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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43화 (243/298)

243화. 영웅을 보내며

“카핫. 진작 이렇게 질척거리지 그랬느냐. 고려국 세자와 함께 고려로 돌아갈 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던 놈이.”

그러나 명령이라는 말로 나를 짓누르던 것도 잠시, 도르곤은 금세 평소의 그로 되돌아왔다. 더 말하지 않아도 내가 순순히 말을 들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안다.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지. 너도 그렇고, 그리고 나도 그렇고.”

내 말은 기다리지도 않고 스스로 결론을 내린 도르곤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형 홍타이지처럼 마른기침 끝에 피를 토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목구멍 너머에서 나는 공기 새는 소리를 보면, 도르곤의 상태가 좋지 못함은 분명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카라호툰이 아무리 사냥과 요양을 위한 공간이라고는 하나, 좋은 의원을 비롯해 전하께 만일이 벌어졌을 때 도와줄 사람은 북경에 훨씬 많지 않습니까.”

“아르가투. 나는 네가 형님께 만주족 이름을 내려받은 이후로 완연한 만주족이 된 줄 알았는데, 이런 면에서는 부족한 모양이구나. 하긴, 이건 초원에서 태어난 사나이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것이지.”

“무슨 말씀이신지…….”

도르곤이 만면에 환한 미소를 띠었다. 그의 목구멍에서 여전히 새어나오는 숨소리와는 정반대로 생동감 있는 웃음이었다.

“좋다. 오늘 이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초원에 대해 가르침을 주마.”

“마지막이라니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너도 조금 뒤에 일어날 일을 알고 있으면서 그런 입바른 소리는 하지 말거라. 내가 왜 고려로 돌아가는 네 편에 아내와 딸을 함께 보내겠느냐.”

지금 내가 이끄는 총통위 행렬의 후미에는 말이 끄는 수레가 여러 대 따르고 있었다. 외부에는 도르곤이 열하로 요양을 가는 사이 그의 아내와 딸이 고향을 방문한다고 공표했지만, 사실과는 당연히 다르다.

북경을 출발하기 전, 섭정왕저에서 묵묵히 수레에 오르던 도르곤의 외동딸, 동아(東莪)의 얼굴은 눈물로 잔뜩 얼룩져 있었다. 아마도 직전에 올린 문안이 아비에게 올리는 마지막 인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카하핫, 유조를 전하시던 형님께서 어떤 심정이셨는지 이제 알 것 같구나. 나는 참으로 나쁜 아우였다. 형님이 네게 맡기셨던 마카타는 빼앗아놓고, 도리어 내 딸은 네게 맡기다니.”

“……그때, 제가 다이칭 구룬에 남았으면, 전하께서는 어찌 행동하셨을까요.”

“그랬다면 어떻게든 반대세력들을 쳐내버리고 네놈을 아이신기오로의 핏줄로 꽁꽁 묶었을 것이다. 마카타를 대복진으로 삼고, 내 딸은 나이가 차면 계복진으로 주었겠지.”

“…….”

“그렇게 되었다면 아마 내 예친왕 작위는 사위인 네놈이 잇지 않았겠느냐. 하, 네놈이 도왔더라면 회수 장강 너머 한조 놈들을 정벌하는 것도 이토록 차질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터인데, 원통하도다.”

도르곤은 진심으로 애통해하고 있었다.

아마도 그는 지금의 청나라도 무지막지한 운이 따른 결과라고 생각하겠지. 백 명도 안 되는 건주여진의 일개 부족이 대륙의 절반을 장악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내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명은 자연히 이자성에게 무너지고 청은 더 손쉽게 대륙을 삼켰을 것이다. 그러나 원 역사의 존재를 모르는 도르곤은 그저 더 이상 남명을 몰아붙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할 뿐이었다.

그걸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 한구석에 조용히 올라오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주 작디작은 가시 하나만큼의 거슬림이었지만, 그 거슬림에서 오는 불편함이 내 입을 열게 만들었다.

“섭정왕 전하.”

“갑자기 왜 부르느냐?”

“송구합니다. 제가 전하께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카하핫, 이제 와서? 예친왕 작위 이야기를 들으니 마음이 바뀌기라도 한 것이냐?”

“그것이 아니오라……. 제가 전하께 해드리지 못한 것에 대해 그동안 마음에 걸리던 것이 많았습니다. 지금이 아니면 사죄드릴 수 없을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흥, 도르곤의 코에서 미약한 콧김이 뿜어져 나왔다. 아마 도르곤이 이런 인물인지 몰랐더라면, 나는 그가 받아야했던 것을 가로챈 것에 대해 사죄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을 것이다.

