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화. 돌잔치
임금이 미안할 만한 일이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일이라고 해도, 일 년이 넘는 초장기 출장을 끝내고 겨우 돌아왔다가 또다시 먼 곳으로 가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 일을 그 누가 원하겠는가.
그나마 임금이 나를 배려해주었긴 하나, 그 고마운 마음씀씀이도 집으로 돌아가는 내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지는 못했다. 아무리 청나라까지 가는 여정이 많이 수월해졌다지만, 공식적인 사신 파견이니만큼 짧은 기간만 머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게 일국의 예조판서인지, 아니면 조선의 국제외교 담당 노예인 건지. 하아…….’
그러나 한숨도 잠시였다.
귀가를 마치고 대문이 열린 순간, 내 눈꺼풀을 누르고 있던 불만은 눈 녹듯 녹아내렸다.
“우희야! 아빠 오셨나 보다! 뭐라고 옹알이라도 해 봐! 방금까진 잘 했잖아!”
“요안아!”
날이 좋아서 한낮의 햇볕이라도 쬐고 있었던 건지, 두 여인은 마당을 산책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 와중에 대문이 열리자마자 나를 발견하고 달려오는 요안의 품에는 아기가 안겨 있었다.
“아부부부!”
“어머, 진짜 하네? 언니, 들었어요? 얘, 선생님을 닮아서 머리도 좋은가 봐요!”
우희를 처음 접했을 때는 아기가 너무 귀엽다며 정신도 못 차렸던 주제에, 이제는 엄마보다 더 엄마인 척을 하고 있는 요안을 보고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한 걸음 뒤에서 걸어오는 하연의 입가에도 같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 혼자 아이를 낳느라 고생했다고 울고불고 할 때는 언제고……. 서방님 놀라시겠다, 요안아.”
“그때는 저도 모르게 그만……. 아무튼, 우희는 너무너무 귀여운걸요! 아마 조선에서 제일로 귀여운 아기일 거예요! 선생님도 그리 생각하시죠?”
결국 어제 아기를 보고 싶은 마음을 못 참고 안채로 들이쳤던 녀석이었다. 오랜만에 하연과 단둘이 보내던 시간을 방해받아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아기를 보고 함박웃음을 짓다가 언니가 홀로 고생했다며 펑펑 울기를 반복하는 녀석에게 타박을 날릴 겨를이 없었다.
“아무리 집 안이라지만 너무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서방님도 당황하신 모양이잖니.”
“앗, 아아……. 죄송합니다. 제가 또 혼자 들떠서 그만…….”
그렇게 한참을 울고 웃던 녀석은 숫제 아빠라도 된 것처럼 제 손으로 아가를 평생 지키겠다는 선언까지 날렸다. 제 손가락을 덥석 쥔 우희를 보고 말없이 경탄을 감추지 못하던 길산이 녀석이 오히려 요안보다 더 어른스러울 지경이었다.
웃기지도 않아서, 참.
어라?
“아…….”
어느새 머릿속을 무겁게 누르고 있던 걱정은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밝은 집안 분위기 때문일지, 아니면 요안의 호들갑 때문일지는 모르겠다.
“괜찮으세요, 당신?”
“선생님, 혹시 저 때문에 기분이 상하신 건 아니죠? 어머?”
말없이 내 가족들을 끌어안았다.
이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들의 입가에 웃음이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면 그깟 사신 일 쯤은 하루 종일, 아니 일 년 내내라도 할 수 있었다.
***
다행히 하늘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 모양이었다.
딸아이가 첫 생일을 맞이할 때까지 북쪽으로 통하는 역참에서는 별다른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임금의 배려는 배려대로 받아가면서 오랜만에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몇 달 되지 않는 기간이었지만 참으로 달콤한 휴식이었다.
물론, 완전히 내려놓고 쉴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에 비하면’ 휴식에 그치는 수준이긴 했지만.
