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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29화 (229/298)

229화. 때는 오고야 말았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데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왜 내 아들을 좋아하게 되었는가.’ 라는 임금의 질문은 살짝 선을 넘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에트는 잠시 당황하는 정도로 그치고는 천천히 네덜란드에서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녀는 처음 빌렘이 세자와 대군을 불러들인 자리에서 호기심 많은 동생들이 던진 질문에 어설픈 네덜란드어로 대답해주려 애를 쓰는 모습이 좋았다고 했다. 자신의 조국에 호감을 가져주는 모습도, 어디서나 정중하게 예의를 차리는 모습도 마음에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단둘이 남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을 때, 세자가 조선이라는 국가에 대해서 자신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 가장 좋았다고 했다. 아, 겉으로는 이러면 안 된다고 중얼거리면서도 행동은 달랐던 것도 귀여웠다고 했나.

어른스럽기도 하셔라, 우리 공녀님.

반면 우리 저하는 아직 어른이 덜 된 것 같은데.

“그…… 아버지, 방금은 조금 심하셨습니다. 단둘이 있는 자리도 아니었지 않습니까.”

아까 자리에서 세자의 얼굴은 터질 것 같이 시뻘겋게 변했었다.

헨리에트를 자리에서 떠나보낸 후, 세자가 임금에게 조심스레 투덜거릴 만했다.

“심하다니, 그 아이가 만약 네 배필이 되어 궁에 들어온다면 분명 그 이상의 위기를 겪을 것이다. 나는 그 정도도 이겨내지 못하는 아이를 내 며느리로 맞을 생각이 없었던 것뿐이다.”

“하지만 아버지…….”

“공녀도 그 이야기에 납득을 표하지 않았더냐. 어차피 내 시험은 이번으로 끝이다. 앞으로는 중전과 내명부 사람들이 맡을 일이기도 하고.”

말이야 옳은 말이지만, 과연 임금이 저 의도만으로 공녀에게 짓궂게 대했을지는 조금 의문이었다. 허나 어쩌겠는가. 왕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지.

살짝 불만이 쌓인 듯한 세자를 두고 임금이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은 그때였다. 생각지도 못한 공격이었다.

“그리고 한수 네게도 할 말이 있다. 나는 네가 간택에 개입하는 것을 엄히 금할 것이다.”

“간택에 개입하다니요, 제가 그런 일을 할 리가…….”

“네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만약도 대비해야 하는 법. 네가 공녀를 바라볼 때의 눈빛이 세자를 바라볼 때와 별다를 것이 없지 않으냐.”

그런 사소한 심정의 변화까지도 눈치 챈 건가.

하긴 오랜 세월을 함께한 것은 임금 역시 마찬가지였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공녀가 총통위의 총칼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고 협조할 때부터였나, 스스로 나서서 우두 접종을 한 뒤부터였나, 아니면 세자를 위해 공부에 몰두하던 헨리에트를 본 뒤부터였나.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일국의 국모가 될 자질을 보이는 헨리에트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던 것도 사실이긴 했다.

“그러나 너도 알고 있겠지. 세자빈 간택의 제일 원칙이 무엇인지 정도는.”

“겉으로 보이는 품성과 행동거지도 중요하나…… 무엇보다 명문가의 일원이되 부친의 영향력이 미미해야 합니다.”

“국모란 그런 자리다. 경계해야 하는 것은 본인의 사치와 교만뿐이 아니지. 혹여나 외척이 국정에 끼칠 영향력도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다행히도 공녀는 간신히 그 기준을 충족하고 있지만 말이다.”

헨리에트는 사대부 가문의 일원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귀한 신분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친정인 네덜란드는 멀리 떨어진 데다, 현지에서는 공녀가 조선에 볼모로 갔다는 인식까지 퍼진 터라 빌렘이 헨리에트를 핑계 삼아 조선에 영향력을 끼치기는 어렵다고 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조정에서 문제로 삼으려면 얼마든지 삼을 수 있는 부분이었다. 당장 세자가 네덜란드를 방문한다고 했을 때도 볼모 운운하며 반발이 튀어나오지 않았던가.

게다가 근본적으로 외모가 이질적인 외국인을 차기 임금과 혼인시키는 일이다. 그나마 외국 생활을 겪어본 임금과 중전은 조정 신료들에 비해 개방적인 편이긴 하나, 헨리에트를 세자빈으로 맞을 결심을 했다 하여도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을 것이다.

“세자빈 간택에 제 입김이 들어간 것으로 보이면 오히려 조정의 반발이 더 심해질 수도 있겠군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래. 아무리 사실이 그렇지 않다고는 하나 오얏나무 아래에서 갓끈을 고쳐 매면 곤란해지는 법이다. 안 그래도 네 소실의 출신과 엮일 여지도 있는데, 최대한 의혹이 생길 일은 피해 다오.”

“사실 공녀를 별채에 드나들게 하면서 불쾌한 소문이 돌까 염려해 요안에게 최대한 은밀히 활동하라는 지침을 미리 내렸습니다만…… 그러길 잘 했군요. 타당하신 염려입니다.”

