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진짜 사나이
하지만 대군과 나눈 염려는 그저 기우에 그치는 듯했다. 그날 저녁 오라녜 공 빌렘의 주도로 열린 연회에서는 외교에 관해 그리 중대한 이야기가 오가진 않은 것이다.
하긴, 상식적으로 멀고 먼 나라에 많은 것을 기대하진 않겠지. 아니면 우리를 떠 본 것이거나.
하지만 네덜란드 공화국의 육군 원수답게, 빌렘은 확실히 수입한 호총의 위력과 총통위 병사들의 전술에는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나와 전쟁과 군사 이야기를 나누느라 대군은 뒷전이었을 정도였다.
특히 내가 청나라에서 참전했던 이야기를 나눌 때가 절정이었는데, 대화에 집중한 빌렘은 자신의 다리가 흥분으로 연신 떨리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예물로 전달한 차를 끓여 내온 자리에서도 온통 전쟁 이야기뿐이었다. 홍차를 수출하고 네덜란드의 식민지에서 커피를 수입할 생각으로 꺼낸 물건이었는데 이날은 전혀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때쯤 유럽에 커피하우스가 유행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나? 조정 신료들을 잔뜩 굴리려면 카페인이 꼭 필요한데…….’
결국 차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뤄졌고, 대신 군사 관련 화제가 다음날까지 이어졌다. 빌렘에게 총통위 병사들의 사격 전술 시범을 보여달라는 요청을 받았기에, 나는 배에서 쉬고 있던 군사들을 모아다 헤이그 인근 훈련장으로 향해야 했다.
“총통위, 일제 격발!”
“격발!”
허공을 찢는 소리와 함께 표적으로 세워놓은 나무판들에 바람구멍이 뚫렸다. 대략 250보 거리에 놓아두었던 표적을 확인하는 오라녜 공 빌렘의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당신 말대로 정밀한 사격 하나는 끝내주는군. 그런데 이만한 정예 병력을 대규모로 운용하려면 비용도 많이 들지 않소?”
“예. 아무래도 화약부터 부싯돌까지 만만치 않은 비용을 지출하고 있습니다. 화약은 그나마 귀국 동인도회사의 공급으로 부담을 덜었지만 말입니다.”
“이렇게 좋은 무기가 있으면 뭐하겠소. 의회 놈들은 군비 이야기만 나오면 줄이지 못해 안달이니…….”
근사하게 콧수염을 기른 빌렘의 얼굴에 잠시 경멸의 빛이 서렸다.
그에게 영지가 있다고는 하나 거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공화국의 육군 전체를 무장시키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결국 군비를 댈 자금은 대외무역에서 나오기 마련이고, 그 중심지를 대표하는 의회가 돈줄을 쥐고 있는 상황이겠지.
“군비라……. 그것 때문에 신형 머스킷의 보급이 생각보다 더딘 모양입니다?”
“뭐, 그런 셈이오. 완제품도 몇 정 안 들여온 데다 설계도는 의회 놈들에게 있으니, 생산량도 그놈들 마음대로요. 화약도 제대로 보급해주지 않는 자들이 총이라고 제대로 내놓겠소?”
“하긴, 그래서 구형 머스킷조차 완벽히 다루지 못하는 병사가 많다고 하셨던가요. 그래서 의원들을 불러내 사격시범을 요청하신 겁니까?”
“그렇소. 총통위라고 불렀던가? 조선 정예병의 위력을 똑똑히 보았으니, 생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쥐고 있던 돈주머니를 풀 것이오.”
음, 글쎄. 그 전에 의회와 관계부터 회복하는 것이 먼저 아닌가?
내 편 아닌 자에게 돈을 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내가 빌렘이었다면 먼저 정치적인 방향으로 접근했을 텐데, 이 독단적인 젊은 총독은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저들은 지나치게 낙관적이오. 당장 아버지 대에 엥겔란드와 프랑크라이크(프랑스)와 협력해 스파니예(스페인)을 몰아냈다고는 하나, 어제의 친구가 내일의 적이 될 수 있는 것이 국가 간의 외교가 아니겠소?”
