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공작부인의 접견실
“발효시킨 찻잎 말씀이시군요. 조선에서는 찻물의 색에서 따와 홍차라 이름 지었습니다만.”
“저는 찻잎이 검으니 블랙 티, 아니 즈발트 테(Zwarte thee)라 부를 생각이었는데, 뭐 그건 상관없겠지요.”
공작부인의 가느다란 목으로 찻물이 꿀꺽 넘어갔다.
하긴 네덜란드에서 이걸 어떻게 부르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어차피 홍차처럼 유행이 시작되지 않은 사치품쯤은 동인도회사와의 협의 없이도 내 권한으로 독점 공급이 가능했다. 공작부인의 요구는 그저 애교로 넘길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것보다 지금은 공작부인의 속내가 궁금했다. 세자의 행방을 숨기는 것은 분명 가벼운 장난에 불과하겠지만, 그렇다고 아주 이유 없는 장난 또한 아닐 테니까.
앞에 앉은 사람은 사교를 전쟁에 비유한 사람이다.
“기문(祁門)과 정산소종(正山小種)이라……. 이렇게 복잡한 허브향과 과일향을 즐길 수 있는 음료는 내가 알기로 유럽에 없습니다.”
“…….”
“디저트와 잘 어울리는 것도 그렇고, 이건 분명 귀족부인들 사이에서 유행할 것이 분명해요. 내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공작부인의 추측은 옳았다. 생각해보면 원 역사에서 홍차가 유행한 것도 시집온 포르투갈 공주가 영국 궁정에 소개한 것이 시작이었으니까.
이거, 중전 마마 덕에 일이 편해진 건가.
조선 중기에 접어들어 거의 명맥이 끊어졌던 다도(茶道)를 궁중에 다시 들여놓은 것이 강 여사님이셨다. 달콤한 주전부리에 어울리는 음료를 찾다 남도의 사찰까지 사람을 보내신 것이긴 한데, 아무튼.
물론 중전이 즐기는 차는 전형적인 녹차였지만, 그것을 보고 유럽에 홍차를 팔 생각을 한 것도 사실이었다. 게다가 마침 남경 근방과 복건에서 괜찮은 홍차를 생산하기도 했고.
언젠가는 조선에서 나는 차로도 홍차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개척한 대만 땅에서도.
“선물이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홍차를 독점하고 싶으신 것이라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아직 유행 전의 물건이니 동인도회사에서 관심을 두지 않을 테니까요.”
“고맙습니다, 장관. 하지만 제가 원하는 것은 이 쌉쌀한 찻잎이 다가 아니랍니다.”
“찻잎이 끝이 아니라 하심은…….”
“레이디가 차를 우아하게 즐기려면 필요한 것이 많은 법이죠. 안 그렇습니까?”
공작부인은 홍차 향을 음미하며 찻잔을 쥔 손의 새끼손가락을 슬며시 펴들었다.
아, 그 말씀이셨구만.
“……도자기까지 함께 독점하고 싶으시단 말씀이십니까?”
“역시 외무장관은 눈치가 빠르시군요. 조선은 동인도회사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나라라 하더니, 그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아, 영국 공주님께서 도자기에서 돈 냄새를 맡으신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하는 물건을 마구 공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도 우리 나름의 사정이라는 것이 있으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도자기는 어렵습니다. 신용은 장사꾼 사이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서요.”
“알고 있습니다. 저도 동인도회사에서 독점해 취급중인 물건을 굳이 빼달라는 것은 아니니까요. 제가 원하는 것은 이 찻잔과 주전자처럼 차를 음미하기 위한 도구뿐이랍니다. ‘Dagu’라고 하셨던가요?”
“다구(茶具) 말씀이시군요. 이미 동인도회사에서 주문한대로 주전자와 찻잔을 공급하고 있는지라,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만.”
“알고 있습니다. 우리 공작 각하도 조선산 도자기에 커피를 끓여 드시지요. 허나 그 회사에서 취급하는 것은 철저히 이쪽에서 유행하는 취향의 물건이지요. 제가 원하는 것은 다른 형태의 물건이랍니다.”
