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대리 구사 어전
그로부터 한 달 가량이 지난 후, 나는 총통위 군사 오백을 이끌고 두만강을 넘었다. 한양과 그 인근에 주둔하는 근왕군에서 절반, 함경도에서 주둔하는 지역대에서 절반을 선발한 병력이었다.
그렇게 조선군은 일주일가량 진흙탕을 행군해 집결지인 영고탑(寧古塔)에 도착했다. 현대로 치면 중국의 무단장 시 인근에 위치한 지역이다.
그러나 겨우 도착한 집결지에서 나는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맞닥뜨리고 말았다. 빌어먹을 만주 군관구 사령관 샤르후다라는 놈이 성질이 급했는지 먼저 목적지로 떠나 버린 것이다.
“암반 장긴이 이미 송화강이 흑룡강과 합류하는 지점으로 향한지 오래라고 하셨습니까?”
“예. 그 사이 만주 일대에서 집결시킨 군세가 도착했거든요, 그것을 보시더니 고려군 따위는 필요 없다며 큰 자신감에 차 계셨습니다.”
기껏 요청받은 대로 원병을 몰고 왔건만, 이렇게 찬밥 대우를 해?
몸에 힘이 쭉 빠지는 기분이었으나 내 앞에서 최신 정보를 전해 주는 머이런 장긴 앞에서 티를 낼 수는 없었다.
이 사람도 만주 군관구의 부사령관쯤 되는 고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목상 청나라 군 계급이 낮은 내게도 타국의 고관이라며 존대를 붙여주는 개념인에게 감정을 드러낼 수 있겠는가.
“허어, 저는 영고탑에 도착하면 암반 장긴을 뵐 수 있을 줄 알았는데요. 암반의 본거지에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의견을 나누는 것이 당연하고, 추후 보급 문제도 해결해야 하지 않습니까.”
“고려국 사령관의 말이 백 번 옳으나…….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지친 군사들을 쉬게 하시고, 곧 심양에서 후속으로 도착할 물자를 기다리시지요. 저는 그동안 고려 병력과 물자를 실어 나를 배를 수배하겠습니다.”
만주 전체의 방위를 맡은 암반 장긴이라는 작자가 행동이 가벼워도 너무 가벼웠다. 왠지 이번 원정, 이 트롤러 때문에 고생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팍팍 들고 있었다. 그래도 내 상대를 맡은 부장과는 말이 그나마 통하니 다행인가.
결국 조선군은 며칠을 영고탑에 발이 묶인 채 체력을 비축해야 했다. 그러나 이 며칠간의 휴식이 아주 시간 낭비는 아니었다. 심양에서 보낸 물자와 함께 내게 큰 힘이 되어줄 사람들이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너희들은?”
“오랜만입니다, 대장! 타스하 잘안, 아니 호포대가 얼마 만에 완편되는 것입니까?”
물자를 호위해온 병력은 익숙한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선으로 귀국하는 대신 청나라 팔기가 되길 선택한 전직 호포대 대원들이었다.
조선말 억양은 예전보다 어눌해져 있었지만, 나를 여전히 대장 취급해주는 것은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 탓인지 왜인지 모르게 코가 찡해져왔다.
게다가 집결지인 영고탑에는 대원들만 도착한 것이 아니었다. 혹시나 벌어질 지도 모르는 공성전에 필요한 물자 외에, 내가 요청하지 않았던 의외의 선물 또한 함께 도착해 있었다.
“아니, 이것은?”
“장긴께 미리 존대를 하길 잘 했군요. 마치 제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 예지한 것 같지 않습니까.”
“……머이런 장긴께서는 이런 상황에서 농담도 하실 줄 아십니까?”
섭정왕은 마치 암반 장긴이 혼자 날뛸 것을 미리 예측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고급진 상자로 포장되어 있던 도르곤의 선물은 브레이크 없이 날뛰는 샤르후다를 제어할 수 있게 만들어줄 물건이었으니까.
평소에 그에게 쌓인 것이 많았는지, 그것을 본 머이런 장긴은 즐거워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그처럼 순수하게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
“에잇! 고려 놈들은 대체 언제 도착한단 말이냐? 영고탑에서는 소식이 없는가?”
