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스스로 택한 고행길
얼마 전까지 실망을 감추지 못했던 하멜의 눈은 도로 커져 있었다. 벽란항을 벗어난 이후로 드디어 볼 만한 것들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사실 벽란항에서 배를 갈아타고 마포라는 나루까지 향하는 도중에는 그닥 눈요기를 할 만한 것은 별로 없었다. 마포는 허술해 보이는 나루터와 거대한 창고 여럿이 늘어서 있는 장소에 불과했으니까. 거대한 강이 수시로 범람하기 때문이라지만, 역시 별로인 것은 별로였다.
그나마 하멜의 흥미를 강하게 잡아끈 것은, 폭이 넓은 도로가 북동쪽을 향해 시원하게 뻗어있다는 것 정도였다. 네덜란드 사절단 일행은 그렇게 마차를 타고 북상해 한양도성이 보이는 곳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오, 생각보다 깔끔한데?”
“성저십리, 그러니까 수도 인근 지역이 이렇게 변한 건 얼마 안 됐습니다. 네덜란드에서 오신 정착민들이 이 근처에 거주하시기 시작하면서부터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거든요.”
“아까 내렸던 마포라는 곳은 무역회사 구역만 빼면 조금 초라해서 실망이었는데, 여기서부터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구나. 묘하게 우리 네덜란드풍 건물과 조선풍 건물이 뒤섞여 있기도 하고.”
“연희궁 인근 하란타촌에서 생산된 것들은 주로 여기 서소문 밖에서 거래가 되고 있으니까요. 마포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조선 최대의 무역회사도 상점은 이곳에 열어 놓았습니다.”
“왜 그런 초라한 곳에 그토록 훌륭한 도로가 놓여 있나 했더니, 이런 곳이 있을 줄이야? 이곳만큼은 암스테르담의 상점가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 것 같다.”
하멜은 대만 총독 판 더 고에즈 경과 길산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들으며 마차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잘게 부서진 돌로 포장된 도로 양 옆으로 높은 건물들이 솟아있는 것이 보였다.
조선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2층 이상으로 지어진 건물들이었다.
재밌는 것은 도성 내부에서는 궁궐을 제외하고는 이런 건물을 지을 수가 없다는 점.
왕이 머무는 공간의 보안을 위한 조치라고 했다. 그래서 이 서소문 거리라는 곳에 상업의 중심지가 옮겨 온 모양이었다.
“서소문 거리에는 하란타촌에서 낸 상점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오신 동인도회사에서 낸 조선 지부, 그리고 방금 말씀드렸던 회사, 마포상단의 본점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왕실이 운영하는 무역회사인 내수사도 여기에 본거지를 옮겼죠.”
“그래서 이렇게 단시간에 번화한 곳으로 바뀐 것이군. 두 가지 양식의 건물들이 섞여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고.”
“예, 그렇습니다. 이제 총독께서는 도보로 성문을 통과하신 후 주상 전하를 알현하러 가셔야 합니다. 바로 가보시겠습니까?”
“좋다, 그렇게 하지. 선장, 선원들에게 자유 시간을 보내라는 명령을 내리고 집합 시간을 통지하게. 조선의 왕궁에 방문할 사람은 나와 여기 선장, 그리고 서기인 하멜이다.”
총독의 지시를 받은 선원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상점가 사이로 흩어져갔다. 지금부터 주어진 자유시간은 그들에게는 천금과도 같을 것이다.
그러나 수행원으로 지목받아 자유시간이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하멜은 자신이 정말로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의 대부가 시장이 아니었다면 어찌 말단 선원에 불과한 하멜이 총독의 수행원이 되어 조선 왕궁에 들어갈 수 있었겠는가.
“정지! 하란타인 일행인가? 성문을 통과하려는 목적을 말하시오!”
“고생이 많으십니다, 수문장님. 저는 군관도감 생도 안길산이라고 합니다. 전하의 명을 받아 하란타에서 오신 사절분들을 안내하고 있습니다. 여기 승정원에서 발행한 문서입니다.”
“오, 생도가 어려운 임무를 맡아 고생이 많구만. 안 그래도 궐에서 마중 나오신 신료분이 계시다. 저쪽에서 기다리고 계시니……. 아, 불러올 필요는 없어졌구나.”
