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화. 초임군관 김악기의 요인 경호
총통위 초임군관 김악기는 군기가 바짝 들어 있었다.
그는 몇 년 전 살마주 정벌 당시 수군에 자원한 서자 출신 병사였다. 그 싸움에서 적선에 불을 붙이는 공을 세워 군관도감에 입학을 허가받은 것은 그의 일생 최고의 행운이었다.
서자라고 아들 취급도 하지 않던 아비가 축하를 해줄 정도였다. 김악기는 그 순간, 인생이 바뀐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생각만 해도 비명이 나오는 훈련들을 견뎌내고, 첫 사냥까지 성공해 짐승탈을 장만한 것까지는 좋았다. 아니, 갓 군관도감을 수료하고 총통위에 배치 받을 때까지만 해도 김악기는 인생 최대의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군관도감을 수료한 성적도 훌륭해 그는 누구나 선망해마지 않는 금군 자리를 꿰찼다. 금군 중에서 그가 배치된 번(番) 역시 역전의 용사들로 가득한 베테랑 집단으로, 단 하나의 결원 자리에 김악기가 신입으로 끼어들게 된 것이었다.
“야, 신입. 정신 똑바로 안 차려?”
“황건철 군관님…….”
“전하의 경호는 총통위 최고의 전사들만이 맡을 수 있는 임무다. 영광으로 여길 생각은 하지 않고 정신을 놓고 있어?”
악으로 깡으로 버티라며 을러대는 선임의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럴 만도 했다.
오늘의 경호 임무는 풋내기가 맡기에는 너무나 정신력 소모가 큰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별군관 황건철 역시 속으로는 마른침을 거듭 삼키고 있었다.
“조선 제일 부대 중에서도 제일 번만이 맡을 수 있는 임무다. 변복, 잠행, 맨몸 격투, 암기술에 능통해야 하지. 도감에서는 그런 것도 안 가르치나?”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런데 왜 이리 얼이 빠져 있나?”
“그, 그것이……. 금상 전하 외에도 다른 분들이 있다는 이야기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집춘문이 벌컥 열렸다.
먼저 문을 빠져나온 것은 번의 지휘관인 번장(番將) 두 명이었다. 오늘은 총통위 금군 중에서도 가장 전투력이 뛰어난 두 개 번이 경호를 맡고 있다.
그만큼 집춘문에서는 중대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문을 나선 번장 둘은 인적이 드문 거리를 살피더니 순식간에 담장을 넘어 안전 지역 확보에 들어갔다. 언제 봐도 혀를 내두를 솜씨였다.
주상께서 청나라에 계시던 시절부터 모셨던 숙련병들은 확실히 사소한 동작부터 때깔이 달랐다.
“이야…….”
“쉿!”
황건철이 신입에게 매서운 눈빛을 쏘기 무섭게, 집춘문 안에서 오늘의 경호 대상들이 납셨다.
갓에 도포, 쾌자 차림을 한 평범한 선비 셋 같아 보이지만, 저분들이야말로 조선의 국본 그 자체인 것이다. 아, 엄밀히 말하면 한 분은 국본이 아니지만.
김악기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오늘 경호하는 대상 중 한 분이 그를 비롯한 신임 군관들의 우상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총통위 중에 부대의 창시자인 그분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전하, 다시 한번 재고해주시옵소서. 도성 내부에 비해 외부는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곳이옵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신이 어찌 얼굴을 들고 살아갈 수 있겠사옵니까?”
‘세상에, 정녕 저분이 내가 아는 호랑이 장군과 같은 분이 맞나?’
살마주의 전장에서 호랑이처럼 달려가 왜구 놈들의 가슴팍에 호총탄을 박아 넣던 안 대감의 모습은 아직도 김악기의 눈에 선했다.
헌데 조선군에 수많은 전설을 남기신 분이, 풍채도 저리 당당하신 분이 저리 쩔쩔매시다니?
임금에게 신하가 쩔쩔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김악기가 전장에서 목격했던 장군의 모습과는 너무 차이가 크지 않은가. 유구국의 왕과 살마주의 번주를 쥐락펴락하던 모습과 비교하면 말이다.
