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오라녜 공의 속내
오라녜 공이 날 찾는다고? 이 시간에?
지금은 거의 한밤중, 조선이었으면 이미 잠들었을 시간이다. 앞으로의 계획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빌렘은 어찌 알아챘을까.
이제는 하도 접해 익숙해진 빌렘의 집사장은 내 반응을 보고도 낯빛 한 점이 흐려지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일까.
“오늘 저녁에도 공작 각하와 접견을 하지 않았나? 그때 미처 하지 못한 말씀이라도 있으셨더냐?”
“저는 명령받은 대로 임무를 수행할 뿐입니다. 각하께서 장관님을 찾으십니다.”
처음 보는 태도였다.
오늘 저녁 빌렘이 극찬한 민트초코 때문이라기에는 집사장이 품은 분위기가 지나치게 무거웠다.
“……혹시 오라녜 공께서 나를 은밀하게 만나고 싶다 하셨나.”
“예. 역시 장관님은 각하의 의도를 알아채실 것 같았습니다.”
집사장의 목소리가 더 낮고 조용하게 변한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정작 나는 빌렘의 의도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그저 평범하고 사소한 친선 목적의 교분만 조용히 쌓아왔을 뿐인데.
아, 설마.
집사장의 뒤를 따라 어둡고 긴 복도를 걷는 동안, 헤이그에 와서 겪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기사회관에서 열린 환영식 자리에서 본, 오만한 빌렘의 첫인상.
가족까지 대동한 자리었음에도 군사 이야기만 나오면 열이 들뜨던 모습.
그리고 나와 호포대의 전술시범을 보자마자 갑자기 오라녜 공 측에서 사적 접촉을 늘려오기도 했다.
외교관 입장에서 빌렘이 나쁘지 않은 파트너라는 판단은 틀렸을지도.
본의를 숨기지 않는 애송이라고 성급한 판단을 내린 것은 명확한 내 실책이었다.
그 자리에서 오만했던 사람은 빌렘뿐이 아니었다.
***
“아직까지 잠들지 못하신 것을 보니, 장관도 고민이 깊었던 모양이오?”
방 안은 고요했다.
빌렘의 옆에 위치한 벽난로에서 잘 마른 장작이 타닥거리는 소리만이 이따금씩 빌렘의 집무실을 울릴 뿐이었다.
“본국의 주상 전하로부터 무거운 임무를 받아온 몸입니다. 어찌 하루라도 헛되이 보낼 수 있겠습니까.”
“하, 그렇다기에는 당신 부인의 소꿉놀이까지 신경을 쓰지 않았소. 거기에 메리의 사소한 부탁까지 들어주었다지? 내 생각엔 장관은 아직 여유가 있어 보이오만.”
빌렘의 목소리는 저녁에 들은 목소리 그대로였다. 공작부인이 권한 민트초코와 홍차를 맛보며 들려주었던 유들유들한 목소리 말이다.
하지만 벽난로의 흔들거리는 불빛이 비추는 그의 얼굴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빌렘이 손에 쥐고 있는 도자기 잔만큼이나 그의 얼굴은 딱딱하기 이를 데가 없어 보였다.
빌렘이 손짓을 보내자, 내 손에는 어느새 같은 잔 하나가 쥐어졌다. 그리고 벽난로 위에서 끓고 있던 음료가 복잡한 향을 피워내며 곧이어 내 잔을 가득 채웠다. 집사장의 솜씨가 꽤나 그럴 듯했다.
“오토만(오스만) 놈들이 쥐고 내놓지 않던 커피가 우리 손아귀에 들어온 것도 30년이 넘었군. 장관 입에는 좀 맞으시오?”
“입 안을 덮치는 쓴 맛 뒤에 깊고 풍부한 향미가 숨어있군요. 공께서 이 음료를 즐기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커피를 이 땅에서 처음 맛보았을 사람이 대답은 그럴듯하구려? 마치 예전부터 커피를 즐기던 사람의 감상을 듣는 것 같소.”
잘도 알아챘군. 현대에서 매일 입에 달고 살던 그 맛을 어떻게 잊었겠는가.
물론 그 때 마시던 아메리카노에 비하면 진하디 진한 에스프레소에 가까운 물건이었지만.
“늦은 밤까지 고생하는 제게 커피라도 내려주시며 격려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까? 듣자하니 이 음료는 정신을 맑게 하는 효능이 있다던데, 고국으로 돌아가면 입번을 서는 관료들에게 하사하면 좋겠군요.”
“하, 여기까지 와서도 나랏일 생각이오? 하지만 나는 그런 장관이 싫지 않소. 그런 사람임을 알기에 이 자리에 부른 것이기도 하고.”
