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신의 축복과 악마의 선물
감자는 신이 내린 축복이다.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 뒤 독일에서 활동할 위대한 문인, 괴테의 발언이다.
실제로 감자는 유럽에 널리 보급된 이후로 하층민들을 문자 그대로 먹여 살렸다.
아일랜드의 경우, 성인 한 명이 하루에 6킬로그램의 감자와 약간의 버터밀크 외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도 생활이 가능했다고 한다.
영국 특유의 가혹한 수탈에서 아일랜드가 버틸 수 있었던 원동력은 감자였다.
하지만 현재 내가 방문한 17세기의 유럽에는 감자가 거의 보급되어 있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 들어온 상태긴 하나, 감자의 괴상한 모양과 그 부산물이 품은 독이 문제였다. 때문에 이 대단한 음식은 대부분의 지방에서 신의 축복은커녕 악마의 작물로 불리고 있었다.
“장관님 말씀이 옳습니다. 이 땅, 네덜란드는 점점 식량난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청어 어업과 북해를 통한 식량 수입으로도 한계가 온 모양이군요. 게다가 대도시인 암스테르담은 더 심각한 상황이겠지요.”
“예. 아무래도 부두 노동자 같은 일용직으로 생활이 가능하다 보니 가진 것 없는 빈민들이 네덜란드 전역에서, 아니 다른 나라에서도 몰려들고 있습니다.”
지금보다 조금 과거, 암스테르담으로 출발하기 이전의 일이다. 요한 더 비트와 방문 일정을 조율하던 도중이었나.
“식량이 부족할 수밖에 없겠군요. 수입해오는 식량 가격은 나날이 치솟을 것이고요.”
“아직 인구조사를 제대로 해본 적은 없지만 암스테르담의 인구만 이십만 명이 넘을 지도 모릅니다. 식량 가격이 치솟는 것은 둘째 치고, 귀중한 수송선들이 고작 식량을 사 오는데 낭비되고 있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렇겠지. 식량을 사오는 데 투입하던 배들을 다른 무역에 돌리면 돈이 더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식량 문제가 공화국 의회의 가장 큰 과제일 것이라 예측했다.
“게다가 다른 문제도 심각합니다. 청어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던 어부들이 타국의 어장에 접근했다가 나포되는 경우가 계속 나오고 있거든요.”
“이 근처 청어 어장이라면……. 엥겔란드와 마찰이 벌어졌겠군요.”
“정확하십니다. 놈들의 해군이 장관의 배를 막아섰다고 하셨는데, 아마 그 이유도 있을 겁니다.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네덜란드와 영국 사이의 긴장이 점점 고조되는 것도 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영국에게 제해권을 빼앗기면 식량 수입선을 차단당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라위터르가 고향을 다녀오고 표정이 좋지 않았던 이유도 이것과 관련이 있었다. 그의 고향 플리싱언 역시 청어 어업으로 인한 마찰 때문에 나포 피해자가 수두룩했던 것이다.
악마의 작물, 가축 사료에까지 손을 대야 할 정도로 절박한 상황인가.
하지만 감자는 분명 그럴 대우를 받을 작물이 아니다.
이미 그 위력은 조선에서 충분히 증명되었을 터.
“조선 상관장의 보고로는 조선에서는 단기간에 감자를 보급하는데 성공했다더군요. 그것이 우리 공화국에도 가능해진다면 정말로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허나 단기간이라 해도 적어도 오 년 이상을 내다보고 시행해야 하는 정책입니다. 허나 저는 그리 오래 머무를 수 없으니, 단순한 발상 밖에 제공해 드릴 수 없을 테고요.”
“괜찮습니다! 무엇이라도 좋습니다! 부디 양국의 친선을 위해 장관의 지혜를 제공해 주십시오!”
하지만 내가 호언장담한 것처럼 그리 단순한 일은 아니었다. 조선에서 써먹은 방법이 같은 효과를 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니까. 여기 네덜란드에는 내 명성이 통하지 않는 데다 내 말이라면 껌뻑 죽는 백성들도 없다.
