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그리운 조선으로
“시간이 참 빠르군요. 장관과는 더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었는데요.”
“아, 요한. 여기까지 배웅을 나오신 겁니까? 그러실 필요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는 사이지 않습니까. 마지막 인사 정도는 제대로 해야지요. 그리고…….”
공화파를 대표해서 배웅 나온 요한 더 비트였다.
오늘은 분위기를 자각하고 있는지, 그나마 말수가 적어서 다행이었다.
그의 옆에는 이제 고향에 정착하게 된 피터르가 함께 서 있었다. 동인도회사는 그가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에서 겪은 경험을 꽤나 높이 샀다고 들었다.
그의 출세는 네덜란드 전체가 이번 일로 조선과의 관계를 더 중요히 여기게 되었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는 평소에는 헤이그와 암스테르담 사이를 계속 오가며 대군과 요한 더 비트를 보좌하다가, 조선에서 화물이 들어오는 날에는 그것과 관련된 임무를 전담하게 될 것이다.
“결국 미힐은 끝까지 못 보고 가시는군요. 조금 서운하시겠습니다.”
“뭐, 괜찮습니다. 도버 해협이라는 곳에 또다시 사략선과 엥겔란드 놈들이 날뛰고 있다 들었습니다. 그쪽을 경계하고 항로를 지키는 것이 훨씬 중요한 임무가 아니겠습니까.”
“그 정도는 트롬프 제독님께 맡겨도 되었을 텐데요. 미힐은 도대체 무엇이 그리 급한지 모르겠습니다.”
요한 더 비트의 낯빛이 조금 어두웠다.
라위터르와 내가 끝까지 마지막 인사를 나누지 못한 것이 마음에 계속 걸렸던 듯했다.
솔직히 나도 조금 서운하긴 했다. 그러나 나는 라위터르의 판단을 믿었다.
그가 초계 임무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면 그게 맞을 것이다.
그때였다. 손짓을 받은 요한 더 비트의 수행원이 내 앞으로 걸어 나와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장관께 전해달라며, 미힐이 편지와 함께 이것을 제게 보내왔습니다.”
상자 속에는 익숙한 물건이 들어있었다. 유럽에 들어와서 라위터르가 줄곧 사용하던 그 망원경이었다. 네덜란드로 들어오는 해협에서 영국 함대를 맞닥뜨렸을 때의 기억이 생생했다.
“‘이 망원경이 예판과 나를 다시 만나게 해 줄 것입니다.’라…….”
“만나러 오지 못해 미안하다는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그 친구의 표현 방식이 원래 그런 것은 장관도 잘 알고 계실 것이고요.”
나도 모르게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이걸 보니 정말로 라위터르를 만나지 못하고 조선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확 와닿고 말았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요한 더 비트 역시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사적인 감정에 휘둘릴 때가 아니었다.
“사실 장관님의 말씀대로 엥겔란드 쪽에서 부는 바람이 심상치 않긴 합니다. 놈들이 무역위원회라는 것을 구성해 엥겔란드의 모든 무역을 조정하겠다고 나섰다는군요. 첫 조치로 왕당파에 가담한 식민지와의 교역을 법령으로 제한했다고 합니다.”
“드디어 엥겔란드가 칼을 뽑아들었군요. 그들이 세운 칼끝은 언제든지 공화국을 향할 수 있음을 유념하십시오. 그들이 법령으로 교역을 제한할 수 있는 것은 왕당파뿐만이 아니겠지요.”
“왜 장관께서 군축을 유예하라 권유하셨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아마 미힐도 이런 냄새를 맡았으니 바다로 나간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그렇지. 조금 응어리진 마음이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라위터르는 아무 이유 없이 나 대신 바다를 선택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코에는 이미 내년에 일어날 항해 조례 선포, 그리고 내후년에 일어날 영란전쟁의 냄새가 풍기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나저나, 어려운 상황에 공직을 처음 맡게 되셨군요. 하지만 당신의 능력은 이러한 상황에서 더욱 빛날 것입니다, 요한.”
“장관님…….”
“공화국의 미래를 위해 앞으로도 힘을 내셔야 할 것입니다. 나는 지구 반대편에서 당신을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저도 장관님을 공화국에서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장관님이 공화국에 전해주신 선물을 헛되이 쓰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공화국과 조선의 영원한 친선을 위해.”
“조선과 네덜란드의 영원한 친선을 위해.”
요한 더 비트는 그의 말을 주어만 바꾸어서 따라한 것이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는 몇 번이고 같은 문장을 중얼거리더니, 씨익 미소를 짓고는 피터르와 함께 자리를 비켜주었다.