기억에 남은 것과 조금 다른 모습에, 김악기는 조금 혼란스러워졌다. 유일하게 속을 터놓는 상대에게 임금이 자주 의지한다는 사실을 나중에 별장에게 듣게 되지만, 아무튼.
“한수야, 우리는 지금 궐문을 넘었다. 이미 지난번부터 약속한 바가 있지 않았더냐?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냐? 아니면 지금 어명을 어기려 드는 것이냐?”
“혀…… 형님. 하지만 성저십리가 상대적으로 위험하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부디 도성 안만 잠행하는 것으로 마음을 고쳐 주십시오.”
“도성 내부는 이미 가볼 곳은 다 가보았느니. 게다가 네가 계획하는 일 중 시찰하지 못한 것이 딱 하나 남아있지 않았더냐. 그러려면 하란타 인들을 만나러 가 보아야지.”
“그것은 그러하나…….”
“게다가, 내게는 아직도 하란타를 가보지 못한 한이 남아 있다. 이제 그것마저 막으려 들 셈이냐?”
도포 아래로도 딱 벌어진 어깨에 근육질 몸이 비치는 분도 높은 자리에서 나랏일을 하면 저럴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전쟁터에서는 호랑이 장군으로 불리시던 분이 난감해하는 모습을 보며, 김악기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한양 백성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은 전부 거짓임이 분명하다는 것.
저잣거리에서는 저런 안 대감을 정승보다 더한 조정의 실세라 수군거리고 있지만, 저런 불쌍한 실세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생각해보니 오늘 궐내각사는 휴일이라 관원들도 등청하지 않는 날이다.
임금에게 쉬는 날 끌려나오는 실세라니.
결국 안 대감은 임금의 고집에 이기지 못하고 손을 들고 말았다. 방금 들은 것이 맞다면 임금의 목적지는 서소문 밖 하란타 정착촌일 것이다.
“꼬르륵.”
연달아 궁에서 나온 나머지 부대원들이 거리를 확보하는 사이, 김악기의 배에서 난데없는 꼬르륵 소리가 울려 퍼지고 말았다. 높으신 분들은 듣지 못한 모양이지만, 반대쪽 기둥을 지키고 서 있던 황건철은 그 소리를 똑똑히 들었다.
“저런, 여기 대원은 새벽같이 나오느라 아침을 걸렀나 보구나. 그렇지 않으냐, 길산아.”
“그…… 저하? 소인도 대감처럼 호칭을 바꿔야하는 것입니까?”
세자와 덩치가 비슷한 소년 하나가 울상을 지은 채 입을 열었다. 방금까지 안 대감의 그림자에 숨어 쭈뼛거리고 있던 녀석이었다.
김악기는 그 녀석의 정체도 알고 있다.
매일같이 총통위 훈련장에 드나드는 녀석이라 김악기 같은 신입도 모를 수가 없었다.
이름이 길산이라 했던가. 안 대감이 거두어 키우는 아이답게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게 영특하고 성장이 빠른 녀석이었다.
그러니 총통위에서 녀석의 평판도 좋았다. 길산이를 아는 금군 치고 녀석 같은 아들을 두길 원하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아버지께서 명을 내리시지 않았더냐. 정체를 숨겨야 하니 너 또한 지시를 따라야지.”
“하오나 저하…….”
“이미 동생들 때문에 형님이란 단어는 익숙하다. 어서.”
신임 군관은 세자가 임금의 피를 진하게 이어받았음을 확신했다. 친한 아랫사람을 다루는 모습이 완전히 같지 않은가.
“참, 아버지, 여기 군관 배에서 소리가 나서 드리는 말씀인데, 하란타 정착촌에 가거든 마령서 튀김을 꼭 드셔보아야 합니다.”
“마령서 튀김?”
“제 스승이 하란타에서 고안한 요리입니다. 그곳의 식량난을 해결할 방도를 제시해 귀족들에게 신뢰를 샀는데, 마령서 튀김을 알려준 일이 특효였거든요.”