그렇다면 다른 발상을 여기에 더해야겠지.
마침 적당한 발상이 하나 떠오르긴 했다. 역시 새로운 작물을 보급할 때는 맛있는 조리법과 함께 보급하는 것이 제일이다. 원 역사에서도 이 인근에서 탄생한 요리기도 했고.
결국 나는 민트초코라는 악마를 네덜란드에 강림시킨데 이어, 악마의 선물까지 이곳에 탄생시키게 될 모양이었다. 그 선물은 조선에 식용유가 풍부하지 않아 탄생이 미뤄졌던 놈이었다.
‘신은 인간에게 감자를 주었지만 악마는 감자를 먹는 법을 가르쳤다.’
신의 존재는 믿지 않지만…… 아멘, 이 죄 많은 자를 용서하소서.
어린 양들이 굶어 죽는 것보다는 성인병으로 천천히 죽는 것이 낫지 않겠나이까.
***
그로부터 며칠 후, 나는 암스테르담의 유력자들이 모인 자리에 결과물을 들고 나타났다. 현지에서 빌린 요리사와 함께였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나는 동방에서 온 기발한 요리를 대접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습니다만.”
“아, 의원님. 사실은…….”
요한 더 비트는 몸이 달아 있었다.
지금 이 자리는 원래 내가 조선 음식을 대접하겠답시고 모은 자리다. 갑자기 감자가 등장할 줄은 그도 몰랐을 것이다.
내가 그와 상의 없이 일을 추진한 탓에, 갑작스레 높으신 분들에게 촌놈들이 먹는 악마의 작물을 내놓게 된 것이다.
얼굴빛이 확 가라앉은 것이, 아마 비트의 속은 꽤나 꼬여있지 싶다.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조선국 외무장관? 이건 악마의 작물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허나 저는 여러분들께 암스테르담과 네덜란드의 식량난을 해결할 방법을 알려드리겠다 약조를 드렸습니다. 이것이 제 대답입니다.”
“이것이 대답이라고? 이걸 먹으면 배탈이 나지 않소?”
“그것은 먹는 방법이 잘못되어서 그렇습니다. 덩이줄기만 따로 보관에 유의하면 먹고 탈이 날 이유가 없는 작물입니다.”
내 집을 떠나면 고생이라고, 역시 남의 나라에서 내 주장을 관철시키기는 쉽지 않았다. 그렇게 몇 번이나 고성이 섞여 날아드는 질문에 나는 꽤나 고생을 해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 나라고 이렇게 막무가내로 강한 인상을 주고 싶었겠는가. 최대한 빨리 공화파와 동인도회사측의 믿음을 얻는 것이 급했다.
“잠깐! 그래도 멀리서 온 귀한 손님이 하시는 이야기요! 그렇게 공격적인 언사는 결례요!”
“하지만 시장님…….”
“이미 조선에서는 일상적으로 먹는 음식이라고 하지 않소! 맛부터 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을 일이오!”
혼란스러웠던 자리가 정리될 수 있었던 것은 요한 더 비트의 예비 장인인 암스테르담 시장, 얀 비커 덕분이었다. 비트가 암스테르담으로 오는 내내 약혼녀인 웬델리아를 얼마나 자랑했던지 귀에 피가 맺힐 지경이었는데 들은 보람은 있어 다행인가.
아버지는 공화국 의회 의원에, 혼맥으로 암스테르담의 유력자들과 엮이는 것을 보면 비트가 출세할 수 있었던 이유가 조금은 이해가 갔다. 어쨌건 암스테르담 시장쯤 되는 양반이 자기 자리를 걸고 나를 옹호해준 덕분에 불만을 빠르게 누를 수 있었다.
“그런 반응도 이해합니다. 어쨌건 이 아드애플(감자)은 여러분께 낯선 음식일 테니까요.”
“…….”
