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11화 (211/298)

211화. 네덜란드 유학생

인정한다. 나는 생각보다 단순했던 모양이다.

아침에 요안의 품에서 눈을 떴을 때, 나는 내가 최면술 따위나 걸려 잠드는 단순한 놈이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아.

“내…… 내가 얼마나 잠이 들어 있었느냐?”

“바깥을 보세요, 선생님. 이미 해님이 떠오르기 시작했다구요.”

요안의 손끝이 창밖을 가리켰다.

분명 정신을 잃기 전에는 노을이 내리고 있었는데? 어리둥절한 내 얼굴을 아침의 화사한 햇살이 감쌌다. 요안은 그런 나를 천천히 쓰다듬으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심지어 요안은 나보다 먼저 일어나 있었다.

아니, 어쩌면 밤새 자지 않고 나를 지켜본 것일지도? 에이, 그건 아니겠지.

“정말 죽은 것처럼 주무시더라구요. 제가 오죽하면 이따금씩 선생님 코밑에 손을 대 봤겠어요?”

“아……. 어젯밤에 끝마치기로 계획한 일이 있었는데…….”

“아주 급한 일이 아니면 괜찮잖아요? 가끔은 쉬실 줄도 알아야 몸이 안 상하신다구요.”

내가 깨어났음에도 나를 쓰다듬는 요안의 손길은 멎을 줄을 몰랐다. 그 손길에서 나는 그동안 그녀에게 받지 못했던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묘한 차분함.

요안도 이런 분위기를 낼 줄 아는 여자였었나. 매번 쓰다듬어주는 쪽은 나였는데, 관계가 역전된 것 같아 조금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휴식이 필요하실 때면 언제든 저를 찾아오세요. 언제든지 바로 푹 재워드릴 테니까요.”

“허, 참. 이게 정말로 효과가 있을 줄은……. 허나 몸이 개운해진 것은 사실이다. 고맙구나.”

“뭘요. 저는 선생님의 부인인걸요. 이 정도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죠.”

이제야 원래 얼굴로 돌아온 요안이 씩 웃음을 날렸다. 그러나 몽글몽글한 분위기도 잠시, 녀석이 뒤이어 한 말은 따스함에 흠뻑 취해있던 내 정신을 퍼뜩 들게 만들었다.

“참, 어젯밤에 선생님이 잠드신 직후에, 저하께서 잠시 다녀가셨었어요. 시내의 서점에서 재미있는 책을 찾으셨다나요?”

“재미있는 책? 대체 무슨 책이기에 그 야밤에 나를 찾으셨을까……. 아니 잠깐.”

“유학 이론과 닮은 책을 찾았다고 흥분해 계시던데요. 근데 왜 그러세요, 선생님?”

“……혹시나 해서 묻는 것인데, 저하께서 내가 너와 이러고 있는 모습을 보셨더냐?”

나긋나긋하기 이를 데 없던 요안의 목소리가 순간 멎었다. 그렇게 잠시 흘러가던 정적은, 예전대로 돌아온 녀석의 목소리에 의해 흩어졌다.

“그게…… 네…….”

***

“송구합니다, 스승님. 제가 좋은 시간을 하필 방해…….”

“이럴 때는 아예 언급을 하지 않는 것이 군자의 도리입니다, 저하. 저를 찾아오셨던 용건이나 다시 풀어놓으시지요.”

세자의 얼굴에는 미안함과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미안함 한 스푼에 호기심 다섯 스푼 정도.

못 볼꼴을 보이고 말았다. 연애 일로 세자를 그리 갈군 것이 얼마 안 되었다는 것은 그렇다 치고, 내가 내 제자에게 이런 시선을 받게 될 줄이야. 하아.

“그게…… 서점에서 정말로 흥미로운 일이 있어 스승님께 말씀드리러 갔던 것이었는데, 그런 상황을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정말로 죄송합니다.”

