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화. 담판
“조선에서 ‘담판’을 요청해왔다고? 네가 제대로 전한 것이 맞느냐?”
“예, 도독님……. 게다가 그것이…….”
부하가 말꼬리를 흐리는 이유가 있었다. 방금 정성공이 건네받은 두루마리에는 상상도 못한 내용이 적혀있었으니까.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친 처사다……. 요구에 응할 수 없다…….”
“도독님, 저는 이만 나가봐도 되겠습니까. 생각이 필요하실 듯싶은데…….”
심상치 않아진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부하는 정성공에게 퇴실을 요청했다. 그런 부하를 벌레 보듯 바라본 정성공은 입가를 구기더니 손짓으로 꺼지라는 신호를 보냈다.
“조선에는 멀쩡한 개가 없는가? 나름 골라서 확인한 놈이 주제도 모르고 주인을 물려 들질 않는가.”
적혀있는 내용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정성공의 눈길이 몇 번이고 두루마리 위를 훑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거기 적힌 내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냐. 네 뜻대로 한 번 해주마. 대체 네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짖어대는 것인지, 한 번 들어나 봐 주겠다.”
정성공은 천천히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두루마리를 말아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그의 손에 쥐여 있는 종이는 한 구석이 미세하게 구겨져 있었다. 정성공의 손끝이 차오르기 시작한 감정 탓에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오랜만입니다. 국성야?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냈지요. 조선국 도승지, 아니, 그것도 옛날이야기로군. 지금은 관직이 어디에 이르렀다고 하셨었지요?”
이곳은 대륙과 대만 사이에서 무리를 지은 섬들, 팽호 제도에서도 외진 곳에 홀로 떨어져 있는 한 무인도.
표류하지 않고서는 인적조차 닿지 않는 외딴 섬 해변에는 평소와 어울리지 않는 인파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리고 고즈넉하던 무인도 인근 바다 위에는 웬 거대한 함선들이 위용을 앞다투어 뽐내는 중이었다.
“삼정승 중 하나, 좌의정입니다, 국성야. 그동안 작은 공을 세운 것이 주상 전하의 눈에 들어 과분한 은혜를 받았지요.”
“호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으셨나봅니다. 진심으로 감축드리는 바요.”
“그러는 국성야께서도 국구(國舅, 황제의 장인) 집안이 되셨고, 군의 정점에 서셨다면서요? 감축드립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이 서로 안부를 묻는 자리에 불과했다. 두 거물의 입가에는 가벼운 미소만이 흐르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 자리에 가득 들어차 있는 것은 팽팽한 긴장감.
오히려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것은 양 거물과 동행한 이들이었다. 조선 측 대표의 옆에 앉아있는 이십대 초반의 젊은이 한 명만 제외하면 모두가 그랬다.
“옆에 있는 부관은 낯이 익은데……. 혹시 저번에 남경에 데려왔던 꼬마입니까?”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남경에서 제게 전통극을 보여주신 날, 이 녀석에게 빙고(氷庫)에서 낸 귤을 잔뜩 쥐어주셨지요.”
“훌륭하게도 컸군. 마치 밀사 시절의 좌의정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헌데, 조선국 좌의정은 기억력이 좋으신 모양입니다? 그날 와사(瓦肆)에서 있던 일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날 일을 잊었을 리가 있습니까. 국성야께서 처음으로 극진한 대접을 해주신 곳인데요. 하하.”
두 사람이 나누는 말에 담긴 내용은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것들이 허공에서 부딪힐 적에는 불꽃이 튀었다.
그날, 정성공은 원형 극장에서 절강 지방의 전통극을 조선의 밀사에게 보여주며 처음으로 본색을 드러냈었다. 그 압력에 밀려 굴복했던 사람의 입장에서 그날을 잊었을 리가 있겠는가.
“그럼 그날 제가 좌의정께 귤을 건네며 했던 말 역시 기억하시겠군요. 남귤북지(南橘北枳)의 상황은 그날 이후로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회수 남쪽에서는 귤이 나고, 북쪽에서는 탱자가 나고 있지요.”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회수와 장강을 낀 방어선은 여전히 튼튼하게 지켜지고 있다는 사실도요. 오삼계 도독께서 고생을 많이 하신다지요.”
“이런 상황에서 어찌하여 제 심기를 거스르시는지 궁금하군요. 분명 당시의 좌의정은 대명의 뜻과 질서를 따르겠다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렇게 약속을 어길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았는데요.”
정성공의 눈은 웃고 있었지만, 그의 이마에는 희미하게 핏줄이 돋은 채였다. 그를 상대하는 사내는 정성공의 표정에서 슬슬 본의를 읽을 수 있었다.
어디 조선 주제에 분수도 모르고 기어오르는가.
아마 정성공이 막되어먹은 자였다면 그런 말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을 것이다.