“하지만 여러분들이 먹지 않는 악마의 작물도 사실 조리하는 방법에 따라 굉장히 맛있어질 수 있는 음식입니다. 어디 동방의 지혜를 한번 맛보시지요.”
감자가 맛있다는 말에 자리는 다시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네덜란드에서는 지역감정까지 담겨 촌놈들이나 먹는 음식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도 당연한가.
“네 차례다. 요안아.”
“……칫.”
볼이 부루퉁해진 요안은 들고 온 주전자 두 개를 탁자에 거칠게 놓고는 앞접시를 나눠주러 앞으로 나섰다. 오늘 자리는 둘이 함께 준비한 자리지만, 요안의 음식 솜씨로는 또 다른 악마를 탄생시킬까봐 조리 과정에 절대 손을 못 대게 했더니 잔뜩 뿔이 난 것이다.
“호오, 이건?”
요리사가 껍질을 벗겨낸 감자를 능숙하게 막대 모양으로 썰기 시작하자 자리의 모든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밝게 웃으며 질문에 대답해준 요안 덕분에 자리에 남아있던 경계심마저 거둬들여진 듯했다.
감자를 써는 사이, 화로에 올린 냄비에서는 신선한 쇠기름이 열을 받아 액체로 변했다. 어느새 조용해진 사람들 사이에서 질문 하나가 날아온 것은 그때였다.
“소의 지방이라……. 튀김 요리라도 할 생각이시오? 튀기면 감자에 있는 독이 없어지나 보지?”
“아니오. 이 덩이줄기에는 원래 독이 없습니다. 그러나 햇빛을 받아 초록색으로 변한 경우에만 독이 생기지요.”
“호오…….”
“여러분들이 이 음식을 맛있다 느끼신다면, 감자를 보급할 때 반드시 독을 구분하는 법도 함께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요리사가 고르게 썬 감자들을 천으로 감싸 물기를 제거했다. 그리고 곧바로 적당한 온도가 된 기름 솥에 막대감자들을 쏟아 넣었다.
치이익─
식욕을 자극하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코를 벌름거리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맛을 보시기 전에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작물, 감자는 정말 대단한 녀석입니다. 이 녀석이 여러분께서 제게 요청하신 문제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해결해 줄 해답이거든요.”
“문제 두 가지라니, 식량 문제 말고 다른 것도 해결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예. 감자는 괴혈병 치료제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이 외면해온 악마의 작물이 실은 신의 은총이었던 셈이죠.”
자리에서 웅성거림이 점점 커져갔다. 그리고 그 웅성거림은 빗발치는 질문이 되어 내게 날아오기 시작했다. 나는 결국 감자가 황갈색으로 튀겨질 때까지 그들의 질문에 쉴 새 없이 대답해야 했다.
“감자가 괴혈병 치료제라니, 그럼 조선에서는 괴혈병에 걸리는 사람이 없단 말입니까?”
“예. 적어도 여기 네덜란드까지 오는 길에 괴혈병에 걸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말도 안 돼! 그럼 당장 감자를 널리 심어 선원들에게 보급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거, 장기간 항해에도 보관할 수 있는 물건입니까?”
“아니오. 조선에서 싣고 온 감자로는 백 일 정도를 버티는 것이 한계였습니다.”
“그럼 어떻게 여기까지 오는 길에 괴혈병 환자가 발생하지 않은 겁니까?”
차례를 지키지도 않고 쏟아지는 질문에 전부 대답하는 것은 분명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말해줄 사실은 하나였다. 괴혈병은 적절한 채소 보급만으로도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는 것.
비타민의 개념까지는 알려줄 수 없었으나 이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감자에는 비타민C가 풍부할뿐더러, 전분으로 감싸진 덕분에 열을 가해도 비타민이 파괴되지 않는다. 그래서 항해 초반부의 비타민 보급은 감자로 대강 해결했던 참이었다.
“……거기에 조선의 항해식량은 육포와 말린 과일을 기름으로 반죽한 형태입니다. 기항지에서 실은 신선한 식량이 떨어지면 그걸 먹어 해결했습니다.”
