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역천(逆天)
내 예측은 틀리지 않은 것 같았다.
편전 앞에서 네덜란드의 상주상관장인 헨드릭 인다이크(Hendrick Indijck)를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반촌에 위치한 상관은 궁에서 멀지 않은데도, 그 거리를 뛰다시피 걸어왔는지 인다이크는 조금씩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상관장, 당신도 전하의 부름을 받고 온 것이오?”
“아, 좌상 대감? 인사가 늦었습니다. 혹시 국왕 전하께서 저희를 부르신 이유를 알 수 있겠습니까? 포모사, 아니 대만 섬에서 소식이 들어왔다던데요.”
“안타깝게도 좋은 소식은 아닐 것 같소. 자, 일단 들어갑시다.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시지 않소.”
손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연신 훔치던 인다이크는 내 말을 듣고는 얼굴이 굳어졌다. 마루를 울리는 그의 발걸음 소리에서 당황한 기색이 묻어났다.
초대 상관장 얀 판 엘세라크가 긴 체류를 마치고 물러난 후, 반촌 상관장은 지속적으로 네덜란드 본국에서 파견되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상관장의 임기는 일이 년에 불과해, 이런 긴급 사태가 터졌을 때 능수능란한 대처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하긴, 봉림대군 같은 경우를 쉽게 기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 기껏해야 몇 년을 살다 귀국할 것이라 예상했던 대군은 여전히 네덜란드에 머물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가족까지 곁으로 데려갔었지, 아마.
“왔느냐. 좋은 날을 방해해서 미안하구나. 앉거라.”
문서에 시선을 고정한 채 나를 맞는 임금의 이마에는 깊은 주름이 가 있었다. 인다이크에게 앉으라는 손짓을 보내며 나도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한두 번 있던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괜찮습니다.”
“천자문을 또랑또랑 읽어 내려가던 원손의 얼굴이 눈에 선하거늘……. 하지만 그만큼 시급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아이를 두고 내가 중간에 자리를 뜨지 않았겠지.”
다행히 조선인의 외모를 타고 태어난 원손이 이제 만으로 네 살이던가, 다섯 살이던가. 세자가 국혼을 올리고 삼십팔 주 만에 바로 태어난 원손이 벌써 천자문을 배우고 있다니. 그동안 흘러간 세월이 실감되고 있었다.
임금은 처음 얻은 손자를 어찌나 아끼는지, 원손을 보러 하루라도 동궁전에 들르지 않는 날이 드물 정도였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다는 격언 그대로였다.
임금이 삼 대에 걸쳐 나를 또다시 왕위계승자의 스승으로 붙일 것 같다는 염려는 둘째 치자. 임금이 그리 예뻐하는 손자를 팽개치고 이 자리에 왔다는 것은 그만큼 대만에서 중대한 소식이 들어왔다는 이야기였다.
입안이 마르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지금 읽고 계신 그 장계, 어떤 내용인지 알 것 같습니다, 전하.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기 상관장을 부르신 이유는…….”
“그래. 저쪽에서 결국 칼을 뽑아들었다. 우리가 예상했던 그대로.”
임금이 읽고 있던 두루마리를 내게 내밀었다.
건네받은 문서는 두 장이었다. 하나는 대만 섬의 오륜 현령이 보내온 장계,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적혀있는 내용에서 찬바람이 부는 외교문서였다.
그 발신지가 어디인지는 명백했다.
그동안 숨겨왔던 일들에 대한 추궁이 가득한 문서의 끝에는 명나라 수군 도독 정성공의 인장이 찍혀있었다. 옆에서 질란디아 요새로부터 온 보고서를 읽는 상관장은 얼굴에서 핏기를 잃어갔다.
“약속을 어겼으니 우리 교역선을 나포했다……. 그리고 그 뒷내용은 대부분이 대만 섬에서 들킨 하란타와의 관계에 대한 추궁이군요. 그동안 눈감아주던 밀무역도 함께 따질 생각인 모양입니다.”
“너는 어찌하고 싶으냐. 지금이 역천(逆天)을 시도하기에 적절한 시간이라 생각하느냐.”
