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출장보고서
“네가 보낸 장계는 잘 받아 읽었다. 그동안 참으로 고생이 많았느니라, 한수야.”
임금은 편전에 들자마자 상선에게 일러 주위를 모두 물렸다. 타인의 접근을 허하지 말라는 명을 내린 것을 보니 어지간히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나름대로 즐거운 여행이었습니다. 얻은 것도 상당히 많았고요.”
“그 말이 옳다. 네가 하란타에서 가지고 돌아온 새 문물만 해도 그동안 우리 왕조가 열리고 들여온 문물 전체에 비길 만한 양이었다. 그 공을 어찌 치하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장계를 펼친 임금은 서안을 뒤적거리더니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이 양반이 그 선물을 마음에 들어 할 줄은 알고 있었는데, 가장 먼저 꺼내들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었다.
혹여나 내가 없던 사이 임금의 먹성이 좋아진 것은 아닐까. 급히 임금의 옆얼굴을 스캔해보았으나 겉보기로는 체중이 그리 달라진 것 같지 않았다. 중전마마께서 잘 관리하고 계신 모양이다.
“하란타에서는 이걸 초콜라데라 부른다고……. 나는 이 독특한 풍미와 달콤함 사이에 숨은 쌉싸름한 향기가 참으로 마음에 드는구나. 상쾌한 것이 박하향과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현지에서는 문트라 부르는 것이나, 박하와 큰 차이는 없을 것입니다. 헌데, 그것이 그리도 마음에 드셨습니까?”
“마음에 들다마다. 다만 조선에서는 만들 수 없는 귀한 물건이고, 중전의 눈도 있으니 아껴먹어야 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민트를 넣은 것과 넣지 않은 것, 두 가지 초콜릿을 임금에게 올렸는데 우리 전하께서는 민트초코 쪽이 더 마음에 드신 모양이었다. 도대체 왜?
긴 여행을 버티지 못하고 녹아 묽은 반죽처럼 된 초콜릿도 저리 맛있어하는데, 그것을 조선에서 직접 만들게 되면 어떤 반응이 나올까 궁금하긴 했다. 다만 네덜란드와 조선의 높으신 분들이 모두 민초를 마음에 들어 하셨으니, 이 시대의 표준은 민트초코가 될지도.
“그러나 이 주전부리는 작디작은 입가심에 불과하겠지. 네가 가지고 들어온 신문물 중에 조선을 뒤흔들어놓을 만한 물건이 꽤 보이더구나.”
“그렇습니다, 전하. 그 중에 무엇이 마음에 드셨나이까.”
“당연히 전부가 아니겠느냐. 그 중 하나를 꼽기가 어려운 것이다.”
“전하를 감히 고민에 빠뜨리다니. 불충한 소신을 용서해주시옵소서.”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던 임금이 웃음을 터뜨렸다가 황급히 입을 가렸다.
아차, 임금이 상중임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러나 임금은 오히려 기분이 조금 가벼워졌는지, 장계를 다시 검토하며 내가 가져온 물목들을 읊기 시작했다.
“일단 차(茶)를 전해준 대가로 그쪽의 차를 받아왔구나. 커피라 했던가? 네가 적어준 방식대로 어제 저녁 중전과 끓여 마셔보았는데 맛이 나쁘지 않았다. 다만.”
“밤에 잡수셨으니 잠을 설치셨겠군요. 웬만하면 아침이나 낮것을 든 후에 드시라 장계에 함께 적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약효가 그리 뛰어날 줄 알았겠느냐. 덕분에 자정이 훌쩍 넘고 나서야 겨우 잠들 수 있었다. 겨우 제 시간에 기침해 대비전에 문안을 드리는데 눈앞이 어질어질하더구나.”
어쩐지 임금의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더라니. 카페인의 각성 효과 때문에 어젯밤은 잠을 된통 설친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도 설탕을 타 먹으니 마실 만했다는 둥, 중전은 그대로 향을 즐기며 마시는 것을 선호했다는 둥 임금은 커피에 대한 감상을 풀고 있었다. 그래도 커피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커피는 차의 일종이지만 사람의 정신을 강제로 맑게 해주는 약이기도 합니다. 제가 그것을 들여온 이유 역시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지금 벌여놓은 일은 많으나 조정에서 일할 신하가 부족해 다들 고생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약까지 하사해 일을 재촉한다면 신료들 사이에서 원망이 들끓지 않겠더냐.”
