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암스테르담으로
“물론 이 질문은 공화국 의회와 동인도회사의 공식적인 입장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오게 된 것이기도 합니다.”
확실히 공화파 쪽에서도 오라녜 공 빌렘에게 주의를 쏟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헤이그에 머무는 동안 빌렘과 여러 차례 접촉한 사실을 알아채긴 어려운 일이 아니었겠지.
그래서 공식적인 접촉 대신 요한 더 비트를 대리인으로 보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비트는 공식적인 직함을 아직 달기 전이니 위험부담이 적다 이건가.
하긴 빌렘이 훈련장에서 대놓고 신무기와 전술에 침을 질질 흘려댔으니, 그 소식을 전해들은 공화파의 경계가 올라가도 이상하지 않다.
내가 그들의 입장이었어도 똑같이 처신했을 것이다.
“실례가 되었다면 죄송합니다, 장관님. 하지만…… 장관께서도 대강 눈치는 채셨겠지요?”
“이해합니다. 저도 정치에 꽤 오래 몸을 담근 몸, 그 정도 눈치는 있습니다. 따로 이 나라의 상황에 대해 정보를 입수했던 것도 있고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마 미힐에게 이야기를 들으신 모양이군요. 그 친구 말이 틀리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저희 의회는 조선을 적대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라는 점을…….”
내게 고개를 까딱여 감사를 표한 비트가 쓸 데 없는 이야기를 연달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 인간, 은근히 쓸 데 없는 말이 많았다.
이러다 귀에서 피가 흐르겠군, 투 머치 토커 같으니라고.
사실 멀리서 온 손님들에게 무례한 질문부터 던졌으니 비트의 변명이 길어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이 변명은 그런 것 치고는 지나치게 길었다.
아마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그의 변명은 또 다른 목적을 품고 있을지도.
“그…… 장관님? 관용을 즉각 베풀어주신 것은 감사하기 이를 데 없지만, 저는 부여받은 임무를 완수해야 합니다. 그럼 이제 대답을 해 주시겠습니까?”
“암스테르담에 방문하는 목적이라……. 당연히 양국의 친선 증진과 이익 증대가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어린아이도 할 만한 대답을 원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정확하십니다, 장관님. 사실 높으신 분들의 의심을 풀어주실 만한 무언가가 필요해서 제가 이 자리에 온 것이기도 합니다. 부디 묘안을 내 주셨으면 합니다.”
결국 그건가. 빌렘의 편을 들어 공화파를 적대하지 않겠다는 것을 증명하라?
사실 그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빌렘에게 군사적, 사교적 선물을 던져주었듯이 의회와 동인도회사에도 동급의 이익을 던져주면 된다.
나를 이롭게 하는 자는 적이 아닌 법이니까.
“결국 간단히 말하자면 총독인 오라녜 공에게 이득을 주었듯이 의회와 동인도회사에도 비슷한 것을 달라는 말씀이시군요. 맞습니까?”
“조선 측에 정확히 그것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게 가장 쉽고 빠른 방법임은 부정할 수 없겠습니다. 사실 그 먼 길을 오면서 저희를 위해 준비하신 것이 없을 것 같지도 않고요.”
요한 더 비트의 말이 틀리지 않다. 사실 빌렘에게 준 것들은 임기응변으로 나온 선물이었으니까.
동인도회사에 진 신세를 갚고 친선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선물은 조선에서부터 확실히 미리 준비해왔다.
“당신 말이 맞습니다, 비트 씨. 조선은 당신들을 위해 두 가지 선물을 준비했거든요.”
“두 가지 씩이나요?”
“식량난과 괴혈병. 당신들이 맞닥뜨린 커다란 문제 두 가지를 해결해드리겠습니다. 이 정도면 신뢰를 다질 선물로 충분하겠습니까?”