“그동안은 명국의 황제가 저를 편들어준 덕분에 그자가 대놓고 조선을 건드릴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분명 명국 조정은 지금 한 사람의 손에 놀아나고 있으니까요.”
숭정제가 세상을 뜬 것은 얼마 전이었다. 그리고 줄이 닿아있는 남경의 토호들에게 받은 정보에 따르면, 뒤를 이어 새로 즉위한 황제는 마치 촉한의 유선과 비교될 만큼 무능한 인간이라 했다.
그런 황제를 휘어잡은 사람은 여동생을 귀비로 바치고 황실의 외척이 된 정성공이었다. 향락에 빠진 황제를 허수아비로 세워놓고, 손에 틀어쥔 군권과 재력을 토대로 정성공이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상황.
“그동안 명국의 삼두(三頭)로 활약하던 오삼계와 사가법이 힘을 쓰지 못하고 있다 했던가……. 그러니 이 자가 수군도독 개인의 명의로 우리에게 위협을 가해오는 것이로구나.”
“그렇습니다, 전하. 북쪽의 청국 역시 겨울잠에서 깨어나 다시금 남쪽으로 공세를 취하고 있으니까요. 그것을 막으러 오삼계는 조정을 떠나 있을 것이고, 병권도 금전도 황제의 총애도 쥐지 못한 사가법 혼자서는 그를 제어하기엔 무리입니다.”
“건방진 놈. 우리를 얼마나 얕보았으면 이런 상황에서 시비를 걸어왔단 말이냐.”
“아마도 전방의 청국을 상대로 온 역량을 집중하기 전, 배후의 위험을 걷어내겠다는 심산이었겠지요. 이전에 보았던 주성공의 심성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내가 남경에 갔을 적, 가면을 걷어낸 정성공에게서 느낀 인상을 한 단어로 요약하자면 이것이었다.
오만.
처음 발을 디딘 네덜란드에서 빌렘에게 받았던 인상과 정확히 같은 느낌.
그 오만 때문에 정성공은 감히 내게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내가 일국의 사신이든,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든 개의치 않는 듯했다. 언제든지 나를 깔아뭉갤 수 있다는 오만한 자신감이 있었기에 나온 행동이었을 것이다.
“오만이라……. 그것만큼 경계해야 할 것도 드물 것이거늘.”
“덕분에 우리는 어두운 등잔불 아래에서 이렇게 실력을 키울 수 있었지요. 기껏해야 몇 년 전부터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한 탓에 그자가 이제 와서 손을 쓸 생각이 든 것 같지만 말입니다.”
정성공쯤 되는 자가 지금까지 조선이 밀무역을 시행하던 것을 눈치 채지 못했을 리 없었다.
대륙 남부와 교역이 다시 이어진 것도 십오 년이 넘었으니까.
그리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규모의 밀무역 정도는 묵인할 수 있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조선에서는 그만큼 공무역 규모도 늘려 정성공의 주머니를 채워주었고, 접선 장소를 수차례 옮겨가면서까지 최대한 밀무역을 숨기려 애를 쓴 결과였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렇게 눌려 살 수는 없었다.
본디 바다의 왕좌는 한 명에게만 허락된 것. 그리고 순치제에게 건넨 약속으로 쐐기를 박아버린 이상 물러날 곳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도 그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언제든 조선 정도는 손을 봐줄 수 있다는 생각 아래 이렇게 움직이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우리 정도는 손을 봐줄 수 있다라……. 한수야, 그의 판단은 옳았느냐?”
“그가 틀렸다는 것을 지금부터 증명해줘야겠지요. 자신이 이 바다의 최고라는 오만과 방심, 그것이 언제든지 스스로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 또한 말입니다.”
러시아 원정대를 제압하고 청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나와 임금은 함대의 규모를 늘리는데 온 힘을 다했다. 본국에서 함선을 건조하는 것은 물론이고, 바타비아에 있는 네덜란드 조선소에서도 협조를 구했을 정도였다.