공작부인의 손가락이 허공에 찻잔 모양을 그려냈다. 유럽에서 보통 쓰는 손잡이 달린 찻잔이 아닌, 처음 공작 부부를 사적으로 방문했을 때 홍차와 함께 준비해온 조선식 찻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홍차를 처음 선보인 자리에서 공작부인이 다구 세트를 탐냈던 기억이 났다. 세자의 개인 물품이라 선물할 수는 없었지만, 조만간 여벌 찻잔과 찻주전자를 선물할까 고심하던 참이긴 했다.
“동인도회사와의 계약이 문제라면, 그쪽에서 취급하는 물건과 다른 물건을 독점하겠다 하면 그들도 막을 명분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 말씀은……. 조선식 다구를 따로 공작 가문에서 사들이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유행을 선도하려면 철저해져야지요. 이국의 음료는 이국의 그릇에 담아야 더 맛이 사는 법 아니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세트 아이템에는 보통 추가 효과가 붙지 않던가. 찻잎을 팔려면 찻잔 세트도 함께 팔아야 효과가 더 좋겠지.
게다가 내 협조만 얻으면 오라녜 가문에서 차를 핑계로 대고 동인도회사의 도자기 지분을 조금이나마 슬쩍 빼앗아올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여러 모로 공작부인이 머리를 굴린 듯했다.
“그럴 듯한 제안이군요. 안 그래도 사절단의 다음 행선지는 암스테르담이 될 텐데, 동인도회사의 중진들을 만나면 이야기를 꺼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장관. 역시 부인의 부탁은 잘 들어주시는 모양이군요. 한결 마음이 놓입니다.”
엥, 갑자기 부인이요? 그거 요안이 얘기인가?
녀석은 내게 홍차와 초콜릿 이야기만 신나게 했었던 것 같은데. 공작부인이 홍차 수입 건으로 무언가 요청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언급조차 없었다.
도대체 저 얘기는 어떻게 나온 건지.
“부끄러우십니까? 부인에게서 다 들었습니다. 참으로 기사의 표본 같은 분이라고 하던데요.”
“그…… 리더(ridder, 기사)가 제가 아는 그 기사가 맞습니까? 부인의 고향말로 나이트?”
“예, 맞습니다. 부인을 네덜란드까지 데려온 것도 어린 시절 약속을 지키기 위함이었다고 저번에 함께한 자리에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게다가 부인이 궁정에서 맡은 일을 몰래 뒤에서 전부 살펴 주고 계셨다면서요? 어디 갈 때마다 선물도 빼놓지 않고 하신다니, 얼마나 로맨틱한 일입니까.”
요안이 갓 입궁했던 시절 시작했던 일이 습관처럼 계속 지속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긴 했다. 하지만 그건 그 천방지축이 중전 마마 상대로 무슨 일을 벌일까 걱정되어 한 일들인데…….
사고를 방지하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체크는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매주 중궁전에 심어둔 끄나풀에게 녀석의 일주일 치 행적을 보고받아왔다.
‘어머, 안 선비님, 아니 교리님? 갑자기 여긴 어인 일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녀석이 쓴 소설 덕분이기도 하고. 상궁과 궁녀들은 수결 한 장만 넘겨주면 온갖 부탁을 다 들어주었다.
게다가 나는 녀석의 선생임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 아닌가. 가끔 몇 번은 잘못한 일을 보고받고 요안이를 따끔하게 혼낸 적도 있었다.
근데 그게 남의 눈에는 그렇게 비춰진다고? 정말로?
“부럽습니다. 게다가 귀국의 왕비께서는 본격적으로 나랏일을 하고 계시고, 부인께서 그것을 돕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걸 장관이 남편으로서 도와주다니……. 사교 밖에 할 수 없는 저는 너무나 부러운 일이랍니다.”
“그…… 조금 과장이 섞여 전달된 모양인데 딱히 그렇게 칭찬받을 일은 아닙니다. 공작부인께만 말씀드리는 것이지만 네덜란드에 동행한 부인은 제가 가르치던 제자였어서요.”
