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46화 (246/298)

246화. 대조회(大朝會)

지어진지 얼마 되지 않은 창경궁의 한 별궁 인근.

동궁을 벗어난 세자가 목적지인 창덕궁의 인정전을 향해 바삐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원 역사에서는 강빈의 옥사에 연루되어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은 경선군 이석철이지만, 지금은 역사가 바뀌어 당당히 원손에서 차기 국본 자리까지 오른 세자 이백(李栢)이다.

그러나 세자의 걸음은 똑바로 목적지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지금 세자가 걷고 있는 길은 조금은 돌아서 가는 길.

후원 방향에 세워진 별궁을 스치기 위해 꽤나 긴 거리를 더 걸어야 했음에도 세자의 마음에는 한 점 후회가 없었다.

‘마침내…… 마침내 이 날이 오고야 말았다.’

오늘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이 될지도 모르는 날이었다.

방년 열아홉의 세자가 처음으로 조정에서 열리는 조회에 참석하는 날.

국정이 오가는 일선에 드디어 발을 들이게 되는 날.

그리고, 그의 반려가 결정될지도 모르는 날.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기 때문일까. 이백은 점점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이 별궁의 담장 너머에는 너무나 그리운 사람이 간택을 마치고 가례(嘉禮) 전까지 교육을 받으며 바깥의 시선에서 격리되어 있었다.

“상온(尙醞, 내시부 정3품).”

“예, 저하.”

세자의 소매에서 서찰 한 장이 나오자마자 동궁의 늙은 내관 하나가 재빠른 몸놀림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 서찰은 곧 별궁 담장의 어느 기왓장 아래로 사라졌다.

약속한 대로, 별궁의 상궁은 그것을 수신자에게로 잘 전달할 것이다. 자신의 서찰을 받은 그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이백은 그것이 너무나 궁금했다.

“오늘 조회, 잘 해내실 수 있겠사옵니까.”

“물론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저 사람을 아내로 맞이할 자격조차 없을 것이야.”

“……성장하셨습니다. 저하.”

“나를 위해 지구 반 바퀴를 돌아온 저 사람 때문만이 아니다. 내 주제넘은 욕심을 이뤄주겠다 도와준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상온.”

처음에는 이역만리 이국에서 만난 풋사랑에 불과한 인연이었다. 하지만 그저 뜬구름처럼 스쳐지나갈 수도 있었던 인연이 드디어 한 발자국 앞까지 다가오게 된 것은, 그동안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백은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이 많았다.

아무리 지존의 자리에 위치한 임금일지라도 자신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스스로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도와줄 세력과 사람을 모으고, 나름의 논리를 철저히 갖추어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무엇보다 뼛속 깊이 새겨주었던 스승, 그가 없었더라면 이백은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서 놓아버렸을지도 모른다. 세자로 책봉 받았던 코찔찔이 시절부터 그의 옆을 줄곧 지켜온 스승은, 아버지에게 개입을 금지당했음에도 이백에게 은밀히 힘을 더해주었다.

“그리고, 오늘은 스승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날이기도 하다. 내가 그분께 배운 것들을 만조백관 앞에서 증명하는 날이 될 테니까.”

때로는 아바마마가 원망스럽기도 했다. 아버지가 한당과 손을 잡고 차근차근 왕권을 강화해 나간 결과, 지금 왕권은 타국에서 온 세자빈쯤은 임금의 말 한 마디면 반대를 감수하고 책봉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이백에게 힘을 빌려주지 않았다.

분명히 공녀가 마음에 드는 눈치였음에도, 임금은 조정 최고의 권신에게까지 개입을 금해가며 한 발 뒤에 물러나 있었던 것이다.

“오늘은 아버님이 준비하신 일종의 시험이라도 되는 것일까…….”

임금의 의도가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스스로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한 것이 하나 있긴 했다. 오늘 조회 자리에서 신하들의 반대를 마주하며 겪을 일들은, 앞으로도, 왕위에 오른 후에도 그의 일상이 되리라는 것.

이백은 입술을 질근 깨문 채 별궁에서 몸을 돌렸다. 이곳에 더 머물렀다가는 당장이라도 별궁을 박차고 들어가 그 사람의 손목이라도 덥석 잡고 싶은 충동에 지배당할 것 같았기에.

그 사람이 피를 태워가며 공부한 결과 간택에서 최고점을 받았든, 어머니가 그 사람을 마음에 들어 했든 지금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이백 스스로가 논리의 칼을 뽑아들고 그 사람을 반대할 신료들을 조정에서 베어넘기지 않는 이상, 불면 날아갈 사실에 불과하다.