“그래. 네가 용의주도했던 덕분에 위험 하나는 배제할 수 있게 되었구나. 다행이도다.”

방금까지 투덜거리던 세자의 입은 굳게 다물어져 있었다.

이번 일은 그에게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나랏일과 관련되어 있다면 사소해 보이는 일이라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눈앞에서 목격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이번 소동을 통해, 익선관의 무게는 조선 팔도를 합친 것만큼 무겁다는 것도 절절히 깨닫게 되겠지.

“좋아. 지루한 이야기는 이쯤 하고, 이젠 하란타 마을에 온 진짜 목적을 슬슬 달성해 볼까.”

“아버지, 마을 시설과 장인들을 점검하고 공녀를 대면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까?”

“그럴 리가. 아들아, 너는 아비가 무엇을 정녕 원하는지 조금 알 필요가 있어 보이는구나.”

말을 마친 임금은 신호를 보내 방 밖을 지키던 번장을 불러들였다. 늘 임금을 호위하는 금군 번장은 임금의 의도를 이미 읽어낸 듯했다.

“전하, 마침 바깥에 기미를 마친 수라가 당도했사옵니다. 안으로 들여도 되겠사옵니까.”

“물론이다. 내 오늘은 몸을 많이 움직여 시장하니, 빠르게 들이도록 하여라.”

“예, 전하.”

명을 받은 번장이 문을 나서기 무섭게 미리 주문했던 요리들이 방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 들어온 저건 미트볼과 소시지인가, 네덜란드에서 먹었던 음식 그대로였다.

“많이 기대하셨던 모양이군요, 전하. 그리고 아마 이렇게 양껏 수라를 잡수시려는 이유는…….”

“궐에 있으면 중전이 잔소리를 하기 일쑤니,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언제 음식을 양껏 즐기겠느냐. 아, 저것이 네가 고안했다던 마령서 튀김이냐? 저것부터 가져오도록 해라.”

뒤이어 들어온 산더미처럼 쌓인 감자튀김을 향해 임금은 연신 손짓을 날려댔다. 저 감자튀김 역시 조선에 식용유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한 온갖 노력의 결정체였지만, 지금은 그것을 보고할 때가 아닌 것 같았다.

우물우물. 잠행 나온 자리에서도 체통을 지킨다는 이유로 식사는 조용히 이루어졌지만, 그 와중에도 임금의 식욕은 막기 어려웠다.

건강 때문인지, 아니면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여야하기 때문인지, 우리 강 여사님께서 평소에 임금의 식단을 빡빡하게 관리하신 결과였다.

“아니, 이것은 또 무엇이더냐. 닭고기를 토막 내 튀긴 것 같은데?”

그리고 임금의 입맛을 사로잡은 음식은 감자튀김만이 아니었다. 식사 자리에 흐르던 침묵을 한 방에 날려버렸을 정도로, 임금은 방금 맛본 음식의 맛이 충격적인 모양이었다.

“기름 공급이 원활해진 덕에, 원래 전해 내려오던 포계(炮鷄)의 조리법을 조금 발전시킬 수 있었습니다. 옆에 놓인 종지에 담긴 양념과 함께 드시면 됩니다.”

“아니, 이 맛은……?”

아마 지금 임금의 눈앞에는 미미(美味)라는 글자가 떠돌아다니고 있지 않을까. 백 선생님의 레시피는 조선시대에도 먹히는 모양이었다. 아니면 아직 조선 음식에 널리 쓰이지 않는 고추의 매운맛 덕분인가.

얼마나 맛이 있었는지, 결국 그날 튀김의 마력에 사로잡힌 임금은 홀린 것처럼 자신의 이전 어명을 수정하기에 이르렀다. 익숙하지 않은 매운맛에 우스꽝스럽게 부어오른 입술만은 옥에 티였다.

“……어명을 고치시겠다니요. 그럼 승정원에 쌓여있는 그 수많은 어필들은…….”

“모든 백성이 칠일에 한 번 닭고기를 먹게 하겠다는 어명을 철회하겠다. 앞으로 조선은 모든 백성이 칠일에 한 번 튀긴 닭을 먹을 수 있도록 목표를 삼아야 할 것이다.”

닭을 튀긴 기름이 유채꽃 씨앗에서 짜낸 기름이라거나, 유채는 재배도 쉽고 기름을 짜고 난 부산물도 비료나 사료로 쓰기 좋다는 내 말들은 임금에게 이미 뒷전인 듯했다.

방전법으로 고생하는 와중에도 내가 얼마나 신경을 쓴 일이건만……. 결국 허무하게도 백 마디 보고보다 임팩트 있는 한 방이 임금에게 더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하긴, 임금이 치킨을 좋아하는 건 유전자에 새겨져 있는 내력 때문일지도.

그렇게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어쨌건 백성들의 생활이 이 일로 말미암아 나아지게 되면 그것으로 좋은 일이지.