원 역사에 비하면 그가 휘두른 권력도 반 토막, 청나라가 얻은 강역도 반 토막.

도르곤이 얻은 것이라고는 몇 년 정도 연장된 수명뿐이었다.

누군가에게는 그것만으로도 괜찮겠지만, 홍타이지의 뜻을 받들며 살아갔던 도르곤에게는 그깟 수명 따위겠지.

“되었다. 그것은 이미 한낮의 꿈이 되어버린 것을. 이제 와서 사죄한들 무엇 하겠느냐.”

“……죄송합니다.”

“되었다 하지 않았느냐. 사내의 뜨거운 심장끼리 이끌렸던 일이다. 내 심장이 고려국 세자의 심장보다 덜 뜨거웠던 모양이지. 카하핫.”

도르곤은 그저 내가 조선으로 돌아간 일을 사죄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보는 마음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그나마 약간의 죄책감을 덜어냈을 뿐.

“그래도, 지금은 진심으로 섭정왕 전하를 섬겨도 좋았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 상황이 조금만 달라졌어도 제 머리에 상투 대신 변발이 올라앉았을지도 모릅니다.”

“알고 있다. 네놈이 넘어올 것 같았기에 나도 너를 포섭하려 했던 것이니까. 아무리 우리에게 원한을 가진 나라의 출신이라고는 하나, 네놈이 제시한 당돌한 제안과 눈에서 빛나던 무언가를 보고 마음이 움직였었느니.”

오목도의 집에서 처음 나를 본 날, 도르곤은 내게서 무언가를 읽은 모양이었다. 하긴, 그러니 볼모 따까리에 불과한 내게 흥미를 가졌겠지.

마음을 무겁게 만들고 있던 죄책감이 도르곤의 말 한 마디로 옅어졌다.

그는 분명 인생을 걸어볼 만한 사람이었다. 다만 소현세자에 비하면 무언가가 조금 모자랐을 뿐.

“그리고, 사실 나도 너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적이 있었다. 네놈에게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이지만, 그것 때문에 처음 너를 마주하고 동질감을 느꼈다는 사실만 알아두거라.”

“말씀하실 수 없는 비밀이라……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굳이 궁금해 하지 않겠습니다, 섭정왕 전하. 그러나 덕분에 전하와 인연을 맺을 수 있었다는 점은, 제게 분명히 큰 행운이었습니다.”

“그래, 그렇게 말해주어서 고맙다, 아르가투.”

아마 비슷한 처지에 놓였었다는 이야기는 그의 형 홍타이지가 그의 어미 울라나라 씨를 순장한 일을 가리킬 것이다. 어미를 잃은 아이가 원수에게 원한을 품지 않았을 리가 없지.

그러나 심양에 도착하고 나서 내가 본 도르곤의 모습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카간을 성심성의껏 받들며 그의 유조를 받는 자리에서는 통곡을 삼키기까지 했다. 심지어 그때는 홍타이지가 순장 이야기를 먼저 꺼내며 사과를 하던 자리였는데도.

확실히, 도르곤이 홍타이지를 대한 태도는 진심이 아니고서야 우러나올 수 없는 것들이었다.

조선이 청에 품은 원한에 빗댄 것을 보면 도르곤의 원한 또한 사소한 것은 아니었을 텐데, 도르곤은 ‘뜨거운 심장’을 홍타이지에게서 느끼기라도 한 것일까.

“옛 이야기를 하니 즐겁구나. 마치 심양에서 큰 뜻을 품고 일하던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하다.”

“전하께서 잠시 시름을 잊으셨다니 다행입니다. 그럼 하실 말씀은 이것이 전부입니까.”

“그럴 리가 있겠느냐. 다만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이제 몇 마디만 더 하고는 너를 보내주어야겠구나.”

도르곤이 말을 마치기 무섭게 관문 너머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그의 행선지인 카라호툰 방향에서 불어온 바람은, 마치 도르곤의 걸음을 재촉하는 듯 세차게 불어대고 있었다.

그 사이 더 핼쑥해진 것 같은 도르곤의 변발 댕기가 세찬 바람에 마구잡이로 휘날렸다. 그렇게 잠시 말을 잊고 있던 사이, 어느새 바람은 다시 잦아들고 도르곤의 입술은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바람조차 나를 재촉하는가……. 그럼 아르가투,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마지막……. 무엇입니까. 무엇이든 숨기지 않고 대답하겠습니다.”

방금까지 비극적인 개인사를 이야기하던 도르곤은 이제 오히려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마치 이제는 세상사에 초탈했다는 듯한 그의 모습에, 나는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힘이 빠져있던 도르곤의 눈가에는 어느새 생기가 돌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나와 처음 마주했던 시절의 건강한 도르곤이 내 눈앞에 있는 듯했다.