어차피 당분간은 이 나라와 함께 성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이쪽 정치와 관련 없는 역사는 네덜란드에 유리하게 뒤바꿀 것을 각오하고 배에 오른 터였다.
내가 준비한 답은 정답인 모양이었다.
잠시 얼빠진 표정을 짓던 비트가 온갖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으나 그 질문에 바로 대답해줄 생각은 없었다.
***
“회신이 왔습니다. 암스테르담 시장을 비롯한 의원들과 동인도회사의 중역들은 조선 사절단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얼마 전에는 무례를 저질러 송구했다며, 요한 더 비트는 머리부터 깊이 숙이고 들어왔다. 이번에는 자리에 동석한 라위터르가 그 모습을 보고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감사합니다. 역시 동인도회사에 대한 신용을 지킨 것이 컸던 모양이군요.”
“그것도 그것이지만 아무래도 장관께서 주시기로 약속한 ‘선물’이 꽤나 효과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지켜주신 신용의 가치가 낮았다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요.”
임금이 동인도회사에 큰 금액을 투자한 일도 그렇고, 이번에 공작부인이 도자기를 요청했던 일을 미리 동인도회사측과 협의한 일 역시 그들에게 꽤 호감을 산 모양이었다.
지금의 네덜란드는 신용에 뿌리를 두고 태어난 나라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라를 떠받치고 있는 세력은 상인과 금융업자들이고, 공화국의 중심인 홀란드 주 역시 상업이 근본이다.
이들은 독립전쟁 중에도 조건만 된다면 적국인 스페인에 전쟁자금 대출을 해 줄 정도로 신용을 중요시했다. 전쟁 중인 적국에도 신용을 지킨다는 소문에, 온 유럽의 돈이 암스테르담의 은행으로 몰려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임금과 함께 대(對) 네덜란드 정책을 설계할 때도 철저히 신용을 지켜야 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했던 터다. 그 결과가 지금 눈앞에서 열매를 맺고 있었다.
“그나저나 그 ‘선물’은 아무래도 암스테르담에 도착해서 전해주시는 겁니까? 의장께서 하루빨리 방문 일정을 확정해 알려달라며 안달이 나신지라…….”
거기에 네덜란드가 황금기를 맞이하며 모자라기 시작한 식량 문제에, 선원들의 가장 큰 적인 괴혈병까지 해결해 주겠다 나선 상황이다.
이 정도 선물이 통하지 않을 리가 없다.
하도 닦달을 해대기에 그 대신 배에 실려 있던 도자기 상당수를 먼저 암스테르담으로 보냈는데도 반응이 이런 것을 보니 확실하다
“예. 중간에 들러야 할 곳도 있고, 이동로도 정해야 하니 금방 이동할 수는 없겠군요. 몸이 좋지 않아 여기 덴 하흐에 남는 인원도 있고 말이죠.”
“원하신다면 암스테르담에서 마차를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아니면 타고 오신 배로 이동하셔도 상관은 없습니다.”
“암스테르담에 가기 전 확보해야 하는 물건이 있는지라 마차를 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일단 그 물건을 수소문하는 것부터 도와주셔야겠지만요.”
미리 준비해온 리스트 하나를 비트에게 밀어놓았다. 영문도 모르고 내가 건넨 문서를 읽던 그의 얼굴에는 의문이 점점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거, 제가 알고 있는 것이 맞다면 이 근방에서는 레이던(Leiden) 시의 식물원에서만 구할 수 있는 작물로 알고 있습니다만……. 이게 정말로 그 해답입니까?”
“네, 맞습니다. 여기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길에 위치해 들르기는 좋은 곳입니다. 허나 과연 이것이 해답이 될 수 있을지…….”
해답 이야기를 듣자마자 요한 더 비트는 난색을 표했다.
이 작물은 네덜란드에서 일반적으로 식용으로 여겨지지 않는다고 했다. 홀란드 주의 동쪽, 프리슬란드의 촌놈들이 가축 사료를 뺏어 먹는다고 비웃는 이야기가 농담으로 통용될 정도였다.