“장긴! 진정하십시오! 안 그래도 그들이 추가 물자와 함께 이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전갈이 도착했습니다!”
샤르후다의 수하는 성난 상관을 진정시키며 생긴 불만을 꾹 삼켰다. 지금 원군은 필요 없다며 제멋대로 굴어댄 누구 때문에 나선 놈들에게 고전 중인데, 이제 와서 원군을 찾는단 말인가.
“오오, 그래? 그럼 놈들의 저 거대한 함선을 상대할 군선도 함께 오는 것이냐?”
“장긴, 지금 군선들은 전부 남쪽에서 명국 놈들의 함대를 막는 데 동원되어 있지 않습니까. 해봐야 왈가족 놈들이 쓰는 조각배가 전부일 것입니다.”
“뭐야?”
기분이 상했는지, 샤르후다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나선 놈들이 송화강까지 끌고 온 거대한 배를 방패로 삼아 밀어붙인 덕분에 청군은 첫 전투에서 패배를 맛보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원군이 왔음에도 여전히 적의 가장 큰 무기를 무력화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니. 첫 번째 전투가 증명했듯이 청군이 소지한 창, 칼, 활로는 도저히 놈들의 거선을 뚫을 수 없다는 것이 자명했다.
샤르후다의 수하 역시 심기가 불편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전번의 패배는 나선 놈들과 처음 충돌했던 시절보다 두 배나 병력이 늘었다는 이유로 샤르후다가 멋대로 단독 행동을 해버린 결과지 않은가.
그러나 그런 감정을 섣불리 얼굴에 드러낼 수는 없었다. 샤르후다가 북경의 조정에 대고 있는 끈은 꽤나 굵고 강력했으니까. 기껏 해봐야 니루 장긴에 불과한 수하는 샤르후다가 훅 불면 날아갈 위치에 불과했다.
“그래도 장긴, 고려군의 화기는 한족 녹영병들의 화기보다 더 강력하고 뛰어납니다. 전번에도 나선 놈들이 고려군의 화력에 놀라 그들의 요새로 숨어버린 것이 아니었습니까.”
“으음……. 전임자였던 하이써의 기록에서 읽은 이야기긴 한데…….”
“게다가 이번에는 북경을 수비하는 병력 중 타스하 잘안의 정예들도 함께 파견되었다고 합니다. 그들도 고려군에 버금가는 팔기 최고의 조총수들입니다.”
“타스하 잘안? 잠깐, 그럼 섭정왕의 양백기 소속 놈들이 아니냐? 섭정왕이 이런 촌구석까지 직속 병사를 보냈단 말이냐?”
샤르후다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가 있었다. 그의 씨족인 구왈기야 가문은 섭정왕에게 적대적인 파벌에 소속되어 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아니, ‘오보이’는 대체 무얼 하기에 이런 중요한 일을 귀띔도 해주지 않은 건가! 섭정왕이 감히 구왈기야 씨족에게 간섭하려 하는데!”
“그분은 지금 호오거님과 함께 사천을 정벌 중이지 않으십니까. 안 그래도 카간 직속 양황기의 바야라 장긴 임무를 수행하시느라 바쁘신 분인데요.”
“그래도 북경에 남겨둔 수하 정도는 있을 것이 아니냐! 그놈, 카간의 눈에 들었다고 동본은 벌써 안중에도 없다 이건가?”
구왈기야 샤르후다가 길길이 날뛴 덕에 크지 않은 군막이 들썩거렸다. 샤르후다의 이런 행동은 아마 나이도 어린 친척이 특급 출세길에 올라탄 것에 대한 질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수하도 상관의 심정을 대충 이해는 하고 있었다. 현재 북경의 조정이 양분되어 있는 사정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어떻게 보면 파벌 사이의 갈등에 샤르후다가 치였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쪽 파벌은 내정과 군권 절반을 틀어쥔 섭정왕 도르곤의 세력이다. 선선대 카간의 치세부터 수많은 공을 세워온 도르곤의 위세는 섭정왕 직의 기한이 끝나가고 있음에도 기세가 등등했다.