다음 차례는 배웅을 나온 인파 중 유일하게 조선 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이제는 네덜란드에서 조선을 대표하는 임무를 맡을 봉림대군이 육중한 걸음을 들이밀었다.
“공작은 몸이 좋지 않다고 하더군. 짐작 가는 바가 있느냐?”
“글쎄요. 아마 아끼는 여동생이 영영 조선으로 떠나가게 되었으니 마음이라도 상한 것이 아닐지.”
“그러면 다행이겠다만……. 뭐, 딱히 문제는 없겠지.”
어차피 빌렘이 이 자리에 나오지 않는 것 따위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동생을 보낸답시고 눈물콧물이나 안 쥐어짜면 다행이겠지.
“일단 남기로 한 마당에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이상하다만, 홀로 남게 되면 조금 적적하겠구나. 하란타로 오기까지는 심심할 틈이 없었는데.”
“대군 대감, 어제까지만 해도 자유로운 처지가 되었답시고 행복해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셨던 분께서 약한 소리 하시깁니까. 내일은 또 총독과 말을 달리며 저희를 조선으로 보냈다는 사실마저 금방 잊으실 거 다 압니다.”
“건방진 놈, 마지막이니 조금 무게를 잡아볼까 했더니, 이렇게 나오기가 있느냐?”
방금까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대군의 얼굴에 도로 미소가 올라앉았다.
진작 이럴 것이지. 우리의 작별에 이런 무거운 분위기는 안 어울린다고.
“형님을 잘 부탁한다. 물론 내가 부탁하지 않더라도 네가 어련히 잘 하겠다만.”
“대감께서 전하를 염려하시는 마음이 극진함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제 몸과 마음을 다해 늘 그랬듯이 전하를 보필하겠습니다.”
“그래. 헌데 그렇게 굳게 마음을 먹었건만, 정작 너희를 떠나보낼 때가 되니 왜 마음이 약해지는지 모르겠다. 혼자 남게 되어서 그러한가.”
아마 대군의 네덜란드 생활은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외교관으로서 행해야 할 임무는 그렇다 치고, 낯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향수병을 앓는 것만으로도 버티기 어려울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나는 일 년 가까운 시간을 부대끼며 봉림대군이라는 사람을 잘 알게 되었다. 내가 아는 대군이라면 외교관 역할을 거뜬히 잘 해낼 것이다. 혼자라며 엄살을 떠는 것과는 달리 늘 동행하던 여덟 명의 경호원도 네덜란드에 함께 체류할 것이고.
“그리고…… 판관 박연, 나는 사실 네가 함께 하란타에 남아 나를 도와주길 기대했다. 그런데 조선으로 돌아가길 택할 줄이야. 이 땅은 네 고향이 아니더냐?”
“송구합니다, 대군 대감.”
그동안 존재감이 없던 박연이 대군이 말을 걸자마자 고개를 숙였다.
고향에 다녀온 이후로 급격히 말수가 적어진 박연이었다. 요안이 제 아비를 힘내게 해주겠답시고 이것저것 시도해보았으나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었다.
“그래도 대군 대감의 하란타어 실력은 이 땅에 머무는 동안 급격히 향상되셨습니다. 외교를 행하심에 있어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도 믿음직한 사람이 늘 곁에 남아있는 때와는 상황이 다를 터. 네가 역관 겸 부관으로 있었을 때는 든든하기 이를 데가 없었는데, 아쉽구나.”
“저는 조선 사람이고, 조선으로 돌아가서 마저 해야 할 일도 많으니까요. 저를 높게 평가해주신 것에 대해서는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네덜란드어 회화가 막힘이 없어졌고 피터르 역시 대군을 돕기로 약조했음에도, 대군은 박연을 부관으로 삼지 못한 일을 안타까워했다. 그래도 피터르가 대군을 돕게 되었으니 큰 문제는 없을 것이었다.
사실 나도 역시 대군처럼 박연을 네덜란드에 남기려 했었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이니 박연도 대군과 함께 일정 기간 머물며 네덜란드 현지에서 조선을 위해 활동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으니까.
‘그 건은 거절하겠소, 안 선생.’
‘예?’
‘이제 홀란드에서 얀 벨테브레이는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소. 이런 땅에 더 머물러서 무엇 하겠소. 나는 내 나라 조선으로 돌아가려 하오.’
