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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33화 (233/298)

233화. 송화강 전투

“하핫! 저 버러지 놈들이 또 뜨거운 맛을 보러 왔구나!”

러시아 원정대가 또다시 적과 마주친 때는 아직 수면 위에 강안개가 살짝 남아있는 오전이었다. 오늘도 아무르 강(흑룡강)의 지류를 따라 올라가며 모피를 약탈할 부락을 찾던 스테파노프의 입에서 비웃음이 새어나왔다.

“질리지도 않는지 저 조각배를 또 끌고 왔군요. 어찌할까요, 스테파노프 님.”

“당연히 쫓아야지! 돛을 활짝 펼쳐라! 전 함선, 전속력으로!”

“저도 그러고 싶지만, 오늘은 바람이 미약하게 불고 있지 않습니까. 놈들의 조각배는 빠른 편은 아니지만, 오늘 같은 날은 기동에 주의하셔야 합니다.”

적선들이 선수를 돌려 도망치기 시작하자, 부관의 눈이 날카롭게 강변 양쪽을 훑었다. 혹여나 있을 법한 복병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어이! 그럴 필요가 있나? 이 함선에 타고 있는 한, 우리는 무적이라고!”

“그렇지만 스테파노프 님, 만일의 상황은 늘 감안을 해야…….”

“시끄럽다! 놈들이 저번에 저지른 추태를 보고도 아직도 그렇게 쫄아 있나? 놈들의 원시적인 무기로는 우리 배에 접근조차 하지 못한다! 이 함선은 불침의 요새란 말이다!”

“그래도 놈들이 강변에 참호라도 파 놓았으면 꽤나 귀찮은 상황이 벌어지지 않겠습니까. 전투가 질질 끌리게 될지도 모릅니다.”

“핫! 그래봐야 지난번처럼 집중 사격 몇 방이면 흩어져 달아날 놈들이! 그 많은 병사를 데리고도 하선한 우리 카자크들에게 손도 못 대던 놈들이지 않나!”

부관도 그것은 알고 있다. 지난 번 전투에서 아군이 몇 명 안 되는 전사자를 냈을 때, 놈들은 적어도 수백 구의 시체를 남기고 전장에서 도망쳤었다.

사실 스테파노프의 말이 옳긴 했다. 그렇게 기록적인 패배를 당했으니 적의 사기는 꺾일 대로 꺾여 있어야 정상이긴 하다. 그러나 부관은 적과 합류했다는 원군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리고 있었다.

“하지만…….”

“됐다! 그렇게 뭉그적거리면 어떻게 모스크바에서 요구하는 실적을 맞출 수 있겠나! 부관은 이 미개한 땅에서 평생을 보내고 싶은 건가?”

부관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하긴 누가 좋아서 끝없는 시베리아의 동토를 지나 이 프리모리예(바다에 접한 땅, 연해주)까지 왔겠는가.

모피와 노예, 결과를 내야 원정대는 집으로 돌아가 따뜻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위에서 끊임없이 가해지는 채찍질은 인간성과 이성을 마비시키는 법이다.

그렇게 러시아 원정대를 태운 함대는 야만인들의 조각배를 쫓아 다시 강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놈들을 이번 기회에 싹 쏘아 넘기고 인근 부락을 전부 약탈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부관의 머리를 스쳤다.

“스테파노프 님! 강가에 적의 군세가 나타났습니다!”

이동하는 사이 휴식을 취하던 스테파노프의 선실에 견시병이 들이닥친 것은 함대가 강을 거슬러 올라간 지 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왔구나, 이 야만인 놈들.”

스테파노프는 전 원정대에 전투 준비 명령을 내린 후 부관과 함께 갑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보십시오. 저쪽입니다!”

“저 미개한 놈들은 목숨이 여럿이라도 되는 건가? 저번과 별로 달라진 것도 없지 않나?”

“스테파노프 님, 지난번처럼 상륙 명령을 내릴까요?”

“좋다! 선상에서 엄호 사격을 가할 병력들만 남겨두고 전부 하선한다! 오늘 이 자리에서 놈들을 전부 주님 곁으로 보내주도록 하지!”

마치 그 판단을 뒷받침해주기라도 하듯, 접근하는 러시아 선단을 발견한 적군은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저번 전투에서 처참하게 당한 기억이 여전히 그들에게 깊게 새겨져 있는 듯했다.

“저 우스꽝스러운 적군 지휘관 놈은 그대로구나? 이번에는 병력을 돌격시키지 않나 보지?”

“아군 카자크들의 일제사격에 군세가 처참하게 무너진 경험이 있는데, 학습 능력이 있는 한 다시 그런 짓을 저지르지는 않겠지요.”

“미개인들은 학습 능력이 없을 수도 있지. 저것 봐라, 또다시 싸울 채비를 갖추고 있지 않나.”

“놈들도 지켜야 할 것은 있을 테니까요. 그럼 전투 개시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겨우 대열을 추스른 적을 보며, 스테파노프는 코웃음을 날렸다. 여전히 적군은 미개한 수준의 병기로 무장한 상태로, 지난번과 나아진 것이 하나도 없었다. 보아하니 원군이랍시고 온 병력도 별 것이 아닌 모양이다.