그러나 그에게 치여 나머지 군권 절반을 장악하는데 그친 호오거의 세력이 최근 활기를 되찾고 있었다. 곧 친정을 개시할 나이가 된 카간이 현 권력자인 도르곤에게 반감을 품고 눌려있던 반대쪽 파벌을 포섭한 것이다.
“에잇! 머리가 복잡하구나! 병사들을 순번에 따라 경계 임무에 투입시키고 나머지는 휴식을 취하게 해라!”
섭정왕은 이런 촌구석까지 견제를 하려 드는 건가?
머릿속이 혼란해진 샤르후다는 수하를 군막 밖으로 쫓아내고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 어차피 섭정왕이 보낸 병력이야 일개 니루에 불과하고, 고려에서 보낸 병력도 얼마 되지 않는다. 놈들이 무슨 수를 쓰려고.’
샤르후다가 원래 계획한 대로 작전을 진행해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고려군 놈들을 대강 선두에 세워 총알받이나 지원사격용으로 써먹고, 나선 놈들에게서 나온 전리품들은 전부 꿀꺽하면 된다.
반발은 분명 생기겠지만, 어쩌려고?
감히 만주 지역의 사령관, 암반 장긴인 자신의 말을 번국 놈이 거역하겠는가?
놈이 타스하 잘안의 장긴으로 임명받아 파견되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래봐야 잘안 장긴은 자신의 아래 계급이다.
샤르후다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맺혔다.
절대 본인은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얼굴에서 뚝뚝 묻어났다.
“좋아, 나선 놈들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으로 무얼 장만할지 생각하면서 기분이나 풀어볼까?”
그러나 샤르후다는 고작 잘안 장긴이라고 무시하던 자에게 도르곤이 내린 선물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그 선물이 자신의 계획을 전부 어그러뜨리리라는 것 역시 아직은 깨닫지 못했다.
***
십여 년 만에 한 몸이 된 호포대를 실은 채, 야인여진이 쓰는 조각배들은 흑룡강의 지류인 송화강을 향해 나아갔다. 많아 봐야 열일곱 명이 탈 수 있는 이 자피선이라는 조각배는 강의 물결에도 흔들거리기 일쑤였다.
이런 쪽배로 러시아가 가져왔을 범선을 상대할 수 있을까? 이미 수전에 익숙해진 총통위 인원들이 멀미를 하지 않아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머릿속은 앞으로 펼쳐나갈 전략을 짜느라 한껏 복잡해져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별일 아닙니다. 전장을 한두 번 겪은 것도 아니고요.”
“놈들이 슬슬 이 땅을 침범하기 시작한 이래로 수도 없이 벌어진 일입니다. 하지만 영고탑 인근에 주둔 중인 암반의 군사들만으로는 저들을 대적할 수 없었지요.”
“이제 제가 왔으니 그것도 마지막이 될 것입니다.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저런 짓거리를…….”
실은 방금 목격한 것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강폭이 슬슬 넓어지며 송화강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 보이기 시작할 무렵부터, 강가에는 이따금씩 처참한 참상이 펼쳐져 있곤 했다.
“놈들의 목적은 간단합니다. 모피와 노예지요. 나머지 필요 없는 것들은 이제 저런 식으로 ‘처분’해 흔적을 남기고 갑니다.”
“힘을 과시하려는 목적이든, 아니면 우리에게 경고를 보내려는 목적이든,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들에겐 반드시 천벌이 내려질 것입니다.”
“정말로 당신 같은 분이 원군으로 와 주셔서 정말로 다행입니다. 암반 장긴이 조금만 당신을 닮았더라도…….”
머이런 장긴이 입에 씁쓸한 미소를 한껏 머금은 이유가 있었다.
러시아 원정대 놈들은 여자와 아이, 가축은 끌고 가고, 남자는 죽이거나 나무에 묶어 짐승의 밥이 되도록 방치했다. 그 후 모피처럼 돈이 될 만한 것들을 모두 털어가고는 마을을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었다.