하멜이 네덜란드에서 배운 초급 조선어로도 그들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가 대충 어떤 내용인지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물론 어려운 단어는 대부분 들리지 않았지만.
그때, 수문장이 가리킨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기 무섭게 푸른 관복 하나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길산의 옷자락이 너풀거릴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반갑습니다. 총독님을 모시러온 조선의 의정부 사인, 강충신이라고 합니다.”
“아, 당신 이야기는 전임 총독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름을 들으니 확실해지는군요. 저는…….”
총독과 익숙하게 악수를 나누는 조선 관료의 입에서는 유창한 네덜란드어가 흘러나왔다. 눈을 감고 들으면 네덜란드인으로 착각할 수준의 실력이었다.
“니콜라스가 제 이야기를 많이 한 모양이군요, 총독님? 그도 저처럼 포모사에 머물던 시절이 자유롭고 즐겁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었죠.”
“베르부르그 씨는 당신이 반 년 동안 포모사에서 보여준 능력에 대해 말하면서, 조선에 가면 가장 먼저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라 했습니다.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되다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니콜라스가 질란디아에서 실수한 것을 만회해준 적이 한두 번이었어야죠. 오늘 전하의 알현이 끝나면 그때 이야기를 하며 한잔 어떻습니까? 마침 사업 이야기로 드릴 말씀도 있고요.”
“아, 그러고 보니 당신이 마포회사의 사장이라고 하셨던가요? 이거 운이 참 좋군요. 일이 빠르게 진행되려는 모양입니다. 하하하.”
두 사내는 순식간에 전대 대만 총독 이야기로 꽃을 피우더니, 금세 친해져 대기하고 있던 말에 나란히 올라탔다. 충신이 대만에서 많은 일을 해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의아하게 보일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다.
일이 빨라도 너무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옆에 있던 선장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하멜의 옆구리를 쿡 찔러 난감하다는 눈빛을 보내왔다.
‘오늘도 일지에 쓸 거리가 시작부터 참 많군.’
어느새 길산이 대령한 말에 올라타며 하멜은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해보니 오늘 아침으로 나온 피자라는 기묘한 요리도 네덜란드에서는 먹어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아마 오늘도 잠을 푹 자기는 그른 것 같았다.
그래도 오늘만 지나면 더 이상 기록으로 잠을 설칠 일은 없겠거니 했건만, 하멜의 예측은 철저하게 빗나갔다. 그날 서소문거리에서 겪은 일은 시작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네덜란드에는 없는 넓고 커다란 왕궁과, 줄무늬 의복을 차려입고 왕궁을 지키던 정예병들의 모습, 그리고 사절단을 맞아들이는 화려한 행사까지.
반촌에 위치한 네덜란드 공관에 숙소를 정한 그날 밤까지도 하멜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그리고 길산의 안내를 받아 화포 제작 기술을 가진 선원들과 함께 병조와 군관도감이라는 곳을 방문한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에 머무는 내내 수면부족에 시달린 하멜의 눈 밑은 시꺼멓게 죽어갈 뿐이었다.
조선 특유의 전통, 막 생겨나기 시작한 신문물들, 네덜란드와 교류를 통해 융화되기 시작한 제3의 문화까지.
이곳에는 기록해야할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
“길산! 왔어?”
대문 열리는 소리가 나자마자 마루에 앉아있던 우희가 자리를 박차고 쪼르르 뛰쳐나갔다. 제 엄마가 오늘은 친정에 다녀온다고 안채를 비운 것을 알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잠시 후, 우희에게 목말을 태우고 길산이 사랑채로 들어섰다. 난감한 얼굴을 한 녀석과는 반대로 우희는 싱글벙글 만면에 미소를 흘리고 있었다. 그 와중에 우희의 귓가에 커다란 꽃송이가 꽂힌 것이 눈에 들어왔다.
“사부, 저는 그것이…….”
“안다. 또 우희가 제멋대로 달라붙어 목말을 태워 달라 졸랐겠지.”
우희의 고집은 엄마인 하연을 닮았다. 게다가 한창 말썽꾸러기일 나이라 집을 자주 비우는 내 말은 잘 듣지도 않는다. 그러니 우리집에 더부살이중인 길산이 녀석에게는 오죽하겠는가.
