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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03화 (203/298)

203화. 각성

“사부! 급보입니다! 급보!”

암스테르담 시청에서 연락병으로 대기하던 길산이 해군기지를 박차고 들어온 것은 피터르의 연설로부터 사흘이 지난 후였다. 가뜩이나 사람이 모자란 탓에 녀석에게도 이런 임무를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위트레흐트 서쪽에서 의문의 군세 발견……. 프리슬란드에서 홀란드로 향하는 병사들을 벨루베(Veluwe)라는 삼림지대에서 목격…….”

“부관, 함대에 출항 대기 명령을.”

“예. 사령관님.”

트롬프 제독은 곧바로 빠른 판단을 내렸다.

빌렘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분명했다.

“길산아, 너도 지금 배를 지키고 있는 선직(船直, 배지기)과 기패관에게 이 명령서를 전하거라. 최대한 빨리.”

나 역시 배에서 대기 중인 수군들에게 같은 명령을 내려야 했다.

잠시 몸 상태를 핑계 대고 시간을 달라 요청한 우리 삼도수군통제사 때문이었다.

트롬프 제독과 헤이그 습격작전의 초안을 설계하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던가. 라위터르는 몸이 조금 좋지 않다며 먼저 자리를 비웠다.

그러나 그가 간 곳은 숙소가 아닌, 교역품을 전부 내리고 암스테르담 항에 정박 중이던 조선의 무역선이었다.

“역시 미힐 그놈은 아직도 애송이 티를 벗지 못했습니다. 내 녀석이 해군을 뛰쳐나갔을 때 아주 연을 끊어버려야 했던 것을.”

제독이 그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다.

라위터르는 그날 이후로 배를 해군 기지로 이동시킨 것 외에는 선장실에서 두문불출하던 상태였으니까.

유일하게 식사를 넣어주러 접촉할 수 있었던 길산이 녀석의 증언에 의하면 책상 위에 웬 책을 펼쳐놓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다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 책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너무 그렇게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제독님. 저는 통제사를 믿습니다.”

“장관이 알아서 잘 하시겠지만…… 녀석이 없다고 해도 딱히 문제는 없을 겁니다. 길잡이를 대신 맡아줄 적당한 장교는 이미 선별해 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자리는 라위터르가 마땅히 맡아야 할 자리다. 나는 내가 구상한 작전을 트롬프 제독에게 털어놓았을 때부터 다른 사람에게 그 임무를 맡기리란 생각은 한 톨도 한 적이 없었다.

“헌데, 장관께서 녀석에게 공화국이 아니라 조선을 위해 일하라 한 마디만 하면 되는 일이 아닙니까? 조선의 해군사령관이라는 놈이 어째서 임무를 외면하는 것입니까?”

“그건 통제사의 자유의지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독님.”

“자유의지요? 놈은 군인이 아닙니까. 아, 설마…….”

“제독님, 사실…… 저는 통제사를 이 나라에 남겨두고 갈 생각입니다.”

조금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제독의 입가가 볼썽사납게 뒤틀렸다.

방금까지 시가를 뻑뻑 빨아들이던 트롬프의 입에서 갈 곳 잃은 연기가 허공을 향해 피어올랐다.

“물론 통제사의 해군지휘관으로서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그의 지휘력은 조선 수군에는 과분할 정도로 훌륭합니다.”

“제게 호기롭게 조선으로 아주 떠날 것이라고 선언할 때는 언제고, 놈도 혈관에 흐르는 오렌지색을 자각하긴 한 모양이군요. 흥.”

“하지만 제독님. 당신이 후계자로 삼을 만한 사람은 통제사 한 사람밖에 없지 않습니까. 당신의 뒤를 이어 이 네덜란드의 바다를 지킬 사람도 마찬가지고요.”

뭐라 반박이라도 하려는 듯이 우물거리던 제독의 입이 닫혔다.

그래, 부정할 수는 없겠지. 당신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이 누구인지는 명백하니까.

“허나 미힐 녀석이 과연 생각을 고쳐먹겠습니까? 내가 아는 녀석의 고집은 고래심줄 급입니다.”

“제독님, 이런 사소한 가능성을 저울질하기에는 시간이 없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거든 천천히 말씀드릴 날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하. 그제서야 표정을 푼 늙은 제독은 한숨과 함께 멍하니 들고 있던 시가를 입에 한 모금 물었다. 그 몸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방금에 비해 눈에 띄게 작아져 있었다.

“사실 미힐이 내 뒤를 이어만 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는 일이긴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깊은 고민에 빠졌다고는 하나, 조국을 버리고 전열함 대신 장삿배나 선택한 놈이 다시 해군으로 돌아오겠습니까?”

