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그물 안에 든 물고기
“허억…… 허억…….”
인적이 드문 흑룡강 유역에 웬 거친 숨소리가 울려 퍼졌다. 거지꼴이 되어 도망치는 중인 러시아 원정대가 내는 소리였다.
그나마 배로 도망치던 때보다는 사정이 나았다. 배에서 하선하며 흔적을 잘 지운 덕분인지, 적 추격대가 따라붙는 모습이 관측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좋아, 오늘은 여기서 휴식한다. 계산대로면 아찬스크 요새까지는 얼마나 남았나?”
“이틀 정도 더 걸으면 도착할 것 같습니다. 스테파노프 님.”
“이틀이라……. 일단 아찬스크에서 어느 정도 회복을 한 후 후방으로 후퇴한다. 끈질긴 야만인 놈들 같으니라고.”
러시아 원정대는 지금 원래 목적지와 정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본거지인 흑룡강 상류의 쿠마르스크 요새가 아닌, 하류에 위치한 예비용 거점, 아찬스크 요새로 향하고 있던 것이다.
방향을 속인 덕분인지, 최근 들어 적 추격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지금 러시아 원정대는 패배 후 처음으로 숙영지를 마련하고 휴식다운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젠장……. 야만인 놈들이 어떻게 그런 사격술을…….”
모래바닥에 대충 가죽을 펼치고 겨우 다리를 쭉 편 스테파노프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야만인 놈들을 치러 가기 전, 의기양양했던 모습은 이제 마치 거짓말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거듭된 피로 탓인지 발이 신발 안에서 부어올라 터질 것 같았지만 그동안 발걸음을 쉴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언제 야만인 놈들이 뒤를 칠지 몰라 이따금씩 반 시간 남짓 휴식을 취한 것이 전부였으니까.
“하나, 둘, 셋, 넷……. 빌어먹을, 이것밖에 남지 않았다니……. 나도 하바로프처럼 모스크바로 압송되는 건가.”
야만인 부락을 약탈하러 강을 거슬러 올라갈 때만 하더라도 스테파노프의 휘하에는 400명이 넘는 부하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의 곁에는 남은 부하는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일단 살아남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보초는 세워놓았으니 그만 쉬시지요. 안색이 좋지 못하십니다.”
“그래, 그 말이 옳다, 부관. 목숨만 붙어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는 법이지. 그 하바로프도 결국 재판에서 무죄를 받아내지 않았나.”
명령불복종으로 모스크바로 잡혀갔던 하바로프도 결국 차르에게 용서를 받고 시베리아 개척에 다시 종사한다는 조건으로 작위를 회복했다. 스테파노프 자신도 잘만 하면 하바로프처럼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
어쨌건 모스크바에 귀중한 정보를 알릴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스스로를 다이칭 구룬이라 부르는 야만인 놈들이 뛰어난 신무기를 지녔다는 귀중한 정보 말이다. 그런 무기를 든 절대다수의 적과 싸워 패배했으니 정상참작을 받을 수 있을지도.
그제서야 마음이 조금 가라앉은 스테파노프는 가죽 위에 몸을 길게 누일 수 있었다. 복잡하던 머릿속이 천천히 정리되는 것 같았다.
“좋아, 야만인 놈들이 내 의도를 읽었을 리 없지. 분명 우리가 상류의 쿠마르스크 요새로 간 줄 알고 허깨비를 쫓고 있을 것이다.”
“우리 원정대는 최근 몇 년 간 쭉 쿠마르스크를 거점으로 활동했으니까요. 그래도 스테파노프 님의 지시로 아찬스크에도 비상용 물자를 계속해서 거치해 놓은 것이 이렇게 도움이 되는군요.”
“아찬스크 역시 우수리 강이 아무르 강에 합류하는 요충지지. 당연한 판단이다. 그리고 그 당연한 판단이 우리를 구할 것이다.”
사실 아찬스크, 그러니까 현대의 하바롭스크로 러시아 원정대가 발길을 돌린 이유는 또 있었다. 쿠마르스크 요새는 하선한 위치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던 것이다. 지치고 부상당한 병력을 끌고 도달하기 어려운 거리였다.