“과일에도 괴혈병을 예방할 수 있는 물질이 들어있단 말씀이십니까?”
“예. 저희는 매실이라는 과일을 사용했는데, 여기 유럽에서는 레몬이나 라임으로 대용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들은 암스테르담에서도 구하기 쉬운 과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렇게 쉽게 괴혈병이……!”
“그 둘도 구할 수 없다면 네덜란드에서 흔하게 먹는 주르콜(zuurkool, 절인 양배추)도 괜찮을 것입니다. 저희 쪽의 비슷한 음식인 김치 또한 같은 효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네덜란드가 누리는 번영은 바다 위에서 수없이 죽어나간 선원들의 희생위에 쌓아올린 것이었다. 바다에서 병으로 죽는 선원 중 대략 사분의 삼 이상이 괴혈병에 희생되었다.
그걸 이토록 쉽게 막을 수 있다니, 반응이 이토록 격렬한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원 역사에서 괴혈병이 정복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한 세기 뒤의 일이다.
하지만 질문과 답변은 여기까지다. 원래 이 사람들을 자리에 끌어 모은 이유는 괴혈병 Q&A를 위해서가 아니었으니까.
“잠깐! 음식이 완성되었습니다. 일단 맛부터 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아니, 그래도 조금만 더…….”
“질문을 받아드릴 시간은 앞으로도 많습니다. 식으면 맛이 떨어지는 음식이니 먼저 드시지요.”
내가 질문을 막은 사이, 의원들 앞에는 바삭거리는 감자튀김이 놓여졌다. 감자튀김에서 오르는 김을 보고 의원들이 침을 꿀꺽 삼키는 것이 보였다. 소금까지 적당히 친 음식이니 절대 맛이 없을 리가 없다.
그리고 감자튀김을 전부 돌린 후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요안의 손에는 방금까지 안 보이던 주전자 두 개가 들려있었다.
아, 그 이야기, 진담이었나.
“내기, 잊지 마세요.”
요리에 안 끼워줬다고 잔뜩 삐친 녀석이 그래도 약속한 일은 잊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물론 그 내기에 질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말이다.
“호오, 이건?”
“생각보다 맛있군요? 이게 악마의 작물이 맞나 모르겠습니다.”
지금 암스테르담의 유력자들이 정신없이 입에 넣고 있는 음식은 미래인들의 옆구리 살을 수 킬로는 늘어나게 만든 악마다. 그 바삭하고 포슬포슬한 음식이 맛이 없을 리가 있나.
거기에 요안이 돌아다니면서 접시에 부어주는 두 가지 소스는 감자튀김과 떼 놓을 수 없는 양념이다. 맛이 없으려야 없을 수 없는 조합이지.
“이 소스는 대체 뭡니까? 너무 맛있습니다! 거기에 이 튀긴 감자와 너무 잘 어울리는군요!”
“한 가지는 또 다른 악마의 작물로 만들어본 것이고, 한 가지는 느끼한 맛을 좋아하시는 분들을 위해 만들어보았습니다. 마음에 드시는지요.”
“마음에 들다 마다요! 이 소스의 레시피를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이번 회합이 끝나면 소스를 나눠주고 있는 제 부인에게 사람을 보내십시오. 그럼 레시피를 얻으실 수 있으실 겁니다.”
헌데 어째 감자튀김보다 소스가 더 인기인 게 조금 불안하긴 했다. 불티나게 날아드는 소스 추가 요청에, 요안은 쉴 새 없이 사람들 사이를 누벼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소스 덕분일까? 처음에는 반응이 그리 열렬하지 않던 감자튀김도 순식간에 접시에서 사라졌다. 덕분에 요리사는 계속해서 감자를 썰어야 했다.
“후……. 이거 완전 전쟁터네요, 선생님.”
“나도 이렇게 반응이 좋을 줄은 몰랐다. 네 말대로 양념을 추가로 준비하는 것이 옳았구나.”