“해 봐야지요. 그리고 제가 아는 통제사는 아마 올바른 길을 선택할 겁니다. 반드시요.”

“과연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장관은 늘 알 수 없는 확신에 차 계시는군요.”

알 수 없는 확신이오? 제 머릿속에 있는 역사책이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제독님.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것 말고 꾸며댈 핑계가 없던 것도 아니었고.

“근거 없는 확신이 아닙니다, 제독님. 통제사에게 바다를 가르친 위대한 제독 두 분은 모두, 이런 상황에서 나라에 헌신하시어 몸을 아끼지 않으셨거든요.”

“두 분이오?”

“예, 한 분은 통제사가 늘 입에 달고 다니던 조선의 명장이시고, 한 분은…….”

사실, 당신에게서도 국적을 초월한 무언가를 느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트롬프 제독님.

나도 모르게 나온 간신 짓에, 슬그머니 입가가 올라갔다.

무언가 가슴을 막고 있던 것이 뚫리는 느낌이었다.

“굳이 뭐 말씀드려야겠습니까? 아무튼 통제사는 제가 책임지고 배에 태우겠습니다. 걱정은 붙들어 매십시오.”

“하, 하, 핫하하하하하!”

늙은 제독의 입에서 파안대소가 터져 나왔다. 얼핏 무거워질 뻔한 분위기가 풀려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장관이 젊은 나이에 그렇게 고위직에 올라가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출진 전에 이렇게 이 노병의 기분을 풀어주시다니. 사람 다루는 법을 아시는 분이로군요.”

“저는 진심이었습니다, 제독님.”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미힐 녀석의 문제는 장관에게 모두 일임하겠습니다. 엉덩이를 걷어차서라도 녀석이 전장에 합류하도록 해 주십시오.”

***

미래의 명장이 그래도 임무를 아주 내팽개친 것은 아니었다. 배에서 소란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을 감지한 라위터르는 늘 그랬듯이 갑판 위로 나와 선원들에게 작업을 지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라위터르의 모습에서 평소와 다른 것이 딱 하나 있었다. 선장 임무를 수행 중인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아,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통제사.”

“…….”

조선의 함선이 숨어든 네덜란드 해군 함대가 암스테르담을 출항하고 시간이 조금 흐른 후였다.

저녁 시간에 맞춰 헤이그에 도착하기 위해, 함대는 노을이 내린 바다를 가르며 나아가고 있었다.

“통제사께서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압니다. 잠시만 내게…….”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예판.”

“통제사?”

내가 그를 찾아냈을 때, 라위터르는 파도를 마주하는 바위처럼 뱃머리에 서 있었다. 서쪽으로 지는 오렌지색 태양빛에 멍하니 잠겨 있는 그의 모습에서는 이전까지와는 다른 묵직한 무언가가 풍겨 나왔다.

“운명이란 참 얄궂지 않습니까, 예판?”

“무엇이 말입니까?”

“그저 돈을 벌러 갔었던 동방의 나라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본받을 수 있는 위대한 분을 만나고, 일이 잘 풀려 과분한 기회까지 받았었지요. 그 행운에 감사하고 조선에서 능력을 발휘하며 살아갔으면 되는 일이었는데…….”

나를 향해 몸을 돌린 라위터르의 시선은 하늘을 향했다. 턱을 치켜 올린 채 한숨을 길게 쏟아낸 그의 눈동자는 저 멀리 동쪽 어딘가를 훑고 있었다.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습니다. 나는 그저 네덜란드까지 안전하게 왕복시켜 드리는 것으로 예판과 조선에 진 빚을 갚으려 했던 것인데…….”

“통제사…….”

“얀의 농담대로 조선에서 새 아내라도 맞이했어야 했나 봅니다. 핏줄의 무게가 이토록 무거운지, 나는 이전까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던지는 쓸쓸한 미소를 섞은 농담에, 나는 뭐라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아니, 과연 농담이 맞긴 할까.

생각해보니 그랬다. 원 역사에서 시간차를 두고 조선에 표류한 두 네덜란드인은 다른 길을 택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만난 벨테브레이는 자식을 낳고 조선인 박연으로 다시 태어났고, 그렇지 않았던 하멜은 어떻게든 조선을 탈출해 고향으로 돌아갔었지.

“핏줄의 무게라……. 그만큼 무거운 것이 없긴 합니다. 나 역시 볼모의 처지셨던 주상 전하를 보필하며 머물렀던 청나라에서 비슷한 일을 겪었거든요.”

“……예판은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말을 해 주다니.”

“입에 발린 말이 아닙니다, 통제사. 이건 예조판서가 삼도수군통제사에게 하는 말이 아닌, 인간 안한수가 인간 미힐 더 라위터르에게 전하는 말입니다.”