“어머, 그것 역시 달달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어린 시절 이국적인 외모로 인한 괴롭힘으로부터 지켜주고, 굳게 맺은 약속을 이어간 후, 그녀의 꿈을 뒤에서 응원해주다가 사랑에 빠져 영원한 서약까지…….”
아니, 아무리 기사와 귀족부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로맨스의 본고장이어도 그렇지. 나와 요안이 이야기 맞아, 저거?
공작부인의 눈에는 핑크색 필터가 단단히 장착된 듯했다. 우리 중전마마는 관심도 없으시던 이야기인데 반응이 이런 것을 보면, 동서양 여사님들의 취향도 조금은 차이가 있는 걸까.
폭주하기 시작한 공작부인은 당장이라도 궁정시인을 불러 서사시라도 지으라 명할 기세였다. 이러면 차라리 요안이더러 소설을 쓰게 해 저작권료라도 챙기는 게 낫지 않을까?
“후후, 그 철인 같던 장관님의 약점이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군요. 농담이었습니다. 마음에 두지 마세요.”
“농담이시라니 다행입니다만…….”
과연 농담이 맞을까. 비슷한 사람을 조선에서 모셨던 내 경험상, 저건 일백 퍼센트 진담이었다.
어쨌건 공작부인의 뼈 있는 농담 덕인지 방금까지 팽팽했던 분위기가 조금 풀린 듯했다. 덕분에 협상은 물 흐르듯 진행될 수 있었다.
그렇게 처음 인도할 찻잎의 수량와 종류가 정해졌다. 도자기의 경우는 공작부인의 취향이 까다롭게 반영된 주문이 들어와 조금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공작가에서 쓸 다구에는 오라녜 가의 문장을 그려 드리고, 하사하거나 따로 판매할 다구에는 조선의 특산품임을 알리는 표식을 새겨달란 말씀이십니까?”
“종합하자면 그렇네요. 큰 문제는 없겠죠?”
“저희 도공들의 자기채색 기술도 꽤 일취월장한지라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다만 다구에 새길 조선의 상징을 무엇으로 삼느냐가 문제군요.”
“이미 동인도회사에서 판매하는 도자기 중 최고급품에는 조선 왕실에서 쓰는 도자기라는 표식이 새겨져 있다 들었습니다. 그것과는 다른, 새로운 브랜드가 필요합니다.”
이런 건 충신이나 중전마마와 상담해야 수월하게 풀릴 일이다. 일단 승낙은 했으나 조선으로 돌아가 해야 할 숙제가 하나 늘었다.
그렇게 주문을 마무리 지었다.
공작부인은 얻고자 한 것을 얻어내 그런지, 아니면 동방의 로맨스 때문인지 뿌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모름지기 상대방의 기분이 좋으면 조금 더 얻어낼 것이 있는 법이다. 한 번 질척거려볼 가치는 있었다.
“헌데 부인, 한 가지 유념해주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귀국 동인도회사와 맺은 약속은 함부로 저버릴 수 없는 것이라, 찻잎이면 몰라도 다구에 관한 건은 납품 보장을 해 드리기 어렵습니다.”
“그렇겠지요. 안 그래도 조선국 장관이 승낙할 수밖에 없는 특혜를 준비한 참입니다.”
“승낙할 수밖에 없는 특혜요?”
“지금은 역적 놈들의 손에 고향을 빼앗겼지만, 제 몸에는 잉글랜드의 스튜어트 왕가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혹여나 조선국이 잉글랜드와의 연결을 원한다면, 제가 도와드리지요.”
영국과의 끈이라, 양다리를 걸쳐서 나쁠 것은 없겠지만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작부인은 찰스 1세의 장녀지만 지금 영국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그녀 아비의 목을 날려버린 호국경 크롬웰이니까.
게다가 적어도 이번 세기에는 바다에서 네덜란드의 영향력이 영국에 뒤지지 않을 것이었다. 굳이 사업 파트너를 고르자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손을 잡는 것이 옳았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역시 힘들 것 같습니다.”