알고 있다. 조선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그때도 해답을 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이번은 조선에서와 달리 시민들에게 내 명성 또한 통하지 않는 상황이다.
‘그래도 방법은 있다.’
네덜란드인들의 입맛이 그들의 후손과 다르지 않다면 백 퍼센트 먹힐 것이다. 이미 나는 맛있는 음식은 시대를 초월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겪었으니까.
***
일주일 후, 조선 사절단을 태운 마차 여러 대가 헤이그에서 암스테르담으로 향했다. 한양에서 제물포까지 거리보다 조금 더 먼 거리에 불과해, 생각보다 여정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저하께서 괜찮으실지 모르겠습니다. 건강을 핑계대고 일정을 미루자고 하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신데……. 서연조차 툴툴거리실지언정 미루지는 않으셨던 분입니다.”
“그러게 말이오. 나처럼 정리해야 할 세월이 앞에 있는 것도 아니실 테고. 덴 하흐에 더 머물고 싶으셨을지도.”
마차를 함께 타고 있던 박연이 뼈 있는 농담을 던져왔다. 세자는 지금 앞을 달리는 다른 마차에 심복들과 함께 타고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만중이 녀석도 공작 저택의 책을 더 읽고 싶다는 둥 헛소리를 했었다. 암스테르담에 가면 더한 볼거리가 많다는 말에 마음을 돌렸었는데, 세자도 비슷한 걸까.
그 와중에 박연의 표정이 굳어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럴 만도 했다.
고향 방문 자체가 그에게는 무겁게 여겨져도 이상하지 않다. 게다가 그것을 위해 대군의 역관 임무마저 잠시 맡겨놓고 온 상황이다.
피터르라는 선원에게 인수인계를 했다고 했었나. 그의 네덜란드어 실력은 몰라도 역관 치고는 조선어가 서툰 편이라며 박연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고향에 다녀오는 일은 결코 나쁘지 않을 것이오, 판관. 고향이 알크마르 근방이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통제사 영감. 허나 저는…….”
“알고 있소. 정리할 것이 나보다 복잡하고 많을 테지. 그래도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지 않소. 나 역시 그 생각 탓에 발걸음이 무거웠다오.”
라위터르가 박연의 심정에 공감하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이미 고향에 남겨둔 것을 정리하고 온 사람이니까. 박연 역시 라위터르가 그랬듯 과거의 인연을 정리하러 고향에 방문할 예정이었다.
아마 고향에 요안을 데리고 가지 않고 혼자 가기로 한 것은, 고향에 두고 온 전처와 아이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딸 앞에서 그들과의 인연을 정리하기는 어려웠겠지.
“하지만 통제사 영감, 고향에 다녀오시고도 왜 이리 표정이 좋지 않으신 것입니까. 중간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통제사께서 이러시니 저도 고향에 방문하는 것이 겁이 납니다.”
“별 일은 없었소. 다만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은 다른 문제요. 판관은 고민 말고 여기서의 인연을 잘 정리하길 바라오.”
나는 헤이그를 떠나기 전 요한 더 비트를 통해 라위터르의 생각이 복잡할 만한 이유를 전해 들었다. 그가 다녀온 플리싱언에서 얼마 전 시위가 벌어졌다는 정보였다.
‘엥겔란드 해군에 나포된 선원들의 가족이 시청으로 몰려가 항의를 벌였다고요?’
‘예. 미힐의 고향, 제일란트 주는 단거리 무역과 청어 어업으로 먹고 사는 동네여서요. 장거리 무역을 전문으로 하는 암스테르담보다 나포 피해가 심각한 편이라고 합니다.’
라위터르의 눈썹 사이 주름살이 한결 짙어진 이유가 있었다. 거기에 고향에서 돌아와 보니 단결해도 모자랄 나라는 안에서 두 쪽이 나 있었으니, 그의 고민이 깊을 수밖에.