“옳으신 말씀입니다.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그만한 힘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요.”
“조선의 외무장관은 이치를 아는 사람이구만! 헌데 의회 놈들은 그 간단한 진리를 모르고 있소. 돈을 아껴야 할 곳과 아끼지 말아야 할 곳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단 말이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훗날 일어난 영란전쟁에서, 바다에서는 대등한 전과를 올리던 네덜란드가 급격하게 무너진 원인이 바로 빌렘이 말한 육군 병력의 약화에 있었다.
프랑스의 참전 이후 육전에서 연일 참패해 나중에는 댐까지 터뜨려가며 처절히 방어해야 했던 네덜란드다.
이걸 보면 빌렘이 국제 정세를 읽는 눈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 오만하고 독선적인 성격인가.
‘내가 네덜란드의 총독인데 감히 의회 놈들 따위가…….’라는 태도는 사태 해결에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터.
한편 빌렘이 의회 놈들이라 싸잡아 무시하는 공화파 사람들의 시각은 어떨까. 빌렘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총통위의 사격을 관찰하는 의원들의 표정은 읽기 어려웠다.
“그나저나 조금 놀랐소. 줄리스테인 백작이 조선에서 당신네 총통위의 전술을 감상하고 와서는 숙부님의 전술과 매우 닮아있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게 사실일 줄이야.”
“그분의 지혜와 비교되다니 영광입니다. 고성능의 머스킷을 개발하고 병사의 숙련도를 높여 장전시간을 빠르게 하다 보니 전술이 점점 이쪽 방향으로 바뀌게 되더군요.”
“파이크를 든 병사들 사이에서 일제사격과 순차사격으로 적을 제압하는 것까지 같아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했다오. 역시 유능한 전술가들은 같은 환경에서는 비슷한 발상을 하는 것일까.”
“칭찬 감사합니다. 오라녜 공 각하.”
뭐, 굳이 따지자면 빌렘의 숙부, 오라녜 공 마우리츠의 전술보다는 스웨덴 구스타프 대왕의 머스킷티어 전술과 비슷하겠지만 그게 중요하겠는가. 빌렘이 그것을 통해 내게 호감을 가졌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게 총통위 장창병의 방진 형성과 총검돌격까지 감상한 후였다. 빌렘은 자신도 보여줄 것이 있다며 보좌관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그러자 훈련장 한 편에 대기하던 병사 한 무리가 앞으로 나섰다.
“이들이 어떤 임무를 맡고 있는지 아시겠소?”
“일단 단련된 몸이나 날카로운 눈매를 보니 정예병인 것을 알겠습니다. 제 앞에 내보이실 정도면 오라녜 공 각하의 최정예겠지요.”
“정답이오. 그 이상 알아낸 것은 없소?”
“등에 멘 머스킷 외에 허리춤에 무언가 추가로 차고 있는 것이 있군요. 그것이 저들의 특수한 무장이 아닐지……. 병사들 모자에 챙이 없는 것을 보니 무언가 던지는 물건이 아닙니까?”
다 알면서 잡아떼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이 시기, 유럽의 최정예라면 당연히 척탄병이 아니겠는가.
내 말이 들리는 위치에 서 있는 지휘관의 안색이 변하는 것이 보였다.
“이야……. 당신만한 통찰력을 가진 사람을 나는 본 적이 없소. 전부 정답이오. 이들이 내가 자랑하는 흐레나디어(Grenadier, 척탄병)요.”
“조선에도 비슷한 무기가 있어서 추측해보았습니다. 질려포(蒺藜砲)라고, 뾰족한 마름쇠를 화약을 넣은 통에 넣고 터뜨려 적을 살상하는 무기지요.”
지지 않으려 조선식 수류탄인 질려포 이야기를 꺼내던 찰나, 머릿속에 좋은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질려포의 내용물을 바꿔치면 화염이 터져 나오는 산화포(散火砲)가 될뿐더러, 이것은 화포에 넣고 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이때 유럽에 폭발하는 포탄인 작열탄의 개념이 있었나? 이 아이디어는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을지도.