지금 라위터르가 느끼는 감정은 분명 내 가슴에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송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직후, 홍타이지의 앞에서 마패의 진동이 내 가슴을 울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마 지금쯤 변발을 하고 도르곤의 아래에서 갈리고 있었을 테니까.

그랬다면 내 옆에는 하연 대신…… 아니다. 지나간 일을 굳이 꺼내서 무엇 하겠는가.

하지만 그 말을 들은 라위터르의 표정은 밝아지기는커녕 더 무거워질 뿐이었다. 그 이유 또한 나는 알고 있다.

그도 나처럼 입었던 은혜를 쉽게 잊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내가 도르곤을 떠나며, 그녀를 떠나며 가슴이 묵직해졌던 것처럼 말이다.

“예판, 사실 나는…… 지금 내가 내리려 하는 결정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나는 늘 선장이 바보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제대로 된 보상도 주어지지 않음에도 조국에 헌신하고, 또 푸대접을 받으면서도 바다로 나가는 것을 멈추지 않았지요.”

“…….”

“헌데 먼 동쪽에서 만났던 위대한 스승님 역시 그러한 분이었습니다. 나는 바로 발아래에 묻혀 있던 보물 상자를 미처 깨닫지 못하다가, 지구 한 바퀴를 돌고 나서야 비로소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을 맺은 라위터르의 목울대가 다시 한 번 꿈틀거렸다. 그 모습에서 복잡한 감정이 내게 스며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감정을 터뜨리는 대신, 도로 말문을 잇는 것을 택했다.

“물론 충무공을 알게 된 것이 헛되었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하더군요. 내가 조선으로 가게 되었던 것은, 아마 이런 깨달음을 얻게 하려는 신의 인도가 아니었을까.”

“…….”

“참, 조선에서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었죠. 실례되는 이야기를…….”

“아닙니다, 통제사. 하지만 통제사는 조선에 오지 않았더라도 분명 같은 깨달음을 얻으셨을 겁니다.”

원 역사에서 당신은 그러셨으니까요.

조선에 오지 않고도 마치 충무공과 같은 삶을 네덜란드에서 살아가셨던 분이니까요.

“아니오, 그건 확실히 아닙니다, 예판.”

“그렇습니까?”

“덴 하흐를 습격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고 제가 선장실에 틀어박혀 고민에 빠졌을 때 제게 의지가 되어주셨던 것은 분명 충무공이셨으니까요.”

“…….”

“그분이 남긴 기록이 어둠 속을 헤매고 있는 제게 등대가 되어주었습니다. 예판은 제가 고뇌가 극에 달했을 때 펼친 책장에서 어떤 구절이 나왔는지 아십니까?”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 尙有十二).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전선이 남아있사옵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며, 라위터르는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분께서 책장과 시간을 뛰어넘어 제게 직접 호통을 치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해군이 푸대접을 받는 것이 무엇이 대수란 말이더냐, 이기기 어려운 싸움이 목전에 닥친 것이 무엇이 문제란 말이더냐…….”

“통제사…….”

“제가 느낀 것이 맞을 겁니다, 예판. 그분의 뒤를 이어 명예로운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직을 수행한 사람이라면, 고작 이런 것에 흔들려서는 안 되는 법이니까요.”

왜 라위터르를 바라보는 내 눈시울이 시큰한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 통제사, 통제사가 내린 결정은…….”

“송구합니다, 예판. 조선에 계신 주상 전하께 부디 제 진실된 사죄를 전해 주십시오.”

“…….”

“그동안 받은 은혜를 배신해 죄송하다고, 저는 먼 땅에서 조국의 바다를 지키며 조선과 네덜란드 양국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말입니다.”

그제서야 라위터르는 개운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던 모양이다.

모든 걸 털어낸 듯한 환한 웃음 위에, 서쪽으로 넘어가는 태양으로부터 하루 중 가장 짙은 오렌지색이 얹혔다.

“그럼 예판 대감, 지금부터 저 미힐 더 라위터르는 조선의 삼도수군통제사로서 마지막 임무를 덴 하흐에서 수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 뜻, 온전히 제게 전해졌습니다, 통제사.”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군 대감과 공화국 의원들을 구해내고, 내 조국 네덜란드를 하나로 만드는 것, 그것이 조선에 입은 은혜를 갚는 가장 좋은 방법일 테니까요.”

지금 입고 있는 통제사의 구군복이 그리울 것이라며, 라위터르는 개운했던 얼굴에 다시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그렇게 미래 네덜란드인들의 마음에 영원히 남을 명장은 짧은 방황을 마치고 제자리를 찾아 돌아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이제 내가 당분간 신경 쓸 것은 한 가지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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