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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42화 (242/298)

242화. 새로운 결심

그날 밤, 나는 아담 샬과 술자리를 기울이며 여러 가지로 각오를 다졌다.

홍타이지가 세상을 떠나고 청을 떠난 후, 나는 내가 방향을 돌려놓은 대륙의 정세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내 눈으로 확인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러나 역사라는 거대한 톱니바퀴 사이 끼어들어간 작은 돌멩이 하나는, 아무래도 꽤나 큰 균열을 일으킨 듯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십니까?”

“아, 아닙니다. 술기운이 조금 올라오나 봅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가져온 술이 확실히 사람을 쉬이 취하게 만드는군요.”

“원래부터 독한 술이긴 하지요. 허나 저는 아직도 취하려면 먼 것 같습니다. 장긴께서 지구 반대편에서도 이 미미한 사제 하나를 기억해 주신 마음이 깊이 와닿아서일까요.”

내 복잡한 속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아담 샬은 내가 가져온 슈냅스를 홀짝이며 너스레를 떨어댔다. 그를 기분 좋게 만든 것이 나와의 재회인지, 아니면 내가 가져온 선물인지는 모르겠지만 술자리의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독주를 계속해서 내 목구멍으로 넘겼음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또렷했다.

오히려 화끈거리는 차가운 액체가 계속해서 내 심장에 불을 붙이고 있었다.

방금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던 마카타의 일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번 청나라 방문을 통해, 내 안을 지배하고 있던 어떤 생각 하나가 천천히 바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참, 감정(監正) 어른, 한 가지 여쭐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제가 심양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장긴들이 꽤 많았는데, 이번에 북경에 오니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몇몇 있더군요. 혹시 그 사이에 제가 모르는 어떤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글쎄요. 좌찬성께서 모르실만한 일은 없었을 터인데요. 아, 혹시 국경으로 나간 주방팔기(駐防八旗)들을 잊으신 것이 아닙니까? 많은 장긴들이 팔기를 이끌고 지금도 각지에서 적과 대치중이지요.”

“아, 그렇군요. 완전히 잊고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북경을 떠났을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겠군요.”

시치미를 뚝 뗀 채 던진 질문은 원하는 대답을 물고 돌아왔다.

예상대로였다.

입관이 이루어질 때만 하더라도 팔기군의 총 병력은 20만에 달했다. 그러나 그것은 청나라의 모든 정예병을 끌어 모아 화북을 공략해 들어갔을 때의 이야기다.

그 이후로 청은 남명과 회수 혹은 장강을 경계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였다. 그리고 그 사이 명의 북방 영토를 삼키기 위해 일부 병력은 서쪽으로 나아가 점령전을 시행했다.

그리고, 그렇게 삼킨 영토를 유지하려면 주둔군이 필요하다. 그것이 아담 샬이 언급한 주방팔기의 정체였다.

지금은 팔기군 중 일부만이 서안이나 내몽골 등지에 주둔하고 있겠지만, 이 추세가 지속된다면 팔기군은 사분의 일 정도의 병력만을 북경 인근에 남기고 각지로 흩어질 것이다. 아니면 남명과의 전면전이 재개되어 남방 전선에 전부 투입되든지.

“아마 북경에 조금 더 머물게 되신다면 말씀하신 장긴들이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아마 폐하께서 곧 팔기 상당수를 북경 근방으로 모으실 것이기에.”

“북경 근방으로 말입니까? 아아…….”

“저는 섭정왕께도 좋은 감정을 품고 있지만, 원래 권력이란 것은 냉정한 법이니까요. 안타깝게 되었습니다.”

순치제의 총애를 받고 있어서 그런가, 아담 샬은 이미 도르곤 사후 벌어질 숙청 계획까지도 대강 알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소집한 팔기군은 순치제가 정한, 아니 오보이가 정한 숙청대상들을 도륙 내겠지. 간신히 호포대는 그 칼날을 피했지만, 도르곤 밑에서 종군하던 시절 알고 지냈던 정백기, 양백기의 많은 지휘관과 군사들은 아마도 상당수가 목숨을 잃을 것이다.