박연은 네덜란드 방문이 오히려 손해였던 유일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아내는 자신이 죽은 줄 알고 재혼한지 오래였으며, 네덜란드를 떠날 때는 젖먹이였던 자식들도 남을 대하듯 박연을 데면데면하게 대했다고 했다. 오히려 동인도회사에서 박연의 목숨 값으로 받은 보험금을 반납해야 하느냐며 호들갑을 떨었다던가.
부모도 세상을 떴고, 형제자매도 없는 처지인 박연이 이런 상황에서 네덜란드에 더 머물고 싶을 리가 없었다. 대군이 박연에게 부관을 맡아달라는 제의를 더 밀어붙이지 못한 이유가 있었다.
“저는 이제서야 정말로 조선 사람으로 거듭난 기분입니다, 대군 대감.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말아 주십시오.”
“알겠다. 내 괜한 말을 꺼냈지 싶구나. 나를 용서하거라.”
“아닙니다, 대감. 대감을 돕지 못해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연신 고개를 숙이는 박연을 보고 대군은 말문이 막힌 듯했다. 갑자기 분위기가 자리에 어울리게 무거워진 것이 느껴졌다.
대군도 그것을 느꼈는지. 갑자기 입가에 억지 미소를 띠기 시작했다. 박연에게 이번 일을 너무 마음에 두지 말라는 위로를 남긴 대군의 시선이 다시 나를 향했다.
“그럼 결국 덴 하흐에서 외로이 생활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군. 이렇게 되었으니 한수 너는 떠나기 전에 동인도회사에 보낼 편지 한 통만 더 남겨다오.”
“편지라니요?”
“왕족이 일 년 동안 쓸 재물 치고는 체류 비용을 너무 적게 책정하지 않았더냐. 하란타 땅에 홀로 남아 버텨야 할 내 처지를 고려해 달라 이 말이다.”
잠시 사고가 멎었다.
한껏 진지한 대군의 표정이 입에 담은 말과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마터면 저 진지한 표정에 속아 넘어갈 뻔했다.
하, 어쩐지 대군이 자꾸 외로움을 강조하고 이미 끝난 이야기까지 꺼내더라니, 이쪽을 위한 밑밥이었나? 외롭게 타국 땅에서 살아가야할 가여운 대군에게 돈을 더 남겨주세요?
하지만 빌드 업이 너무 어설프다. 이 정도로 내가 쥐고 있는 내탕금 지갑이 열릴 것이라 생각하면 커다란 오산이지.
“안 됩니다. 동인도회사에 투자된 내탕금은 전하와 저하께서 제게 위임하신 것, 한 푼도 허투루 쓸 수 없습니다.”
요청을 칼같이 잘라냈다. 바로 대군의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꽤 볼 만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 내가 저번에도 말하지 않았더냐. 고작 이 정도 은이면 쓰고 남은 금액으로 말 한 마리 사기도 벅찬……. 아차.”
“그럴 줄 알았습니다. 피 같은 내탕금을 그런 용도로 낭비할 수는 없지요. 미리 자백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군 대감.”
“……망할……, 그래도, 어떻게 안 되겠느냐?”
“안 됩니다.”
***
그렇게 나는 가장 먼저 작별인사를 마치고 선실로 향했다. 배가 닻을 올리기 전에 점검해야할 일이 하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네덜란드로 올 때 대군이 쓰던 방을 헨리에트가 쓰고 있었는데, 그녀가 불편한 점은 없는지 확인해야 했다. 가장 중요한 VIP께서 바다에 적응하지 못한다면 출항은 연기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방문에 노크를 하고, 제발 문 너머에서 헛구역질 소리가 들리지 않길 기도하며 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 너머에서 보이는 광경은 기대한 것 이상이었다.
“……이렇게나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고요? 농담 아니죠?”
“공녀님. 일국의 왕비가 되는 일이 쉬울 리가 있나요? 일단 가는 동안 천천히 조선말과 간단한 예절부터 배우셔야 해요. 책을 읽기 위한 한문과 본격적인 궁중 예법을 배우는 것은 그다음이랍니다.”
헨리에트의 방에는 손님이 먼저 와 있었다. 그 손님 탓에 벌써부터 공녀의 기가 완전히 꺾인 것 같았다.
게다가, 저 모습은 대체 뭐란 말인가.
해야 할 일 리스트를 작성한 후, 학생에게 한 줄씩 읽으라 시키며 밑줄을 좍좍 긋는 저 모습, 완전 내 과외 스타일인데?
“……요안아.”
“앗! 선생님?”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게냐. 아직 항구를 벗어나지도 않았는데.”