한 점 티끌조차 잡히지 않기 위해 이백은 귀국한 이후 몇 년이나 그 사람과의 생이별까지 감수했다. 이미 사랑을 속삭이고 서로의 얼굴에서 느껴지던 체온까지 확인한 사이였건만, 피 끓는 나날들을 그 사람을 평생 옆에 두겠다는 다짐 하나로 이겨냈던 것이다.

“가자. 늦어서는 안 될 것이다. 오늘만큼은, 아니 앞으로도 절대 그들에게 틈을 내어주지 않을 셈이니. 그 틈을 향해 날아들 것은 내 사람을 향한 공격일 테니까.”

“공녀께서도 기뻐하실 것이옵니다. 분명 좋은 결과를 얻으실 것이고요.”

내관의 격려를 뒤로 하고, 이백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궐내에서 스치듯 볼 수 있었던, 몇 년 사이 성숙한 그 사람의 자태가 눈앞에서 아른거렸지만 혀를 깨물고 이겨냈다.

***

“전하, 금군으로부터 보고가 올라왔나이다. 세자 저하가 막 동궁을 출발했다고 하옵니다.”

“세자 녀석, 오늘은 어디서 청승이나 떨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한수야, 너는 오늘 인정전에서 어떤 결과가 내려지리라 예상하느냐?”

“개입을 금하셨으면서 예측은 명하시는 것입니까? 애초에 오늘 조회 자리는 전하의 의중이 깊게 반영된 자리가 아닙니까. 저는 전하의 예상과 다른 판단을 내려 불충을 저지르고 싶지 않습니다.”

“너는 스승이라는 이가 제자의 성장이 궁금하지도 않단 말이더냐? 아무리 상당수가 전향해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된 산당이라지만, 세자가 그들을 어찌 상대할지 궁금하지도 않더냐?”

“남아있던 마지막 이빨까지 전하께서 잡아 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나마 남은 산당들의 우두머리인 예판 또한 오늘 자리에 개입을 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송시열이 어느새 네게 알렸더냐? 고얀지고. 하지만, 내 뜻에 대놓고 반기를 들 자들이 다수 있었더라면 하란타인 세자빈 건은 추진하지도 않았다. 이제 결과는 백이 녀석에게 달렸지.”

***

대조회(大朝會)가 벌어지는 창덕궁 인정전 앞은 고요했다.

보통은 당상관 이상만이 모이는 조회인 상참(常參)만을 치르지만, 특별한 날에는 문무백관이 임금에게 하례를 올리는 조하(朝賀)가 치러지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었다.

그리고 보름날에 치러지는 오늘의 조회는 특별했다.

드디어 세자가 처음으로 정치적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내 차기 임금으로서 다음 단계를 밟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이제 다음으로 남은 단계는 대리 청정, 즉 실제로 임금의 대리인이 되어 국정을 행하는 일뿐이었다.

“오늘도 흑두차 향이 참으로 좋군. 경들도 어서 들도록 하시오.”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전하!”

최근 인정전 앞뜰에서 벌어지는 대조회 자리는 조금 색다르게 변해 있었다. 조회에 참석한 만조백관들은 손에 각자 지참한 찻잔을 하나씩 들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조선에서는 아직 낯선 검은 찻물이 가득 담겨있었다.

먼저 임금이 찻물을 입안에 가볍게 머금고 굴려 향을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야 신하들은 허공에 흐르기 시작한 향을 느끼며 품계 순으로 임금이 내린 성은을 받아 마실 수 있었다.

“세상에, 이건…….”

“쉿!”

외국 사절 자격으로 참석한 포모사 총독을 수행하던 하멜도 자신의 찻잔에 익숙한 찻물을 받을 수 있었다. 찻주전자를 들고 신하들 사이를 바쁘게 돌아다니는 내관이 전한 그 찻물의 정체는 당연히 커피였다.

회의를 매일같이 이렇게 이른 시간에 하다니. 하멜의 생각엔 조선의 신하들은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한 관료인 것이 틀림없었다.

“중요한 자리에서 정신을 맑게 하라는 의미로 국왕께서 내리시는 커피입니다. 남기지 말고 드십시오.”

“예, 그럼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사절단을 보조하러 함께하고 있는 충신이 총독에게 나직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바타비아 인근에서 최초로 재배를 성공한 커피는 조선으로 대다수가 수출되고 있다더니,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하멜은 아직 훗날 그의 책에 기록되는 사소한 이야기까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컨대 조선국왕이 들고 계신 커피잔에는 설탕과 우유가 듬뿍 쳐져 있다든지, 당직을 서며 야근하는 신하들에게는 커피주전자가 통째로 내려진다든지.