이윽고 적이 원정대를 향해 접근을 시작했다. 곧바로 부관이 내지른 함성과 동시에 강가에서 전열을 갖춘 카자크들이 적군을 향해 사격을 개시했다. 공기를 찢어놓는 폭발음과 함께 야만인 군사들 사이에서 선혈이 낭자했다.

“놈들이 도망친다! 추격해 씨를 말려라! 한 놈이라도 놓쳤다가는 용서하지 않겠다!”

연달아 화약을 터뜨리며 총을 쏘아대는 카자크들에게 배 위에서 하는 말이 들릴 리가 없건만, 스테파노프는 입가에 거품을 묻혀가면서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지능이란 게 없고 말도 못 하는 동물을 사냥할 때와는 쾌감이 다르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는 인간을 사냥할 때가 제일 즐거웠다.

그 쾌감에 빠져, 스테파노프는 연신 권총을 쥔 주먹을 카자크들을 향해 흔들어댔다.

“어?”

그때였다. 강가 근방에 길쭉하게 펼쳐져있던 야트막한 언덕에서 갑자기 수십 명쯤 되어 보이는 집단 하나가 나타났다. 방금까지는 아무것도 없었던 자리였다.

“뭐, 뭐야?”

마치 땅에서 솟아 오른 것 같았다. 급히 네덜란드제 망원경을 눈에 들이댄 스테파노프의 눈에, 갑자기 나타난 병사들이 뒤집어쓴 짐승 가죽이 보였다.

“설마, 저것들이 하바로프 놈이 말했던…….”

스테파노프의 뒷골이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적군 집단은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놈들의 손에는 분명 머스킷처럼 보이는 물건이 들려 있었다.

“카자크들에게 침착하게 위치를 사수하라 전해라! 놈들의 군세는 그리 많지 않다! 우왕좌왕하는 적병들을 격멸하고 새로 나타난 적병과 맞붙으면 되는 일이다!”

“예! 스테파노프 님!”

곧바로 스테파노프의 명령을 받은 선원 하나가 전령 역할을 맡아 배에서 뛰어내렸다.

‘진정해라, 오노프리오. 적은 아직 머스킷 사정거리 한참 밖에 있다. 천천히 순서대로 싸우기만 하면 우리 러시아 제국의 원정대가 질 리가 없다!’

피슝.

생각을 마치기 무섭게 어디선가 들려온 파공성과 동시에, 스테파노프는 앞머리가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손을 가져다 대 보니, 늘 머리에 자랑스레 쓰고 다니던 화려한 털모자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 아니? 천 피트도 넘게 떨어진 거리에서?”

황급히 갑판에 몸을 엎드리며, 스테파노프는 경악에 가득 찬 비명을 내질렀다. 천 피트(약 삼백 미터) 밖에서 저격이라니, 이건 유럽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사격술이었다.

아니, 야만인들이 저런 고등한 사격술을 가지고 있을 리가 없지 않나. 방금 날아온 총탄은 하바로프가 겪었던 것처럼 운 좋게 이쪽으로 날아온 신호탄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며, 스테파노프는 애써 자신을 다스렸다.

피슝, 피슝, 퍼퍽.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스테파노프가 서 있던 곳을 또다시 총탄들이 스치며 배에 박혔다. 그가 자신감을 얻어 몸을 미처 일으키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스테파노프 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소리냐? 지금 적군이 나타난 것보다 더한 일이 어디 있다고!”

“저쪽, 저쪽을 보십시오! 강 상류에서 불타는 무언가가 떠내려옵…… 으악!”

스테파노프에게 급보를 전하려 달려오던 부관이 피를 뿜으며 나자빠졌다. 그에게서 뿌려진 뜨거운 핏방울들이 상관의 얼굴을 적셨다.

반쯤 넋이 나갈 것 같았으나, 스테파노프의 몸뚱이는 자신도 모르게 알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어깨를 쥐고 갑판을 뒹구는 부관을 뒤로 하고, 스테파노프는 부관이 가리켰던 방향을 향해 네 발로 기듯이 이동했다.

“……저 불덩이들은?”

눈동자에 비치는 비현실적인 광경에 스테파노프는 몇 번이고 눈꺼풀을 여닫아야 했다. 시꺼먼 연기를 망토처럼 휘날리며 시뻘건 화마(火魔)들이 강 위를 달려오고 있었다.

“하나님 맙소사, 제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입니까? 야만인들의 땅에서 이런 일을 겪을 리가…….”

넋이 완전히 나가버린 스테파노프는 그 불덩이의 정체가 자신이 지금까지 열심히 씹어댔던 야만족의 조각배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자신의 배가 강의 물살이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 또한 알아채지 못했다.

***

“좋아. 이대로 작전을 개시한다.”

종사관이 얼굴에 짐승 가죽을 뒤집어썼다. 김악기를 비롯한 총통위 군관들에게 세부 작전을 지시한 후였다.