“오히려 처음에는 서역의 귀한 차를 하사해주셨다며 형님께 감사를 드리겠지요. 신료들이 그것에 담긴 본의를 알아차리게 되면 아마 사약 바로 아래쯤의 물건으로 여기지 않을는지.”
이번에는 임금이 겨우 웃음을 참아냈다. 그 와중에도 임금은 신하들에게 커피를 내리지 않더라도 중전 마음에 든 모양이니 그것으로도 족하다며, 굳이 애처가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보인다, 보여. 멀지 않은 훗날, 에스프레소에 마카롱을 곁들여 티타임을 즐기게 될 강 여사님의 모습이.
“아무튼 약효 하나는 내 몸으로 확실히 확인했으니 쓸 만한 음료라는 것은 확실하구나. 그래, 이것도 대만 섬에서 언젠가 재배할 날이 올 것이라고?”
“일단 저희 몫의 묘목도 바타비아에 맡겨놓고 왔으나, 언젠가 그쪽에서 재배법이 확립이 되고 대만 섬의 조선 정착지가 안정이 되면 재배를 시도할 날이 올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겠지, 그래야 하겠지. 아마 이 커피라는 물건은 주변국에 비싸게 팔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찻잎이 비싸게 거래되는 것은 중원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리고 대만 섬 이야기가 나온 김에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자꾸나.”
“다음이라 하시면…….”
장계에 적힌 문장을 따라 움직이던 임금의 손가락이 멎었다. 아마 읽어본 적이 없는 낯선 단어가 나타나서일 것이다.
“이것은 기나라 읽는 것이냐? 기나 나무 껍질이라……. 이 껍질 조금이 온 내의원의 개똥쑥이 낼 수 있는 약효에 필적하다니.”
“귀국하는 길에 대만 섬에 들렀었습니다. 작년에만 원인 모를 열병으로 적지 않은 희생자가 나왔다 하더군요. 이것만 있었어도 사망자를 꽤 줄일 수 있었을 겁니다.”
“아마 모기를 적극적으로 쫓으라는 네 조언이 없었더라면 더 많은 희생자가 나왔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병 탓에 개척 의지를 잃는 백성들이 적지 않았는데, 특효약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큰 도움이 되겠구나.”
“분명 값이 싼 약재는 아닙니다만, 은을 지출할 가치는 충분히 있을 것입니다. 정착촌의 백성들이 상감마마의 은덕에 감동해 눈물까지 흘릴 정도였으니까요.”
귀국길에 시찰을 겸해 들렀던 대만 남부의 조선인 정착촌에서 내가 두 눈으로 확인한 결과였다. 임금이 귀한 약재를 지구 반대편에서 사서 보냈다는 말을 들은 백성들이 한양 방향을 향해 넙죽 절을 올렸었지.
“그래. 백성들의 마음을 사는 일만큼 중요한 일은 없지. 그것을 보위에 오른 후로 잊은 적이 없었다. 네게 하란타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 전권을 위임하길 잘 했구나.”
“그와 함께 가축까지 선물 받았으니, 이제 대만 섬에 정착한 백성들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할 것입니다. 대만 섬을 개척해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라는 임무 말입니다.”
“조선의 소에 비해 우유를 많이 짜낼 수 있다던 하란타의 소 말이더냐. 사실 네가 없는 사이 유제품 소비를 줄이라며 간쟁이 한 번 있었었다. 송아지가 먹어도 모자랄 우유를 빼앗아 먹지 말라고 했던가.”
밥 먹고 하는 일이 국정에 태클 거는 것인 삼사 대간 중 하나가 우유 건으로 임금에게 딴지를 건 모양이었다. 유목민들에게 사들인 소는 한우에 비해 젖이 많이 나오는 편이었음에도 그런 간언이 날아왔으니, 유제품을 좋아하는 임금이 받은 스트레스가 오죽할까.
“그 얼룩소는 과장을 조금 섞어 우유를 물처럼 낸다고? 임금이 아닌 나 개인에게는 가장 좋은 선물이로구나.”
“하란타의 동쪽, 프리슬란드라고 불리는 지방의 소입니다. 중간 기항지인 말라카와 바타비아에 많이 들어와 있지 않던 녀석이라, 조선까지 데려오는데 애를 조금 먹었습니다.”
살아있는 생물을 지구 반대편으로 옮기는 일이 쉬울 리가 없었다. 좋아하는 건초를 먹이고, 기항할 때마다 하선시켜 스트레스를 풀게 하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조선까지 실어온 소는 처음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나마 말라카와 바타비아에서 몇 안 되는 홀슈타인 소를 더 구입해 오지 않았더라면 조선에서 번식시킬 수 있는 머릿수를 맞추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안 그래도 맛이 가기 일보 직전인 녀석들은 대만에 맡기고 오기도 했고.