지금까지 목단강을 따라 내려가며 목격한 증거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집결지에 가까워올수록 그 빈도는 더했다. 강 위에서 볼 수 있었던 것만 그 정도니, 내륙에는 더 많은 약탈의 흉터가 남아 있겠지.
“그나저나 지금 모습, 참으로 잘 어울리십니다. 마치 계속해서 팔기에 몸담아온 분 같군요.”
“하하, 농담도 잘하십니다. 이걸 마지막으로 입어본 지가 어느새 십 년도 훌쩍 지났는걸요.”
“아니오, 정말입니다. 유창한 만주어도 그렇고, 팔기의 복장이 이리 잘 어울리는 것도 그렇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누가 어전님을 고려 사람이라 생각하겠습니까?”
분위기가 무거워진 것을 느꼈는지, 머이런 장긴이 화제를 바꾸었다.
그 와중에 오랜만에 입어본 청나라 두정갑은 마치 몸에 맞춘 것처럼 들어맞았다. 마치 흘러간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섭정왕께서 반드시 대장께 전하라 하신 물건인데…… 왜 그러셨는지 알겠군요. 저희와 함께하던 그 시절 그대로가 아니십니까.”
분위기를 바꾸고 싶었던 것은 머이런 장긴만이 아니었나보다. 전 호포대 대원들도 내 팔기군 갑주 차림을 품평하기 시작했다. 청나라 두정갑이 잘 어울리기는 한 모양이다.
헌데, 이렇게 갑주 이야기가 나오니 마음에 걸렸던 것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말았다. 지금 갑주에 묶여 강바람에 휘날리는 물건이 문제였다.
황녀에게 이별을 고하고 조선으로 돌아가며 청에 반납한 물건이, 어째서 도르곤에게 들어가 있었을까. 그리고, 어째서 황녀의 머리끈은 여전히 갑주에 묶여 있는 것일까.
도르곤도 이 머리끈이 누구의 물건인지는 알고 있을 텐데…….
“에이, 대장! 칭찬만 들으면 쑥스러워 하시는 것도 그대로시면 어떡합니까?”
“시끄럽다, 이놈들. 그동안 변하지 않은 것은 너희들도 마찬가지로구나.”
괜히 멋쩍어져 슬며시 다시 갑주를 벗었다. 어차피 지금은 시험 삼아 입어본 것에 불과했다. 아직 러시아 원정대 놈들이 활보하는 전장까지는 거리가 조금 남아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단단히 갑주에 묶여있는 황녀의 머리끈을 재빨리 풀어, 작은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이미 끝난 인연은 다시 이어봐야 구차해질 뿐이니까.
“참, 머이런 장긴, 어제 나누었던 북경 조정의 상황을 계속해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어제 섭정왕 전하의 파벌이 흔들리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하셨던 것 같은데요.”
“이제 제게 말씀을 높이지 않으셔도 됩니다만……. 뭐,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겠지요. 그럼 계속하겠습니다.”
멋쩍은 감정을 숨기기 위해, 나는 머이런 장긴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아주 필요 없는 행동은 아니었다. 영고탑을 떠난 이후부터, 머이런 장긴으로부터 청나라 내부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업데이트 받을 필요가 분명 있었다.
청나라의 권력 구도가 원 역사와는 조금 다르게 변했기 때문이었다.
본래 역사에서는 산해관을 넘어 북경성과 남경성을 함락시킨 도르곤 앞에 대적할 세력은 없었다. 그러나 바뀐 역사에서는 입관과 북경 점령이 홍타이지의 공이 되었고, 남경에서는 아직 명이 아슬아슬하게 청의 공세를 막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도르곤의 공적이 원래의 반으로 줄어들었으니, 실제 역사에 비하면 그가 휘두르던 권력이 반 이하로 줄어들어도 이상하지 않다. 때문에 진작 숙청되었어야 할 호오거는 북경에 돌아오지는 못하는 상태이긴 했으나, 최전방 사령관으로 여전히 살아있었다.
