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시민과 자유
대세가 정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미 내가 흘린 정보의 진위를 놓고 반반으로 갈렸던 여론은 순식간에 균형을 잃고 한쪽으로 무너져 내렸다.
이걸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용의 눈동자에 점이 되어 찍힌 피터르라는 존재 덕분에 계획이 수월하게 풀린 것은 확실했다.
“그렇다면 정말 총독이 우리에게 총구를 겨누려고 계획 중이란 말입니까?”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여기 조선국 장관께서도 그 일에 참가하라 협박을 받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덴 하흐에 억류 중인 인질이 보낸 메시지는 무엇이었습니까?”
“저는 해석할 수 없었지만, 여기 장관이 알려준 암호에 따르면 사태가 위급해졌다는 뜻이라 했습니다.”
공화파와 우리 사이에는 드디어 신뢰가 형성된 듯했다. 이제야 제대로 된 질문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피터르는 내게 주입받은 정보를 막힘없이 공화파와 동인도회사의 중진들에게 풀어놓았다. 나는 옆에서 도움을 조금 주는 것으로 충분했다.
“당신이 정말로 전 대사법관 올덴바르네벨트의 알려지지 않은 손자라는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어째서 그런 사람이 저 먼 극동의 땅으로 가 있었던 것입니까?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이따금씩 공화파 측에서 피터르의 정체에 대한 의문이 날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피터르가 직접 그것을 해명할 필요는 없었다.
다행히 그가 동아시아까지 가게 된 경위를 아는 사람이 이 자리에 있었다.
“그건 내가 설명하겠소. 은행장.”
“부시장님?”
“이 코넬리스 더 그라프가 암스테르담 시의 부시장 겸 동인도회사의 회장인 것은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오. 내가 이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저 사람의 조부, 올덴바르네벨트 대사법관님의 은혜 덕도 있었지. 그래서…….”
마침 아버지를 잃고 성인이 된 피터르가 동인도회사에서 일할 수 있도록 힘써준 사람이 회의에 참석 중이었다.
사필귀정이라는 말이 이토록 체감되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유난히 목소리가 큰 회장은 그 자리에서 피터르의 정체에 대한 의문을 한방에 불식시켰다.
나중에 알게 된 이야기지만, 엘세라크도 피터르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것을 보면 그가 피터르를 동아시아로 보내면서 신변에 대해 단단히 당부라도 했던 것이 아닐는지.
“피터르, 자네, 이번 일이 끝나고 무얼 할지 미리 생각해놓는 편이 좋겠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예판 대감?”
암스테르담 은행장이 시끄럽게 피터르의 정체에 대해 떠들어대는 사이, 나와 피터르 사이에서는 귓속말로 재빠르게 대화가 오갔다. 이왕 지금 생각이 난 것, 미리 말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자네는 이번 일로 암스테르담과 동인도회사에 큰 공헌을 한 것이나 다름이 없네. 게다가 자네의 신원을 보증해주고 후견인이 되어줄 사람도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굳이 조선에서 험한 선원 일을 하지 않아도 되겠지.”
“하지만…….”
“극동의 여러 나라를 오가며 쌓은 경험에, 앞으로 네덜란드의 커다란 협력국이 될 조선에 대한 지식 역시 자네만 한 사람이 없지 않겠는가. 이건 자네에게 큰 기회가 될 것일세.”
“너무 김칫국을 드시는 것 아닙니까, 대감?”
‘김칫국’라는 단어를 네덜란드 억양으로 또박또박 발음하며, 피터르는 웃음기를 애써 삼켰다.
하지만 얼굴에 띤 웃음기와는 달리, 그것을 내심 싫어하지만은 않는 눈치였다.
나나 조선 입장에서도 조선에 대해 빠삭한 피터르 같은 사람이 현지에 남아 교류에 도움을 주면 나쁠 것이 없다. 첫인상은 조금 좋지 않았지만, 그는 그동안 선원으로서 무역로와 전쟁터를 구분하지 않고 조선과 네덜란드를 위해 열심히 일해 왔다.
“아무튼 알겠습니다. 저도 슬슬 고향이 그립긴 하던 차였으니까요.”
“잘 생각했네. 물론 자네가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라고 지적한 것도 틀린 말은 아니었네.”
“사실 아무리 총독이 상대라고 해도 질 것 같지가 않긴 합니다. 우리에게는 통제사와 예판 대감이 있지 않습니까.”
“통제사는 아직 마음을 정하지 않으셨네. 너무 그렇게 낙관하진 말아주게.”
“잘 될 것입니다. 일이 잘 풀리면 대감 말씀대로 저는 고향에 남아 가문에 씌워진 오명을 벗겨내고 공화국과 조선의 친선을 위해 최선을 다해볼까 합니다. 이걸 조선말로 보은(報恩)이라 했던가요.”
돌아가거든 요운에게 자신을 보러 네덜란드로 꼭 와달라고 전해달라며, 피터르는 유난히 흰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그 녀석이랑은 왜구 토벌과 사쓰마 원정을 갈 때 친해졌던 건가.