“역시, 거절하실 줄 알았습니다. 조선도 꽤나 신용을 중시하는 나라군요.”
“조선 속담에 어려운 시절에 술지게미까지 먹으며 함께 버텨온 아내는 홀대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동인도회사는 나름대로 어려운 시절부터 손을 잡고 함께 성장해온 상대입니다. 그러니…….”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럼 그 제안은 없는 것으로 하고, 다른 선물을 제시하지요.”
왜 요안이를 그리 챙기는 줄 알겠다며 쓸 데 없는 사족을 붙인 공작부인이 내게 윙크를 날려왔다. 이야기가 어떻게 또 그쪽으로 새는 건지.
헌데, 공작부인이 준비한 다른 선물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오라녜 가문에서 따로 준비할 수 있는 게 또 있었던가?
“그 선물이라 하심은?”
“오라녜 공작가와 조선 왕가의 굳건한 친선입니다. 어떠신지요.”
“친선이라, 그것은 이미 이번 사절단의 방문으로 성립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아직 시작에 불과한 관계인 것도 사실이지요. 그것을 더 단단하고 구체적으로 만들어드릴 만한 선물을 곧 마련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양국의 친선을 강화할 선물이라? 짐작이 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공작부인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벌컥.
공작부인의 방문이 갑작스레 열린 것은 그때였다. 방문 밖에는 내가 애타게 찾고 있던 사람이 서 있었다.
“세자 저하? 어딜 갔다 이제 오신 겁니까? 아니, 그리고 체통은 어디 두시고 귀부인의 방문을 이렇게……!”
“괜찮습니다. 조선국 왕세자님은 제가 초대한 손님이니까요. 그리고 급하게 돌아오셔야 했던 이유도 있고요.”
“헉…… 헉……. 스승님께서 저를 찾으신다는 소식을 듣고 산책을 나갔던 길에서 발길을 돌렸습니다. 말도 없이 자리를 비워서 송구합니다.”
“아니, 그래도 저하…….”
“저하께서 조금 기분이 가라앉은 것처럼 보이시기에 제가 추천한 산책로였답니다. 덴 하흐를 흐르는 운하를 바라보며 걷기 좋은 길이죠. 그래, 산책은 즐거우셨습니까?”
얼굴이 새빨개진 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게 혼날 것을 염려해 급하게 온 탓인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듯했다.
세자를 호위하는 겸사복이나 내시들이 잘 동행한 것을 보면 큰 문제는 아닐 텐데 굳이? 다음부터는 행선지를 주위에 제대로 알리라는 훈계 몇 번이면 충분할 일인데, 세자의 반응이 이상하게 과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공작부인은 계속해서 웃음기를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좋은 일이라도 있는 사람 같았다.
“부인, 무슨 즐거운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예. 제가 조선에 알맞은 선물을 준비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이제 차와 찻잔 공급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겠군요.”
뚱딴지같은 말이었지만 공작부인은 그 이상 상세히 대답하는 것을 거부했다.
세자에게 기분전환용 산책로를 알려준 것이 그 정도의 특혜였단 건가? 그게 일국의 세자를 불러낸 이유고?
더 캐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더 이상 이런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세자는 무사히 돌아온 데다 공작부인에게서 새로운 숙제가 주어지지 않았는가.
그날은 결국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공작부인의 방에서 물러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까지도 방 한 편에서 책에 정신이 팔려있던 만중이 녀석이 하루 종일 벌서를 썼어야함은 물론이다.
***
한편, 나는 또다시 역사에 죄를 짓고 말았다.
그날 공작부인에게 작별을 고하며 요안의 초콜릿 연구에 협조를 부탁했는데, 그 결과가 이렇게 흘러갈 줄을 내가 어떻게 예상했겠는가.
“맛있죠, 선생님?”
“이, 이거…….”
“코끝에선 화~, 입안에선 후~ 되게 잘 어울리지 않아요?”
공작부인이 영국 사람이라고 했을 때, 이 지옥을 예측했어야 했다.