우욱. 헌데 왜 이야기가 그쪽으로 흘러가는가.
김악기는 자신도 모르게 속에서 올라온 신물에 경기를 일으켰다. 마령서 튀김이라는 말에 좋지 않은 기억 하나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악기 아저씨, 괜찮으세요? 안색이 좋지 않으세요.”
“괜, 괜찮다. 내가 누구냐. 호랑이도 두려워한다는 총통위 군관이 아니냐.”
어느새 길산이 녀석이 가까이 다가와 김악기의 몸 상태를 묻고 있었다.
이 총명한 녀석은 궁에서 근무하는 금군 전원의 이름과 얼굴을 전부 외우고 있는 것도 모자라, 겉으로 티내지 않은 이상조차 이리 쉽게 감지해냈다.
실은 마령서 튀김을 생각만 해도 두드러기가 돋는 이유가 있었다. 김악기가 하란타 정착촌을 어떻게 모르겠는가.
총통위에 배치된 첫날 회식이랍시고 끌려가 웬 뜨거운 튀김을 허겁지겁 삼켜야 했던 기억이 아직도 김악기의 뇌리에 선했다. 평소라면 너무나 맛있게 먹었을 음식이 악마로 돌변하던 순간이었다.
결국 그는 식고문을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가 길가 풀숲에 속을 온통 게워냈었다. 그날 신래침학을 주도한 것이 옆에 서 있는 황건철 군관이었다.
‘네가 선택해서 온 총통위다. 악으로 깡으로 먹어라.’
악으로 깡으로.
한 번만 더 속을 게워내면 땅콩 범벅에 버무린 마령서 튀김을 먹게 하겠다며 황건철 군관이 을러대던 목소리가 김악기의 머릿속을 울렸다.
우욱.
김악기가 아이였던 시절에는 이런 일이 없었다. 먹을 것으로 이런 장난을 치다니, 천벌을 받을 일이 아니겠는가.
아마 어느새 나아진 식량 사정은 이런 부조리에도 영향을 끼친 것일지도. 생각해보니 김악기의 고향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나온 지도 꽤 오래전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마령서 튀김? 그러고 보니 장계에서 읽은 기억이 나는데, 하란타 사람들에게 가축사료로 알려져 있던 마령서의 인식을 바꿔놓았다 했던가. 좋다, 오늘 낮것은 그것으로 하겠다.”
“좋습니다. 아버지도 그 맛을 보면 분명 놀라실 것입니다. 헌데, 여기 총통위 군관은 왜 낯빛이 좋지 않은 겁니까?”
“초임군관이라더니 긴장이라도 한 모양이지. 시간이 없다. 바삐 걸음을 옮기자꾸나.”
임금은 아마 군관의 뒤집어지는 속을 모를 것이다.
따흐흑.
그날 김악기는 마령서로 담근 송령주를 마시지 않고도 취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아니, 정신이 혼미해질 수 있음을 깨달았다.
조선에서 제일 존귀한 사내 셋을 경호해야 한다니.
선임들의 말에는 과장이 한 톨도 섞여 있지 않았다. 임금을 경호하는 금군 자리는 꿀을 빠는 자리가 결코 아니었다.
이토록 예상치도 못한 일이 연속해서 몰려오는 일은 범이 우글거리는 산골짜기에서도 겪어보지 못했다.
***
한 시간 쯤 후, 말을 탄 임금과 나는 연희궁 터 근방에 조성된 하란타 정착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나마 서소문을 나가 십 리 이상 도성에서 멀어지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곳은 반촌에서 거주하던 기존 네덜란드인 일부와, 헨리에트 공녀를 따라온 새 이주민들이 새로 정착한 마을이다. 광해군 시기 화재로 불타버린 이래로 연희궁 터 인근은 을씨년스럽게 방치되고 있었는데, 그것을 정리하면서 인근 토지를 네덜란드인들에게 하사한 것이다.