“그게……. 공녀님이 조금 도와달라고 하셨거든요. 아마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 내명부의 예의범절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저뿐일 걸요?”
지금 하는 것을 보니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진심을 담아 도움을 요청했을 헨리에트의 얼굴이 저리 질린 것을 보면 요안이 얼마나 무거운 짐을 강요했는지 보이는 듯했다.
“장관님……. 이건 조금, 조금 힘겨운 일입니다…….”
“이해합니다, 공녀님. 갑자기 진행하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는 일들이지요.”
요안은 도대체 누굴 닮아 저리 가르치려 하는 건지. 그렇게 가르치면 학생이 너무 불쌍하잖아.
하지만 울상이 된 헨리에트를 본 순간, 내 눈 앞에 스쳐가는 얼굴 하나가 있었다. 네덜란드에 와서 사고를 열심히 쳐 주신 분의 얼굴이었다. 덕분에 반쯤 휴양으로 온 네덜란드 방문이 얼마나 꼬였던가.
그리고 무엇보다 요안의 접근법은 틀리지 않았다. 겨우 공부 따위, 여기 울상이 된 소녀가 넘어야 할 벽 중 가장 낮고 만만한 벽 하나일 뿐이다.
“역시……. 그럼 아내 분께 공부량을 조금 조정하라고 조언을 해 주시겠어요?”
“하지만 공녀님, 요안의 말은 틀린 곳이 없습니다. 언어도 문화도 다른 나라의 왕비가 되는 일이 어찌 쉬울 수 있겠습니까.”
내 말이 예상과 달랐던 걸까. 헨리에트의 얼굴에서 핏기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봐 줄 생각은 없었다. 이 정도 시련도 견디지 못할 사람이라면, 만리타국의 왕비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을 테니까.
“확실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조선의 국왕께나 왕비께 이번 일에 대해 사적인 청탁을 넣을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공녀께서 선택하신 조선행입니다. 악으로 깡으로 버티십시오.
“네? 그럼 저는…….”
“그리고 공녀님, 본래 어떤 일이라도 특혜가 끼어들게 되면, 반드시 훗날 문제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아직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셔도 좋습니다. 천천히 가르쳐드릴 시간은 앞으로 많으니까요.”
“…….”
“저는 이 정도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을 훗날 조선의 국모로 섬길 생각이 없습니다. 아, 이것 말고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저만 성실히 따라오신다면 세자빈 간택은 공녀님 스스로의 힘으로 통과하게 될 테니까요.”
“스스로의 힘이라고요? 그러니까…… 이것들을 전부?”
고개를 끄덕였다. 요안이 헨리에트를 향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는 것이 보였다.
분명 과분한 부담이긴 할 것이다.
간택을 통해 세자빈으로 선발되는 것은 조선의 규수들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그걸 외국인이라는 페널티까지 안은 헨리에트가 통과하려면 지금부터 스파르타 식으로 가르쳐도 한참이 모자랄 테니까. 질릴 법도 하지.
그러나 우리 공녀님이 보인 반응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하얗게 질렸던 헨리에트의 얼굴에 핏기가 돌아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좋아요.”
“좋다고 말씀하심은?”
“원래 어떤 이야기든 중간에 장애물이 끼어들기 마련이죠. 그걸 넘어야만 행복한 결말을 쟁취할 수 있다는 사실은 저도 잘 알고 있어요.”
“…….”
“제 걱정은 하지 말아주세요. 장관께서 생각하시는 계획대로 저를 가르쳐주세요. 그 ‘간택’이라는 것을 통과할 수 있도록 말이에요.”
이제 갓 십 대 중반이 된 공녀다.
지독한 공부량에 절망하거나, 윗선에 잘 좀 말해달라며 떼를 쓸 줄만 알았는데.
“호오, 상상하시는 것보다 더 고된 일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네덜란드를 떠나기로 다짐했을 때부터 이미 굳게 결심했던 일이었어요. 이 정도 일로 꺾일 것이었으면 저하를 따라 조선에 가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내 예상과 달리 헨리에트는 오히려 더 어른스러운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호감도가 마구 올라가는 것이 느껴졌다.
우리 철없는 세자 저하의 짝으로는 아까울 정도였다. 아니, 오히려 그런 세자의 내조를 잘 해낼 테니 잘 어울리는 한 쌍이 되려나.
“좋습니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저와 제 아내는 최선을 다해 공녀님을 도울 것입니다.”
“고마워요, 장관님. 앞으로 부디 저를 잘 가르쳐 주세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헨리에트는 결의에 찬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거, 이런 학생이라면 정말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어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