인적 자원을 수급하는 것은 그나마 용이했다. 수군은 더 이상 칠반천역으로 논해지는 기피 직업이 아니었으니까. 수군의 복무하는 것만으로도 신분 상승의 기회와 넉넉한 보상을 거머쥘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얼들이 자신의 팔자를 고치고자 수군에 자원하는 것은 여전했다. 또한 면천을 상으로 내걸고 천민들을 수군으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복무를 원하는 노비가 있으면 몸값을 지불하고 수군에 편입시켰다.
사관학교인 군관도감도 임시로 정원을 두 배로 늘렸다. 무과 선발인원 또한 일시적으로 급격히 늘려, 강화도에 확장된 훈련장에서는 사람 앓는 소리가 끊이는 날이 없었다.
하멜과 함께 조선에 들어온 네덜란드 화포 장인들은 쉬는 날도 없이 일해야 했다. 총통위에 설치된 화포도감은 개량된 화포인 을(乙)식 충무포를 생산하느라 밤늦게까지 불을 밝혔다.
“그렇게 마련된 함대가 전선만 팔십여 척이라……. 살마주를 칠 때에 비하면 네 배가 늘어난 규모로구나.”
“아마 교역선으로 쓰는 예성선까지 치면 최대 백오십 척 가량을 동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명국의 함대에 비하면 규모로는 한참 미치지 못합니다.”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추정한 바로는 우리 함대의 두 배 가량이라 했던가? 그만한 규모의 함대를 운용한다니 그동안 해상왕이라 불릴 만도 했구나.”
들리는 소문으로는 정성공의 함대가 구백 척에 달한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하지만 현지에서 수집한 정보를 파악한 바로는 실체는 크고 작은 배를 모두 합쳐 많아야 삼백에서 사백 척 정도였다.
병법에는 적의 수가 많으면 도망가라 적혀있다. 단순히 함선의 수로만 따지면 절체절명의 상황. 그러나 적 함대를 이루는 대다수 함선은 중국식 정크선이다. 질로 따지자면 조선 수군이 압도적이다.
게다가 평범한 전선의 질만 앞서는 것이 아니었다. 네덜란드를 방문하면서 선물로 받아온 최종병기 두 척 역시 조선 수군에서 든든하게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왜란 때 우리를 도우러 왔던 명 수군의 함선은 형편없었다고 했던가. 명의 장수 하나는 판옥선 한 척을 선물로 받고 뛸 듯이 기뻐했다던데.”
“예, 그렇습니다. 장강과 근해에서 쓰이는 배들이 명국 함대의 대부분을 차지할 것입니다. 물론 그들에게도 먼 바다를 건너 교역하는 배가 있긴 하나, 그것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해볼 만한 싸움이라는 생각이 드는구나. 아, 그가 있었다면 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을 터인데…….”
“저도 통제사 라위터르가 그립습니다, 하지만 그에게서 전략전술을 옆에서 보고 배운 장수가 뒤를 잇지 않았습니까. 현 삼도수군통제사 이완 말입니다.”
원 역사에서 효종이 시행한 북벌정책의 선봉대장이었던 이완은 이제는 수군의 꼭대기에서 조선 역사상 가장 강력한 함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이완은 라위터르가 조선에 머무는 동안 부관 역할을 하며 그의 모든 것을 닮으려 노력했고, 그 결과가 지금 빛을 발하는 중이었다.
“그가 원양수군을 맡은 이후로 우리 수군은 패배를 경험한 적이 없다. 물론, 많아봐야 몇 십 척 규모의 해적을 상대로 한 소규모 해전이었지만 말이지.”
“대규모 해전을 경험하지 못한 것은 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저희에게는 여기 든든한 동맹군도 있지 않습니까.”
“아, 그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었구나. 그렇지 않느냐, 인다이크 상관장?”
임금의 목소리를 들은 인다이크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나와 임금이 대화를 나누던 사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정신을 놓고 있던 그였다.
“전하, 그…… 죄송합니다. 제 모자란 조선어 실력으로는 지금 오가는 이야기를 전부 알아들을 수 없었습니다. 명의 함대와 싸울 생각이신 것 같은데, 제 생각이 맞는지요?”