“사실 조금 놀랐다. 하란타 방식으로 마을을 건설하겠다기에 쉽게 허락을 내린 것이었는데, 이렇게 조선의 것과 큰 차이가 날 줄이야.”
“이곳은 하란타에서 봤던 농촌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아버지. 다만 하란타 건축기술의 정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에서 볼 수 있습니다만, 이곳의 정경과는 조금 차이가 있군요.”
네덜란드 풍의 시골길을 나란히 걸으며, 임금과 세자는 마을 어귀에 들어서서 목격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둘 다 만족스러워하는 감정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이 마을은 먼저 조선에 정착해 있던 네덜란드인들이 후임들에게 도움을 아끼지 않은 덕분에 세워진 마을이었다. 시간도 넉넉했으니, 조선에서 벽란항의 기반시설을 지어대느라 이골이 난 건축가들에게 100가구 남짓한 농촌을 건설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임금은 이 마을의 풍경을 보고 이국적인 느낌을 받은 것 같았다.
일단 마을 한가운데부터 조선에선 볼 수 없는 교회 건물이 솟아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풍차도 서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태풍을 버티지 못할 것이라 만들지 못한 것이 아쉬웠다.
“부럽구나. 나도 마음 같아서는 한번 꼭 하란타에 가보고 싶었거늘. 내가 짊어진 책임이 있으니 그것은 때가 올 때까지 참을 수밖에.”
조선왕이 네덜란드에 방문할 때가 온다고요? 설마 세자를 키워놓고 상왕으로라도 물러나시게? 어쩐지 임금의 눈이 그토록 반짝거리더니, 임금은 아직도 네덜란드 방문의 꿈을 버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말문이 턱 막혔다.
언제였더라, 네덜란드에서 사절단을 보내달라는 문서가 왔을 때였나. 그때 임금이 했던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방금 보신 수차는 하란타와 서역의 기술이 결합한 물건입니다. 그것을 보는 것으로는 모자라신 겝니까, 형님.”
안 그래도 막 한강에 설치한 새 수차를 구경하고 오는 길이었다. 상류에 저수지까지 팠지만, 홍제천의 물로 돌리는 수차로는 마을 사람들이 먹을 밀가루를 제분하는 것도 모자라 수차를 새로 설치할 수밖에 없었다.
이놈의 빌어먹을 반도.
태풍 때문에 풍차도 못 쓰고, 계절에 따라 물이 흐르는 양도 달라지니 수차도 설치하기 어렵다. 그나마 도입할 만했던 것이 아라비아 반도에 기항했을 때 입수한 중동의 기술로, 강물 위에 띄워 설치하는 부유식 수차를 제작하는 기술이었다.
이것도 장마가 오면 강에서 끌어내야겠지만, 적어도 한강의 막대한 유량을 써먹을 방법이 생겼다는 것은 긍정적이었다. 벽란항에서 한강의 포구를 오가는 배들마다 부유식 수차를 향해 이상한 눈길을 쏘아대는 것은 그렇다 치고.
“모자라고말고. 그래도 본토의 풍경과는 차이가 있지 않느냐.”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리고, 내가 이렇게까지 참고 있는데, 벽란항을 시찰하는 일 정도는 네가 허락해주어야 하지 않겠더냐? 말을 달리면 어떻게든 당일치기도 가능할 것 같았는데 말이다.”
이 양반이 아직도 헛된 꿈을 못 버리고.
안 그래도 도성에서 출발하면서 벽란항 인근까지 보고 오자는 임금을 겨우 말린 참이었다.
그런데 하란타 정착촌에 들어오자마자 임금은 또다시 그 이야기를 꺼내들고 있지 않은가. 끈질기기도 하시지.
그렇게 되면 백 퍼센트 파주행궁에서 예정에도 없던 외박을 하게 된다. 임금이 도성을 벗어나 잠행하는 것도 파격적인 행보인데, 그 이상 선을 넘는 일은 곤란했다.
