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침투
“젠장……! 이게 무슨 꼴이야! 경계근무만 몇 시간째냐고!”
하지만 가스파르의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근무를 서야 하건만, 이 자리에는 가스파르 혼자뿐이었다.
빌어먹을 고참병은 이미 끝이 나지 않는 근무에 지쳐 어딘가에 짱박혀 곯아떨어졌으리라. 몇 시간 전, 선임이 은신할 자리를 찾으러 가기 전 한 말이 가스파르의 머릿속을 울렸다.
‘근무는 X같지만 근무만 서게 된 것을 감사해라, 등신아.’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교대하면서 장교 새끼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성을 나간 병력들은 훈련 나간 게 아니라…….’
말꼬리를 흐린 선임은 후임의 가슴팍에 주먹을 한 방 날리고는 가스파르를 홀로 남겨둔 채 어디론가 사라졌다. 하나님 맙소사, 그럼 시내에 돌던 소문이 진짜라고?
하긴 그것이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긴 했다.
의회에서 군대를 감축하려 한다는 소문은 육군 사이에서도 이미 파다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대규모 훈련이라니, 조금만 생각해도 앞뒤가 안 맞지 않은가.
“X발……. 그래도 최소한의 병사는 남기고 가야지. 이게 무슨 고생이야?”
다시 한참을 욕설과 함께 불평을 늘어놓았지만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걸 알고 있다. 하긴 오라녜 공의 직속 병력을 빼면 네덜란드의 각 주는 스스로를 방어하는 것도 벅차다는 사실을 군인치고 모를 사람은 없다. 아, 갓 입대한 병아리들은 모르겠군.
‘아니, 그래도 열여덟 시간 연짱 근무는 너무한 것 아니냐고!’
장교란 새끼들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인지. 지금까지 귀빈을 지켜야 한다며 경계근무를 세워놓고, 오늘은 그 귀빈인지 말린 청어 대가리인지 모를 사람들을 옮긴다며 병력을 또 빼간 결과가 지금 이 모양 이 꼴이다.
“X미럴……. 누가 이런 데를 공격한다고? 암스테르담 깍쟁이들은 어디 하늘을 날아다니기라도 하나?”
아마 덴 하흐의 외곽경계를 맡았으면 그나마 휴식시간이라도 길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쪽은 병사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카악. 답답한 속을 풀려는 듯, 가스파르는 걸쭉한 가래침을 내뱉었다.
“물개 새끼들은 오늘 단체 외박이라던데, X발, 우리는 왜?”
안 그래도 방금 장교가 순찰을 돌며 항구에 입항한 해군 병력과 충돌할 일을 만들지 말라고 엄포를 놓고 가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누구는 피로로 내려가는 눈꺼풀을 다잡기도 힘든데, X발.
그때였다. 어디에선가 들려온, 공기 새는 소리와 물 튀는 소리 비슷한 것이 가스파르의 고막을 뚫고 들어왔다.
“뭐, 뭐야?”
자신도 모르게 건물에 기대 꾸벅거리기 직전이었던 가스파르는 그 이상한 소리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혹시나 또 다시 장교가 순찰을 나온 것은 아닌가 했지만 다행히 그것은 아니었다.
다만…….
“물개놈들인가?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덴 하흐 시가지에서 비넨호프로 향하는 다리 위를 해군 제복을 입은 사내 몇이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 몇이 그들을 제지하러 달려갔으나, 무식한 해군 놈들은 지시를 따를 생각이 없어 보이는 듯했다.
“저, 저! 무식한 새끼들이!”
취한 듯 비틀거리는 물개 놈들이 일으킨 실랑이는 좀처럼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다리 위의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가스파르의 머릿속에 무언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마침 잘 되었다. 잠도 오던 마당에 저 물개 놈들이나 영창에 처넣고 속이나 풀어야지. 뒷수습은 높으신 장교 새끼분들께서 알아서 하라지.
가스파르는 자신도 모르게 홀린 듯이 운하에 걸린 다리를 향해 발을 내딛었다. 이정도 일이면 잠시 잠이나 깨러 근무지를 이탈해도 추궁은 받지 않겠지.
퍽. 그 순간, 이상한 타격음과 함께 가스파르의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어, 어어?”
눈앞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점점 말을 듣지 않기 시작한 다리는 가스파르를 이상한 곳으로 옮겨놓고 있었다.
“뭐, 뭐야…… 네놈들……?”
하지만 그의 입에서 새어나올 수 있었던 말은 그것이 끝이었다.