빌렘은 잔에 남긴 커피를 모조리 목구멍으로 넘기더니 나를 향해 강렬한 눈빛을 쏘아댔다. 오늘 이 자리에서 나눌 이야기는 에스프레소처럼 쓰고 묵직한 이야기임이 분명했다.
“마시면서 들으시오. 나는 이 커피라는 음료를 내 아내만큼 사랑하지만, 빌어먹을 사탄만큼이나 증오하기도 하오. 그 이유를 알고 있소?”
“사탄이오? 설마 커피의 색이 짙은 검정이어서 그러신 것은 아닐 테지요.”
“장관은 그런 시답잖은 농담도 던지는 사람이었소? 이거 실망인데.”
잠시 굳었던 얼굴 표정을 풀고 킬킬거린 빌렘은 커피잔을 내려놓고 말을 이었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커피가 유독 쓰게 느껴졌다.
“이 커피는 선대 교황 성하께서 신의 음료라 축복하신 물건이지. 장관도 알고 있소?”
“그렇다 들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이단의 음료, 악마의 음료라 불렸다지요.”
“하, 도대체 장관은 모르는 것이 무엇이오? 허나 그 축복을 경건히 내려 받아도 모자랄 판에, 불온한 놈들이 이 신성한 음료를 매개로 음모를 키우고 날조된 소문을 퍼뜨리고 있소.”
“……혹시 암스테르담 시내에 유행한다던 커피하우스 이야기입니까.”
“바로 그거요, 장관. 그것이 내가 커피를 사탄처럼 증오하게 된 이유요.”
빌렘은 탁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커피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이 커피잔이 왕실 도자기가 아니었다면 깨졌을 지도 모르겠군.
어느새 소리 없이 나타난 집사장은 잔을 거둬 어딘가로 사라졌다.
“장관도 여기까지 오는 길에 해군 함대에 달린 삼색기를 봤을 거요. 어떤 깃발이 달려 있었소?”
“빨강, 하양, 파랑의 삼색기였습니다. 깃발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본래 우리 네덜란드를 상징하는 깃발은 그것이 아니오. 놈들은 그 붉은색이 용기를 상징한다며 헛소리를 하고 있지만 본래 그 자리에 들어갈 색은 따로 있소.”
공작은 코 밑에 불쾌한 것이 달려 있다는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네덜란드 국기가 현대에서 보던 국기 그대로였기에 시초부터 원형을 유지했나 싶었는데, 빌렘의 말을 들어보니 아닌 모양이다.
“따로 있다니요?”
“원래 네덜란드의 정통 삼색기는 주황, 하양, 파랑으로 이루어진 삼색기요. 하양은 우리가 수호하는 신앙, 파랑은 국가에 바치는 충성을 상징하지.”
“그럼 주황색은…….”
“그렇소. 오라녜(orange). 바로 나와 내 가문을 가리키는 것이오. 대대로 네덜란드의 독립에 헌신한, 우리 오라녜 가문이 마땅히 받아야 할 권리란 말이오.”
굉장히 오만한 태도였다.
빌렘은 마치 네덜란드라는 나라가 자신의 소유물이라는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나는 구국의 영웅이자 네덜란드 공화국의 위대한 총독이셨던 할아버님의 정통 후계자요. 그분의 이름과 스타드하우더 자리까지 적법하게 물려받았지. 그건 장관도 잘 알고 있을 게요.”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세우신 업적은 먼 나라 사람인 저 또한 존경스럽게 느낄 정도니까요.”
“좋아, 좋아. 장관 같은 이국인도 알 정도니, 이것은 보편 타당한 진리라 봐도 되겠지. 헌데 네덜란드인 주제에 내게 마땅히 향해야 할 존경과 복종, 그것을 바치지 않는 자들이 수두룩하단 말이오. 무슨 말인지 알고 있소?”
“혹시 커피하우스 이야기를 하신 이유가…….”
“바로 그렇소. 스스로를 지식인이라 칭하는 무엄한 놈들이 그 커피하우스에 모여 나와 내 군사정책을 비난하고 있지. 그걸 단속해야할 의회는 오히려 손을 놓고 부추기고 있는 것이 이 나라의 현실이란 말이오.”
글쎄, 그것은 당신이 아직 그만한 정치력을 보이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정치는 곧 논의와 타협을 통한 줄다리기의 연장이다. 당신 부친 대에는 그러지 않던 사람들이 지금 이렇게 나오는 이유는 따로 있을 터.