“안 됩니다. 저도 지금 많이 양보해드렸다는 것을 형님이 제일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끄응……. 아쉽구나. 강 사인의 보고로는 인근의 빈민과 유민들이 벽란항 근처에 빈민촌을 형성할 정도로 모여들었다던데 말이지. 높은 사람이라면 무릇 나라에서 가장 낮은 곳에도 임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더냐?”
“이론으로 따지면 옳으신 말씀이오나……. 형님, 더 이상 금군과 총통위에 부담을 주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리고 벽란항까지 당일치기라고 하셨는데,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훤하오니 이쯤에서 뜻을 접어주십시오.”
“들켰느냐? 역시 한수 네게는 무엇을 숨길 수가 없구나. 그저 나는 빈민들이 살아가는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보고 싶었을 뿐이거늘.”
임금은 잠행이 아니면 백성들의 진실된 모습을 볼 수 없다며 꽤나 강하게 의견을 내세웠었다. 내 말을 고분고분 잘 듣던 평소의 임금이 아니었다.
사실 정책에 참고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꾸며내지 않은 정보가 필요하다는 임금의 변명은 틀리지 않다. 안 그래도 부두 노동자로 살아가는 빈민들 문제가 점점 수면 위로 떠오르는 상황이기도 했다.
이미 나랏돈을 써서 품삯을 지불하고 부역을 시키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에 임금과 내 의견이 모아진 상태였다. 하지만 문제는, 임금의 행차가 알려지게 되면 현지 상황이 왜곡될 것이 뻔하다는 것. 왜, 군대에서도 별이 뜨면 온갖 미화 작업이 시작되지 않던가.
그러니 임금이 벽란항 인근까지 잠행을 해 실상을 파악하겠다고 끝까지 우겨댄 것이다.
사실 멀리 나갔다 오고 싶은 마음에 대는 핑계도 반쯤이겠지만, 핑계라도 없이 나들이를 나갔다가는 조정에서 통촉하시라는 소리를 잔뜩 얻어맞을 게 뻔하니까.
쓸 데 없이 들떠 있는 임금의 발걸음을 조금 가라앉힐 필요가 있어 보였다.
“형님 말씀이 틀리지 않습니다. 허나, 벽란항은 가까운 곳이 아닙니다. 그런 곳까지 가서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머무는 것으로 형님이 만족하실 리 없잖습니까. 분명 또 제게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하루만 더 머물겠다 떼를 쓰시겠지요.”
“아버지. 심정은 절실히 이해하오나, 한양에 계실 어머니도 생각을 해 주시옵소서. 예고도 없이 자리를 하루라도 비우게 되면 불어 닥칠 후폭풍도 생각을 해 주셔야지요.”
이쯤 되면 세자도 임금의 속내가 다 파악이 된 모양이었다. 나로도 모자라 아들에게까지 한방 먹은 임금은 앓는 소리를 한 번 내더니 그 이상의 변명을 꺼내지 못했다.
“되었다. 아우와 아들이 한 목소리를 내 반대하는데 어찌 뜻을 끝까지 밀고 나가겠느냐. 그것은 다음 기회로 미루도록 하겠다.”
“다음 기회요?”
“참, 이제 목적지가 가까워오지 않았느냐? 저곳은 누가 보아도 대장간이로구나. 저곳에 네가 데려온 하란타 장인이 있다고?”
임금은 은근슬쩍 말을 돌리며 다음을 기약했다. 뻔뻔하기도 해라.
세자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입을 열어 아비에게 무언가 항변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대장간에서 흘러나오는 쇠를 깎고 두드리는 소음에 묻혀, 나오려던 말이 목구멍 안으로 다시 들어간 모양이었다.
이거, 이렇게 넘어가면 곤란한데. 대신 내가 임금의 말에 무어라 딴지를 걸려던 순간이었다.
쾅. 대장간에 딸린 방 안에서 의문의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무, 무슨 일이냐?”
“거긴…….”
놀란 임금이 의문을 표하기 무섭게, 폭발음이 터져 나온 방의 장지문이 활짝 열렸다. 그 문 틈 사이에는 시꺼먼 그을음을 뒤집어쓴 사람의 얼굴 하나가 비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