“그렇다. 우리는 증편한 모든 함대를 동원해 명의 함대에 맞서기로 결정했다. 너희 하란타와 동인도회사는 어떤 협력을 제공할 수 있나?”
“명으로부터 위협이 가해졌으니, 저번에 미리 대만 총독과 정한대로 이미 바타비아의 본부로 연락선이 출발했을 것입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그곳에서도 긴급회의가 벌어졌겠군요.”
“…….”
“물론 저희 공화국와 동인도회사는 조선에 아낌없이 협력할 생각입니다. 대만은 조선뿐만 아니라 저희 입장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귀중한 곳이니까요. 아마도 바타비아에서 파견할 수 있는 병력의 규모는…….”
인다이크의 입에서 천천히 숫자 몇 개가 흘러나왔다.
전함으로 사용할 스쿠너 20척과 그것을 보조할 플류트 10척, 그리고 그것을 운용할 병력들.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아마 이것이 바타비아에서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전력일 것입니다. 전하께서 요청하신대로 엥겔란드와의 전쟁이 끝나고 군에서 물러나온 해군 출신들을 고용한 상태입니다.”
“알고 있다. 그 정도면 가용한 함선을 전부 보낸다고 봐도 무방하겠구나. 내 이번 일이 끝나면 따로 동인도회사에 치하의 뜻을 전하겠다.”
“대만 섬은 공화국과 조선 사이에 오간 우호의 상징과도 같은 곳입니다. 아마 조선이 없었더라면 공화국 단독으로는 그곳을 방어하기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겠지요. 감사해야할 것은 오히려 저희입니다.”
임금의 격려를 받은 인다이크가 가슴에 손을 올리고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하긴, 대만에 설치한 오륜현의 이름부터가 조선과 네덜란드 우호의 상징이었다.
젤란디아 요새 근방에 설치한 행정구역의 이름에 오라녜 가문의 이름을 음차해 붙인 것 만한 상징이 또 있겠는가.
“좋다. 그러면 이 건방진 도독이 보낸 문서에 어떤 대답을 할지 완전히 정해졌구나.”
***
어쨌건 상국으로 여기던 명을 치는 일이다. 아직도 조정에 일부 남아있는 산당의 반대를 염려했건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산당은 모문룡을 징벌한 과거를 근거삼아 정성공 정벌을 지지했다. 30년 전 압록강 근방을 점거하고 행패를 부리던 명나라 장수 이야기다.
그들의 말인즉 황제의 눈을 가리고 명과 조선의 친선을 방해하는 정성공을 제거해야한다는 논리였다.
이제 무역이 조선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도 부정할 수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국력이 강성해지면서 산당 또한 사상에 변화를 겪고 있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좋았다. 임금의 즉위 이후 조선 조정은 허울뿐인 명분보다 국익을 위한 결정을 내리기 위해 일치단결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뭣이? 이런 일에까지 네가 나설 이유는 없지 않느냐?”
“제가 가야 명분이 완성이 됩니다. 지금 조선에서 명국에게 책봉을 받은 사람은 저와 전하뿐이지 않습니까.”
임금은 말리려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정성공은 명나라 무관 중에 위가 없는 정일품 도독 자리에 오른 자다. 그를 벌한다는 명분을 취하려면 적어도 명나라 안에서 비슷한 위치를 가진 사람이 가야 했다.
그것이 숭정제에게서 종일품 도독동지 직을 받은 나였다.
게다가 전투가 끝나고 남명을 상대로 빠른 뒷수습을 하기에도 내가 참전하는 것이 옳았다. 결국 나는 임금과 아내를 상대로 절대 최전선에 나가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고서야 대만으로 떠날 수 있었다.
***
“좌상 대감! 저기 육지가 보입니다!”
후발대와 함께 벽란항을 떠난 지 보름쯤 후, 나는 수평선 너머로 네덜란드인들의 요새가 드러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앞에 지어진 항구에서는 조선군의 거대한 전열함 두 척이 정박한 채로 나를 반기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