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발본색원
까놓고 말해서, 오랜만에 맡는 만주의 공기는 조금 어색했다. 화약 냄새가 섞인 전장의 분위기 역시.
“쳇.”
그동안 이 녀석을 멀리한 탓에 솜씨가 녹슨 건가.
병사들이 하선한 카자크들을 쏘는 사이 갑판 위에 모습을 드러낸 적을 쏴 봤는데,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목표물이 재빨리 몸을 숨긴 것을 보니 모자를 벗긴 것에 그친 건가. 옆 참호의 병사에게 방금 내가 쏜 자리로 예측 사격을 지시했으나, 이것마저 헛방이었다. 모자를 날려먹고 겁이라도 잔뜩 먹은 모양이다.
탕. 이번에는 명중이다.
숨을 고르고 다시 발사한 탄환은 대열 안에서 장전을 개시한 머스킷티어 한 놈의 목숨을 앗아가 버렸다.
“역시……. 섭정왕께서 어전께 위임장을 보내신 이유가 있군요. 어떻게 고려 사람이 선대 카간의 눈에 들 수 있었나 했더니 이런 비밀이…….”
방금까지 내 총에서 연달아 터진 사격음에 귀를 막고 있던 머이런 장긴이 겨우 말을 걸어왔다. 냉병기 위주의 군사만 지휘하던 사람이라, 화약의 폭발음에 쉽게 익숙해질 수 없었던 모양이다.
“한창 카간 아래에서 한군 놈들을 쏘아 넘기던 시절에 비하면 많이 모자랍니다. 우리 총통위 병사들을 보십시오. 제 사격 솜씨에 비하면 백발백중이 아닙니까.”
“암반 장긴이 그리 애를 먹었던 나선 놈들이 이리도 쉽게 격멸되다니……. 게다가 지금 이 전장에 전력을 다하신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적보다 우수한 병사와 우수한 무기를 들고 있는데 일개 전투에 승리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지요. 이런 상황에서 함정까지 적이 깊숙이 들어오는 행운까지 따랐는데, 그런 적을 살려 보내서야 되겠습니까.”
“보통 쓰이는 병법과 다르게 어째서 수적 우위를 스스로 포기하시고 병력을 쪼개시나 했더니 제 식견이 짧았습니다. 놈들도 아군 병력이 적은 것을 보고 방심한 모양인데…….”
흥분을 못 이긴 머이런 장긴의 입에서 계속해서 찬양 일색이 흘러나오는 이유가 있었다.
사격이 잠시 멎은 사이 대열을 갖춘 카자크 기병의 돌격이 청군 기병에게 일차로 저지당했다. 그리고 그 사이 장전을 마친 조총수들은 기병의 머리 위로 총알의 소나기를 퍼부어댔다.
지난번 싸움에서 청군에게 가장 큰 피해를 주었다던 적 머스킷티어의 사격은 우리 조총수들에게 닿지 않았다. 2차 저지선에서 장창을 들고 흘러나온 적 기병을 방어하는 쿠투러 등패수들의 등나무 방패는 적의 탄알 또한 상당수 막아내고 있었다.
남은 것은 전의를 점점 잃어가는 적을 일방적으로 두들기는 일뿐.
미리 파놓은 참호와 토벽 뒤에서 재빠르게 장전을 마친 총통위 조총수들은 끊임없이 적을 쏘아 넘겼다.
“세상에, 이게 말로만 듣던 그……. 어째서 다른 팔기들은 이런 병사와 전술을 받아들일 생각을 하지 않는 겁니까?”
“글쎄요. 그분들은 나름대로의 전술로 한조에 승리를 거둬 오시지 않았습니까. 다만 나선 같은 적을 상대할 때는 제 전술이 더 적합한 것이겠지요.”
“하긴, 저 역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화약무기는 한인들이나 고려인들이 쓰는 것이라고 여겼었지요. 이런 만주 구석까지 녹영병을 주둔시킬 수는 없을 노릇이고요.”
머이런 장긴이 말했듯, 만주족 출신 병사들은 이상하게도 화약무기를 쓰지 않으려는 자가 대다수였다. 그들이 조총을 처음 접했을 때는 총신을 녹여 재활용할 정도였으니.
하지만 그렇다고 팔기군 전체가 화약무기를 쓰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누르하치는 사천의 장창병을 귀순한 명군 조총병과 방패차로 패퇴시켰고, 홍타이지 역시 나를 중용하며 조선인 조총수들을 요긴하게 써먹었다. 그리고 한인팔기라 불리는 명군 출신 팔기군 역시 조총과 대포를 분명 운용하고 있었다.
“제가 알기로는 심양에서 보낸 홍이포도 팔기군의 무기라고 하던데요. 공성전을 대비하기 위해 미리 강 하류로 보낸 물건 말입니다.”