그래도 방금 받은 커피는 나쁘지 않은 선물이었다. 조선에 온 이후로 밤새 기록을 써내려가느라 하멜은 늘 낮에는 몽롱한 상태였으니까. 커피는 그가 중요한 자리에서 실수를 하지 않게 해줄 좋은 약이 될 것이었다.

“생각보다 행사가 길지 않았군요.”

“오늘은 세자 저하께서 정무를 보시게 된 일을 하늘에 알리고, 조정의 모든 관료들이 저하께 하례를 올리는 자리입니다. 정식 조하에 비하면 오늘 것은 상당히 간소했습니다.”

정말 제대로 된 행사는 새해 첫날과 동짓날에 치러진다며 충신이 덧붙였다. 예정되었던 의식이 모두 끝나고 임금을 따라 인정전 안으로 들며 총독이 나직이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대조회가 끝나기 무섭게 인정전 앞뜰을 가득 채웠던 신료 대다수가 흩어져 근무처로 돌아갔다. 그러나 하멜을 비롯한 네덜란드 사절 일행은 당상관 이상 고관대작들과 함께 임금을 따라 정전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 이유는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오늘 조선의 조정에서 논의될 주제는 바로 네덜란드에서 온 공녀가 조선의 세자빈 자리에 오르는 일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런 중대한 자리에 낄 수 있었던 것은, 오늘 결정된 일에 관해 네덜란드 본국을 납득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

“……그리고 만약 하란타가 조선에 손을 뻗칠 생각이 없다 하더라도, 어찌 사람이 태어난 고향을 잊을 수 있겠사옵니까. 이상 이 삼불가(三不可)론를 들어 이번 세자빈 책봉이 불가함을 아뢰옵니다. 통촉하여주시옵소서!”

“통촉하여주시옵소서!”

대사헌 윤선거의 읍소가 끝나자 그를 따르는 신하들이 모두 통촉을 외쳐댔다. 당장이라도 끼어들어 저 주장을 논파하고 싶었으나, 나는 이미 임금과 이 사태에 개입하지 않기로 약조를 한 상태.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성근, 꽤나 입이 근질거리는 모양이오? 그러기에 왜 굳이 전하의 제안을 받아들이셨소.”

“남 말하지 마시오, 영보. 논쟁은 공평해야 한다며 산당의 아랫사람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뒤로 물러난 예판은 누구시더라.”

나와 송시열은 지금 저 치열한 논쟁의 중심지에서 한발 물러나있었다. 나는 그렇다 치고 이 인간이 이런 일에 손을 놓을 줄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지금 내가 없어도 수가 많은 책봉 찬성 측이 이리도 밀리고 있는데, 유자 된 도리로써 어찌 불공정한 논쟁을 유도할 수 있겠소. 더구나 책봉의 가장 큰 지지자가 될 것이 분명했던 성근 당신이 먼저 발을 빼 준 상태인데.”

얼마 전 예조참판으로 임명된 좌명이 앞으로 나서 윤선거의 주장을 논박하는 것을 보며, 송시열이 중얼거렸다. 승지 임기가 끝나자마자 송시열이 바로 자신을 보좌하는 자리로 끌고 갈 정도로 둘의 사이는 돈독했다.

아마 제 상사가 속한 당파의 의견과도 저리 대놓고 각을 세우는 좌명의 꼰꼰함이 송시열의 마음에 들었지 싶은데.

과거에 비하면 당파 간의 경계가 꽤나 흐려졌기에 가능한 상황이기도 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순수 산당으로 분류할 수 있는 신료들은 이제 정말로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내가 논쟁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을 내린 이유는 국정에 사적인 감정이 끼어드는 것을 염려해서였소. 굳이 영보까지 나를 따라 반대편에서 발을 뺄 필요는 없었다는 이야기요.”

“글쎄. 사실 성근이 하란타와의 교류를 열고나서부터 예조의 업무가 과다해졌지 않소. 그런 자리를 내게 물려주었으니, 가끔은 이리 휴식을 취하더라도 당신이 가장 잘 이해해 주어야하지 않겠소. 허허.”

그 유교탈레반의 거두가 이렇게 변하다니. 사학자들이 이 꼴을 보면 꽤나 놀라지 않을까.

북벌과 환국이 없는 세상에서의 송시열은 비교적 유연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아마 다른 파벌과의 교류가 늘고, 타국의 정보를 많이 접하게 된 것이 그에게 좋은 영향을 준 것일지도.