“한 잔 더 하시죠. 저는 그래도 좌찬성이라도 살아남으실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정 어른. 하지만 아직 정해진 일은 아닙니다. 고작 오 년의 말미를 받은 것뿐입니다.”

아담 샬이 방금 한 말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도르곤의 권유였다지만, 나도 결국은 살아남기 위해 순치제에게 줄을 갈아타지 않았던가.

입맛이 썼다. 입가심이라도 하라는 듯, 아담 샬이 재빨리 술병을 들어 빈 잔을 채우는 것을 보며 나는 천천히 생각에 잠겨들었다.

“저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조선으로 시헌력 서적을 보내고 네덜란드에서 들어온 물품들을 받을 때, 천진(天津)으로 입항하는 위풍당당한 조선 함대의 위용을 목격했으니까요.”

“…….”

“이미 청나라 사람들도 조선이 예전의 조선이 아님을 잘 알고 있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장긴을 부르기 전에 저더러 조선에 대해 많은 질문을 하셨고요. 아마 전번에 자금성에서 오보이라는 장긴이 시비를 걸어온 것도 그런 연유일 겁니다.”

“그렇습니까? 그와는 감정 어른이 아시는 것 이상으로 오랜 악연을 가진 사이입니다. 지금까지는 잘 드러나지 않았지만요.”

“이제 와서 갑자기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 무슨 이유겠습니까? 맹수는 사냥감을 조용히 덮치지 몸을 드러내 위협하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이빨을 세운 이유는, 장긴과 조선이 그만큼 위협적인 존재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추측에 불과하겠지만, 아담 샬은 꽤나 정확히 당시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다. 내가 오보이에게 위협을 당할 때는 목소리도 띄엄띄엄 들릴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었으면서 말이다.

“조선의 함대가 정확히 어떤 규모인지는 모르겠으나, 폐하 앞에서 정성공이라는 자의 목을 가져오겠다 호언장담하신 것을 보니 상당한 규모의 함대를 구축하셨겠지요. 그렇다면 조선의 함대는 다이칭 구룬의 수군으로도 상대가 어려울 것입니다.”

“…….”

“너무 그렇게 침울해하지 마십시오, 안 장긴. 황제께서 장긴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시던데, 그의 심복이 반기를 들어봐야 어떡하겠습니까. 자, 한잔하십시다.”

아담 샬이 건넨 말은 따스했지만, 그다지 위로가 되진 않았다. 조선이 이제 청에서도 무시 못 할 세력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을 남의 입으로 확인받은 것은 고무적이지만, 아담 샬이 그리 믿어 의심치 않는 순치제의 치세는 사실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VIP의 경호실장이나 수도방위사령관이 권력자가 되는 것은 역사의 필연인가. 고작 순치제의 인간백정 역할이나 하던 오보이가 보정대신 자리에 올라 권력을 틀어쥘 수 있었던 이유는 순치제가 요절했기 때문이었다.

사인(死因)은 아마 천연두였던가.

그러나 네덜란드에서처럼 의심을 받지 않고 종두법을 그 귀하신 몸에 시행할 계책도, 그리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우두균을 온전히 동아시아까지 옮겨올 방법도 없었다.

게다가, 순치제가 야사에서처럼 정인인 현비 동고 씨의 사망으로 속세에 뜻을 잃고 출가한 것이라면 종두법도 소용이 없다. 결국 내가 도르곤 대신 선택한 방패도 언젠가는 사라지고 오보이 놈과 정면으로 마주하는 날이 오고 만다는 이야기였다.

독주가 담긴 잔을 쭈욱 들이켰다. 알코올이 미끄러져 내려가는 속은 심화(心火)로 불타는 듯했다.