“적어도 닝구타에는 그것을 쓸 줄 아는 병사가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여기서 쓰는 화포라고 해봐야 작은 불랑기포가 전부거든요. 고려군이 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첫 번째 전투의 패배를 다시 반복했을 것이 뻔합니다.”
“그 정도입니까? 제가 선대 카간을 모시던 시절의 청군은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아무래도 카간께서 북경으로 옮겨가신 이후부터 병력의 질이 영 좋지 않아졌습니다. 갑자기 든 생각인데, 이곳의 지방군처럼 팔기도 같은 상황에 처했을까 그것이 염려되는군요.”
아. 이 이야기를 들으니 떠오르는 지식이 하나 있었다.
청나라가 화북에 입관한 이후 최강을 자랑하던 팔기군의 질은 급속도로 하락하기 시작한다. 아마 그 원인은 만주에 영지를 가진 팔기들을 짧은 시간 안에 강제로 화북으로 이주시키며 영지 재분배를 졸속으로 시행했기 때문이었던가.
팔기는 단순한 군대가 아니었다. 한 영지의 지배계층이 영지에서 얻은 생산력을 바탕으로 무장을 갖춰 조직한 집단이었다. 그러니 자신이 가진 영지와 결속이 흐려질수록 전투력도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마 청나라가 회수 장강을 좀처럼 넘지 못하는 이유는 내부 분열 뿐만이 아니라 여기서 기인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이른 시기에 재빨리 이루어진 입관이 오히려 독이 된 것인가.
“어쨌건, 지금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구사 어전께서 훌륭한 군재를 발휘하시어 저 간악한 나선 놈들을 철저히 패퇴시키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판단을 내리기에는 너무 이릅니다, 머이런 장긴. 아직 계획의 반도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어전 같은 명장이 지휘하는 강군이 저런 소규모 병력을 못 요리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저는 명장 옆에서 이런 전략을 구경하게 된 것을 행운으로 여기고 지금을 더 즐기겠습니다.”
헌데 왜 다들 이렇게 제멋대로 나를 무관이라 착각하는 걸까. 소과부터 성균관, 대과까지 문관의 엘리트 코스만 골라 밟았는데 어째서…….
“즐기고만 있으시면 안 됩니다. 두 번째 작전을 시행할 시간이 다 되지 않았습니까.”
“아차, 그렇군요. 말씀하셨던 대로 적이 우왕좌왕하고 있는 틈을 제대로 공략해야겠지요. 돌격 신호를 보내라!”
뿌우.
청군 특유의 길쭉한 나팔에서 울리는 소리가 전장에 세 번 연달아 퍼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가느다란 연기가 오르던 강 상류 방향에서는 본격적으로 시꺼먼 먹구름이 뭉게뭉게 오르기 시작했다. 적에게 혼란을 가하기 위해 계획한 화공(火攻)의 신호다.
동시에 나는 그동안 천천히 장전을 마친 호총을 들어 마지막 한 방을 신호 삼아 격발했다. 전번에 헛방을 쳤던 것과 달리, 발사된 총탄은 러시아 함선의 갑판을 달려가던 군사 하나를 쓰러뜨렸다.
“그럼 우리도 갑시다, 머이런 장긴.”
“예? 지금 있는 언덕이 관측하기에는 더 좋은 자리가 아닙니까?”
“적과 지상에서 전면전을 벌일 때에는 그러하나, 지금부터 전투의 양상은 패주하는 적을 격멸하는 추격전으로 변했습니다.”
“아아…….”
“강 위에서 일어나는 일까지 빠르게 대처하려면 지휘관은 더 전장 가까이에 위치해야 합니다. 따라오십시오.”
말을 마치기 무섭게 몸을 날려 대기시켜놓았던 말에 올라탔다.
높아진 시야에는 슬슬 후퇴하기 시작하는 러시아 원정대가 보였다. 이미 아군 조총수들의 장거리 사격에 대열은 무너진 지 오래였고, 기병은 빠르게 전장을 이탈, 머스킷티어는 무기를 내던지고 배로 돌아가려 허둥거리고 있었다.
계획대로군.
“가자! 이럇!”
옆구리를 걷어차인 말이 전장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뒤늦게 말에 오른 머이런 장긴이 감탄하는 소리가 천천히 나를 따라왔다.
***
“어째서……! 어째서……!”
스테파노프의 입에서 비통한 절규가 터져 나왔다. 지금 러시아 원정대의 패잔병들은 나흘째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강을 따라 도망치는 중이었다.
“진정하십시오, 스테파노프님!”
“지금 이 꼴을 보고도 진정하게 생겼나, 부관!”
상류에서 불덩이들이 떠내려 오기 시작했을 때, 스테파노프는 자신이 완전히 덫에 걸려들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야만인 놈들을 과소평가했다는 것 역시도.
그래도 강의 흐름이 빠르지 않았던 덕분에 대다수의 러시아 함선은 어떻게든 닻을 올리고 불덩이들을 피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는 것.