“공자님 말씀에 산을 만드는데 마지막 한 삼태기까지 가져다 부어야 비로소 완성된다는 말도 있잖아요. 이런 일에는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야 된다고 선생님이 가르치시기도 했고요.”
“잘 기억하고 있구나. 내가 제자 하나는 잘 둔 모양이다.”
“아내 하나도 잘 뒀죠. 그리고 선생님. 내기 걸었던 거, 기억하고 계시죠?”
내기? 그러고 보니 녀석과 내기 비슷한 것을 하긴 했었다.
내가 처음에 만든 소스는 토마토케첩이었다. 이미 호두와 버섯이 들어가는 원시적인 케첩이 네덜란드에 들어와 있는 상황이라 만드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거기에 토마토와 설탕만 첨가하면 되는 일이니까.
‘그걸로는 모자라다니까요? 여기 사람들은 더 느끼한 맛을 좋아할 거라구요!’
‘그럴 리가 없다! 마령서 튀김은 분명 이 남만시 양념과 잘 어울리지 않느냐!’
‘그건 조선 사람 입맛이고요! 제가 아버지한테서 물려받은 하란타 입맛이 더 확실하죠! 못 믿으시면 내기라도 하실래요?’
소스를 두 종류 준비한 이유는 이 쓸데없는 자존심 싸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요리엔 젬병인 녀석이 새로운 소스를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녀석에게 승자의 아량을 조금 베풀어 준 결과가 이것이다. 감자튀김에 케첩 조합이 질 리가 없지 않은가?
기름과 식초를 계란 노른자를 매개로 섞어 하얗게 굳힌 소스, 마요네즈는 그렇게 세상에 일찍 태어났다. 내가 알고 있는 느끼한 소스 제조법은 이것뿐이었으니까.
그걸 맛본 요안은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오히려 완성된 마요네즈에 후추 약간을 더한 후에는, 반드시 이걸 감자튀김과 함께 내야한다며 더한 고집을 부려댔다.
‘제 인생을 다 걸어도 좋아요! 하란타 사람들 입맛에는 이게 더 맞을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소스 두 개를 내놓기로 하고도 우리 둘 사이에 오가던 입씨름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어느 소스가 더 인기 있을지 그 결과를 놓고 내기를 했던 기억이 이제야 떠올랐다.
“상품으로 주시기로 한 거, 잊지 마세요?”
“상품? 내가 그런 것도 걸었더냐?”
“그럼요! 소원 하나를 들어주시기로 했었잖아요! 꼭 지키셔야 해요!”
티 없이 맑은 웃음을 남긴 채 요안은 다시 사람들 사이로 멀어져갔다. 내 앞에 주전자 하나를 남겨놓은 채였다.
아, 이걸 두고 간 이유가 설마…….
“아쉽네요. 그 하얀 소스는 이미 다 떨어졌답니다. 좀 부족하지만 빨간 소스는 남아있는데, 이거라도 드릴까요?”
요안이 생글생글 웃으며 일부러 크게 대답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저 녀석이 정말?
떨리는 손으로 내 앞에 남겨진 주전자의 뚜껑을 열었다. 이미 바닥을 드러낸 주전자 내부에는 흰 소스의 흔적만이 조금씩 묻어있을 뿐이었다.
패배한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조금 뒤의 일이었다. 폭풍처럼 몰려왔던 일들이 정리된 후, 잔잔해진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 하나가 있었던 것이다.
내가 왜 이걸 떠올리지 못 했던 건지.
‘으엑? 너 네덜란드 사람이 아니라 러시아 사람이었냐? 감튀에 왜 마요네즈를 부어?’
‘뭘 모르네. 어디 맛도 모르는 양키 놈들이나 그렇게 먹지, 원조가 이렇게 먹는다는데 무슨 불만이 이렇게 많아?’
‘원조라고? 그거 프렌치프라이, 그러니까 프랑스 음식 아니었냐?’