“놈들이 쓸데없이 수색에 시간을 보내는 동안 우리는 철저히 회복에 전념한다. 그리고 재빠르게 후방 거점인 야쿠츠크로 후퇴한 후 모스크바로 긴급 보고를 보내야 할 것이다. 야만인 놈들이 강대한 군세를 가지고 있다고 말이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정리가 되어서 그런가, 바짝 긴장되어 있던 스테파노프의 몸에 그동안 누적된 피로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무거워진 눈꺼풀을 내리고 오랜만의 휴식에 돌입하려던 순간이었다.
뿌우.
강가에 접해있는 수풀에서 웬 낯선 관악기 소리가 터져 나왔다. 막 잠에 들려고 했던 스테파노프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몸에 얼음물이 끼얹어진 듯했다.
“이, 이건?”
“스테파노프 님, 설마…….”
뿌우. 뿌우.
마치 첫 소리에 응답하듯 두 번의 나팔 소리가 울렸다. 기억났다. 야만인 놈들이 머스킷총병과 파이크병을 향해 돌격할 때 내던 그 소리다.
“전원! 기상이다, 기상! 무기를 집어 들고 주변을 경계……!”
그러나 무거운 몸을 일으키며 소리를 질러대던 스테파노프는 말을 끝까지 마치지 못했다. 수풀 사이에서 하나둘씩 짐승 머리를 한 야만인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떻게, 어떻게 여길!”
스테파노프의 비통한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숙영지 주변에 무서운 속도로 횃불이 오르기 시작했다. 활활 불타오르는 불덩이들은 이미 러시아 패잔병들이 완전히 포위되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번쩍.
앞으로 나서기 시작한 수두인(獸頭人)들이 차례차례 누워있던 카자크들을 겨누었다. 그들의 손에 들린 총검에 횃불에서 비친 빛이 반사되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접근을 경고했어야 할 보초병은 이미 제압된 지 오래였다.
***
“헤헤, 구사 어전님. 이 샤르후다가 어전님의 명을 받들어 큰 공을 세워왔습니다. 지금 바로 보시겠습니까?”
열심히 손을 비벼대던 샤르후다가 부하의 손에서 상자 하나를 빼앗아들더니 내게 바쳤다. 이 인간, 내가 러시아 원정대를 단숨에 격파하는 것을 목격한 이후로 태세 전환이 아주 수준급이다.
이게 이 남자의 처세술인가. 조금 역겹긴 하지만 대단한 수준임은 부정할 수 없다. 나와 같은 생각인지, 내 옆에 서 있던 머이런 장긴 역시 순간 표정을 구긴 것을 똑똑히 보았다.
사실 머이런 장긴도 샤르후다에게 품은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음에도 그동안 거의 티를 내지 않긴 했다. 이런 걸 보면 처세술이 뛰어난 점은 사령관이나 부사령관이나 닮아 있긴 한데.
“엄밀히 말하면 암반 장긴이 세운 공은 아니지 않습니까? 장긴은 반대편 유역을 수색하는 임무를 받았을 텐데요.”
“에이, 무슨 섭섭하신 말씀이십니까? 길잡이를 맡은 제 부하가 간악한 나선 놈들에게 어전님의 정예병을 인도하던 도중에 이렇게 공을 세워왔으니, 그것은 제 공과 다름이 없지요. 자, 보십시오!”
사실 그다지 상자에 든 내용물을 보고 싶지 않았다. 쉬파리가 주위를 떠돌고 있는 상자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안 보아도 알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강제로 보여주는데 눈을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예상대로 상자 안에는 혀를 빼문 수급 하나가 들어있었다. 이렇게 포장까지 정성스럽게 해온 것을 보니 적 지휘관의 수급인 듯했다.
“구사 어전님이 모자란 소관을 도와주신 덕분에 제 부하가 적의 괴수를 이렇게 처치할 수 있었습니다! 이 전공을 모두 어전님께 바치겠습니다!”
“웬만하면 적들을 포로로 잡아오라 명을 내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어째서 이 사람만 머리를 잘라 가져온 겁니까? 다른 나선 침략자 놈들은 대부분이 포로로 잡혔지 않습니까?”