운이 좋지 않았던 몇 척은 불덩이가 선체에 꽂힌 채로 그대로 타들어가야 했다. 불이 붙은 채 흘러온 조각배의 선수에는 작살 비슷한 것이 달려있어 한 번 문 배를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야만인 놈들이 이 정도로 머리를 굴릴 수 있을 줄이야.
“부관! 놈들이 아직도 우리를 따라오고 있나!”
“그렇습니다! 대략 이천 피트 정도 거리를 두고 계속해서 추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쑤꺄 블럇!(сука блять!) 어떻게 저 미개인 놈들이 우리 함선을 조종하는 법을 알고 있는 것이냐! 그것도 저렇게 능숙하게!”
“우리 배는 선상 전투에서 선원이 많이 상했지 않습니까! 선원이 모자라니 속도를 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바람도 지금 우리 편이 아니고요!”
“알고 있다, 알고 있다! 그리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이런 젠장맞을!”
그러나 적이 판 함정은 하나가 아니었다.
불덩이를 피하느라 정신이 온통 쏠려 있던 사이, 이미 아군 함선에는 적이 보낸 특작대가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이상한 덩굴로 엮은 방패와 고리가 달린 칼을 든 야만인들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가면을 뒤집어쓴 채 선원들을 베어 넘겼다.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강가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어 특작대가 많이 올라타지 못했던 배 세 척 뿐이었다. 나머지 함선은 전부 배에 올라탄 야만인들의 손에 들어갔고, 그렇지 않은 배들도 인명 피해가 극심했다.
순간 스테파노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고 보니 함께 도주하던 함선 세 척 중 한 척이 보이지 않았다.
“나머지 한 척은 어디 갔나! 어째서 내 눈에는 아군의 배가 두 척밖에 보이지 않는 거지?”
“스테파노프 님……? 이미 어제 미끼가 되길 자원해 함대에서 이탈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희생 덕분에 이 정도로 거리를 벌릴 수 있었던 것인데요?”
아아, 그랬나.
순간 스테파노프의 시야가 암흑으로 물들었다 원상태로 돌아왔다. 4일 동안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하고 도망치느라 러시아 원정대 전원의 판단력은 이미 정상에서 한참 벗어난 상태였다.
“헌데 이제 어떡하시겠습니까? 이대로라면 쿠마르스크 요새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돌아갈 수 없다고? 이제 곧 아무르 강(흑룡강) 본류로 진입할 텐데, 탈출구를 얼마 남겨놓지 않고 그것이 무슨 소리냐!”
“스테파노프 님……. 쿠마르스크 요새는 아무르 강의 상류에 있지 않습니까. 바람, 그것도 동풍이 불어 주지 않으면 거대한 강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기 쉽지 않습니다……. 제발 정신 좀 차리십시오…….”
어깨 부상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정신줄을 잡고 있던 부관도 이제 한계가 온 모양이었다. 부관뿐만이 아니라 야만인들의 추격에 쫓기고 있는 모두가 정신적 육체적 피로가 극에 달해 있었다.
“바람!”
무심코 스테파노프는 손가락을 입에 넣었다가 머리 위로 치켜 올렸다. 침이 증발해 차가워지기 시작한 손가락은 지금 미약한 북서풍이 불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아무르 강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거대한 강이다. 아무리 범선으로 역풍을 뚫고 강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는 하나 그것은 느린 속도를 감당할 여유가 있을 때의 이야기. 이렇게 되면 육로로도 추격해오는 적을 따돌릴 수 없다.
제길.
“이, 이거……. 하늘도 우리 편이 아닌 모양이구나!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답은 하나뿐입니다. 수로가 안 된다면 육로로 탈출하는 수밖에요. 다만 우리 병사들이 그것을 버틸 수 있을지가…….”
절망에 빠진 부관은 말을 제대로 맺지 못했다. 그 말을 듣는 스테파노프의 심정 역시 그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반나절 후, 조청연합군은 도망치던 러시아 함선을 따라잡았다. 그러나 강가에 세워진 채로 발견된 배는 텅 비어 있었다. 부상으로 거동이 불편한 러시아 선원 일부만이 배에 남아 있을 뿐.
“예상대로군요. 구사 어전. 여기 남아 있는 나선 놈들은 영고탑으로 압송하겠습니다.”
“흔적을 잘도 인멸한 것 같지만 어차피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은 뻔합니다. 그럼 우리도 그물 안으로 고기를 몰아넣으러 가 볼까요.”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사령관의 체력은 대체 어디까지가 한계냐며 머이런 장긴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정작 조청연합군의 사령관 본인에게는 그 말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휴식은 전투가 끝나고 얼마든지 취할 수 있는 반면, 적의 뿌리는 지금이 아니면 뽑아내지 못한다. 무엇을 우선시해야 할지는 명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