‘너, 내가 벨기에 사람이었으면 진지하게 지금 한 대 맞았다? 그러니까 한 번 츄라이 츄라이 해 보라고.’
‘말도 안 하고 소스를 부은 놈이 무슨……. 한국에서는 함부로 소스 붓다가 한 대 맞는 경우가 있거든?’
그 도움 안 되는 네덜란드 유학생 놈의 얼굴은 왜 이리도 늦게 떠올랐는지.
놈은 원 역사에서 처음 감자튀김이 탄생한 남부 네덜란드, 즉 벨기에에서는 원래 감자튀김에 마요네즈를 뿌려먹는 것이 정석이라고 했다. 네덜란드로 놀러오면 꼭 원조를 먹여주겠다던 약속이 그제서야 기억났다.
하. 나는 멍청하게도 애초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을 건 셈이었다. 요안이 그 사실을 알고 내기를 걸어온 것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
공화국 의원들과 암스테르담의 유력자들은 내가 제시한 해답에 더할 수 없는 만족을 표했다. 일단 괴혈병의 치료제를 제공한 것 하나만으로도 차고 넘치는 협조였는데, 감자 보급을 위한 아이디어까지 제공했으니 그럴 수밖에.
내가 조선에서 감자 보급을 위해 써먹었던 프리드리히 대왕의 방식 또한 당연히 의회 측으로 전달했다. 감자튀김을 빈곤층에도 보급하기 위한 발상까지 추가로 말이다.
그리 시행하기 어려운 발상은 아니었다. 마을에서 제분소와 빵 가마를 공동으로 사용하듯, 튀김냄비 또한 사용료를 받고 공동으로 쓰는 장소를 만들면 감자튀김을 쉽게 먹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다행이네요. 그 콧수염 난 아저씨들이 의심을 거둬주어서.”
요안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을 걸어왔다. 녀석은 방금 자리가 파하자마자 제 방에 있던 짐을 내 숙소로 전부 옮겨온 터였다. 내 마음이 바뀌기 전에 쐐기를 박아야 한다나.
안 그래도 세자가 머무는 방 다음으로 좋은 숙소다. 화려한 장식부터 시작해서 넓은 공간까지 녀석이 원래 머물던 방과는 비교가 되지 않겠지.
이 방이 그렇게 탐났던 건가.
하지만 그건 그거고, 나는 녀석의 행동에 반항할 명분이 없었다. 남아일언중천금, 내기에서 진 자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대화의 장단을 맞춰 줄 수밖에.
“한시름 놓았다. 거기에 전폭적인 협력까지 약속받았으니 이제 하란타에서 계획했던 일들이 방해받을 일은 없겠구나.”
“그건 모르는 일이에요. 앞일을 누가 알겠어요?”
요안의 지적은 지극히 옳았다. 하긴, 헤이그에서 빌렘과 그런 일도 있었는데 긴장을 푸는 일 만큼 어리석인 짓은 없겠지.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요안은 싱긋 웃더니 크게 입을 벌려 음식을 베어 물었다. 감자튀김에 손을 못 대게 했더니 삐쳐서는 제멋대로 만들어버린 오늘의 저녁이었다.
“감히 선생님께…… 내기를…… 건 보람이 있네요…… 냠냠…….”
“또 그러는구나. 만약 네 언니가 이 모습을 봤으면 네 종아리를 걷겠다 난리를 쳤을 게다.”
“그치만…… 우물우물……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우물우물…… 해보겠어요?”
원래대로면 이 꼴을 보지 않았을 텐데.
요안의 소원은 간단했다.
하나는 암스테르담에 머무는 동안 자기 옆에서 떨어지지 말아달라는 소박한 소원이었다.
그동안 당연히 받았어야 했을 애정을 몰아서 받겠다는데 어떻게 그 요구를 거절하겠는가. 애초에 내기에 진 것부터 문제긴 했지만.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흐……. 소원, 잊지 않으셨죠? 여기 방 안에서는 뭐라 하기 없기에요?”