“아, 어전님. 설마 소관을 군공에 눈이 먼 그런 사람으로 보시는 겁니까? 오해십니다!”
아뇨, 정확하게 그렇게 보이는데요. 나를 대하는 태도가 180도로 변한 주제에.
“오해요? 제가 분명 이들의 처분은 카간과 섭정왕께 달려있다 그리 말씀을 드렸을 텐데요?”
“이 자는 소관의 부하가 처리한 것이 아닙니다! 포위망에 걸려들고 나서 절망에 빠져 자결했다고 들었습니다! 여기 고려인 장수에게 물어봐도 같은 대답을 할 겁니다! 믿어주십시오!”
“정말입니까? 김 파총?”
“옛, 대감. 작은 저항 끝에 적의 수괴가 자결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수급만 취한 것은 시신을 전부 운반할 수 없었기 때문이고요.”
뭐, 김귀돌까지 이렇게 같은 증언을 하고 있으니, 샤르후다의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끝까지 사정을 들어본 결과, 러시아 원정대가 항복하는 척을 하고 최후의 발악을 한 결과 벌어진 일이긴 했는데, 아무튼.
“……악독한 놈들 같으니, 쓸 데 없는 저항을 한 탓에 우리 병사들만 더 상하지 않았나. 놈들은 저지른 죄에 대한 앙갚음을 받게 될 것이다.”
“옛. 그래도 이것으로 모든 작전이 일단락이 되었습니다. 놈들의 잔당이 남아있는 요새를 공략하는 일까지 마무리되면 조선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니, 조선으로 바로 귀환할 수는 없네, 김 파총. 이번 전과를 북경에 보고하는 것까지가 우리가 전하께 명받은 임무니까.”
“아, 그렇습니까? 그럼 오랜만에 호포대 동료들과 심양과 북경에 방문할 수 있겠군요. 그렇다면 이거, 귀국이 늦춰지는 보람이 있는데요.”
멋쩍은 듯이 손가락으로 코를 훔친 김귀돌이 씨익 웃음을 흘렸다. 하긴, 그에게는 젊은 시절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을 다시 방문하게 되는 일이니 기분이 좋을 만했다.
그러나 내 경우는 사정이 조금 달랐다.
글쎄, 과연 십여 년 만에 다시 마주하는 도르곤이 내게 어떤 말을 꺼낼 것인가.
“아, 어전께서는 북경에 들렀다가 귀국하십니까?”
“그렇소.”
“그럼 소관도 동행하겠습니다! 어전님이 세우신 군공을 모두의 앞에서 또박또박 증언하는 일의 적격자가 닝구타 암반 장긴인 저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예?”
이 인간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가. 샤르후다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보니 진심인 것 같긴 한데.
“암반 장긴. 전리품이 탐나서 그런 것이면 그만 두십시오. 저는 분명 수거한 전리품의 절반만 가져간다고 이미 이야기를 하지 않았습니까?”
“전리품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 아, 그게 아니라, 제가 아니면 어전의 빛나는 판단력과 용병술을 누가 증언할 수 있겠습니까?”
글쎄요. 여기 머이런 장긴도 충분히 증언할 수 있지 않을까요?
“게다가 북경 조정에는 제가 아는 인맥들도 많습니다! 그들이 어전께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인맥이요?”
“제가 누굽니까! 선선대 카간 시절부터 종군하며 숱한 공을 세운 구왈기야 가문의 사람이 아닙니까! 물론 어전께서는 섭정왕 파벌이라 꺼리실지도 모르지만, 알아둬서 나쁠 것은 없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고려국에 속한 사람입니다. 다이칭 내부의 파벌에는 속해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번 싸움의 논공행상은 카간께서 판단하실 문제고요.”
쓸 데 없는 제안을 딱 잘라 거절했다. 그러나 고집 센 샤르후다는 뜻을 꺾으려 들지 않았다.
그 순간, 어느새 바짝 붙은 머이런 장긴이 귓가에 나직한 말 한마디를 속삭였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재빠른 행동이었다.
“저, 구사 어전. 암반 장긴의 청을 그냥 받아 주시지요.”
