면에 끼어들어서 얻어갈 것도 없긴 하겠다만.”

“어차피 하란타 공이 거사를 언제 일으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리고 거사 결과가 어떻게 되든 하란타 측은 우리 조선을 가볍게 대할 생각은 없는 것이 확실하고요.”

그래, 어차피 만일을 대비해 여러 가지 계획을 짜 놓는 것이 내 특기 아니었던가.

결과가 어떻게 되든 간에 조선은 양쪽에 줄을 대놓고 보험을 마련해 놓으면 된다. 원래 계획에서도 헤이그에서의 일정이 마무리되면 암스테르담을 방문하기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예판. 거사가 언제 일어날지 모르게 되었다면, 우리가 하란타 측의 분쟁에 말려들어가는 경우도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것도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일단 현지에 도착했으니 정보를 더 수집해 보고, 나름대로 대응책을 강구해 보겠습니다.”

오라녜 공 빌렘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태라 골치가 아팠다. 원래대로라면 네덜란드에 너무 깊이 개입하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언제 상황이 바뀌게 될지 모르게 되었으니까.

만약 역사가 바뀌지 않는다면 오라녜 공의 급사(急死) 이후 당분간은 공화정이 네덜란드를 다스리겠지. 영국과 프랑스에 대패한 이후로는 다시 후임 오라녜 공이 총독이 되어 정권을 잡게 되겠고.

문제는 그렇게 되면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한 명 있다는 점.

“참, 통제사가 지금 공화파에 속해있다던 친우를 만나러 갔다고 했나. 그가 돌아오고 나서 물어보면 확실해지겠군.”

“예. ‘요한’이라는 벗을 만나러 간다 들었습니다. 아까 환영식 자리에도 나와 있던 젊은 친구더군요.”

네덜란드가 힘을 잃지 않게 하려면 라위터르를 이 땅에 남겨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그는 오라녜 공의 쿠데타 실패 후 완전한 공화국이 된 네덜란드를 위해 평생을 싸우다, 외세를 등에 업고 복위된 총독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만다.

마음이 복잡했다. 한 사람을 위해 역사를 바꾸어야 하는가. 아니 과연 잠시 이 땅에 머무는 것만으로 역사를 바꿀 수 있긴 할까.

똑똑. 그때 노크하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군 역시 눈을 감고 고민에 빠져 있다가 눈꺼풀을 여는 것이 보였다.

“어…… 제가 방해했나 봐요? 죄송합니다!”

문 사이로 슬쩍 비친 사람의 정체는 지금 사절단에서 제일 신나 있을 그 녀석이었다. 대군의 존재에 당황한 모양인지 금방 방문을 닫고 복도로 발걸음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녀석이 왜 내 방을 방문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잘 어울리는군.”

“대군 대감!”

“네 후실이라고 감상도 못 하게 하는 게냐? 조선 옷도 잘 어울리더니 하란타의 의상도 잘 어울리지 않느냐.”

여기까지 아내를 데려와서 좋겠다며, 방금까지 외교로 고민하던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대군이 긴장을 풀고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요안이 녀석의 드레스 차림이 대군에게는 그렇게 보인 건가.

물론 연두색이 감도는 드레스 차림이 녀석에게 꽤 잘 어울린 것은 사실이었다. 덕분에 복잡하던 머리를 잠시 비울 수 있었던 것은 나름 고마웠다.

그래, 이미 나는 역사를 여러 번 크게 바꿔놓았다. 무슨 고민이 더 필요하겠는가.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든 나는 조선의 이득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면 그만이다. 역사를 바꾸든, 바꾸지 않든, 그 흐름을 조선에 유리하게 돌려놓는 것이 내 임무인 것이다.

라위터르가 역사에 휘말리게 된다면, 미리 손을 써 최대한 그를 수렁에서 건져내도록 힘을 쓰면 된다.

그것이 미래를 아는 자의 특전이 아니겠는가.

늙고 병든 상왕이 그리도 부러워하던 특전 말이다.

방금까지 힘이 쭉 빠져 있던 몸에 힘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방금 문을 열며 녀석이 내게 들이민 함박웃음이 무엇보다 큰 힘이 된 것 같았다.

헌데 요안이는 도대체 어디서 저걸 얻어 입은 건지, 나 참.

녀석의 알 수 없는 친화력 탓에 다시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을 털어내기 위해 다시 대군과의 논의에 집중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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