게다가 이번에 들여온 가축은 소가 끝이 아니었다. 이미 식육용 돼지와 닭은 네덜란드로 떠나기 전 청에서 수입을 해놓은 상태였고, 이 김에 추가로 산란계, 즉 계란을 얻기 위한 닭도 도입에 성공한 것이다. 덕분에 배 한 구석이 닭똥 냄새로 진동을 하긴 했지만.
많아야 사흘에 알 하나를 낳던 토종닭에 비해 많으면 사흘에 두 개까지도 알을 얻을 수 있는 품종이라는 말에 임금은 흡족함을 감추지 못했다. 임금은 백성들에게 먹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가축 이야기를 하니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다. 한수 네가 장계에 쓴 문장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던 문장이 있었는데, 그것이 무엇인 줄 아느냐.”
“확신은 하지 못하겠으나, 방금까지의 화제를 생각하면 무엇인지 알 것도 같습니다.”
“모든 백성이 일요일이면 닭고기를 먹을 수 있는 나라를 만들라 했던가? 프랑스라는 나라의 명군이 한 말이라고? 나는 이것만큼 내 치세에 이뤄야 할 목표를 적절하게 표현한 문장을 듣지 못했다.”
임금은 내가 장계에 인용한 앙리 4세의 명언이 너무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어젯밤 커피를 마셔 잠이 오지 않는 동안 어필(御筆)을 몇 장이나 남겼다고 했다.
갑자기 관리해야 할 어필이 늘어나 업무폭탄을 맞은 승정원에 애도를 표했다. 임금은 그런 내 속도 모르고 빙그레 사람 좋은 웃음만 띠고 있을 뿐이었다. 전국의 수령들에게 이 어필을 전부 보낼 것이라나.
***
하지만 말랑말랑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인 듯했다. 목이 탄다며 임금이 물로 입을 적신 후, 기묘하게도 편전에 감도는 분위기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가벼운 이야기는 이쯤 해 두고, 이제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구나.”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알겠습니다. 하란타에서 예상치 못한 일들이 워낙 많이 일어났는지라.”
“지금까지 나눈 이야기들은 네가 하란타로 떠나기 예고를 하고 간 것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을 연달아 들고 올 줄이야.”
본인은 수리시설을 개축하고 이앙법을 보급하는 데도 골머리를 썩였는데, 잘도 이런 큰일들을 벌여놓았다며 임금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사업의 결과가 꽤나 성공적이었음에도, 임금이 그 성공을 머릿속에서 잠시 내려놓을 정도로 중대한 일이긴 했다.
“일단, 봉림대군이 하란타에 남아 상주외교관을 하겠다 자원한 일은 문제가 없다. 대군도 내가 허락할 것을 알고 있었으니 저지르고 보았겠다만.”
“아마 대군 본인의 마음에는 계속 짐이 남아있었던 것 같습니다. 졸(拙)한 김상헌이 대군을 세자로 옹립하려 했던 그 일 말입니다.”
“그 일에 봉림의 책임이 있다고 볼 수는 없으나……. 녀석이 외교관에 자원해 외국을 돌았던 것과 아주 관련이 없진 않겠구나. 녀석만큼 나를 생각해주는 아우는 없을 테니까.”
장계와 함께 전달한 봉림대군의 편지를 읽으며, 임금은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생각해 이역만리 타국 생활을 선택한 아우에 대한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서로 청나라에 볼모로 가겠다고 다투던 시절부터 둘 사이는 돈독했었지. 대군이 정말로 그 일 때문에 조선에 돌아올 생각이 없다면, 그의 가족이라도 곁으로 보내줘야겠다며 임금은 씁쓸한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그러나 두 번째 문제는 조금 심각할지도 모르겠다. 하란타인 세자빈이라니, 이 일은 조정에서 절대 묵과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네가 그걸 모르고 공녀를 데려온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지.”
“알고 있습니다. 제 아내와 장인의 출신이 그러한데, 제가 어찌 모를 수 있겠습니까.”
“이 일을 추진한 것이 너와 봉림이 아니었으면 바로 공녀를 하란타로 돌려보냈을 것이다. 내가 가장 믿고 아끼는 사람 둘이 허락한 일이니, 무슨 곡절이라도 있을까 하여 세세한 것을 따져보게 된 것이지.”