“진짜 나는 이런 반푼이가 어떻게 나랏일을 그리 잘 해내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제 아내가 아이를 가진 것도 모르고 하란타로 떠날 수가 있었던 거냐? 가는 길에 발병이라도 나지 않았더냐?”
“선진, 너무 그렇게 닦달하지 마십시오. 성근이 이런 쪽으로 눈치가 둔한 것이 하루 이틀 일입니까? 청국으로 떠날 때도 그리 답답하던 사람인데요. 제가 누이를 시집보내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나저나 모자란 아비와는 다르게 딸은 엄마를 닮아 영특해서 다행이구나. 저렇게 더듬더듬 단어들을 말하는 것을 보면 보통 아이와는 벌써부터 다르지 않냐.”
이런 타박을 들으려고 이놈들을 돌잔치에 초대한 것이 아니었는데.
처가 사람들만 초대해 조촐하게 우희의 탄생을 기념하려 했었으나, 일이 완전히 꼬여버렸다.
하긴 여기서 나를 신나게 갈구는 놈 중 하나가 하연의 오라비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다.
“그나저나 사형, 나랏일이 바쁘다며 죽을상을 할 때는 언제고, 남의 돌잔치에 와서 험담을 늘어놓을 여유는 있으신 겁니까? 강 사인(舍人, 정4품)이 나랏일에 여유가 생겼다며 전하께 넌지시 말씀이라도 드려야 할까요?”
“저, 저 매정한 놈 보게. 네가 하란타에서 잔뜩 가져온 일거리를 처리해준 사람이 누군데 어찌 그런 망발을 지껄인단 말이냐, 은혜도 모르는 놈. 안 그래도 벽란항에 흘러드는 유민들 처리 문제로 골머리가 깨질 지경인데.”
“도성 밖에 하란타 정착촌을 마련해주신 것은 감사하지만, 신료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 아닙니까. 어차피 교역이 활발해질수록 사형 주머니도 두둑해지는 걸 누가 모를까봐서요?”
“우리 한수, 대감을 달고 하란타까지 다녀오고도 예전과 변한 것이 없구나. 이 사형은 그런 소나무 같은 사제가 너무나 든든하노라.”
술잔을 훌쩍 비워낸 충신이 너스레를 떨어댔다. 요새는 매일같이 벽란항에 드나든다며 불평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사실 그것은 엄살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애초에 조정을 벗어나지 못해 안달이던 사람이 아니던가.
자신이 잠시 대만에 다녀온 사이 놈들이 주제를 잊었다며 길길이 날뛰던 충신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이미 예전에 수하로 들였던 개성상인, 송상(松商)들이 군기가 빠졌다나.
“어차피 무슨 생각을 가지고 그 일에 자원했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사형이 사적인 일을 나랏일보다 우선하지 않는 사람이기에 가만히 있는 거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바로 사헌부에 감찰을 요청했을 겁니다.”
“야, 인삼 사업이 얼마나 조선에 중요한 사업인데 그걸 사적인 일이라고 표현하냐? 얼마 전에 하란타에서도 홍삼 주문이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한 사람은 다른 안 대감이었냐?”
“어쨌건 조정을 통해 명이 내려간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수익을 나라에 전부 바치는 것도 아니고요.”
“이 천하의 못된 놈 같으니라고. 내 너 없는 사이 몸을 갈아 넣어 수운 체계를 개선해놨는데, 사제라는 놈은…….”
한껏 우울한 척을 해대는 충신의 눈앞에 술병을 들이밀었다. 늘 그랬지만 이 인간을 대하는 일이 임금을 대할 때보다 더 까다로웠다.
하지만 충신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아직 충청도에 한정된 이야기고, 이것을 확대하려면 몸을 더 갈아넣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가 충청도를 암행하며 얻은 경험을 기반으로 수운(水運) 체계를 뜯어고쳐놓은 덕분에, 세곡선의 침몰이 급격히 줄어들고 올해 조정에는 전례가 없을 정도의 세곡이 들어왔다고 전해들었다. 아마 경강상인 시절부터 충신이 쌓아온 경험도 큰 도움이 되었겠지.