“전하께서는 세자빈 책봉 건으로 외척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지 않으셨던 것인가……. 성근, 내 추측이 어떻소. 허무맹랑한 추측이오?”

“그것만 바라고 이런 자리를 만드신 것은 아니지만, 틀린 추측은 아니오. 명종대왕 시절 외척의 개입이 조정을 어지럽게 했던 과거를 경계하고 계시긴 하니까.”

“그걸 전하의 인척이 되는 것이 유력했던 당신이 말하고 있으니 조금 우습구려. 하긴, 청풍 김씨 가문에서 세자빈을 내려고 했으면 내가 가장 먼저 반대했을 것이오. 그것이야말로 탕평을 해치는 일이 될 테니까.”

송시열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세자가 네덜란드에서 눈이 맞아오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좌명의 딸이자 석주의 여동생이 가장 유력한 세자빈 후보로 거론되었을 것이다.

국혼 한방에 한당의 영수인 김육의 집안과 제일의 심복인 나를 혈맥으로 엮을 수 있게 될 테니까. 그러고 보니 원 역사에서도 좌명의 동생, 우명의 딸인 명성왕후가 왕비로 들어가 외척이 된 사례가 있었다.

하지만 임금은 이제는 그 카드를 고려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아마 내게 스포일러당한 역사에서 교훈을 찾았기 때문일 것이다. 현종 시기부터 발흥하기 시작한 외척 세력이 안동 김씨의 등장과 함께 정점을 찍고 세도정치로 변질되는 그 미래 말이다.

송시열이 지금 세자빈 책봉 건에 한 발 물러나 있는 것은, 아마 내가 청풍 김씨 가문을 외척으로 밀어붙이지 않은 데 대한 보답일지도 모르겠다. 송시열은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럴 시간에 더 시급하게 논해야 할 건이 있다며 화제를 바꿨다.

“세자빈 책봉을 논할 시간에 양반에게도 군포를 거두는 것, 저기 있는 하란타인들에게서 화포 기술을 끌어내는 것 등 논해야 할 것이 많지 않소. 이럴 시간에 중전마마께 내수사의 자금도 끌어내야 하건만.”

“영보가 제안한 건은 걱정 마시오. 중전마마께서 영보가 한 말이 아주 마음에 드셨는지, 여학당에서도 반드시 유학을 가르치시겠다 확언하셨으니. 여인도 사람답게 살려면 학문을 배우고, 학문을 통해 도리를 깨우쳐야 한다던 그 말 말이오.”

최근 송시열의 행보는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넘쳐나는 내수사의 자금을 끌어다 개혁의 원동력으로 삼는 것.

내수사가 벌어들이는 돈 탓에 지나치게 강화된 왕권을 견제하겠다는 목적이라고는 하나, 그의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인간, 생각해보니 반정 전에도 이런 기미가 보이긴 했다.

대동법이 궤도에 올라가자 스승인 김집의 입장을 거스르면서까지 대동법 찬성으로 입장을 바꿨던 것이다. 하긴, 김집도 조정만 벗어나면 장인어른과 개인적인 교류를 잘만 나눠댔으니 무리는 아닌가.

“누가 보면 영보의 당파가 산당이 아니라 한당인 줄만 알겠소. 이런 자리에서까지 제 당파의 손을 들어주지 않다니.”

“벗을 놔두고 논쟁에서 발을 뺀 성근이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소만? 그리고 전하께서 늘 탕평을 외치시는데, 그것을 따라야 신하된 도리가 아니겠소?”

“내수사를 혁파하고 그 재정을 호조로 돌려야한다는 주장을 입에 담으면서 잘도 그런 소리를……. 됐소. 조회 자리에서 이런 입씨름을 하는 것도 올바른 일은 아닐 테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송시열이 도움을 주면 주었지 국정 운영을 방해한 적은 그동안 한 번도 없었다. 반정 직후 그에게 숭정제의 용포 조각을 보여주었던 그날 이후로 말이다.

방금 송시열이 조회 자리에서 논해야 된다 말했던 주제들 역시 나와 미리 교감이 되어있던 것들이었다. 물론 그가 내 개혁책에 동의하지 않았다면 절대 협조를 해오지 않았겠지만.

열띤 논쟁이 오고가던 인정전 내부가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조용해진 것은 그때였다. 옥좌 위에서 울려 퍼지는 임금의 묵직한 목소리가 신하들의 침묵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그만. 경들이 주장하는 말의 요지는 대강 알겠도다. 서로가 각자의 주장을 들고 한 치도 물러나지 않으니, 잠시 경들은 논쟁을 멈추라.”