임금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이해할 만한 반응이었다. 조선처럼 폐쇄적인 국가에서 국모를 외국인으로 맞는 일이 쉽게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헨리에트라 했나? 하란타의 공녀를 세자빈으로 맞았을 때 얻는 이득이 무엇인지는 명확히 알겠다. 하란타와 더 단단한 우호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거대한 이득임이 분명하니까.”
“하란타와 통교한 이래로 그들의 힘을 빌려 많은 이익을 얻고 있는 것이 사실이니, 혼인을 통해 굳건한 동맹 관계를 형성하는 일은 조선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지참금 조로 딸려보낸 인력 역시 큰 도움이 될 것이고요.”
“그 말 또한 옳다. 하지만…….”
임금이 말꼬리를 흐리는 이유를 나도 알고 있다.
신하들의 반발 역시 얻을 수 있는 이득만큼 거대할 테니까. 아마 원 간섭기에 몽골의 공주를 왕비로 삼아야 했던 전례를 들고 나와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어린 나이에 침착하게 대군의 구출을 돕고, 새로운 의술을 주저 없이 자신의 몸에 먼저 실험했다…….”
“장계에 올린 내용 중에 과장이나 거짓은 없습니다, 형님.”
그러나 헨리에트는 그런 반대를 무마하고 세자빈에 올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보여준 자질들을 보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테니까.
게다가 이미 그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배운 조선말을 이미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었다. 세자에 대한 애타는 감정이 학습 속도를 끌어올린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네덜란드에서 역사를 바꿔버린 결과 그녀는 임금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이제는 단순히 네덜란드 한 나라와의 친선이 걸린 문제가 아니게 될지도.
“……뭣이? 그 말이 사실이렷다?”
현재 영국과 네덜란드의 상황, 그리고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전해들은 임금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당연했다. 지금은 왕도 아니고 권한을 제한당한 총독에 불과한 빌렘이, 이후 다섯 나라의 왕이 된다고 하는데 그 말을 쉽게 믿을 수 있을 리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나 다시 총독이 요절할지도 모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그가 오래 살아남게 되거나 공작부인과 사이에서 왕위계승권을 가진 자식들을 더 낳게 된다면, 역사는 크게 달라집니다.”
“원래는 영길리에 밀려 쇠퇴하는 하란타가 전성기를 더 길게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니. 아니, 아예 한 나라가 될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그 연합왕국의 임금 자리에 하란타 공의 가문이?”
“그렇습니다, 형님.”
혼란이 극에 달했는지, 임금은 양손으로 마른세수를 몇 번 하더니 생각에 잠겨들었다. 속성으로 공부한 유럽의 복잡한 현황에, 미래 지식까지 갑자기 훅 들어왔으니 머릿속이 복잡할 만도 했다.
“세자빈 건은 조금만 시간을 두고 결정을 내리겠다. 이 건은 중전과 더 상의를 거쳐야 할 것 같구나.”
“그러실 것 같았습니다. 이번 혼인으로 얻게 될 연결고리는 조선의 미래까지 크게 뒤흔들 수 있는 일이니까요.”
말을 마치자마자 임금은 턱을 괴고 도로 생각에 빠져들었다. 이제 장계에 올린 내용은 전부 논의했으니, 임금에게 하직인사를 올리고 물러가기 위해 막 몸을 움직이려 들었을 때였다.
“잠깐, 네게 할 말이 아직 남아있다. 네가 조선을 비운 사이 너를 급하게 찾는 사람이 있었던 것을 아느냐.”
“저를 급하게 찾는 사람이라니요? 짐작이 가는 것이 없습니다.”
생각에서 깨어난 임금이 나를 도로 주저앉혔다.
급하게 나를 찾는 사람이 있었다니, 처음에는 혹시 이 양반이 하연의 이야기로 나를 놀리려 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자리에 흐르는 분위기는 농담이 오갈 분위기가 아니었다.
“김 별장의 행방을 물었었지. 그는 지금쯤 만주 어딘가에서 적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을 것이다. 정예 총통위 병력을 이끌고 말이지.”
“김 별장이 저를 찾았습니까? 아니, 그런데 총통위를 이끌고 만주에서 싸움을 벌일 일이……. 아.”
“그런 일로 내가 너를 주저앉힐 리가 없지 않느냐. 네 반응을 보니 이것 또한 원래 일어났어야 하는 일인 모양이로구나.”
임금이 서안에서 화려하게 장식된 두루마리 한 통을 꺼내 내밀었다.
오랜만에 보는 청나라 장식, 그것도 황제가 내리는 칙서에 걸맞은 장식에 나도 모르게 시야가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