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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06화 (206/298)

206화. 뒤통수에는 뒤통수로

척.

입구에서 뛰쳐나온 사내는 내 쪽을 향해 곧바로 칼을 겨눴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허리에 차고 있던 투창기와 투창 하나를 뽑아들었을 때였다.

“네놈들은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전해져오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그제서야 긴장으로 잔뜩 움츠러들었던 몸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나왔으니 보이지 않을 만도 하지. 반면 눈이 어둠에 익숙해진 나는 사내가 들고 있는 칼이 조선군의 환도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납니다, 통제사.”

“예판?”

라위터르였다. 허탈한 웃음과 함께 칼끝을 내리는 그의 뒤로 병영에서 나온 총통위 병사들이 줄줄이 대열을 갖추기 시작했다.

“통제사의 구군복을 내가 못 알아채는 날이 올 줄은 몰랐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전투가 격했던 겁니까?”

“하하. 그저…… 조금 흥이 올랐을 뿐입니다, 예판.”

조금 흥이 올라? 색색깔의 비단으로 지은 구군복이 온통 검붉게 물들어 있는데?

하지만 그렇게 딴지를 걸 시간마저 없었다. 이쪽의 병력은 전부 격멸했으나 멀리서 식별될 정도로 소음을 냈으니 빨리 자리를 떠야 한다.

마침 난감해하는 표정을 짓는 라위터르 뒤로 우리의 목표들이 병영을 빠져나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빌렘에게 잡혀 있던 공화국 의원들이었다.

“당신들은 조선에서 온 사절단이 아니오? 머리에 뒤집어쓴 것은 대체 무엇이고, 왜 우리를……?”

“나는 암스테르담 시장과 여기 통제사의 친구, 요한 더 비트의 부탁을 받고 왔습니다. 일단 자세한 것은 여기 비넨호프와 덴 하흐를 빠져나가고 말씀드리죠.”

“내 아들이? 그럼 지금 암스테르담은 멀쩡하오?”

“제가 암스테르담에 총독의 야심을 경고한 탓에 지금은 방비태세를 갖춘 상태입니다. 총독이 아무리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준비된 성벽을 뚫어내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의원들 사이에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사이, 마지막 병력이 병영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내 시야에 잡혔다.

재빨리 병력을 체크했다. 총통위 병사 몇몇은 부상을 당해 부축을 받아야 할 지경이었지만, 일단 내가 보기에 줄어든 사람은 없어보였다. 천운이었다.

“그럼 일단 움직이셔야겠습니다. 방금 전투에서 난 소음 때문에 언제 적의 후속 병력이 이쪽으로 달려올지 모릅니다.”

“아, 알겠소, 장관. 어서 갑시다.”

의원들도 그 정도는 알고 있을 테지. 지금 대화는 사치라는 걸.

***

그날 밤, 헤이그 항구를 배 한 척이 빠져나왔다.

트롬프 제독의 함대 사이에 섞여있던 조선의 함선이었다.

“스승님, 돌아오셨…… 아니?”

“저하, 덴 하흐에서 참으로 중대한 사고를 치셨더군요. 허나 상황이 급하니 그 건은 나중에 논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선실로 따라오시지요.”

나를 맞으러 나온 세자가 기겁을 한 것은 아마 헨리에트와의 관계를 들켜서만은 아닐 것이다. 완전히 피를 뒤집어쓴 악귀 꼴을 한 라위터르가 내 뒤를 따라 갑판 아래로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수염과 머리칼이 적들의 피로 굳어 엉킨 라위터르의 뒤에는 우리 손에 구출된 의원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방금까지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처럼 잘만 병사들 뒤를 따르던 사람들이 뒤늦게 쭈뼛거리는 모습이 조금 우스꽝스럽긴 했다.

“……예판! 무사히 돌아왔구나! 성공했느냐!”

선실에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 총독 저택에 인질로 잡혀 있던 대군이었다.

“예, 대군 대감. 모든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믿고 있었다. 너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작전도 성공시킬 줄 알았지.”

“여러 모로 운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일단 이번 일에 대한 치하는 뒤로 미루시지요. 앞으로 남은 일에 대해서 논의할 것이 많습니다.”

“그래, 나를 비롯한 인질들을 구해냈다고 끝이 아닐 것이다. 네 목표는 더 큰 것이라고 했었지.”

물론 대군에게 물어볼 것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헨리에트와 세자 사이에 있었던 일을 대군이 얼마나 알고 있는지는 나중에 확인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먼저 주춤거리며 선실에 놓인 탁자 주위에 앉기 시작한 공화국 의원들과 담판을 지어야 할 시간이다.

“고맙소! 정말로 고맙소! 조선의 외무장관!”

아직까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다른 의원들과 달리, 자리에 앉자마자 감사를 전해온 사람이 있었다.