하지만 그것을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빌렘은 위대한 선대 총독들의 업적 때문에 콤플렉스에 찌들어있는 사람이다. 이런 이야기를 해 봐야 씨도 안 먹힐 것이 뻔했다.
빌렘이 오늘 이 자리에 나를 부른 이유는 이런 뒷담화를 하기 위해서였나. 점점 지금의 대화가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던 때였다.
“……그럼 역시 답은 하나뿐이지 않겠소?”
“답이라니요?”
“우리 네덜란드 격언 중에 이런 말이 있소. 머리에 무언가가 들어가면, 엉덩이가 붙어 있으면 안 된다.”
“계획을 세웠으면 빠르게 실천하라. 제가 아는 병법에도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역시, 당신은 내가 생각하던 인물상이 맞구려. 자연스럽게 내 말에서 병법을 떠올리다니.”
나는 그저 라위터르와 가고시마 앞바다에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을 뿐이었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빌렘은 다른 생각을 품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대화를 이쪽으로 몰아가고 싶은 것일지도.
벽난로의 불빛이 빌렘의 얼굴에 일렁였다. 그의 표정은 어느새 닿으면 얼어붙을 듯이 차가워져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뒤통수를 스쳐갔다.
“설마 그 계획이라는 것이…….”
“놈들은 이미 작년에 내 군대를 삼분의 이로 줄이려 시도했소. 그리고 곧 일부만 남기고 해산하려 들겠지. 아마 얼마 안 있어 놈들은 군대의 봉급을 지불하지 않겠다 버티기 시작할 것이오.”
“‘놈들’이라는 건 공화국 의회를 가리키는 말입니까.”
“놈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소. 아직도 플란데런과 왈롱을 비롯한 남부 네덜란드는 스파니예(스페인) 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소. 그런데도 반쪽짜리 독립에 만족하고 군대를 줄인다? 하!”
“…….”
“엥겔란드 놈들은 또 어떻소? 내 장인의 목을 친 놈들이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것도 모자라, 겉으로는 우리와 친교를 맺고 있음에도 언제든지 송곳니를 드러낼 준비를 하고 있지. 당신도 이곳까지 오는 길에 목격했을 텐데?”
그동안 쌓인 것이 많았는지, 빌렘은 내 앞에서 주저리주저리 많은 말들을 풀어놓고 있었다. 그가 이토록 의회에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게 빌렘은 침까지 튀겨가며 한참 동안 불만을 토로해댔다. 그걸 경청하며 공작의 적의에 휩쓸려가기 일보 직전, 갑자기 들려온 낯선 단어가 내 정신을 바짝 들게 했다.
“……마침 달과 화성, 토성의 위치가 절묘하오. 이것은 성공을 가리키는 징조지.”
점성술인가? 그럼 성공이란 단어가 가리키는 주체는 설마…….
“그럼 공작 각하, 당신은 지금…….”
“스태츠그립(Staatsgreep). 장관은 우리말에 능통하니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지.”
“나라를 움켜쥔다……. 공작 각하, 너무 성급하신 판단입니다.”
“내 일에 대한 판단은 내가 내리오. 장관은 조선 사절단에 관한 판단만 내리면 되는 것이오.”
쿠데타, 혹은 반정.
빌렘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단호하고 묵직했다. 내가 그에게 받은 첫인상은 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충격을 받은 사이 빌렘은 설명을 이어나갔다. 그의 직속 병사와 그를 지지하는 흐로닝언, 드렌테 두 주의 병사를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킬 계획이라고 했다.
“……총통위라 했던가? 나는 귀국의 정예병을 높이 평가하오. 대다수 머스킷티어보다 훨씬 나음은 물론이고 내 정예 척탄병에도 비길 정도의 전투력이오.”
“그 말씀은 감사하오나, 그토록 높은 평가를 내리시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요.”
“눈치가 빠르시군. 나는 당신의 군대가 내 작전을 돕길 바라오. 그리고 물론 그들의 지휘관인 당신 역시.”
빌렘이 자신의 손을 나를 향해 치켜 올렸다. 그 직후 야망에 가득 찬 공작의 입에서 나온 정보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보고를 받았소. 조선에서 당신은 고작 700명의 특공대를 가지고 정권을 뒤엎었다지. 그 힘을 나를 위해 써줄 수 있겠소?”
“……어디서 입수하신 정보입니까.”
“글쎄. 동인도회사의 하수인들만 조선에서 정보를 물어간 것이 아니라는 정도로만 답하겠소. 당신이 그걸 안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지만.”
내게 날아오는 눈빛은 날카로웠다.