“머이런 장긴?”
“암반 장긴이 탐욕이나 부리는 능력 부족한 지휘관이긴 하나, 그의 인맥은 진짜입니다. 그리고 소개 대신 바라는 것도 그리 큰 것이 아닐 거고요.”
“소개 대신 바라는 것이라……. 아마 본인이 첫 전투에서 저지른 실책을 잘 덮어달라는 것이겠지요.”
“예. 어쨌건 샤르후다도 암반 장긴 자리는 유지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중요하지 않은 일로 그를 막다른 골목에 몰아넣을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무는 법이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다. 어차피 지방군 사령관 하나를 반드시 조져야 할 필요가 없기도 했고.
사실 그가 그렇게 자랑하는 북경의 인맥이 굳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제안을 딱 잘라 거절해 적을 만들어서 무엇 하겠는가.
게다가 샤르후다는 지휘권을 순순히 내준 이후로는 내 명령에 잘 따라주기도 했고.
“제가, 제가 모두 증언하겠습니다! 바람이 적게 부는 날을 틈타 마치 수상요새와도 같던 적의 함대를 공략해낸 어전의 지략을! 흔적을 지운 놈들이 어디로 향할 것인지 정확하게 읽어낸 빛나는 판단을!”
“…….”
“선대 카간께서 어전께 만주족 이름과 바투루(전사) 칭호를 내린 것이 훌륭한 혜안이었음도 함께 증언하겠습니다! 그러니 어전, 제게 부디 북경에 동행할 기회를 내려주십시오!”
마음대로 지껄이라지.
어차피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으니, 이 정도의 자비를 베풀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국경 인근 지역의 사령관에게 은혜를 베풀어 놓으면, 함경도에서 국경을 지키는 병사들에게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다.
처세술이 저리 좋은 사람이니 받은 은혜도 기억하긴 하겠지.
“알겠습니다, 암반 장긴. 북경으로 함께 가시죠. 어쨌건 제가 전장에서 본 암반 장긴의 모습은, 제 명령을 받아 본인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 모습뿐이니까요.”
“감사, 감사합니다! 구사 어전!”
***
러시아 원정대를 완전히 북만주에서 몰아낸 것은 그로부터 시간이 조금 흐른 후였다. 흑룡강 상류에 위치한 요새에 주둔 중이던 일부 병력을 대포까지 동원한 공성전 끝에 격멸하고 나서야 내 임무가 모두 끝이 난 것이다.
그리고나서 나는 청나라 황제 앞에서 개선식을 치를 일부 병력을 데리고 북경으로 향했다. 귀국을 원하는 나머지 병력은 조선으로 돌려보낸 다음이었다.
“승리를 거두고 개선한 고려국 원군의 우두머리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라!”
그렇게 북경에서 진행된 개선식에서, 나는 익숙한 얼굴 여럿을 발견할 수 있었다.
딱 봐도 건강이 좋지 않아 보이는 도르곤, 홍타이지의 후계자 선정에서 대립각을 세웠던 호오거, 그리고 안면을 터놨던 다른 친왕들까지.
다들 흘러간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데다, 타계한 몇몇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내가 청나라를 떠난 지 오래되었다는 것을 실감케 하고 있었다.
“선황제께서 그대에게 만주족 이름과 바투루 칭호를 내리셨다지. 이번에 세운 전공을 보니 아버님의 판단이 백번 옳으셨군. 앞으로도 다이칭 구룬을 위해 고려에서 헌신하도록.”
헌데 젊디젊은 순치제의 격려를 듣고 머리를 조아리는 와중에, 나는 이 자리에서 눈에 띄는 점을 두 가지 발견할 수 있었다.
우선 한 가지, 이질적인 외모를 가진 아담 샬이 이 자리에 끼어있는 것은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지금 순치제의 총애를 듬뿍 받고 있을 테니까. 북경에 온 김에 다시 만나 봐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헌데 숙친왕 호오거 옆에 서서 내게 계속해서 따가운 시선을 날리는 낯선 남자는 또 누구란 말인가? 그 날카로운 시선에서 느껴지는 얄팍한 적대감이 내게 불길한 예감을 심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