그나마 우희를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이 집안의 여인 두 명 뿐이었다. 엄마 앞에서는 당연하고, 우희와 자주 놀아주는 요안의 말도 제법 잘 듣는 편이다.
문제는 그에 비하면 우희의 안에서 아빠의 서열은 한없이 낮았다는 것.
“아빠! 이거 봐요! 길산이가 이렇게 나무를 한 번 박차고 뛰더니 저 높은 곳에 있는 꽃을 이렇게……!”
아이는 고사리 손으로 귓가에 꽂았던 꽃송이를 뽑아 내게 내밀었다. 대문간에 서 있는 목련나무에 몇 송이 피지 않았던 꽃을 길산이 녀석이 꺾어다 준 모양이었다.
분명 햇볕이 잘 드는 꼭대기에 위치한 꽃 몇 송이만 활짝 피었을 텐데. 녀석의 운동신경은 어느새 그 정도까지 발달을 한 건가.
길산이가 군관도감 역대 최연소 생도로 뽑힌 이유가 있었다. 안 그래도 총통위 병사들과 매일같이 어울려 수련하던 녀석이라 또래 중에는 물론이고 몇 살 위 장정들 중에서도 따라올 사람이 없다고 들었다.
“이렇게 휙휙 날아다니더니 꺾어다줬어요! 날아다니는 새처럼 휙휘익!”
“어어, 애기씨! 이러시면 떨어지십니다!”
“꺄하핫! 그치만 길산이가 나를 떨어뜨린 적은 한 번도 없잖아?”
몸집은 웬만한 어른보다 훨씬 크게 자란 녀석이 자그마한 딸아이에게 휘둘리는 모습은 조금 우습긴 했다. 우희가 걸음마를 시작한 이후부터 저 둘은 늘 저 모양이었다. 덩치 크고 충직한 반려견의 꼬랑지를 겁도 없이 잡아당기는 어린 주인을 보는 것 같다고 할까.
하지만 슬슬 장난이 도가 지나치고 있다.
아직 일곱 살이 되지 않았으니 그러려니 놔두고 있지만, 저러다가 아이가 다치면 곤란했다. 요안이 있었으면 슬며시 우희를 달래 별채로 데리고 갔겠지만, 그녀는 지금 중전마마께 잡혀 특별 야근 중이었다.
김만중이 그놈이 도대체 네덜란드에서 무얼 출판했기에 강 여사님은 며칠째 사람을 집에도 보내지 않고 계신단 말인가. 오늘 낮에 궁에서 마주쳤을 때, 퀭한 눈으로 괜찮다고 나를 안심시키던 요안의 애처로운 모습이 머리를 스치고 있던 때였다.
“어, 엄마다!”
또다시 난 대문 열리는 소리에, 길산의 어깨 위에서 잔뜩 신을 내던 우희가 땅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길산이 녀석은 눈치 빠르게 우희를 내려놓고는 사랑채를 벗어났다. 아마 오늘 치 공부를 하러 서재로 향했을 것이다.
곧이어 딸아이의 말 그대로, 하연이 조금 지친 얼굴을 하고는 사랑채에 모습을 드러냈다.
“삼월이 말이 맞았네요. 다들 여기 있는 것을 보니. 어머? 당신…….”
나도 모르게 버선발로 뛰쳐나가 아내의 소매를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임금이 이번 일에는 철저히 개입을 금했기에 아내가 나 대신 고생하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아내가 친정을 방문한 이유는, 김육이 세자빈 간택에 관련해서 중전의 속내를 정확히 듣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늦게 귀가한 것을 보니, 둘 사이에는 꽤나 많은 이야기가 오간 듯했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부인. 바로 안채로 쉬시러 가셔도 되셨을 텐데요.”
“소첩이 고생이랄 게 있겠습니까. 늘 이런 중대한 나랏일로 고생하시는 당신 앞에서 어찌 불평을 내비치겠습니까.”
“몸도 좋지 않으시면서……. 그대는 내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마세요. 지아비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아내만큼 못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방금까지 장난기가 가득하던 우희도 엄마가 평소와 다른 것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하연의 치맛자락을 꼭 쥔 채 얼른 들어가자고 칭얼거리고 있었다.