요한 더 비트의 아버지, 야코프 더 비트였다.

“일단 인질로 잡혀있는 동안 별일이 없으셨길 바랍니다. 저 또한 인질 생활을 해본 적이 있었던지라, 여러분이 어떤 심정이셨을지는 전부 이해하고 있습니다.”

“별일이 일어나기 전에 장관이 우리를 구해주지 않았소! 조금만 늦었더라도 우리는 총독의 요새로 끌려갔을 거요! 그러니 그렇게 겸손할 필요는 없소!”

의회의 높으신 분에게 손을 덥석 잡혀 감사를 받는 일은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다만, 지금 그런 기분에 빠져있을 시간이 없었다. 감사를 받는 것도 좋지만 이들을 구하는 일은 이번 작전의 시작에 불과했으니까.

“감사는 나중에 받겠습니다, 의원님. 곧 트롬프 제독의 함대 역시 우리를 따라오겠지만, 아직 안전한 구역에 다다른 것은 아니니까요.”

“물론이오! 물론이오! 내 장관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르리다!”

“지금, ‘무엇이든’이라고 하셨습니까?”

이들이 조금 안정이 되면 다음 절차를 설명하려 했건만, 이러면 조금 더 일정을 당기는 편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내 손에 이끌려 의자에 앉혀진 야코프 더 비트는 갑자기 달라진 내 태도에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의원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몇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뭐든지! 무엇이 궁금한 것이오?”

“이대로 저희가 암스테르담으로 돌아가 의원님을 내려드리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하실 생각이신지 그것이 궁금합니다.”

“암스테르담에 돌아간 후? 당연히 그 빌어먹을 빌렘 놈을 잡아서 목을 매달든지 해야 하지 않겠소! 감히 공화국에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안보에 금이 가게 한 죄, 공화국 의회의 이름으로 바로 단죄해야 할 것이오!”

요한 더 비트의 아버지가 입에 거품을 물었다. 예상했던 반응이라 덤덤하게 넘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지난밤엔 기습으로 빌렘의 대전략을 무너뜨렸고, 지금부터는 공화파의 분노를 가라앉혀야 한다. 통합된 네덜란드의 미래를 위해.

외교관이란 존재는 국익을 위해서라면 타국의 일에도 이리 힘을 들여야 하는 건가.

어깨가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의원님. 그래도 총독은 네덜란드의 육군 지휘관입니다. 그의 직속 병사들은 오라녜 가에 충성을 다하고 있고, 네덜란드 사람 중 그만큼 군사적 재능을 물려받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나도 알고 있소! 하지만 총독은 의회를 상대로 총구를 들이댔소! 어찌 그런 자를 용납할 수 있단 말이오!”

“그 마음은 이해합니다, 의원님. 헌데, 그렇다면 그 총독과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내전이라도 벌이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의회에서 그렇게 나오면 총독 역시 강경하게 나갈 수밖에 없을 텐데요.”

“그, 그것은…….”

원 역사에서는 암스테르담 시장과 섭정을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라는 빌렘의 요청을 수용했던 주제에, 야고프 더 비트의 태도는 강경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하긴 내가 구해주지 않았더라면 한 달은 더 가까이 억류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야코프 더 비트는 분노를 감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에겐 화를 가라앉힐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해 보였다.

물론 그 때문에 당장 논의해야 할 부분을 넘길 생각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의원님의 입장이 어떤지 완전히 이해했습니다. 다만…….”

“다만?”

“총독의 음모를 이 정도 수준으로 막아낼 수 있었던 것은 저와 트롬프 제독의 공이 컸습니다. 그 정도는 의원님께서도 인정하시겠지요?”

“오라녜에게 꼬리를 흔들 줄만 알았던 제독이 우리를 위해 힘을 쓴 것은 조금 의외긴 하나…… 부정할 수는 없소. 그것까지 부정한다면 네덜란드 사나이가 아니겠지.”

“아마 우리의 조언 덕분에 총독의 군대를 미리 대비할 수 있었던 암스테르담에서도 같은 결론을 내렸을 겁니다. 의원님께서도 저희 계획에 동참해주셔야겠습니다.”

나이 지긋한 의원에게 동의를 받으려는 찰나, 내 시야에 막 선실로 입장하는 한 사람이 들어왔다. 선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온 것인지, 온통 검붉은 피로 뒤덮였던 구군복을 갈아입고 들어온 라위터르였다.

그는 이제 스승에게서 받은 네덜란드 해군의 복장을 걸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나도 모르게 괜스레 입술 한구석을 깨물고 말았다.

“장관?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아, 아닙니다. 저기 더 라위터르 선장이 들어온 것에 잠시 정신이 쏠려서 그랬습니다.”