하지만 오늘의 상상은 여기까지였다. 일단 지금은 앞에 서 있는 공작 각하의 자랑부터 들어줘야 했다.
“호오, 흥미로운 무기로군요. 나중에 그 질려포라는 것 이야기도 따로 자세히 해줘야 할 것이오. 일단은 내 정예들의 솜씨부터 감상하셔야 할 테니.”
앞으로 나선 빌렘의 척탄병들은 익숙한 호총을 들고 있었다. 그들은 총통위와 같은 거리에서 표적을 쏘아 맞추더니, 앞으로 돌격하며 허리에 찬 주머니에서 쇳덩이 하나를 꺼내들었다. 원시적인 수류탄이었다.
쾅. 콰광.
어느 순간 심지에 불이 붙은 수류탄들이 하늘 높이 쏘아 올려졌다. 가장 멀리 던진 병사는 한 20m는 날렸을까. 수류탄을 던지고 재빨리 후퇴해 엎드리는 병사들 너머로 작은 진동이 전해져왔다.
“대단한 담력이군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약을 손에 들고 적을 향해 돌격하다니.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듯합니다.”
“그 말이 맞소. 목숨 따윈 아까워하지 않고 철저히 훈련된 정예병만 가능한 일이지. 조선의 병사들은 저런 일을 할 수 있겠소?”
“흐음……. 조선에서는 보통 저런 탄을 함포에 넣고 쏘는지라. 직접 던지도록 훈련할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하하, 진짜 남자만 할 수 있는 일이오. 저런 정예를 키워내지 못한다 해도 부끄러운 일은 아니지.”
아하, 지금 내게 도발을 거는 건가?
총통위의 사격솜씨와 전술은 흠잡을 데 없으니 척탄병의 수류탄 투척으로 알량한 우월감과 자존심을 챙기겠다?
첫인상이 절반은 맞는다더니, 틀린 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의기양양해진 빌렘의 얼굴에 진흙을 잔뜩 발라주고 싶은 충동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이봐, 그거 하나 빌려주지.”
“예? 그 무슨…….”
내 발걸음은 조용히 척탄병의 지휘관으로 향했다. 뜬금없는 귀빈의 접근에 당황한 장교의 허리춤은 무방비 상태였다. 무기를 순순히 내줬다고 나중에 갈굼을 먹겠지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고.
“진짜 사내라……. 잘 보십시오, 오라녜 공 각하.”
통째로 뜯어낸 수류탄주머니에서 부싯돌을 꺼내 강하게 부딪혔다. 튕겨 나온 불꽃이 부싯깃과 심지에 옮겨 붙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어, 어어……?”
아직도 사태를 파악하지 못한 빌렘을 뒤로 하고 땅을 박찼다.
스탭, 원, 투.
아직도 잊지 않고 투창을 꾸준히 단련중인 내 몸은 야구의 롱 토스 폼을 여전히 잊지 않고 있었다.
손끝에 수류탄의 접합부가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손가락이 화끈거릴 정도로 강하게 튀어나온 부분을 챈 순간, 달리는 힘과 신체의 회전력이 더해져 수류탄이 하늘 높이 쏘아졌다.
“아니?”
“저렇게나 멀리?”
대충 봐도 방금 척탄병들이 날린 거리보다 내 수류탄이 배 이상 멀리 날아갔다. 곧이어 들려올 폭발음을 뒤로 하고 등을 돌렸다.
어깨에 통증 따위는 없었다.
“아니…… 당신은 대체…….”
“이 정도면 네덜란드에서도 진짜 사나이 취급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입을 다물지 못하던 빌렘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차, 이것도 외교적 결례인가?
하필 빌렘이 보여준 병사가 척탄병이 아니었다면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귀한 정예병을 총구 앞에 노출시키고 폭탄을 던져 넣게 하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
내가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빌렘은 그 일로 내가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헤이그에 머무는 동안 거의 하루걸러 한 번씩은 나를 총독관저로 불러냈다.