“……갓 성인이 된 카간께서는 완전한 친정을 하고 싶으신 모양입니다. 섭정왕께서는 아직 그러기엔 이르다며 천천히 권력을 이양하고 계십니다만, 그것에 만족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카간께서 성인이 되셨다고는 하나 벌써부터 국정에 능숙하시긴 어렵지 않겠습니까? 섭정왕이 지나친 권력욕만 보이지 않으면 타당한 조치라 생각됩니다만…….”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다만 원칙을 따지자면 카간의 의지대로 하는 것이 맞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카간께서 섭정왕에 반대하는 세력을 끌어들이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 사이 열다섯이 넘어 성인이 된 황제, 순치제는 친정을 개시하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이었다. 도르곤도 천천히 황제에게 업무를 양보하고 있었지만, 순치제는 그것을 당연히 이미 받았어야하는 권한이라 생각하고 있었으니 그 사이에서 갈등이 벌어진 것이다.
그 결과, 순치제가 도르곤에게 적대하는 파벌을 자신 쪽으로 끌어들인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이다.
원 역사에서도 순치제는 도르곤이 죽자마자 같은 방법으로 남은 도르곤 파벌을 싸그리 숙청했다. 다만 지금은 역사가 바뀌어 도르곤이 아직 살아있을 뿐.
“알겠습니다. 북경으로 보낸 우리 사신 중 가끔 무례한 일을 당한 이가 있곤 했는데, 그런 상황 때문일지도 모르겠군요.”
“예, 고려는 섭정왕에게 줄을 선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니까요. 그래도 저처럼 선대 카간 대에 일어난 일을 정확히 아는 사람들은 그렇지도 않습니다만.”
“저는 분명히 선대 카간께 힘을 보태드렸습니다. 물론 섭정왕과 관계가 아주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청국의 일부 파벌이라도 우리나라를 적대하는 상황은 조금 곤란합니다.”
“저도 그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저쪽 파벌 입장에서는 또 다르겠지요. 어전께서 파벌 사이에 아주 손을 안 대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한때는 팔기에 종군해 북경성 전투까지 참전했던 머이런 장긴이 하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홍타이지의 후계자를 순치제 푸린으로 결정하는 의정왕대신회의에는 분명 내 입김도 들어갔으니까. 아마 자신이 후계에서 밀려난 전말을 알게 된 호오거에게 원한을 사도 이상하지는 않은 일이다.
“사실 촌에 박혀있는 머이런 장긴 주제에 이런 말을 함부로 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조정에 저런 분열이 없었으면 진작 명나라 놈들을 회수와 장강에서 밀어냈을지도 모릅니다.”
“분열의 뿌리가 깊긴 했으니까요. 한양에서 소식을 전해들은 것에 불과하지만, 저도 현 카간의 치세 초기부터 이러한 조짐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 남명의 상황은 내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지금 남경의 명나라 조정도 토호와의 갈등이 수면 위로 올라와, 숭정제가 갓 천도를 단행했을 때만큼은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나마 카간께서 어리셨을 때는 섭정왕이 어떻게든 통제하며 명을 밀어붙였는데, 지금은 놈들이 힘이 빠져 절호의 기회가 왔음에도 전면 공세를 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다이칭 구룬을 버리시기라도 한 것인지…….”
“지금은 카간께서 섭정왕이 군사에 손을 대는 일을 크게 경계하고 계시겠군요. 그러니 카간 직속인 군사만 가지고 국지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고요.”
“그렇습니다. 그마저도 정황, 양황, 정람 세 부대를 전부 원정에 투입하고 있지도 못합니다. 아마 섭정왕이 그릇된 역심이라도 품었다 의심하시느라 친위대를 손에서 놓지 못하시는 것이겠지요.”
국력을 가장 쉽게 손실하는 방법은 내부의 분열이라 했던가.
아마 청나라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대를 손에 쥐고 있는 이 시점에서, 순치제는 도르곤을 견제하느라 병력의 절반 이상을 낭비하고 있었다.
내가 조선으로 빨리 돌아가고자 홍타이지에게 제의했던 계략이 이런 결과까지 낳고 말 줄이야.