그놈의 책이 얼마나 흥미롭기에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내 방으로 달려왔던 것일까.

책에 그럴 만한 가치가 없으면 세자의 국혼을 훼방 놓는 척이라도 해야겠다는 시꺼먼 생각이 막 들 즈음이었다.

“……암스테르담 시내의 서점에서 성리학과 닮아있는 철학 이론서를 찾으셨다고요?”

“그렇습니다. 이 책에서는 정신과 신체가 서로 다른 종류의 실체라 정의하던데, 이것은 퇴계선생이 이와 기를 논한 이론과 꽤 닮아있었습니다.”

세자가 책 한 권을 내게 밀어놓았다. 그런 세자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침대 옆 탁상에 책이 잔뜩 쌓여있는 것이 보였다.

이거 책 쇼핑하는 방식은 어머니를 똑 닮으셨구만. 유전자는 거짓말을 안 한다더니.

허나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정신과 신체는 다른 존재인가, 아니면 같은 존재의 다른 측면인가.

지구 반대편에서 성리학의 이기론을 다시 접하게 될 줄은 몰랐다.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헌데 저하의 하란타어 실력이 벌써 그 정도로 올라선 것입니까? 제가 보기에도 꽤나 어려운 단어가 많은데요.”

“아, 이 책을 먼저 발견한 사람은 만중이었습니다. 그 아이의 하란타어 실력은 나머지 셋 중에서 따라갈 사람이 없을 지경인지라.”

“벌써 이런 사상 서적까지……. 놀라울 지경이군요. 하긴, 덴 하흐에서도 책을 읽어대느라 정신이 없는 모습을 몇 번 봤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스승님이 짐작하실 만한 이유 탓에 회화는 저를 따를 사람이 없긴 합니다만, 만중의 학구열은 놀라울 정도입니다. 서점 주인이 말하길, 이 책은 네덜란드 사람들도 이해하기 어렵다 하더군요.”

아마 표현보다는 여기 담긴 철학의 개념 자체가 어렵기 때문일 테지. 의외로 성리학을 배웠기 때문에 이해에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헌데 세자가 들이민 책에 적혀있는 저자의 이름이 꽤나 낯이 익었다.

이 사람이 지금 네덜란드에 있었나? 철학은 겉핥기로만 아는 나도 절로 흥미가 돋는 이름이 세자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르네 데카르트요?”

“그렇습니다. 저자가 살아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졸(拙)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했습니다. 만중도 그 점을 상당히 아쉬워하더군요.”

찬찬히 책을 읽어보니 그제서야 익숙한 문장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사실 이치와 형태가 구분된다는 발상만 비슷했지, 두 철학이론은 완전히 다른 성향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김만중의 심정이 조금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세상 반대편에서, 성리학과도 견줄 수 있을 만한 수준 높은 철학을 만나게 된 기분은 분명 짜릿하겠지.

헌데 만중의 학문 탐구는 거기서 끝이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상상도 못했던 이름 하나를 또 듣고 말았다.

“서점에서 지나가던 사람과 논쟁이 붙었다고요? 그것도 아직 십대인 소년과?”

“처음에는 외국에서 온 어린 아이가 무얼 알겠냐는 식으로 나오더니, 만중과 대화를 나눈 후에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무언가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요.”

“하란타에도 어린 나이에 사상을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군요. 그래, 만중이 지금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그 사람이라도 만나러 간 것입니까?”

“아니오. 그것은 아닙니다, 스승님. 허나…… 만중이 스승님께 무언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게 세자가 나를 부른 목적이었나? 하긴, 고작 위대한 철학자의 저서 한 권을 발견한 것이 그리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었겠지.

이윽고 세자의 부름을 받은 김만중이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 공작부인의 응접실에서 기사 이야기를 읽던 때와는 달리, 만중의 얼굴에서는 어떤 결의가 묻어나는 듯했다.

“……하란타에 남아 공부를 더 하고 싶다고 하였는가?”