황건철 군관은 퇴로를 끊으러 간 파총 나리를 따라 어디쯤까지 갔으려나. 김악기는 문득 전설적인 호포대 대선배님과 같은 임무를 받아 전장에서 싸울 선임이 부러워졌다.

한편 김악기가 소속된 소부대를 비롯한 두 개의 부대가 안 대감의 명을 받고 수중 작전에 투입되어 있었다. 만주로 파견 온 총통위 중 수군 경험이 있는 이들로 골라 조직한 부대다.

“등패와 왼손을 단단히 결박했나? 이것이 너희의 생명줄이다. 목숨이 아깝거든 허술히 다룰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종사관의 말 한마디가 가슴 한가운데를 꿰뚫고 지나갔다. 병아리인 김악기조차도 그가 이렇게 엄포를 놓는 이유를 바로 깨달을 수 있을 정도로 싸늘한 목소리였다.

수군과 군관도감에서 개처럼 굴려진 덕분에 수영 하나는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유사시 물에 빠졌을 때를 대비해 받은 훈련, 지금처럼 물을 침투로로 활용하는 작전은 조선군 중에 겪은 이가 없을 것이었다.

김악기는 자신도 모르게 등나무로 엮은 방패에 단단히 묶은 자신의 왼손을 쳐다보았다. 총통위에 들어온 이후로 수족처럼 다루던 방패다. 아무리 물에 잘 뜨는 물건이지만 이것에 목숨을 온전히 맡기고 물살을 가를 수 있을까.

“그리고 한 가지 더 명심해라. 너희가 맡은 임무는 가장 어렵고 위험한 임무이나, 너희의 성패가 이번 작전의 성공을 가를 것이다.”

그러나 자신처럼 왼손에 등패를 묶은 종사관의 팔뚝에 드러난 흉터가 김악기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가라앉혀주었다.

번장들이 그토록 자랑하던 저 십자 흉터야말로 심양 시절부터 온갖 사지(死地)를 헤쳐 온 호포대 출신 숙련병의 상징이다.

“안 대감께서 청나라 놈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준 것은 다들 기억하고 있겠지. 그러나 너희가 실패했을 때, 지금까지 눌려있던 청나라 놈들이 대감께 무슨 짓을 할 것인지는 사람새끼라면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

“그것뿐만이 아니다. 너희가 실패하게 되면, 우리를 믿고 이 땅으로 보내신 전하의 얼굴에도 먹칠을 하는 격이 되고 말 것이다. 네놈들은 전부 전하께 평생 갚아도 갚지 못할 은혜를 입은 자들이 아니냐.”

김악기만 해도 평생 벼슬과는 인연이 없을 서자가 임금 덕분에 감히 금군이라는 영광스러운 자리를 꿰찰 수 있었다. 마찬가지 처지인 주변 병사들의 눈빛 역시 달라지는 것이 보였다.

게다가 총통위가 받는 대우는 그전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그러니 먹는 것으로 부조리가 생길 정도였지. 방금까지 싸늘하게 식었던 병사들의 가슴이 다시 달궈지기 시작했다.

“종사관 나리, 그럼 저희는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싸워라. 죽을힘을 다해 싸워서 저 나선 놈들의 숨을 전부 끊어놓아라. 그리고 청나라 놈들이 우리를 보고 감히 얼굴도 들지 못할 정도의 전과를 올려라.”

꿀꺽. 김악기의 목구멍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주상 전하와 찬성 대감은 너희가 이루어낸 것들을 누구보다 공정하게 보아 주실 분들이다. 그분들을 믿고 저 잔악한 나선 놈들을 상대로 너희의 무용을 마음껏 뽐내거라.”

“예, 종사관 나리!”

“우리는 놈들이 꽁무니를 빼기 전에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움직일 때는 바람처럼 날쌔게, 기척을 숨겨야 할 때는 숲처럼 고요하게. 그 다음은?”

“……적을 칠 때는 번지는 불처럼 맹렬하게, 지킬 때는 산처럼 묵직하게.”

“좋다. 우리가 조선제일부대 총통위다. 놈들에게 총통위가 어떤 부대인지 똑똑히 알려주어라.”

종사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든 부대원들이 품에서 꺼낸 짐승 가죽을 뒤집어썼다. 그들 모두가 숨죽여 종사관의 신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타당, 타당. 반대쪽 기슭에서 아군의 총격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적을 쏘아 넘기고 시선을 끌어주는 동안, 이쪽 특작대가 움직여야 할 시간이 점점 다가오는 중이었다.

“지금이다!”

상류에서 미세한 연기가 올라오는 것이 보이자마자, 벼락같이 소리를 지른 종사관이 선두에 서서 목표를 향해 달려 나갔다.

목단강과 송화강이 합류하는 지점, 강가의 수풀에서 짐승 수십 마리가 뛰쳐나와 강물에 몸을 숨기기 시작했다. 거친 물살에도 불구하고 몸을 자유롭게 운신할 수 있었던 짐승들은, 이윽고 목표로 삼은 러시아 원정대의 선박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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