“……덕분에 힘이 나는군요. 감정 어른을 찾아오길 아주 잘 한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까? 참으로 다행입니다. 앞으로도 북경에 들릴 일이 있거든 자주 찾아오십시오. 장긴을 대접하는 것은 제게도 정말 즐거운 일이거든요.”

내 목소리에 힘이 돌아온 것을 보고, 아담 샬은 즐거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담 샬의 조언 때문이 아니었다.

새로이 각오를 다졌기 때문이었다.

‘우리 사이에 오간 것은 내 일방적인 은혜가 아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이득을 쥐여 주고 협력을 나눈 관계지. 그러니 앞으로는 그렇게 내게 빚을 진 것처럼 굴지 마라.’

머릿속을 활활 태우는 불길 사이로, 도르곤이 얼마 전 내게 던졌던 위로가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다. 도르곤이 어렵게 던진 이 말 한 마디가 끊어놓은 것은 그와의 인연만이 아니었다.

나는 심양을 떠난 이래로 친청파임을 숨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를 노리던 산당의 유교탈레반들이 조정에 들끓던 시절부터 쭉 그래왔다.

물론 세자 시절의 임금이 대청 무역으로 벌어들이는 은자들이 내 뒤를 받쳐주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심양 시절 홍타이지, 도르곤과 어울려 대륙을 달렸던 기억들이 내 안에 소중한 무언가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과거는 잊으십시오. 장긴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날은 무궁하지 않겠습니까?”

함께 독한 술을 삼킨 아담 샬이 입에서 크 소리를 내고는 진저리를 쳐댔다. 동시에 그가 한 말이 칼날이 되어 내 고민을 단칼에 끊어 놓았다.

그래, 이제 홍타이지, 도르곤, 그들과의 인연은 곧 끝이 날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들과의 인연 때문에 청을 마음속에서 비교적 특별하게 대했으나, 앞으로 상황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다이칭 구룬에 진 마음의 빚은 없다. 지켜야 할 의리도 없다.

내게 남은 임무는 내 딸, 내 가족, 내 사람들, 내 임금, 내 나라를 지키는 것뿐.

그 순간, 발아래를 무겁게 잡아끌던 무언가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마치 발목에 채워져 있던 족쇄가 박살이라도 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

그렇게 마음이 정해지자 내 행동은 거칠 것이 없어졌다.

아무리 순치제가 이전의 권한을 복구해주었다고는 하나, 그와의 관계가 아예 속내까지 공유하던 도르곤과의 관계와 같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앞으로의 대청(對淸) 외교를 지금 수준으로 유지하려면 나 스스로부터 도르곤의 그늘에서 자립해야 했다.

“북경 내부의 정보만 모으던 것을 넘어, 이제부터 기보(畿辅, 북경 인근 지방을 통틀어 일컫는 말)의 정세까지 살피라는 말씀이십니까요?”

“그래. 이제 북경에만 조선 상품을 파는 것에 만족해서는 아니 되지 않겠는가. 내 본국으로 돌아가거든 내수사에서 허용하는 활동자금을 늘려줄 터이니, 그것으로 정보원을 늘리도록 하게. 상거래 외의 사소한 정보도 본국으로 보고하도록 하고.”

“아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요. 금상께서 좌찬성 어른께 밀명이라도 내리신 모양이로구만요. 청나라와의 교역을 확대하는 것은 저희 상단에서도 너무나 바라던 일이었습니다요.”

일단 북경의 고려점에 파견을 나와 있던 조선 상단의 도방에게 지시할 것이 많았다. 앉아만 있어도 도르곤으로부터 들어오던 정보가 딱 끊어질 처지에 놓였으니, 이젠 나 스스로의 정보망을 북경 일대에 구축해야 했다.

그리고 내 계산대로라면 여기서 얻은 정보는 분명 훗날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반드시 그럴 것이다.