대륙의 분단이 장기화, 고착화되는 것이 조선에게 불리하진 않겠지만, 분명 지금 상황은 내가 의도한 상황은 아니었다.
“고맙습니다, 장긴.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무얼요. 앞으로 함께 나선 놈들을 족쳐야 하실 분인데, 그런 분의 고민을 해결해드리는 것도 제 역할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래도 영고탑부터 계속 말동무를 해준 머이런 장긴 덕분에 현 북경 조정의 상태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지방군의 부사령관쯤 되는 사람이 호의를 보여주어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제 제게 말씀을 높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구사 어전’.”
“구사 어전 ‘대리’입니다. 머이런 장긴. 감히 제가 어찌 팔기의 기주를 칭하겠습니까. 이것은 섭정왕께서 위임해주신 이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를 그리 대하지 말아주십시오.”
“하하, 정말 하나부터 끝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없는 분이시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감히 기주의 대리께 존대를 받는 영광을 누리겠습니다.”
그리고, 도르곤의 선물은 갑주가 끝이 아니었다.
지휘에 도움이 되라며 양백기 구사 어전, 즉 팔기군 중 한 부대를 지휘하는 사령관의 권한을 내게 위임한 것이다. 위임장과 함께 동봉된 양백기 구사 어전의 인수는 분명 진품이었다.
전직 호포대 대원들이 들고 온 이 선물을 보고 처음에는 어리둥절했지만, 이동하는 동안 머이런 장긴의 설명을 듣고 나니 도르곤의 행동이 이제는 이해가 되었다.
아마도 자신의 반대 파벌에 속한 암반 장긴이 내 발목을 잡을까 염려한 것이거나, 아니면 러시아 원정대를 상대로 암반 장긴의 무능함이 발휘되지 못하도록 미리 손을 쓴 것일지도.
섭정왕도 여전하시군.
도르곤의 솜씨를 보니 그는 여전히 용의주도함을 잃지 않은 것 같았다. 동시에 내 마음 속에는 앞으로 청나라에서 겪게 될 일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 작가의 말
이야기의 무대가 오랜만에 청나라로 옮겨갔군요.
오랜만에 등장한 낯선 청나라 계급과 군대 구조에 대해 약간의 부연 설명을 드릴까 합니다.
청나라의 군사 제도인 팔기는 8개의 기(旗)로 이루어진 형태였습니다.
이 기는 만주어로 구사라 읽는데, 아래에 5개의 잘안이 소속되어 있고, 또 그 잘안은 각각 5개의 니루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기의 사령관은 구사 어전, 잘안의 지휘관은 잘안 장긴, 니루의 지휘관은 니루 장긴으로 불렸습니다.
즉 주인공이 도르곤에게 위임받은 구사 어전의 권한은 청나라 군대의 1/8을 지휘할 수 있는 권한이라 보아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물론 실제 그 군대는 북만주가 아닌 다른 곳에 있었을 테니 그저 권위를 더해준 것에 지나지 않지만요.
머이런 장긴은 일종의 부사령관에 가까운 직책입니다. 구사 어전의 아래에 두 명의 머이런 장긴이 있었고, 암반 장긴의 아래에도 머이런 장긴이 있었습니다.
암반 장긴은 본문에 언급했다시피 중앙군이 아닌 지역군의 사령관 직책이라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중앙군인 팔기와 달리 외진 곳에 주둔하는 지역군이 있었는데, 그것을 지휘하는 사령관입니다.
청나라는 입관 후 초기에는 영고탑을 중심으로 배치된 지역군을 지휘하는 암반 장긴을 두었고, 점점 영토를 넓혀가면서 티베트, 신장, 청해, 몽골 등지의 비한족 거주구역에도 암반을 파견하게 됩니다.
이번 화에도 지도를 첨부하고 싶었으나, 적당한 북만주 백지도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조선군은 회령 인근에서 두만강을 넘어 영고탑에서 집결, 목단강을 따라 내려가 송화강과 합류하는 지점(현재의 하얼빈시 의란현)까지 침입해온 러시아 원정대와 마주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