“전하! 하오나!”

“나는 분명 논쟁을 잠시 멈추라 하였다. 대사헌.”

윤선거의 입이 딱 다물어졌다. 임금이 내 앞에서야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지, 그가 휘두르는 왕권은 이제 누구도 흔들 수 없는 경지에 올라 있었다.

상왕에게 양위를 받고 정통성의 흠결 없이 옥좌에 오른 지 10년이 흐르는 동안, 임금이 펼친 정책들은 하나같이 조선을 부강하게 만들고 있었다. 게다가 각 당파를 고르게 등용하여 신하들은 서로를 견제하고 있으니, 왕권은 나날이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굳이 나와 김육의 지지가 없더라도 현 임금의 왕권은 조선 초 이후로 전례가 드물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그러니 송시열이 내수사의 힘이라도 빼려고 애를 쓰는 것이지.

물론, 사화(士禍)나 환국도 없이 이리 강력한 왕권을 구축한 임금이 그것에 흔들릴지는 의문이었지만.

“책봉 찬성과 반대 측, 각자의 논리는 완전히 이해했도다. 이방인을 세자빈으로 책봉한 전례가 없고, 하란타가 공녀를 통해 영향력을 끼치려 들 수 있으며, 공녀가 출신을 우선해 조선의 국익을 뒷전으로 둘 수 있다는 것이 반대 측 논거이고.”

임금의 날카로운 눈빛이 책봉 반대 측의 대표 격인 윤선거에게로 향했다.

나는 분명히 보았다. 임금의 시선이 향하자마자 윤선거의 목이 거북이처럼 오그라드는 것을. 방금까지 소수인 산당을 이끌고 좌명에게 한 치도 물러나지 않던 사람이었다.

“찬성 측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란타와의 교류를 확대하여 얻을 수 있는 국익을 고려해야 한다.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이런 기회를 원천봉쇄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일어나지도 않은 위험을 침소봉대하고 있다는 논거를 들고 있다. 예조참판, 맞느냐?”

임금의 눈동자는 이번에는 좌명을 향하고 있었다. 놈의 깎은 듯한 콧날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니 임금의 기에 눌린 것은 좌명 역시 마찬가지지 싶었다.

“내 경들을 타박하려 한 것이 아니었는데, 허허. 허나, 양측은 고려해야 할 중요한 사실 하나를 잊고 논쟁을 진행하고 있었느니. 그래서 내가 굳이 경들을 멈춘 것이다.”

“…….”

“마침 다소 쉬어갈 적절한 시간이기도 하니, 다들 흑두차로 정신을 마저 맑게 하는 것은 어떠한가? 그동안 경들이 놓친 중요한 발언 하나를 듣고 가기로 하지.”

임금이 손짓하자마자 정전 앞을 지키고 있던 총통위 금군이 문을 활짝 열었다. 밖에서 다시 향긋한 커피 냄새가 풍겨오기 시작함과 동시에, 임금은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직 조선에서 귀한 커피를 이렇게 많은 이들에게 또다시 대접하다니. 임금은 지금부터 벌릴 일에 꽤나 무게를 두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차를 마시면서 들으라. 경들은 지금부터 중요한 증언 하나를 들어주어야겠다.”

“증언이라 하심은…….”

“경들은 지금 명료한 사실 아래 논하고 있는가? 책봉대상자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하란타를 비롯한 유럽이란 곳은 조선에 비해 얼마나 발달한 곳이고 가져올 수 있는 이득은 무엇인지.”

“…….”

“그리고 아무리 혼인이 무릇 가문간의 결합이라지만, 당사자의 의향 또한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나, 세자?”

임금이 꼭두새벽에 불러 말해준 은밀한 계획, 지금 시행되는 모양이다. 과연 우리 세자께서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는지 지켜나 볼까.

“마침 오늘은 우리 세자가 처음으로 국정에 참여하게 된 경사스러운 날이다. 그걸 기념해 본인이 생각하는 바라도 들어보도록 할까.”

“전하, 그것은……!”

“어허, 방금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지금은 흑두차를 들며 정신을 맑게 하는 시간이라고. 그 사이 잠시 세자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더라도 큰 문제가 있으려고?”

“그것은 그렇사옵니다만…….”

신하들의 반발을 능수능란하게 잠재운 임금은 궁녀에게서 커피잔을 익숙한 손놀림으로 받아들었다. 반대편 손으로 작은 주전자를 받아 우유를 붓는 임금의 한쪽 입술에는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그럼 세자, 앞으로 나오라. 네 생각을 온 신료 앞에서 펼칠 기회를 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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