“……나는, 나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은 너에게 어떤 사람이었느냐, 아르가투.”

“…….”

“네 나라와 강토를 도륙낸 원수, 네 주군을 볼모로 삼고 억누른 수괴(首魁), 아니면…….”

도르곤은 질문을 채 끝맺지 못했다. 그러나 갑자기 치고 들어온 그의 질문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가 방금 홍타이지에게 품었던 원한 이야기를 한 이유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도르곤의 질문에 담긴 진의가 무엇인지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청에 원한을 품었으면서 나를 진심으로 따랐던 이유가 무엇이었느냐.

도르곤은 자신과 홍타이지의 관계에 빗대어 내게 묵직한 화두를 던지고 있었다.

슬며시 머리에서 흑립을 벗어 가슴에 가져다 붙였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나를 지켜보는 도르곤을 향해 상체를 굽혔다. 그와 처음 만났던 자리에서 올렸던 만주식 인사였다.

“호오?”

도르곤이 흥미롭다는 듯 소리를 흘렸다.

내가 전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은, 그저 내 진심을 내보이는 것뿐이었다.

오목도의 집에서 도르곤을 처음 마주했을 때는 나 스스로 판단해 예를 올린 것이 아니었다. 그의 부하 중 한 놈이 을러대는 통에 얼떨결에 기억에 남아있던 인사법을 따라했던 것이지.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더 이상 숙일 수 없을 정도로 깊숙이 숙인 내 상투 끝에는 도르곤에 대한 경의가 가득 담겨 있었다.

조선의 아버지가 나를 위정자로 거듭나게 해주신 분이었다면, 도르곤은 뜻과 긍지만 가지고 있던 내게 진정으로 힘을 불어넣어준 후견인이었으니까.

그리고, 홍타이지를 진심으로 섬겼던 도르곤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이제는 확실히 알 수 있었으니까.

곧이어 숙인 고개 너머로, 도르곤 특유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방금 섭정왕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기 때문일까, 그에게서 거슬리는 숨소리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대답은 되었다. 그 모습만으로 전부 대답이 되었구나.”

“섭정왕 전하…….”

“내 사람 보는 눈은 틀리지 않았다. 내가 원하던 대답은 바로 그것이었다, 아르가투.”

뭐라 말을 더 꺼내려던 나를, 도르곤은 손을 들어 만류했다. 더 이상의 대답은 필요치 않다는 듯한 태도였다.

“만족스럽다. 아주 만족스럽다. 너는 늘 나와 헤어지는 자리에서 이런 식으로 선물을 주는구나.”

“다음 번 헤어지는 자리에서도 큰 선물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만 번의 선물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 형님도 이런 기분을 느끼셨던 것이군. 내 속을 시원하게 만들어주어서 고맙다, 아르가투.”

정말로 마음이 개운해졌는지, 도르곤은 그 특유의 웃음소리로 고북구 관문이 떠나가라는 듯이 한참을 웃어댔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손에 고삐가 당겨진 말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아아, 관문을 오래도 막고 있었구나.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쳤군.”

“…….”

“듣고 싶은 대답도 들었으니, 이제는 이별할 시간이다, 아르가투. 덕분에 카라호툰까지 가벼운 걸음으로 움직일 수 있겠구나.”

“조심해서 가십시오, 섭정왕 전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럼 이만 가겠다, 아르가투. 건강해라.”

도르곤을 태운 말이 천천히 멀어져갔다. 나를 지나쳐간 호위병들이 고북구를 통과해 그를 따르는 것을 보면서, 왜 내 눈가가 떨리기 시작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아르가투!”

애써 고개를 떨군 채 무언가를 참아내던 내 귀에 도르곤이 지른 고함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이미 꽤나 멀어진 주제에, 도르곤의 목소리는 사라져가는 사람답지 않게 여전히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카간을 비롯한 다이칭 구룬의 황실을 나를 대하듯 해다오!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 지시, 성실히 수행하겠습니다!”

“그리고, 카간 옆에 붙어있는 이상한 놈에게 지지 말거라! 이것이 섭정왕으로서 내리는 내 마지막 명령이다! 카핫!”

의미심장한 명령을 내린 도르곤은 곧바로 말의 옆구리를 걷어차고는 지평선 너머 카라호툰의 이궁을 향해 달려갔다. 그것이 내가 모시던 섭정왕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초원의 사냥꾼들은 자신의 최후를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것이 늑대건, 여우건, 오소리건 마찬가지지! 나 역시 초원에서 태어나 초원으로 돌아가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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