“……알겠습니다. 저도 카간을 받들기로 했으나 앞일이 조금은 걱정되던 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같이 섭정왕 전하의 수하에서 교분이 있던 고려의 실세께서 협조를 요청하시니, 제가 거부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답례는 섭섭지 않게 챙겨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순치제에게 전향했다던 나라 숙사하를 만나 앞일을 논했다. 숙사하는 이미 도르곤에게 이야기를 전해들은 지 오래라며, 같은 처지끼리 힘을 모으자는 제안을 거부하지 않았다.

이제 적어도 숙사하가 청에 버티고 있는 동안은 이전의 수준만큼은 아니더라도 그를 통해 청의 내부 정보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가 오보이의 칼날 앞에 쓰러진 이후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고륜장공주부(固倫莊公主府)…….”

“아, 저곳은 시집간 청나라 공주님들이 기거하시는 저택입니다요. 고륜장공주라면 어느 분이시더라?”

나라 숙사하를 만난 후, 북경 내성의 팔기 거주구역에서 회동관으로 돌아갈 때는 가슴 아릿한 공간을 지나치기도 했다. 장공주(莊公主)라는 칭호는 카간의 정비 소생 중 첫째만 달 수 있는 칭호, 그 대상이 누군지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방금 길가에 나 있는 창문 너머로 눈동자 몇 개가 스쳐지나간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그러나 그 눈동자들이 진짜라 해도 황녀쯤 되는 분이 길가에 난 행랑채에 계실 리는 없었다.

***

“……바람이 차구나.”

아직은 바람이 찰 계절이 아니었다. 그리고, 말에 탄 도르곤의 어깨가 이토록 작게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여기까지 배웅 나올 필요는 없었는데, 아르가투. 너희 고려군은 산해관을 통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았더냐. 이곳 고북구(古北口)는 옛 몽골의 영역으로 향하는 관문임을 네가 모를 리도 없고.”

“당연히 모를 리가 없지요. 이곳은 저희가 대군을 이끌고 북경을 치러 갔을 때 통과했던 그 장소가 아닙니까. 선대 카간께서 이끌던 군이 제일군, 저희가 이끌던 군이 제이군…….”

“망할 자식 같으니라고. 나와 있었던 일을 그토록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으면서, 어찌 그리도 쉽게 나를 버리고 고려로 돌아갔단 말이냐.”

도르곤은 한쪽 얼굴을 찡그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그와 함께 갑옷을 갖춰 입고 이 관문을 통과하던 일이 선했다. 북경을 치러 가던 그때와 지금은 통과하는 방향이 반대였지만.

“배웅은 이쯤이면 됐다. 굳이 카라호툰(열하)까지 따라올 이유는 없느니라.”

“하지만 전하. 제가 이번에 고려로 돌아가면 다음번은…….”

“명령이다. 이 이상 나를 따라온다면 섭정왕의 권한으로 죄를 물을 것이다.”

잃어버린 권력만큼이나 신체의 힘도 잃어버린 도르곤의 한쪽 입가가 힘없이 찌그러졌다. 섭정왕에게 그럴 생각조차 없다는 것은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아니면, 내 유조(遺詔)라도 들으러 카라호툰까지 굳이 먼 길을 돌아가겠다는 것이냐, 아르가투?”

“그것이 아니오라…….”

“더 이상 나를 따르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남길 말은 이 자리에서 모조리 전할 테니, 너는 그대로 산해관으로 방향을 돌려 고려로 돌아가라. 섭정왕의 명령이다.”

이미 타스하 잘안마저 카간에게 모두 넘기고 빈털터리가 되었는데, 무엇을 더 바라고 따라오느냐며 도르곤은 너털웃음을 짓고는 덧붙였다.

그러나 너털웃음과 함께 전해져오는 그의 눈빛은 단호할 뿐이었다.

아마도 이 자리가 도르곤을 마지막으로 마주할 수 있는 자리인 것 같았다.

대륙을 주름잡던 영웅을 보내는 마지막 자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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