이제 바다를 오가는 조운선은 전부 예성선으로 대체되었다. 그동안 끊임없이 교역선을 건조해 바다에 투입한 결과, 조운선으로 신식 선박을 투입할 여유가 생겼던 것이다. 덕분에 국내를 오가는 물류도 암초와 물골이 득시글거리는 근해를 피해 안전하게 오갈 수 있게 되었다
“그뿐인 줄 아냐? 대만 섬 시절에는 정착촌 백성들에게 필요한 식량과 물자를 구하러 남경까지도 몇 번이나 왕복했어야 했다. 쉬러 간 곳에서 오히려 고생을 더 하고 왔는데,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단 말이냐?”
“남경 방문은 도중에 명국의 함대를 염탐하려는 목적도 있지 않았습니까. 헌데 선진, 남경까지 여러 번 다녀온 것은 그 이유만은 아니었지 않습니까? 송 대사헌 말로는 야다시 자리에서 탄핵 논의가 꽤 진지하게 오갔다던데…….”
“좌명이 너도 모르는 일 가지고 함부로 말하지 마라. 이미 아무런 혐의가 없다 인정받았으니까. 그 일만 생각하면 골치가 아프다, 아주.”
충신이 입수해온 명나라 함대에 대한 정보는 이미 나도 검토한 바가 있었다.
아직 정성공에게 밀무역을 들킨 적은 없었으나, 언젠가는 반드시 그의 함대와 해상 패권을 놓고 충돌할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점점 해상으로 영향력을 뻗어나가고 있는 조선은 곧 정성공의 눈엣가시가 될 것이다. 생각보다 그날은 빨리 올지도.
헌데 또 다른 이유라니? 말을 뱉자마자 좌명이 한쪽 입술을 구기는 것을 보면 심각한 건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면 송시열이 탄핵을 운운했을 리가 없었다.
“아, 성근 자네는 모르겠구만. 우리 장가도 못 간 난봉꾼이 무엇이 좋다고 조선까지 따라온 여인이 있었다네. 그러니 야다시의 이야깃거리가 된 것이고.”
“일정, 그 말, 정말인가? 사형, 내 분명 말하지 않았습니까. 파견지에서 백성의 아녀자를 건들지 말라…… 읍읍!”
“건드린 적 없다. 한수 너, 내가 청국에서 돌아온 이후로 여색에 빠졌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냐?”
생각해보니 그랬다.
심양에서 두세 다리는 가볍게 걸치던 이 인간이 귀국하고 나서는 여자 문제에 휘말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잘 숨기고 다니겠거니 생각했는데, 충신의 진지한 표정을 보니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제서야 충신이 언제부턴가 쓸쓸한 분위기를 풍기고 다니던 것이 떠올랐다.
“잠깐, 선진. 저는 지금까지 농담인 줄만 알았는데, 그 말 진심이셨습니까? 앞으로 혼인 같은 거, 안 하겠다던 그 말?”
“진심이다. 한수 너도 내게 똑같은 말을 들은 기억이 있을 게다. 어차피 집안을 이을 사람은 많으니 굳이 후사에 연연할 필요가 없지 않겠냐. 그러니 혼인도 생각이 없어진 것이고.”
“아니, 그래도 선진이 좋다고 따라온 여인은 남경에서 제일가는 기녀라 하지 않았습니까? 선진 같은 사람이 어째서……?”
“평소였으면 고자 소리를 뱉었을 좌명이 네놈이 그러지 않는 것을 보면 그래도 나이 먹고 눈치는 조금 생긴 모양이구나. 됐다. 술이나 한 잔 더 다오.”
방금까지 흥에 들떠 있던 자리가 삽시간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내게 술병을 빼앗아 단숨에 반을 비운 충신은 거칠게 입을 닦더니 내게 사과부터 전해왔다.
“좋은 날인데 분위기를 망쳐놓아서 미안하다. 그냥 못 들었던 일로 하고 네 딸 생일이나 축하하도록 하자.”
“사형…….”