“예, 예판 대감. 저하께는 송구스러운 일이지만, 어제 소생은 이 땅에 오게 된 이유를 드디어 찾은 것 같습니다.”

“나는 괜찮다. 네가 영원히 하란타에 남아 있을 것도 아니고. 새로운 문물을 깊이 익혀 배워오는 것은 조선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겠느냐.”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세자가 먼저 흔쾌히 찬성을 표한 것을 보니, 만중은 이미 세자에게 자신의 결심을 털어놓은 모양이었다. 결국 네덜란드에 남아서 유학을 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내 하란타에 머무는 동안 자네가 보인 학구열을 모르는 것은 아니네만, 고작 책 몇 권을 접한 일로 그런 결심을 내린 것은 아닐 테지?”

“예. 암스테르담으로 오기 전, 마령서를 구하러 들렀던 레이던이라는 도시에서 들었던 것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이 근방의 모든 고급 학문을 가르치는 서원이 있다고 하더군요.”

“우니베르시테트(Universiteit)라고 불리는 곳 말인가? 대학…… 아닐세, 조선말로는 무어라 바꿔 불러야할지 모르겠구만. 헌데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니?”

암스테르담으로 오는 도중, 만중은 세자를 수행하며 몇몇 정보를 주워들은 모양이었다. 레이던 시에 있는 레이던 대학 이야기를 그때 접한 것인가.

그곳에서는 온갖 새로운 지식을 가르친다고 들었다며, 만중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어댔다. 신학, 법학, 의학, 철학, 수학, 음악학, 천문학까지, 녀석이 배우고 싶은 학문은 한두 가지가 아닌 듯했다.

“그리고, 어제 겪었던 일이 제 마음을 완전히 굳혔습니다.”

“어제 일이라면 서점에서 일어났던 일 말인가?”

“예, 대감. 하란타에서는 고작 잡화상의 후계자도 사대부만큼이나 깊은 성찰을 통해 학문을 갈고 닦고 있었습니다. 이런 나라에 머물 수만 있다면 제 학문도 분명 더 깊어질 것입니다.”

“그건 또 무슨……?”

내가 아는 네덜란드는 그렇게 대단한 학문의 나라가 아닌데? 도대체 만중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가. 머릿속이 얼얼해져 오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만중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그제서야 사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만중이 서점에서 마주친 사람은 근대 철학의 거물이었다.

“그 소년의 이름이 베네딕투스 스피노자라고?”

“예. 저는 그 나이에 이미 자신만의 사상을 구축한 천재는 처음 보았습니다. 사농공상의 구분은 이 하란타 땅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잡화상의 아들이 그런 대단한 사람이라니!”

아, 그건 그 사람이 특이 케이스여서일 텐데? 스피노자는 유럽에서도 한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는 철학자란 말이다.

그러나 내가 무언가 입을 열기도 전에, 흥분한 만중은 이미 기관총을 쏘아대듯 젊은 스피노자와의 대화에서 깨달은 것들을 마구 뱉어댔다.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스피노자의 이론은 율곡 선생의 이기일원론을 떠올리게 한다는 둥, 그가 말한 자연의 섭리가 성리학의 이(理)와 닮아있다는 둥, 만중의 웅변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옆을 돌아보니 세자도 똑같이 이마를 잡고 있었다.

“아시겠습니까, 스승님. 어제 숙소로 돌아온 내내 만중은 이런 상태였습니다.”

“늦은 밤에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있었군요. 이거, 답은 하나뿐인 것 같습니다만…….”

“스승님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저도 그렇습니다.”

보통 이렇게 스위치가 들어간 사람은 막을 수가 없는 법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오늘 해가 질 때까지 만중이 네덜란드에서 배우고 싶은 학문의 내용을 내내 들어야 할 상황이었다.