헤이그의 내성, 비넨호프를 지키던 경비병1은 그렇게 쓰러졌다. 막 땅바닥에 부딪힌 그의 눈동자에는 방금 다시 골목길의 어둠으로 몸을 숨긴 웬 낯선 남자들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가스파르가 네덜란드에서 본 적이 없는 복장을 착용한 채였다. 얼룩무늬 옷을 입은 남자들이 다수에, 맨 앞에 선 덩치 큰 남자는 손에 이상하게 생긴 긴 몽둥이까지, 그리고 그 얼굴엔 괴상한 짐승이…….
***
여기까지 와서 타이거 마스크를 다시 뒤집어쓰게 될 줄은 몰랐다. 오랜만에 휘둘러 손에 착 감기는 정의봉 역시 마찬가지였다.
“좋아, 종사관. 제압은 전부 완료되었나?”
기절해 쓰러진 병사를 질질 끌어 어둠 속에 막 숨겼을 때, 정찰대를 이끌고 앞길을 열러 갔던 부관이 돌아왔다. 경계병들의 군기가 심각하게 빠져있었다며,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은 종사관은 계속해서 보고를 이어갔다.
“예. 대감 말씀대로 총독 저택까지는 병력이 그닥 많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돌입하면 될 것 같습니다.”
퐁당.
그 와중에 운하 아래에서 물이 무언가가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그 소리의 끝에는 돌을 매달아 가라앉힌 옷 뭉치가 있을 것이다. 트롬프 제독에게 빌린 네덜란드 해군 복장 말이다.
덴 하흐 시내를 쉽게 가로지르기 위해 실행했던 위장은 이제 끝이다. 옷을 갈아입은 지금부터는 철저히 조선군으로서 행하는 작전이다.
지금부터 올릴 전과는 철저히 우리의 몫으로 각인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계획한 대로 이후 협상에서 내 발언에 실릴 힘이 커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대로 작전을 속행한다. 정찰대는 자리를 그대로 사수하고 있나?”
“예. 총독 저택 주변의 어둠에 몸을 숨기고 있습니다. 접근하는 병력이 있으면 그대로 제압할 것입니다.”
“완벽하군. 가자.”
오라녜 가문의 저택에 따로 달린 담장이 없는 것이 다행이었다. 비넨호프는 운하에 둘러싸인 좁은 땅덩이라, 공작쯤 되는 사람도 3층짜리 건물 몇 개를 붙여 저택으로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와 총통위 병사들은 몇 주를 머물러 이제는 눈에 익숙해진 총독 저택으로 접근했다.
이번에도 저택 본관으로 향하는 입구를 병사 두 명이 지키고 있었으나, 그들은 벽에 기대 단잠에 빠진 상태였다.
퍽. 퍽. 은밀히 다가간 대원 둘이 경계병의 머리통에 개머리판을 휘둘렀다. 그리고는 재빠른 솜씨로 허리춤에서 밧줄과 재갈을 풀어낸 대원들이 제압을 완료해가던 무렵이었다.
“히, 히익!”
예측 밖의 일이 벌어졌다.
누군가 등불을 들고 저택 현관으로 나온 것이다.
생각지도 못한 불청객이었다.
“……!”
다행히 그 불청객이 소리를 지르기 전, 쓰러진 경계병들을 결박하던 총통위 병사는 뜻밖의 인물을 쉽게 제압해낼 수 있었다.
문제는 불청객의 정체였다.
“아……! 읍읍!”
목덜미에 대검이 들이밀어진 채, 불청객은 입에 재갈이 물려 대원들에게 천천히 끌려왔다. 헌데 그들의 실루엣이 어둠 사이에서 천천히 가까워질수록, 내 동공 역시 천천히 커지고 있었다.
“당신은……?”
대원들이 그 자리에서 불청객을 기절시키지 않고 끌고 온 이유가 있었다.
그 불청객은 네덜란드 육군의 전투복이 아닌, 얇고 하늘하늘한 잠옷을 입고 있었으니까.
“읍…… 읍읍!”
밖을 살피려 했던 것인지, 불청객은 그 자리에까지 끌려오면서 손에 들고 있던 등불을 놓지 않았다. 혹여나 등불이 깨져 소리가 날까 싶어 불청객의 손에서 등불을 빼앗은 순간, 그녀는 손가락을 입에 가리키며 재갈을 풀어달라는 요청을 보내왔다.
이 얼굴, 알고 있다. 오라녜 공 빌렘의 누이동생 헨리에트 카탈리나 판 오라녜였다.