처음 초대받은 자리는 빌렘의 대가족이 모두 모인 자리였다. 대가족이라 해봐야 빌렘의 아내와 여동생 넷이 전부였지만 말이다. 그때는 세자와 대군 역시 동행해 꽤나 북적북적한 자리가 연출되곤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서로 결혼은 했으나 아직 자식이 없는 처지를 알게 되자, 빌렘은 개인 공간에 나를 부르기 시작했다. 부부 동반이라는 명목으로 요안이 녀석도 함께 초대를 받았다.
사실 정치인의 입장에서는 빌렘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외교관의 입장에서 빌렘은 그리 나쁘지 않은 파트너였다. 그는 오만한 만큼 솔직했고 감정을 숨기지 않아 상대하기 편했다.
“……그래서 결국 어릴 적 맺은 약속을 지키셨다? 참으로 로맨틱한 이야기가 아니오?”
“그, 그게…….”
“강인함을 숭상하고 레이디에게 친절하고…… 동쪽에도 그런 훌륭한 기사도가 존재할 줄은 몰랐습니다.”
이야기가 또 그렇게 되나? 여기 계신 진짜 잉글랜드의 공주님께서는 요안이가 들려준 이야기에 눈물까지 글썽거리셨다. 빌렘에게 시집온 찰스 1세의 장녀, 메리 공주 이야기다.
다만 문제인 것은, 빌렘이 나와 요안이를 너무 자주 불러댄 나머지 예의를 차릴 선물로 들고 갈 만한 것들이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도자기, 산수화, 나전칠기 같은 것들이 무한할 리가 없지 않은가.
“오, 이건 조선의 모자인가요? 장식을 조금 바꿔 보면 평소에 써도 되겠는데요?”
선물로 삼을 만한 것들이 떨어진 어느 하루는 초립(草笠)에 꿩깃을 달아 선물하기도 했다. 사절단과 동행한 장인이 만든 물건이었는데, 생각보다 공작부인의 반응이 괜찮았다. 요안의 아이디어였다.
요안이 녀석이 내게 자랑하려 입었던 드레스가 공작부인의 선물이라는 것도 그 자리에서 알았다. 그저 처음엔 조선에서 혼혈로 살아온 사연이 궁금해 불려갔을 뿐이라는데 어떻게 그런 관계가 된 것인지, 참.
어쨌건 처음에는 그저 립서비스일 줄만 알았는데, 공작부인의 반응은 진심인 모양이었다. 직후 열린 파티에서 공작부인이 장식을 바꿔 꽂은 초립을 자연스레 쓰고 나온 것을 보고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모자의 출처를 궁금해 하는 귀족 부인들이 많던데요? 제 재단사에게 초립 엮는 법을 알려주셔야겠어요. 호호.”
지금 한양에서 네덜란드 풍 음식이 유행하듯 헤이그에는 잠시 조선풍 모자가 유행하는 건가. 사절단의 목적이 양국의 우호 증진임을 생각하면 아주 긍정적인 신호였다.
한편, 일방적으로 우리 쪽만 선물을 준 것은 아니었다.
빌렘 역시 네덜란드의 복식이나 세계 각지에서 들어온 귀중품들을 선물로 내밀곤 했다. 헌데 어느 날 받은 선물 중 유독 특별한 것이 하나 있었다.
“초상화를 선물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까?”
“이미 내 아내가 덴 하흐에서 활동하는 도제에게 연습 삼아 부인의 초상화를 의뢰했는데, 꽤 결과물이 좋다는 보고를 받았다오. 부인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고.”
“그렇습니까. 요안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것 같군요. 감사합니다.”
“아내 말로는 도제치고는 꽤 솜씨가 좋은 데다 특이한 화풍을 가지고 있다고 했소. 보고 마음에 들면 이번에는 부부가 같이 그려진 초상을 선물할까 하오.”