어쩐지 박연과도 친분이 있더라니.
“그렇다면 즉시 소집할 수 있는 민병대를 점검합시다! 바르드헬더(Waardgelder, 정착 용병)의 대장에게 연락도 넣고요!”
“바르드헬더에게 인건비로 지급할 긴급 자금은 어디서 부담합니까? 동인도회사입니까?”
“동인도회사의 회장인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병력을 가능한 한 최대한 끌어 모으세요.”
“성문을 닫을 준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성벽 위의 대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당장 무기고로 사람을 보내서 재고부터 파악해야 합니다!”
피터르와 그렇게 사담을 나누는 사이,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은 그대로 빌렘의 암스테르담 침공을 막기 위한 회의에 돌입해 있었다.
시끌벅적해진 틈으로 온갖 의견이 오고 갔다.
그러나 끼어야 할 곳에 끼지 못하고 손바닥만 비벼대는 사람이 한 명 있었다.
바로 내 옆에 서 있던 요한 더 비트였다.
이해한다. 아버지가 당장 헤이그에서 사고에 휘말리게 생겼는데 평소 상태를 유지하긴 어렵겠지.
“더 비트씨, 가서 미래의 장인어른을 도와드리십시오. 어떤 심정인지는 알겠지만, 당신은 지금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습니까.”
비트가 이쪽을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이 투머치토커가 이런 중대한 이야기를 듣고도 가만히 있다니, 얼마나 고민에 깊이 빠져있었다는 이야기인가.
“……장관의 말씀이 옳습니다. 제가 지금 걱정한다고 아버지께서 안전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이 암스테르담에는 당신의 솜씨가 필요합니다. 아버님 일은 나와 트롬프 제독에게 맡기고 당신은 어서 당신의 일을 하십시오.”
“장관과 제독이면 믿을 만하지요……. 허나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럼 장관은…….”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그래서 이곳으로 오는 동안 당신에게 미리 계획을 전했던 것입니다. 방금 제가 말했던 이야기는 물론 기억하고 계시겠지요?”
요한 더 비트에게는 헤이그 습격 작전의 계획을 이미 귀띔해 주었다. 지금 아수라장이 된 이 회의실에서 조선과 트롬프 제독의 입장을 명료하게 전달할 수 있는 것은 그 뿐이니까.
이 사람이라면 혈육의 안전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다. 내 직감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아무리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지만 그렇게 중요한 정보를 어떻게 잊겠습니까. 염려 마십시오.”
“든든하군요. 그렇다면 암스테르담을 당신과 여기 계신 여러분의 손에 맡겨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시민의 자유와 재산은 오직 시민만이 지킬 수 있으니까요.”
비트가 당황하던 모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방금까지 초점을 잃었던 그의 눈에는 어느새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시민의 자유와 재산은 오직 시민만이 지킬 수 있다……. 멋진 말이군요. 저는 왕국의 신민이지만, 그 문구에는 경의를 표하겠습니다.”
“아, 장관님을 모욕하려고 한 말은…….”
“알고 있습니다.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그리고 지금 하신 말씀은 잊지 말아주십시오. 언젠가 다시 쓰게 될 날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내 말을 들은 비트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그에게는 이 말의 의미가 모호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비트가 뱉은 말에서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시민과 자유라는 단어에 향수를 느껴서일지도.
하지만 그렇게 엉망진창인 대화였음에도 내 본심은 잘 전해진 모양이었다.
비트는 내게 불끈 주먹을 쥐어 결의를 보이고는, 회의가 이뤄지는 아수라장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참, 암스테르담 주변에 정찰병을 배치하는 것을 잊지 말라고 전하십시오! 덴 하흐 방향에만 배치해서는 안 됩니다!”
“하하. 역시 장관은 미힐 말대로 전쟁터가 어울리는 사람입니다. 미힐을 잘 부탁합니다.”
***
한편 같은 날 밤, 덴 하흐는 고요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마치 폭풍 전야를 방불케 하는 고요함이었다.
“왕제, 듣고 있소? 아, 대군이라 불러달라고 했었나?”
조선 사절단이 숙소로 쓰던 건물은 텅 비어 있었다. 유일한 방 한 칸에서 타오르는 촛불이 깊은 어둠을 밝혔다.
본디 손님을 맞이할 가구가 가득 들어차 있어야 할 방에는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인질이 된 손님을 앉혀 놓을 의자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빠드득.
대답 없는 대군 대신 이 가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인질의 뒤에 서 있던 호위병이 낸 소리였다.
“참아라. 효성.”
“내가 말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분명 내 나라 안에서는 조선말 따위는 쓰지 말라고 했소.”
“내 별장들은 하란타어를 알지 못하오. 그럼 명령마저 하지 말란 말이오?”
“적어도 내 앞에서는 그러셔야지. 인질 경험이 있다더니 전혀 인질답게 굴지 않고 있지 않소?”