의기양양해진 요안이 손가락을 세워 흔들었다. 입가에 소스를 잔뜩 묻힌 채 해맑게 웃는 모습이 마음에 안 들지만 약속은 약속이니 뭐라 할 수도 없고.
그 소원 덕분에 나는 녀석의 말괄량이 짓에 손을 댈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요안이 방 안에서 단 둘이 있을 때만 그러겠다 다짐했기 때문에 가능한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하……. 이번만이다. 약속은 약속이니, 어쩔 수 없구나.”
“자, 선생님도 드셔보세요. 맛있다구요.”
“알았다, 알았어.”
입 안 가득한 음식을 겨우 삼킨 요안이 제가 먹던 샌드위치를 내게 들이밀었다. 베어 문 빵 사이에 생햄과 야채 조금, 그리고 마요네즈가 듬뿍 들어간 것이 혀에 느껴졌다.
궁에서 나랏일로 바쁠 때 이렇게 먹으면 좋겠다 생각해 왔었다나. 녀석의 네이밍 센스가 궁금했으나, 아직 요안은 이 음식에 이름을 붙일 생각까진 없는 듯했다.
잠깐, 감자튀김까지 만들었으니 이거 음료만 있으면 완전 세트메뉴 하나 뚝딱 아닌가?
그런 잡생각에 빠져 네덜란드에서 겪고 있던 고민을 잠시 잊고 있던 찰나였다.
벌컥 소리와 함께 숙소의 문이 급작스럽게 열렸다. 한 사내가 숙소 문을 지키던 군관을 질질 끌고 들이닥친 것이다.
“이게 무슨 결례입니까? 예판 대감께서 사사로이 쓰시는 공간입니다!”
“비켜라! 덴 하흐에서 올라온 급보다! 한시가 급하단 말이다!”
라위터르였다.
오늘 암스테르담으로 함대를 끌고 귀환한 스승, 트롬프 제독을 만나러 가지 않았나?
그의 뒤에는 세자가 당황한 표정을 하고 서 있었다.
둘은 오늘 내가 감자튀김을 만들던 사이 함께 암스테르담의 해군 기지를 견학하러 갔었을 텐데. 그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통제사, 무슨 일입니까?”
“예판, 선장이 내게 한시가 급한 소식을 알려왔소! 나와 조선 사절단이 암스테르담을 잠시 떠나있는 것이 낫겠다 하더구려!”
“예? 트롬프 제독이 말입니까?”
“그렇소! 오라녜 공에게서 함대를 암스테르담에서 빼라는 요청이 전해졌다고 하오!”
※ 작가의 말
케첩은 실은 중국의 어장(魚醬, 생선장)에서 유래한 소스입니다. 그것이 인도네시아로 건너가 한번 변형되고, 유럽으로 건너와 토마토와 현지 재료로 제작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마요네즈는 이 시기로부터 150년 쯤 뒤에 프랑스에서 제작된 소스입니다. 제작법은 간단한 편이나 등장 시기가 생각보다 늦은 편이죠. 아마 이제 조선의 요리사들에게는 굵은 팔뚝이 필수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감자튀김은 원 역사에서도 이쪽이 원조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남부 네덜란드, 즉 벨기에가 원조지만요. 벨기에에 여행하러 방문하실 일이 있으시다면, 어딜 가나 길거리에서 쉽게 감자튀김을 파는 가게를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작중에서 언급했다시피 현지에서 감자튀김용으로 가장 인기 있는 소스는 마요네즈입니다. 요안이 입맛이 정직했죠.
다만 막대모양의 감자튀김은 프랑스 파리에서 처음 만들어진 음식입니다. 그래서 벨기에와 프랑스 사이에서 실제로 원조가 어디냐는 논쟁이 한창 뜨거웠던 적도 있었죠. 그래서 프렌치프라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니 이것은 소소한 역사개변이라 봐도 좋을까요? 아마 이 세계의 막대감자튀김은 더치 프라이라고 불릴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