“별 일 아니다. 남경에 갔을 때 밀무역 건으로 몇 번 마주했던 구백문이라는 기녀가 내 무엇이 마음에 들었는지 나를 따라왔거든. 헌데 나는 그 여인을 받아들일 수 없어 따로 기루에 머물게 하고 있을 뿐이다.”
구백문이라면 내가 남경에 갔을 때 처음으로 접촉해왔던 기녀 구백문을 일컫는 것인가?
사연이 궁금했으나 싸늘하게 굳은 충신의 얼굴을 보니 더는 캐물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니, 캐물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하필 그 사람이 기녀만 아니었어도…….”
“사형?”
“아, 아니다. 잊어라. 대신 분위기를 망친 대가로 내가 좋은 것을 하나 알려주지.”
“좋은 것이라니요?”
“나, 사실 열 살짜리 딸아이가 딸려 있는 홀아비다. 그래서 여태 혼인을 안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궁금증이 좀 풀렸냐?”
이건 또 무슨 폭탄선언인가.
옆을 돌아보니 좌명의 입이 쩍 벌어져 있었다.
아마 내 입도 같은 꼴일 것이다.
“에이, 선진.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농입니까. 아이가 그때 태어났으면 선진이 심양에 있던 시절이 아닙니까. 그럼 성근이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생각해보니 그렇네? 이거, 네놈들 상대로 안 하던 거짓말을 하려니까 영 형편이 없구만. 그래도 아까보다 분위기는 나아진 것 같으니 너희들도 한 잔씩 해라!”
“애초에 선진이 십 년이나 저희한테 아이를 숨길 정도로 꼼꼼한 사람도 아니지 않습니까? 진짜 딸이 있으면 우리 석주와 혼담을 나눠보는 건 어떻습니까? 이 술은 합환주인 셈 치고요.”
“좌명이 네놈은 자식으로 농을 칠 기분이 들더냐? 에라이.”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분위기는 다시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마치 충신이 일부러 유도라도 한 것처럼.
한편, 다시 예전처럼 농담을 주고받는 충신과 좌명 너머로, 마당쇠에게 책 한 꾸러미를 들려 안채로 들어서는 사람 하나가 보였다. 우희가 돌잡이에서 책을 잡은 것을 보자마자 영의정 체통도 잊으신 채 운종가의 세책점으로 달려가셨던 장인어른이었다.
“우리 예쁜 손녀! 청풍 김가의 후손답게 책을 잡을 줄 알았다! 할아비만 믿거라! 네가 읽고 싶은 책은 내가 감투를 팔아서라도 마련해 줄 테니!”
아니, 장인어른, 영의정 감투를 팔아서까지 살 책이 세상에 존재하긴 합니까?
푸우. 막 술잔을 들이키려다 아버지의 팔불출 모습을 그대로 목격한 좌명이 그대로 입 안에 든 술을 뿜어냈다.
친구의 추태에 충신이 낄낄거리는 소리가 안채 마당을 가득 채웠다.
***
그렇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의 돌잔치가 끝나고도 나는 쉽사리 마음을 놓지 못했다. 도르곤이 언제 청나라로 나를 불러낼지 모르는 가시방석과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 기원이 하늘에 통했을까. 청나라에서 보낸 칙사가 압록강을 넘었다는 소식은 한동안 들려오지 않았다. 그리고 김 갑사를 비롯해 북만주로 파견되었던 총통위는 큰 군사적 충돌 없이 조선으로 귀환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니 다음번을 기약하자……. 그 전언이 사실인가, 김 별장?”
“예, 전하. 틀림없이 청장 하이써라는 자가 북경에서 보내온 명령이라며 그렇게 말했나이다. 나선의 무뢰배들이 토벌대의 존재를 눈치 챈 것인지 올해는 활동을 극도로 줄였다 했사옵니다.”
귀환한 김 갑사를 편전으로 불러들인 자리에서 들려온 것은 기대 이상의 희소식이었다. 임금과 눈을 마주친 후, 나는 그제서야 천천히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