꽤 불쾌할 만한 비꼼이 날아왔음에도 대군의 표정은 한 점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대군은 한 팔을 들어 뒤에 대기 중인 여덟 명의 호위병을 만류했다.
“좋아. 이제야 말을 잘 들으시는구만. 그래, 통역마저 편지를 전달하라고 놓아 보낼 정도이니 그 정도 여유는 있을 거라 생각했지. 역시 왕족쯤 되시는 분이라 그런지 기대에 부응해주시는구만.”
“너무 긴 문장은 이해하기 힘드오.”
“알아듣지 못하는 척을 하는 것은 아니고? 그래, 암스테르담으로 떠난 장관에게서 답장은 언제쯤 오겠소? 우리 군에는 그곳의 정보가 너무 절실히 필요한데.”
뚜벅, 뚜벅.
천천히 소리 내 걸음을 옮긴 빌렘은 봉림대군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의 뒤에는 완전무장한 척탄병들이 무기를 번쩍이며 대기 중이었다.
“모르오. 내가 천리안을 가진 것도 아닌데, 어찌 그것을 알겠소?”
“사절단도, 그리고 통역도 암스테르담으로 보내주었으면 그 값은 해야 하지 않겠소? 아니 그렇소?”
“…….”
“내가 원하는 답변이 근시일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그쪽 사정과 상관없이 다음 단계에 돌입할 수밖에 없소, 대군.”
공작의 손이 허리춤으로 향했다.
어느새 빌렘의 손에 들린 날카로운 날붙이 하나가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저기 엥겔란드 해적 놈들은 적의 친지를 사로잡아 신체 일부를 편지로 보내는 풍습이 있다고 하더군. 진짜인지 그저 풍문에 지나지 않는지는 나도 모르지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놈들이 그러하듯 당신의 손가락 하나를 편지로 보내면 장관이 정신을 차리고 덴 하흐로 돌아올 수도 있지 않겠소? 아니면 어디 보자, 이건 어떨까.”
휙. 휙. 예리한 칼끝이 어둑어둑한 허공을 갈랐다. 그 끝은 명백히 봉림대군의 정수리를 겨냥하고 있었다.
“그건 너무 야만인스럽고……. 조선에서는 이 머리카락을 생명처럼 여긴다지? 이러면 충분히 목적도 달성하고, 다른 나라에게서 비난받지도 않겠군.”
“청나라 만주족 놈들보다 더한 새끼 같으니라고…….”
“뭐라고 했소, 대군? 내 분명 내 나라 안에서는 조선말을 쓰지 말라고 했을 텐데.”
봉림대군의 시야가 순간 어두워졌다. 잠시 후, 대군은 그의 이마를 덮고 있던 망건이 베여 그의 눈까지 내려왔음을 깨달았다.
이를 악물고 참아야 한다.
한수를 보내며 호기롭게 말한 값을 하려면 이 정도의 도발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나는 왕의 아들이다.
“내 기분이 상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거든 말을 잘 듣는 것이 좋을 것이오. 대군. 내 기분이 상할수록 암스테르담은 더 빨리 불바다로 변할 것이거든. 함대도 없는 놈들이 어떻게 내 병력을 막을지 궁금하군.”
“…….”
“그러니, 빨리 암스테르담으로부터 편지가 와야 당신네 조선인들의 목숨도 무사할 수 있지 않겠소? 그래야 곧 벌어질 전투에 휘말려 죄 없는 조선 사절단이 죽는 일도 벌어지지 않을 테니 말이오.”
“…….”
“아니면 그 편지를 보고 겁을 먹은 장관이 덴 하흐로 꽁지가 빠져라 돌아오는 것도 좋겠군. 하하. 그는 내 앞에서 온갖 강한 척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도 얼마 오래 가지는 못할 것이오. 대군.”
빠직. 대군의 안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란타 공작.”
“나를 부른 것이오? 살려달라고 애걸복걸이라도 하려는 것이라면 늦었소. 그럴 거면 장관이 암스테르담으로 떠나기 전에 붙잡았어야지.”
“그럴 리가. 그저 당신이 예측한 것 중 하나는 맞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려 했소.”
“예측? 궁금해지는군. 어떤 예측을 말하는 것이오?”
봉림대군은 천천히 머리를 흔들었다. 그의 눈을 가리고 있던 망건 조각은 그제서야 주인에게 시야의 자유를 안겨주었다.
“한수는 이곳으로 반드시 돌아올 것이오. 공작.”
“내게 말할 것은 그게 다요?”
“당신의 예측에 대해서 말할 것은 그것이 전부요. 그리고 방금, 말해줄 것이 하나 더 떠올랐소.”
눈을 감고 있던 대군의 관자놀이에 솟은 핏줄이, 울룩불룩거리며 그의 뒤끓는 속내를 비췄다.
그리고 잠시 후, 봉림대군 이호의 부릅뜬 눈에서 묘한 광채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방금 빌렘에게 위협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에서 새어나온 것은 그리운 고국의 언어였다.
“조선의 호랑이는 사냥을 시작하기 전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오, 공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