사랑채로 들어오고 잠시 후, 하루 종일 뛰어놀던 우희는 엄마의 치마폭에 안겨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깊게 잠이 들었다. 우리는 그제서야 조정에서 긴박하게 논의되는 건에 대해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중전마마께서 결국 장인어른의 힘을 빌리실 생각이신가보군요. 아마 하란타에서 온 사절이 떠나기 전에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싶으신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소첩의 생각으로도 이미 중전마마께서는 공녀님을 거의 며느리 여기듯 말씀하고 계셨거든요. 하란타 정착촌을 넓히고, 서소문 거리가 세워진 일에 공녀님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이 그리도 마음에 드셨던 모양입니다.”
세자빈 간택은 이미 내부적으로 결과가 나온 상태였다. 내가 청나라에 다녀온 사이 국상 기간은 끝이 났고, 곧이어 치러진 3차에 걸친 간택 끝에 내명부 심사위원들의 최고점을 받은 후보는 네덜란드에서 온 공녀님이었다.
문제는 이 결과가 조정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겠냐는 것.
그러나 우리 강 여사님은 어지간히도 헨리에트 공녀님의 재능이 마음에 드셨는지, 이미 물밑으로 그 영향력을 뻗치고 계신 중이었다.
좁아터진 한양도성 밖에 새로운 번화가를 조성한 것이 헨리에트 공녀의 솜씨였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요안을 통해 중궁전에 제출한 개발 제안서가 중전의 흥미를 잔뜩 이끌어낸 결과, 현대의 신촌─아현동 일대는 네덜란드와 조선이 융화된 신시가지가 들어서고 있었다.
영란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빌렘이 몇 차례 추가로 보낸 네덜란드 정착민들이 도착한 탓에 마을을 넓혀야겠다는 이야기가 어떻게 거기까지 간 것인가. 그 때문인지 슬슬 공조에서 한양 도성을 남서 방향으로 증축해야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기도 했다.
“그럴 수밖에 없겠군요. 그대는 외명부의 사대부가 부인들을 관리하느라 바쁘시고, 중전마마께서도 요안이 한 명만으로 지금처럼 커진 사업 규모를 감당하기 어려우셨겠지요.”
“아버지 입장에서도 하란타와의 교류가 확대되면 확대될수록 이익이 되시는지라, 아마 이번 논의에서 무리 없이 중전마마의 편에 서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만 문제는…….”
“분명 외국인 세자빈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신료들이 있겠지요. 그것도 꽤 많이.”
이미 공녀를 네덜란드에서 데려올 때부터 예상한 사태긴 했다.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외국인을 국본의 자리에 둘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가 극심하겠지.
하지만 내가 판단한 결과, 헨리에트 공녀는 그만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세자빈 자리에 올릴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황공하옵게도 누구보다 계산에 밝은 우리 강 여사님께서도 같은 판단을 내리신 듯했다.
“괜찮겠습니까? 소첩은 아무래도 걱정이 됩니다. 그리고, 중전마마와 당신이 실망하는 일이 벌어질까 그것이 가장 두렵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중전마마께서 마음에 둔 일을 실패하신 적이 있으셨습니까? 심양에서도 맨주먹 하나로 기반을 일구신 분입니다. 아마 중전마마 안에서는 이미 계산이 내려진 일이기에 이렇게 밀어붙이시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그리고, 부인. 전하께서는 제게 이 일에 개입하지 말라 엄중히 명을 내리셨습니다만, 저도 나름대로 수를 써 놓긴 했습니다.”
하연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아아, 이 사람은 이렇게 초췌한 모습도 왜 이리도 고운 것인지.
내가 따로 손을 쓴 이유가 다 있었다. 딱히 세자의 로맨스가 안타깝게 느껴져서는 절대 아니었다.
일단 임금도 공녀를 마음에 들어 한 것은 둘째 치고, 그날 논의될 두 번째 의제 때문이라도 세자빈 간택 건으로 반대파들의 혼을 미리 빼놓는 것이 내게 유리했기 때문이었다.
“조정에서 세자빈 간택 건이 논해지는 그 자리, 저하께서 직접 참석하실 예정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