“읍읍……!”
일반인이, 그것도 어린 소녀가 이 일에 엮여들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그렇게 그녀의 처분을 고민하던 찰나, 그녀가 멀쩡한 손으로 품을 뒤지더니 주머니 하나를 꺼내 내게 들이밀었다.
뭐지? 뇌물이라도 건네는 건가? 헨리에트의 행동이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반대로 내 몸은 자연스럽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가볍기 그지없는 주머니를 거꾸로 들어 손에 털자, 아무 무늬 없는 작은 옥장식 하나가 내 손바닥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이건……?”
“무엇입니까, 대감?”
“도리옥관자…….”
이게 왜 여기서 나오는 건가.
손바닥을 구르는 민무늬 옥관자는 가뜩이나 복잡한 내 머릿속을 더 헤집고 있었다.
관자는 망건끈인 당줄을 고정하기 위한 단추 비슷한 것이다. 내가 지금 차고 있는 망건에도 관자가 달려있다. 정이품 이상의 관료만 찰 수 있는 민무늬 소형 금관자다.
그러나 이 관자는 주인의 신분과 품계에 따라 착용이 엄하게 제한된다. 특히 조선에서 이 도리옥관자, 즉 무늬가 없는 작은 옥관자를 찰 수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는다.
적어도 정일품 이상의 신하나, 혹은 그 이상의 사람뿐.
그렇다. 현재 조선 사절단에서 도리옥관자를 찰 수 있는 사람은 단 두 명 뿐…….
아.
“……이거, 세자 저하의 소지품입니까.”
소녀는 내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머릿속이 순간 새하얗게 변했다가, 급속도로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제야 모든 퍼즐 조각이 머릿속에서 맞춰졌다. 세자가 왜 자꾸 눈길을 돌렸는지, 왜 공작부인을 만나러 갔다가 뜬금없는 산책을 나섰는지, 그리고 왜 요안이 녀석은 감히 서방을 그리 놀려댔는지.
하아. 나는 정말 이쪽에는 눈치가 없어도 너무나 없구나.
나도 모르게 이마를 짚고 말았다. 그러면서도 내 남은 한 손은 헨리에트에게 묶은 재갈을 바쁘게 풀어내고 있었다.
“대군님이 보내셔서 왔어요. 예조판서님.”
“조선식 관직 이름은 언제 익히신……. 이럴 때가 아니군요. 대군께서요?”
“말하자면 길어요. 대군님은 판서님이 언제든지 돌아오실 것이라며, 시간이 나면 바깥을 살펴봐달라고 요청하셨거든요.”
대군에게 식사를 날라주는 일에 자원해서 접촉에 성공했다며, 소녀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저 세자가 언제 돌아오는지 궁금했던 것뿐이었던 소녀는 그렇게 대군의 협력자가 된 모양이다.
사연을 듣자마자 판단이 섰다. 일단 헨리에트에게 들이밀어진 대검부터 맨손으로 치워냈다. 그제서야 그녀의 얼굴에 조금이나마 혈색이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왕세자님은 어디 계신가요? 오라버니가 암스테르담을 공격해 도망 나오신 것은 아닌가요? 무슨 일이 있으신 것은 아니죠? 상황이 이런데 다시 만날 수 있기는 한가요?”
“쉿, 목소리를 낮춰 주십시오. 공녀님……. 저하께서는 지금 덴 하흐 부두에 정박 중인 배에 계십니다. 이번 일이 제대로 마무리된다면 곧 만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여러분과 마주할 수 있다니, 이건 정말 신의 인도하심이 분명해요. 어서 그분의 얼굴을 뵐 수 있었으면……. 참, 대군님은 저 방에 계세요. 판서님.”
속삭이는 고운 목소리와 함께, 헨리에타의 가는 손가락이 저택 3층에 위치한 창문 하나를 가리켰다. 대군을 지키는 감시병들이 지쳐 졸고 있을 것이라 덧붙인 말과 함께였다.
저곳이 대군이 잡혀있는 공간인가. 그녀가 알려준 정보는 너무나 귀중했다. 이렇게 되면 쓸 데 없는 충돌을 피할 수 있다.
“참, 그리고 또 중요한 정보가 있어요. 오라버니에게 억류되었던 공화국 의원 분들에 관한 이야기예요.”
그리고 오라녜의 귀여운 배신자는 또 다른 중대한 정보까지 알려주었다.
오늘 낮, 햇살을 쬐던 창가에서 밧줄에 묶인 사람 몇몇이 기사회관에서 병영 방향으로 옮겨지는 것을 목격했다는 정보였다.