“하하, 우리 요한이 친구 하나는 잘 두었지. 맨 앞에 서서 조선식 검을 휘두르던 그의 모습은 참으로 대단했다오.”

병영에서 지하감옥까지는 협소한 공간과 좁은 복도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했다. 라위터르는 빌렘의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그곳을 최선두에 서서 돌파했다고 한다.

“아니, 지휘관이 앞서 돌격했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무슨 소립니까, 예판? 당연히 이런 상황에서는 몸소 모범을 보여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는 것이 당연한 행동 아닙니까?”

굳이 소매까지 걷어가며 상처 하나 없다는 것을 어필할 필요는 없는데.

아무튼 우리 전직 통제사께서는 검술 또한 훌륭하게 구사하셨던 모양이다. 하긴 해전에서도 백병전은 기본이었던 시기니 당연한가.

아차, 대화가 다른 곳으로 새어버렸다. 허나 이왕 이렇게 된 거, 이런 상황마저도 의원에게 원하는 대답을 끌어낼 수 있도록 이용해야 제대로 된 외교관이겠지.

“방금까지 피에 젖어 있던 라위터르 선장의 모습을 의원께서도 기억하실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을 구출하기 위해 부상을 입어 걸음조차 겨우 옮기던 우리 조선 병사들 역시 물론 기억하시겠죠.”

“……그 피의 대가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라도 있단 말씀이오?”

“우리 조선에서는 결코 헛된 피를 흘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흘린 피의 대가라기엔 뭐하지만, 저희가 공화국 의회와 암스테르담 시에 요청할 사항에 의원님들도 찬성표를 던져주셨으면 합니다.”

“찬성표라니? 다짜고짜 이런…….”

야코프 더 비트는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기세였다.

탈출시켜준 것은 고맙지만, 이야기를 들려주지도 않고 무작정 찬성부터 해달라고 하니 황당하겠지.

“오해하지 마시지요, 의원님. 저희의 제안은 조선뿐만 아니라 네덜란드 공화국 전체의 이익을 위한 것입니다.”

“공화국 전체의 이익이라니? 대체 어떤 요구를 하려는 것이오?”

무리한 요구 뒤에 이어지는 그럴듯한 요구는 더 효과가 좋기 마련이다. 나는 관직에 뛰어든 이후로 이와 비슷한 상황을 숱하게 겪어왔다.

“저는 의회와 암스테르담이 현재 처해있는 상황을 전부 파악하고 있습니다. 아드님께서도 많은 협조를 해 주셨지요. 그 결과 한 가지 의견에 도달했습니다.”

“그래서 그 제안이 무엇…….”

내 쪽을 바라보던 라위터르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이제 네덜란드인의 입장에서, 내 결정이 옳다는 것을 지지해주고 있었다.

“……오라녜 공과 휴전 협상을 개시하시지요.”

“……!”

“그 협상을 저희 조선이 가운데 서서 중재해보겠습니다, 의원님.”

***

암스테르담에서 남동쪽으로 10km 정도 떨어진 마을, 아브커드(Abcoude) 외곽은 평소엔 보이지 않던 군사들로 가득 차 있었다. 현지 주민들은 군사들이 쓰는 독일어 억양이 잔뜩 섞인 프리슬란드 사투리에 몸살을 앓아야 했다.

“메니어 스타드하우더! 덴 하흐에서 급보입니다!”

야전 책상 위에 양 팔꿈치를 올려놓은 채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던 빌렘의 이마에 주름살 하나가 더해졌다. 가뜩이나 암스테르담 따위에 고전하고 있느라, 총독의 기분은 매우 불쾌한 상태였다.

“뭐냐! 급한 일이 아니라면 함부로 막사에 들지 말라는 명을 못 들었나!”

“하지만 스타드하우더! 덴 하흐의 방위를 총괄하는 마요르(Majoor, 소령)가 보낸 소식입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이전에, 이미 기분이 많이 상한 총독은 호위병에게 놈을 막사에서 쫓아내라는 명을 내린 상태였다. 불쌍한 전령은 총독의 막사에서 거의 내던져지다시피 하여 내보내지고 말았다.

하지만 총독의 기분은 그 모습을 보고도 나아지지 않았다. 오히려 수면 부족으로 충혈된 그의 눈은 편지를 보고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를 뿐이었다.

그렇게 호위병이 우악스러운 손길로 빼앗은 편지를 총독에게 바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후였다.

“홋베르돔(Godverdomme)! 이런 X같은!”

아마 총독이 영국인이었다면 저 말 대신 막사 안이 ‘갓 뎀!’이라는 말로 가득 채워지지 않았을까. 그때부터 계속된 총독의 악다구니는 아브커드 상공에 총성(銃聲)이 몇 번 들리고 나서야 겨우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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