“그때는 그랬었지요. 허나.”
“허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지 않습니까? 국성야.”
앞에 앉은 사내의 표정을 본 정성공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흔들리는 정성공의 눈동자에는 사내의 아주 짙은 웃음 하나가 새겨져 있었다.
“먼 바다를 다니는 교역선 한 척이 없던, 그 시절의 조선은 이제 없습니다.”
“……!”
“불리한 요구를 입술을 깨물고 받아들여야했던 그 시절의 조선 또한 이제 없습니다, 국성야.”
그를 상대하는 사람은 미약한 반항밖에 하지 못하던 그 시절의 도승지가 아니었다. 정성공의 이마에 솟았던 핏줄은 이제 목덜미에까지 옮겨가 있었다.
“그만 과거에서 깨어나시지요. 이제 어느 정도 대등한 관계에서 앞일을 논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대등? 좌의정께서 먼 길을 오시는 도중에 몸에 풍토병이라도 침입하신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군요. 어찌 대명과 조선 사이가 대등할 수 있단 말씀이십니까? 이제 이 자리를 만든 의미가 없어 보이는데…….”
“고작 대만 정도를 오는 일로 몸이 상하지 않습니다. 이미 수십 배의 거리를 배를 탔던 몸인데, 이 정도는 앞마당을 다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요.”
“수십 배? 농담도 잘…….”
“믿고 안 믿고는 국성야의 자유입니다. 아, 지구 반대편에 다녀왔다고 해야 말뜻을 알아들으시겠습니까?”
정성공의 포커페이스에 처음으로 금이 갔다. 해봐야 필리핀이나 베트남 인근의 인도차이나 반도가 생각의 한계인 사람에게 그 말은 충격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그의 표정에 보일 듯 말 듯 갔던 실금은 잠시 후, 약간의 혼잣말과 함께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그래, 당신은 허튼 소리를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 하긴, 그 정도는 해야 홍모 놈들과 저리 야합하는 것이 가능할 터…….”
정성공은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즉시 새로운 정보에 대한 판단을 내린 모양이었다. 어느새 그의 표정은 평소 그대로로 돌아와 있었다.
“아하, 이제 알겠습니다, 좌의정.”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무슨 생각을 하고 좌의정이 여기까지 왔는지를요. 당신은 홍모 놈들에게 속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놈들은 자신들의 세력이 저 남방에 흥성하고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허깨비에 불과하거든요.”
자신은 무엇이든지 알고 있다는 정성공의 저 표정. 놈은 여전히 오만에 빠져있는 것이 분명했다.
“고얀 놈들 같으니라고. 놈들이 어떤 식으로 조선을 꼬드긴 것입니까? 언제든지 바다를 덮을 듯한 함대라도 끌고 와 제 함대 정도는 처참히 수장시킬 수 있다 이야기라도 하던가요?”
“…….”
“좌의정이 아주 잘못된 판단을 내리셨습니다. 놈들은 분명 강력한 세력이긴 하나 그것은 본국 근방에서의 일이지요. 본국에서 멀어질수록 놈들의 영향력은 낮아지고, 그나마도 힘을 쓸 수 있는 곳은 파달유아(巴達维亞, 바타비아) 인근에 불과할 겁니다.”
“…….”
“놈들은 자신들의 주력을 이 먼 곳까지 보낼 수 없습니다. 이 근방의 함선을 최대한 동원해 봤자 전선 일이십 척이 전부일 테지요. 도대체 어떤 감언이설에 속으신 것입니까? 하하.”
확실히 정성공은 네덜란드 쪽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계속 확인했던 것이 분명했다. 그가 추론하고 있는 네덜란드 함대의 규모는 거의 정확했으니까. 인도네시아 자바 섬의 바타비아 총독이 약속대로 지원군으로 보내준 함대 이야기였다.
“그런 허풍에 속아 나와 대명을 적으로 돌리다니요. 좌의정도 나이를 먹더니 판단력이 흐려지신 것 아닙니까?”
“…….”
“보십시오, 좌의정. 분명 당신도 이 무인도까지 오면서 내 위풍당당한 함대의 위용을 보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것은 내 함대의 일부 중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건 좌의정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시겠지요. 장강 상류인 사천까지 함락시켰음에도 북방의 공세가 더 이상 뻗지 못하는 것은, 국성야의 함대가 수백 척의 함선과 수만의 병사로 장강과 바다를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니까요.”
“잘 알고 계시는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체 이렇게 나오시는 이유가 뭡니까? 설마 예전 일을 아직까지 마음에 담아두셨다가 이런 중요한 자리에서 화풀이를 하실 분은 아닐 테고.”
정성공의 시선이 무인도 앞바다에 떠 있는 조선 함대에 가 닿았다. 그는 분명 내가 끌고 온 함대를 얕보고 있었다.