공중에서 눈이 마주치자, 세자는 입을 다문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 녀석을 네덜란드에 ‘처리’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을 내린 듯했다. 나 역시 그랬다.

조선인 최초의 유럽 유학생은 그렇게 탄생했다.

***

암스테르담에서 남은 일정은 눈코 뜰 새 없이 휙휙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제서야 네덜란드에 온 본래 목적을 착착 수행할 수 있었다.

여기까지 오는데 너무 빙 돌아오긴 했지만, 결과가 좋으니 문제는 없을 것이다, 아마.

“뭣이? 나더러 김 정승 댁 종손자를 맡아 달라고?”

“일 년 내내 맡아달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대군 대감. 평시에는 레이던 시에 있는 학당에서 기숙하며 수업을 들을 것이거든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럼 이국에 아직 관례도 치르지 못한 소년을 혼자 둘 생각이십니까? 본래 외교관의 임무에 현지에 나와 있는 백성들을 살피는 일이 있다는 것을 모르시진 않을 텐데요.”

만중을 맡아달라는 말을 듣자마자 대군의 표정은 삽시간에 썩어 들어갔다. 이 양반, 네덜란드에서 혼자 자유롭게 살 생각이었나 본데, 적어도 자유에 따르는 책임 정도는 져 주셔야지.

“말도 안 된다! 그러다가 그 녀석이 주류 성리학에 벗어나는 배움에라도 젖어들면 어찌하려고 허락하겠다는 것이냐?”

“이미 일차로 정신교육은 완료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대군께서도 만중에게 적절한 관리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알고 계신 모양이군요. 한 시름 덜었습니다.”

대군의 반박은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시꺼먼 속을 내가 모를까봐.

만중이 네덜란드에서 배우게 될 실존주의와 계몽주의 철학이 조선에서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게다가 어제 만중에게 쌓인 감정도 있고 해서, 세뇌에 가까운 정신교육을 아주 적절히 시행한 참이었다.

“그러니까 한수 네놈, 지금 왕족인 나를 한낱 아이의 감시자로 쓰겠다?”

“안 될 것 있습니까? 왕족이시면서 타국의 상주 외교관이 되겠다고 하신 분도 계신데요.”

“으, 으으…… 안 된다! 여기까지 와서 남의 뒤처리나 할 수는…….”

“정말 이런 식으로 나오실 겁니까, 대군 대감?”

대군은 절대 안 된다며 땅에 드러누울 기세였으나, 그의 반항은 금방 진압되었다. 결국 대군의 체류비용을 대는 것은 왕실과 내수사였기 때문이다.

트롬프 제독의 배에서 맛봤던 건빵과 염장고기만 먹고 살고 싶냐는 협박이 결정타였다. 대군이 그런 생활을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는가. 결국 백기를 들고 항복할 수밖에.

그렇게 대군에게 항복 선언을 받아내고, 나는 암스테르담 시청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늘은 암스테르담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동인도회사 측과 오갔던 이야기들에 대해 확정을 짓는 날이었다.

“오셨습니까, 장관님.”

회의실 입구에서 날 맞이한 것은 요한 더 비트였다.

나는 그와 함께 자리로 걸어 들어가며, 비트가 공화파 사이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달라진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회의실에서 앉는 자리부터가 꽤 상석으로 배치되어 있었으니까.

헤이그에서 비공식적으로 공화파의 입장을 대변하느라 나와 처음 만났을 때는 그저 의회의 심부름꾼이었는데, 휴전 협상을 중재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은 모양이었다.

“그럼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조선 사절단이 암스테르담을 떠나기 전 결론을 지어야 하는 자리니, 오랜 회의가 되겠군요, 장관님.”

자리에 앉으며 미소를 짓는 요한 더 비트를 보며, 이제 네덜란드를 떠나 조선으로 돌아갈 날이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늘 이 자리에서 오갈 이야기를 쉽게 결정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내게 날아온 미소에 답하며, 나는 다시 한번 결의를 굳게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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