“자, 자! 분위기가 너무 처졌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앞으로 보실 암스테르담은 엄청난 곳입니다. 그곳을 보고 조선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진다고 해도 저는 이해할 겁니다.”
“무리하지 말게, 요한.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돼.”
“하지만 미힐, 우리 공화국의 심장부는 엄청난 곳이라는 것을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이런 분위기와 암스테르담 방문은 어울리지 않아.”
무거워진 분위기를 끌어올리려 애를 쓰는 사람이 있었다. 마차에 함께 타고 있던 요한 더 비트였다. 말이 많은 것은 사석에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아니면 미힐, 평소에 앓고 있던 병이라도 도진 겐가? 자네가 복용하던 약, 마침 내가 갖고 있네.”
“그 문제가 아니야, 요한. 그런 간단한 병이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지.”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마차를 채우기 시작하자 그나마 자리의 분위기가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어두웠던 라위터르의 표정이 조금이나마 밝아진 것이 다행이었다.
헌데 지병이라니? 라위터르가 앓는 병이 있다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병이라니요? 통제사가 앓고 있는 병이 있었습니까?”
“으음……. 병이라기보다는 신경증에 가깝긴 합니다만, 꽤나 부끄러운 증상이거든요.”
“요한, 자네가 생각하는 그것이 아니니 쓸 데 없이 입 열지 말게.”
“그래도 한 번 약을 먹는 게 어떻겠나? 내가 생각한 그 문제일 수도 있지 않은가.”
다행히 둘 사이에 오가는 말에 농담기가 가득한 것을 보니 라위터르의 병은 그리 심각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헌데 무언가 신경 쓰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비트가 라위터르를 놀리려는 듯이 주머니에서 꺼낸 물건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이 어딘가 낯이 익었기 때문이었다. 반투명한 흰색 덩어리, 분명 어디선가 다뤄 본 물건이었다.
“비트 씨, 이건 뭡니까?”
“아, 저 친구는 긴장만 하면 변을 못 보는 성격이라 이게 필요할 겁니다. 물과 함께 넘기기만 하면 속에 있는 것들을 전부 비워주는 명약입니다.”
“요한! 쓸 데 없는 소리는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암스테르담에서 몇 년 전 개발된 신약입니다. ‘글라우버의 소금’이라고 하는데, 거기에 이름을 붙인 약사가 제조법과 약효를 발견했다 들었습니다.”
비트의 손에 들려있는 물건이 익숙한 이유가 있었다. 성균관 시절 내가 써먹었던 물건이었으니까. 유럽에서는 이제 와서야 이 물건을 설사약으로 쓰는 방법이 발견된 모양이다.
망초(芒硝)를 이 이역만리에서 발견할 줄이야.
여긴 유럽이니까 황산나트륨, 아니 황산소듐이라 불러야 하나?
“어, 잠깐. 비트 씨, 글라우버라는 약사가 이걸 만드는 법을 발견했다고요?”
“예. 화학실험을 하던 중에 발견했다고 하던데요. 뭐 문제라도 있습니까?”
조선에서 쓰는 황산나트륨은 대륙의 암염 광산이나 염호에서 캐낸 물건을 수입한 것이었다. 허나 이것을 합성한다는 것은 다른 이야기다. 분명 고도로 발달한 화학지식이 필요할 테니까.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무언가가 있었다.
만약 글라우버라는 화학자가 황산나트륨을 합성한 것이 맞다면, 조선군의 무기는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진보를 이뤄낼지도 모른다.
네덜란드에서 이렇게 생각도 못 한 것이 굴러들어온다고?
나도 모르게 바짝 마른 입술에 침을 적셨다. 이렇게 되면 빌렘을 막아야 할 명분이 또 하나 생기고 만 셈이다.
암스테르담에 도착하자마자 긴밀하게 움직일 필요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