“국성야. 제가 그런 옹졸한 자였다면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겠습니까?”
“그건 모르는 일이지요. 사적인 감정으로 큰일을 그르친 이들이 역사에 얼마나 많았습니까. 지금이라도 무례를 진심으로 사죄하고 남경으로 저를 따라오신다면, 이번 일은 최대한 추궁하지 않으려 노력해보겠습니다.”
마치 선심을 베풀 듯이 정성공이 손을 내밀었다.
아직도 그는 조선이 무언가를 착각해 네덜란드와 손을 잡고, 자신의 무역 지분을 야금야금 먹어들어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나 또한 함대의 일부 중 일부만을 이 자리에 데려왔으니까. 보이는 것이 고작해야 벽란선 다섯 척이라면, 정성공이 그리 생각해도 이상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판단은 틀렸다. 그가 내린 판단은 근거부터 잘못되어 있었다.
“착각하지 마십시오, 국성야.”
“……뭐, 뭐요?”
“나는 올바른 판단을 내렸으니까요. 그리고, 그쪽에 고개를 숙였던 것은 한 번으로 족합니다.”
“당신, 지금 제정신…….”
그동안 나는 외부에 조선 수군의 전력을 철저히 숨겨왔다.
당연했다. 적에게 대비할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되는 법이니까.
정성공이 가지고 있는 조선 함대에 관한 정보는 꽤 오래 전부터 멈춰있을 것이다. 그동안 조선을 오간 명나라 칙사들이 본 조선 수군은 벽란항의 것들이 전부였다.
그것을 위해 나는 시설 개선이 완료된 각지의 수영(水營)에 새로 건조한 함대를 분산시켰다. 무역로에 투입한 교역선들도 출항 시기와 항로를 조정해가며 최대한 함대의 전체 규모를 숨기려 애를 썼다.
명에서 조선을 방문하는 교역선이 거의 없었던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놈들은 조선이 가져다주는 특산물만 받아먹고 오래 전부터 상업의 불모지라 여겨왔던 조선 땅에는 직접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선 초 조공무역부터 이어져 온 습관이었다.
“경적필패지리(輕敵必敗之理). 국성야는 이게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적을 가벼이 여기면 반드시 패하는 것이 이치다…….”
“잘 아시는군요. 저는 병법을 배우고 군사를 다루면서 이 원칙을 어겨본 적이 없습니다. 그 말인즉슨…….”
탕. 가볍게 내려친 탁자에서 경쾌한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내면까지 전해졌는지, 대화에 집중하고 있던 정성공은 흠칫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제가 이곳까지 함대를 이끌고 온 것은 국성야에게 사죄하기 위함이 아니며, 또한 당신을 얕봐서도 아니란 말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좌의정. 당신, 후회할거요. 지금 당신이 무슨 말을 입에 담고 있는지 알기나 하시오?”
“나포해간 우리 교역선을 풀어주십시오. 그리고 조선과 이전 같은 관계를 원하신다면 그에 대한 보상과 함께 지금까지 불공정하게 이루어졌던 교역 조건을 전면 재검토해 주십시오.”
“……미쳤군. 당신.”
정성공이 씹어뱉듯 중얼거렸다. 어처구니가 없어 얼이 빠져나간 표정이었다.
그동안 밟아도 꿈틀하지 않던 놈들이, 거대한 꿈틀거림을 선사했으니. 과연 기분이 어떨까.
“하지만 그걸 바라지 않으신다면, 어쩔 수 없지요.”
“마지막 경고요. 최후의 선만은 넘지 않는 것이 좋을 거요.”
남경에서 정성공에게 겪었던 고난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남의 본진에서 바다의 통제권을 쥔 자를 상대로 얼마나 굴욕을 당했었던가.
“아까 지난날 남경에서의 이야기를 하셨지요. 회수 북쪽에서는 귤도 탱자가 된다 하셨던가요? 고작 과일 하나가 강을 건너도 겉모습이 달라지는데, 사람이 수천 리 되는 바다를 건너면 오죽하겠습니까?”
“안한수…….”
“그때 남경에서 보였던 모습이 제 본모습이라 생각하신 모양인데, 그 착각을 이번 기회에 고쳐드리겠습니다, 국성야. 저도 나름 대명의 도독동지 자리에 임명받은 사람이기도 하니까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냉혹하게 변한 정성공의 시선은 나를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이 말을 하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이 걸린 것인가.
“하실 말씀이 더 없으신 것 같군요. 그럼…….”
“……협상은 끝이다. 제 주제 모르고 날뛰는 놈에게 본때를 보여주지.”
피식. 과장된 웃음을 보여주고, 나는 정성공에게서 몸을 돌렸다.
“……다음번에는 바다 위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