어째서 네덜란드에서 보낸 국서에서 나를 콕 집어 사절단으로 요구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빌렘이 훈련장에서 나를 도발한 이유 역시.
동맹국의 고귀한 혈통에서 명분을 찾고, 이름난 정예인 총통위와 내게서 실리를 찾겠다?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저는 귀국과 친선을 위해 이 나라에 온 것이지, 귀국의 내정에 간섭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
“제가 데려온 총통위 병사들은 제 사병(私兵)이 아닙니다. 주상 전하께서 제게 맡기신 병력입니다. 어찌 그것을 제 판단 아래 사사로이 쓰겠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빌렘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의 눈빛에 아쉬움이 살짝 스쳐지나간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럼 내 제안을 거절하시겠다?”
“그렇습니다.”
“놈들의 심장부를 점령하면 내가 조선에 제공할 특혜는 더욱 많아질 텐데? 메리의 제안을 그토록 빨리 대처한 것을 보면 이익 정도는 쉽게 계산할 수 있을 테지.”
“그것은 제가 판단할 영역이 아닌 듯합니다. 저는 조선국왕 전하의 대리자로서 앞으로 예정된 일정을 수행하겠습니다. 협조에 응하지 못해 송구합니다.”
빌렘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였지만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대답은 단호했다.
타국의 쿠데타에 동참하라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더구나 빌렘은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파의 중심지인 암스테르담을 공격할 계획일 것이다. 그 암스테르담은 동인도회사의 본부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결국 빌렘에게 가담한다는 것은 그동안 협력해온 동인도회사의 뒤통수를 치라는 이야기와도 같았다.
“저희 사절단은 예정되었던 일정대로 암스테르담에 들렀다 다시 덴 하흐로 돌아와 조선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것이 제가 본국의 전하께 명령받은 것이니까요.”
“정말로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오? 당신이 암스테르담 내부에서 내 병력에 호응만 해 준다면 일은 정말 쉽게 끝날 것이오. 장관도 훌륭한 전략가니 그 정도는 알지 않소?”
“할 수 없습니다. 대신 이번 일은 입 밖으로 내지 않겠다고 약속을 드리지요.”
“조선 측은 중립을 지키시겠다……? 하긴, 당신이 그리 순순히 내 제안에 응하리라 생각하지는 않았지.”
고민이 깊어졌는지, 빌렘은 잠시 깍지를 낀 채 눈을 감고 생각에 빠졌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흑갈색 눈동자는 번쩍 뜨여 나를 향했다.
“침묵을 지키겠다는 약속만으로는 부족하오. 의회 놈들이 당신 말을 쉽게 믿지도 않을 테고, 당신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사람 같지도 않지만…… 만약은 늘 생각해야 하는 법이지.”
“그 말씀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시오. 암스테르담에 가지 않든지, 이곳에 인질을 남겨 놓고 다녀오든지.”
귓가를 때리는 목소리는 차가웠다. ‘메리’와 ‘헨리에트’가 조선 사절단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면 이런 자비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었다며, 빌렘이 이죽거렸다.
방금 제안은 일단 한 번 찔러본 거고, 그쯤은 되어야 내 입을 막을 수 있다 생각하는 건가.
내가 공작가와 친선을 쌓으며 조선의 이득을 계산하고 있을 때, 빌렘 역시 반대로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진즉 깨달았어야 했다.
빌렘과 함께한 식사 자리, 그가 선물한 선의의 그림 한 점이 점점 나를 수렁으로 이끌고 있었다.
이거 참. 공작부인은 나랏일을 맡지 못한다며 투덜댔지만, 이제 보니 부부끼리 완전히 닮아 있지 않은가. 슬며시 소리 없이 목표에 접근해온 부부의 모습은 마치 뱀의 움직임을 연상케 했다.
“아무나 인질로 받지도 않을 것이오. 암스테르담에 다녀오려거든 고귀한 핏줄 두 명 중 한 사람을 남겨 놓고 가시오.”
“……참으로 어려운 요구를 하시는군요.”
“당신이 딴생각만 먹지 않는다면 어렵지 않은 요구지. 나 오라녜 공작 빌렘은 왕세자, 아니면 왕제. 둘 중 한 명을 인질로 요구하는 바요.”
슬기롭게 처신해야 한다. 그가 송곳니를 드러낸 지금, 첫인상부터 밀리면 계속해서 끌려 다닐 뿐이다.
나는 천천히 미소 지으며, 생각해보겠다는 말 한 마디를 남기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빌렘은 나를 붙잡으려 하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오는 내 뒤통수에 그의 호탕한 웃음소리만이 날아와 달라붙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