“그래서 가장 좋은 옷을 입고 오라 하신 거군요. 제가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혹여나 도포자락에 발견하지 못한 얼룩이 있지는 않을까 재빨리 살펴봤지만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초상화 언급이 나오자마자 요안이 역시 머리칼에 단 화려한 머리장식들을 점검하느라 바빴다.
사실 초상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조금 기대가 되긴 했었다. 이 시기, 네덜란드의 황금기에는 전설적인 화가들이 유명한 초상화를 남기곤 했으니까.
예를 들면 렘브란트라든지.
하지만 초상화를 그려줄 화가가 도제라는 것을 보니 그런 거장의 작품으로 남겨지는 것은 너무 지나친 욕심인 모양이었다.
뭐,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함께 그려진다는 말에 얼굴이 꽃처럼 피어나기 시작한 요안이를 보면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그럼 대기 중인 화가를 들여보내라!”
문이 열리고, 액자를 옆구리에 낀 젊은 화가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동양인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 것이, 꽤나 호기심이 많아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델프트에서 온 요하네스 베르메르라 합니다. 동방에서 오신 고귀한 분들의 초상화를 감히 맡게 되었습니다. 제 미천한 솜씨를 선택해주신 것에 대해 감사를 올리겠습니다.”
베르메르?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화가의 이름을 듣고 무언가 머릿속에서 떠오를 것만 같았지만 뚜렷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술사 공부 좀 할걸.
“그럼 우선 전번에 의뢰하신 장관부인의 초상화부터 공개하겠습니다. 이것입니다.”
아, 그가 그린 초상화를 보자마자 나는 화가의 정체를 알아채 버리고 말았다. 액자 안에서는 어두운 배경을 뒤로하고, 드레스를 차려입은 요안이 몽환적인 표정을 지으며 캔버스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짝 벌어진 채 윤기 흐르게 그려진 도톰한 입술이 선명한 색채로 빛났다. 화려하게 표현된 빛은 요안의 머리에 스며든 비녀 끝에서 방울져 떨어졌다.
“이거, 제목을 내가 지어도 되겠소?”
숨을 삼키고 초상화를 감상하고 있던 도중, 침묵을 깬 사람이 있었다. 빌렘이었다.
“‘비취 헤어핀을 꽂은 소녀(het meisje met een jade haarspeld)’……. 그것 외에는 떠오르지 않소.”
“헤어핀이 아니라 비녀입니다. 오라녜 공 각하.”
내가 비틀어버린 역사에서는 베르메르의 ‘진주귀고리를 한 소녀’ 그림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내 반박에도 불구하고 그 오만한 빌렘이 아무 말이 없었을 정도로 그림의 분위기는 환상적이었다. 다시 자리는 그림을 감상하기 위한 침묵에 빠져들었다.
정신을 차려보았을 때는 시간이 꽤나 흐른 상태였다. 곁눈질로 옆을 보니 요안은 여전히 그림 속 자신의 모습에 넋을 잃고 있었다. 어느새 귀부터 시작된 열꽃이 얼굴 전체로 퍼진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가슴에 무언가가 차올랐다. 형용하기 어려운, 굉장히 묘한 감정이었다.
이 감정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 작가의 말
당대 유럽에는 이미 중국풍이 유행하는 현상인 시누아즈리(Chinoiserie)가 일어나 있었고, 곧 일본풍의 유행인 자포네스크(Japonesque)가 발흥하게 됩니다.
이번 화에선 조금 후대이긴 하나 20세기 초반에 무용가 최승희가 ‘초립동’이라는 극으로 세계 각지에 순회공연을 다닐 때 일어났던 해프닝을 각색해 보았습니다.
1939년 파리에서 공연을 마친 최승희는 제자인 김백봉에게 ‘파리 사람들은 이상하다. 내가 공연 때 쓴 초립동 모자를 너도 나도 쓰고 다닌다’고 회고하며 ‘초립동 모자’의 유행을 흥미로워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당시 유행했던 초립을 쓴 파리 여인들의 사진 역시 전해져 내려옵니다. 당시 파리에서 모자 디자이너로 활동하던 생 시르가 최승희의 공연을 보고 초립을 만들어 유행시킨 결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