“종사관, 날랜 연락병 몇을 보내 이 사실을 통제사에게 어서 전하게! 한 시가 급하네!”
“옛! 대감!”
의원들을 구출하는 임무를 맡은 라위터르와는 중간에 갈라졌다. 하지만 이 정보가 확실하다면 임무에 소모할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은 곧 작전의 성공 가능성이 뚜렷해졌다는 것.
이렇게 되면 굳이 저택 안으로 돌파해 들어갈 필요가 없다. 방금 내 명령을 받은 총통위 병사 둘이 순식간에 벽을 타기 시작했다.
“공녀님, 당신의 협조는 정말로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머리 숙여 감사를 올리겠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뻐요. 그렇다면 지금 왕세자님께 데려가 달라고 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저는 여러분께 방해가 되겠죠?”
“……반드시 곧 세자 저하와 만날 수 있도록 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조용히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방으로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공녀님.”
헨리에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나 소녀다운 계기 덕분에 얻을 수 있었던 협조였으나, 중요할 때에는 그녀가 소녀답지 않게 과감하여 다행이었다.
몸을 돌리기 전 무언가 중얼거리던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렇게 어서 가 보라며 헨리에트가 몸을 돌린 순간, 바닥에 무언가가 가볍게 착지하는 소리가 들렸다.
창문 아래로 늘어진 밧줄 아래에 내가 구하러 온 인질이 사뿐히 내려앉아 있었다.
“대군 대감!”
“올 줄 알고 있었다, 예판. 너라면 해낼 줄 알았지.”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운하에 배를 대기시켜 두었습니다. 빨리 움직이시지요.”
트롬프 제독이 수배한 배가 약속한 장소에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비교적 수월하게 임무를 완수했지만, 시간에 맞추려면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의원들이 병영의 지하감옥으로 옮겨진 것이 사실이라면 라위터르는 분명 그곳에서 소규모 전투를 벌여야 할 테니까. 우리의 침투가 알려지는 순간, 탈출시간은 극도로 제한될 것이다.
그때, 비넨호프의 반대쪽 구역에서 소음이 들렸다. 분명 그 소음은 병사들이 전투에 돌입해 지르는 고함과 쇠붙이들이 마주치는 소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저 쪽에서 전투가 벌어진 모양입니다, 대감.”
“예판, 어찌하겠느냐?”
결국 라위터르도 지하감옥은 무력으로 뚫을 수밖에 없었나.
이런 상황이라면 내가 내려야 할 결정은 정해져 있다.
“종사관, 여기 여덟 명의 호위병과 함께 대군 대감을 모시고 먼저 접선 장소로 가 있게.”
“예? 대감께서는……?”
“통제사와 나머지 총통위 병사들을 데리고 오겠네. 내 병사 한 명도 허투루 상하게 할 수는 없지.”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대감.”
이미 전투가 벌어진 상황이라면 병력 여유가 생긴 이쪽에서 도우러 가는 것이 맞을 것이다. 증원 병력이 달려오기까지 시간도 없고, 라위터르가 알 수 없는 규모의 적을 상대로 승리할지 장담할 수도 없으니까.
그 뜻이 전해졌는지, 종사관은 즉각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고는 대군과 함께 멀어져갔다.
“우리는 통제사의 병력과 합류해 의원들을 구해낸다. 가자!”
소음이 발생하는 방향을 향해 걸음을 박찼다. 머릿속에서는 뒤집힌 모래시계가 아래로 모래를 흘려보내는 모습이 연신 떠오르고 있었다.
지금쯤 비넨호프의 반대쪽 시가지에서는 외박 나온 해군 수병들의 난동이 벌어졌을 것이다. 나머지 경계병들을 유인하기 위해 트롬프가 짜낸 계략이었다.
타이밍이 맞아떨어져야 할 텐데.
“예판 대감, 이것은?”
“……나도 보고 있다.”
내 옆을 함께 달리던 병사 하나가 손가락을 뻗어 앞을 가리켰다. 동시에 그가 가리킨 방향에서 슬슬 피비린내가 풍겨오고 있었다.
어느새 전투의 소음이 가라앉은 병영 앞은 그야말로 피바다를 방불케 했다. 여기 쓰러져 있는 시신 중에 우리 병사가 없길 바라며, 나는 계속해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때였다. 사내 하나가 붉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칼 한 자루를 들고 병영의 입구를 나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온몸은 시뻘겋게 물들어, 격렬한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졌음을 증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