어차피 카카오버터를 추출하는 공정은 어렵지 않았기에 판초콜릿이 금방 완성된 것까진 좋았다. 헌데 요안이 녀석이 싱글벙글하며 갖다 준 초콜릿을 입안에 넣는 순간, 웬 상큼한 향이 온몸에 퍼져나갔다.
왜 이 시대 초콜릿에서 이런 맛이…….
“설탕이 귀하던 시절에 카카오 음료를 먹을 때 쓰던 방법이래요! 쓰고 떫은맛을 가리는데 상쾌한 향이 꽤 효과가 있는 것 같아요!”
“으으…….”
“엘세라크 상관장이 문트라고 부르던 게 이거였어요! 선생님은 선비답게 솔 향을 좋아하시니, 이것도 마음에 드시죠?”
문트는 건강에 좋은 허브기도 하니 오랜 항해에 지친 내 몸에도 도움이 될 거라며, 요안은 환하게 웃음 지었다. 문트를 섞은 초콜릿 음료는 소화제 겸 입가심용으로 식후에 제공되던 음료였던 모양이다.
엘세라크가 솔잎감자소주를 호평했을 때 알아챘어야 했다. 유럽에서는 이미 문트, 아니 민트가 향신료 겸 약초로 널리 쓰이고 있었다는 걸.
“선생님, 표정이 왜 그러세요? 혹시 잘못 만들어진 걸 드렸나?”
“…….”
“이상하다? 맛있기만 한데? 요새 많이 피곤해서 그러시는 거예요?”
피곤한 게 아니다. 내 몸은 그걸 반쯤 맛보자마자 얼어붙은 상태다.
이게 왜 지금…….
하지만 내가 미처 삼키지 못한 악마를 빼와 제 입에 넣은 요안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녀석은 내 기분도 모르고 연신 입술을 오물거리며, 공작부인도 결과물을 꽤나 마음에 들어 했다고 희희낙락한 표정을 지어댔다.
이 녀석을 네덜란드에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다. 첫 단추를 잘못 꿰었으니, 잘못했다간 모든 초콜릿이 이 악마의 맛으로 뒤덮일 지도 몰랐다.
역사를 비틀어 버린 대가가 이렇게 치러지는가.
세상만사는 등가교환이라더니, 악마는 결국 세상에 몇백 년 일찍 강림해버리고 말았다.
***
그렇게 민트초코라는 악마의 탄생과 함께 헤이그에서의 외교는 슬슬 마무리가 되어갔다.
원래 이곳에서는 의회와 오라녜 공의 입회 아래 외교 관계를 정식으로 수립하고, 군사적 교류 정도나 행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끼어든 공작부인 덕분에 홍차 무역 건이 내 골치를 추가로 썩게 만드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홍차는 분명 사교의 수단으로 그칠 물건이 아니었다. 이걸 위해서 오라녜 공 부부가 나와 요안을 그리 환대한 건가.
원 역사에서는 홍차 때문에 미국과 중국에서 전쟁이 두 번이나 벌어졌었다. 이번 생에서는 볼 일이 없는 일이겠지만, 훗날 일어날 중대한 사건에 조선이 끼게 될지도.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먼 이야기다.’
그런 고민을 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이제 다음 목적지인 암스테르담으로 이동해 공화파와 동인도회사 측 사람들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한다. 그 이전에는 라위터르가 소개해준 친구, 요한 더 비트와 만나 암스테르담에서의 일정을 조율해야 했고.
비트와 만난 자리에서 홍차와 다구 세트 이야기도 일차로 꺼내보면 되려나.
공화파가 서신으로 요청한 것에 대한 고민에, 공작부인의 부탁까지 더해져 한창 머리가 복잡했다. 거기에 라위터르 이 인간은 왜 고향에 가서 편지 한 장이 없는 건지.
그때였다. 귓가에 들릴 듯 말 듯한 노크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소리 없이 천천히, 내 방으로 통하는 문이 열렸다.
“조선국 외무장관님, 오라녜 공작 각하께서 보내셔서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