***

피 같은 휴일은 그렇게 임금과의 잠행으로 사라지고 마는 듯했다. 그러나 잠행 일정을 마무리 짓고 궁궐로 돌아왔을 때, 나는 의외의 상황과 마주하고 말았다. 우스운 것은 그 상황 덕분에 기묘한 안도감을 맛보고 있었다는 것.

염려하던 사태가 네덜란드 정착촌을 방문했던 사이 벌어진 것이다. 오늘은 잠행이 없었어도 어차피 출근을 했을 운명인 모양이었다.

“의주로부터 파발이 왔다는 말씀은…… 설마 그 일 때문입니까.”

“그래. 청국에서 온 칙사가 압록강을 넘었다는구나. 마음의 준비는 되었느냐, 한수야.”

“갑작스럽긴 하지만 하란타에서 돌아온 직후에 끌려갔던 것보다는 무조건 낫습니다. 어차피 언젠가 한 번은 가야 했을 일이기도 하고요.”

북만주의 흑룡강 유역 일대에서 청과 러시아가 충돌하는 것은 막을 수 없는 역사의 흐름이었다. 지난번에는 운 좋게 충돌을 피했다고는 하나, 북만주 일대의 농토와 모피를 원하는 러시아 측이 순순히 물러날 리가 없었으니까.

임금은 이번에도 나를 청으로 보내고 싶지 않은 눈치였으나, 딱히 뾰족한 수는 없었다. 결국, 청에서 온 칙사는 얼마 뒤 한양으로 입성하고 말았다.

지난번에 들고 왔던 것과 거의 같은 내용의 칙서를 소지한 채였다.

“이번에도 원병을 보내 달라?”

신료들로 가득한 인정전 안에는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임금이 상국의 칙사와 외교를 논하는 자리다. 바늘 하나 떨어지는 소리라도 나서는 안 될 것이다.

“예, 고려왕 전하, 이것은 황상께서 내리신 뜻입니다.”

청에서 보낸 칙사의 태도는 온건했다. 나와 임금이 홍타이지가 재위할 시절 세웠던 공이 여전히 청나라 내부에서도 유효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입관 직후 화북의 물자가 부족했을 때는 조선에서 중계 무역까지 돌려가며 청을 돕기도 했었다. 그래서 원 역사와는 다르게 청나라 칙사는 임금 앞에서 오만한 태도를 내비치지 못했다.

아니면 임금이 만주어에 능통한 덕분에 통역을 두고 장난치는 일이 원천봉쇄되었기 때문일지도.

그렇다고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 일국의 임금이 외국어를 쓸 수는 없으니 중간에 내가 통역하는 시늉은 내고 있었지만 말이다.

“알았다. 내 지난번처럼 총통위의 정예 조총수를 파견할 것이다. 헌데, 이번에도 한 장수를 특정해 파견하라는 황명이 내려왔느냐?”

“예. 전번에는 그 자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다고 하던데, 이번에는 상황이 심상치 않아 보이니 반드시 데려오라는 명이셨습니다. 그를 데려오기 전까지는 북경으로 돌아오지 말라는 엄명을 받았습니다.”

쯧. 임금이 들릴 듯 말 듯 가볍게 혀를 찼다.

도르곤의 여전한 태도가 심기를 어지럽힌 모양이다.

“좋다. 청국 측에서 그리 원한다면 보내주는 수밖에. 칙사는 이 자리에 있는 잘안 장긴을 알아보겠느냐?”

“잘안 장긴 아르가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단 말씀이십니까? 이 정전 안에는 문관 복장을 한 신하들밖에 보이지 않습니다만? 아, 혹시…….”

임금의 눈짓을 받고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칙사의 얼굴이 경탄으로 가득 차는 것이 보였다.

“아, 당신이 섭정왕께서 줄곧 찾으시던 그……. 만주어는 저보다 더 유창하신 것 같은데 어쩐지 문관 치고는 기골이 장대하시더니…….”

“그래, 그 아르가투가 나요. 섭정왕께서 따로 보내신 전언이라도 있소?”

“예, 예. 그렇습니다. 장긴께서 직접 지휘해 나선 놈들을 물리친 후, 반드시 북경성에 들러 승전을 보고하라 하셨습니다.”

역시, 임금의 추측이 옳았다.

아무리 후방인 만주에 주둔한 청나라 군사의 질이 떨어진다고는 하나, 러시아 원정대를 상대로 조선군을 부르면서 굳이 지휘관까지 지정할 필요가 없었다. 보통은 어련히 조선에서 좋은 지휘관을 임명해 보내지 않겠는가.

칙사가 굳이 전투를 마친 후 북경으로 오라는 말을 전언을 덧붙인 것은, 그것이 도르곤의 진의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로 내가 필요한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알겠소. 즉시 청국으로 파견할 총통위 병력을 소집하지. 칙사 당신과 함께 두만강을 넘으면 되겠소?”

“그러면 감사하지요. 섭정왕께서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하셨습니다.”

나도 모르게 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십여 년 전, 호포대와 만주 벌판을 누비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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