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전초전
남명의 함대가 출항했던 항구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 이곳, 복건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인 하문(下門, 현재의 푸젠성 샤먼시)에는 전에 없던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나가 있어라.”
“도독님…….”
“나가 있으라고 했을 텐데.”
방 안까지 따라 들어오려던 부하를 내쫓은 정성공은, 아버지가 쓰던 자리에 앉아 어금니를 깨물었다. 지금 정성공이 있는 곳은 정씨 가문이 과거 복건 지방에 거주하던 저택.
이곳, 하문은 아버지 정지룡의 고향이자, 정씨 가문의 본거지와도 같았던 항구였다.
정씨 가문은 남명 조정에 출사하며 본거지를 남경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들의 함대는 더 북쪽에 위치한 영파 항을 근거지로 두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정씨 가문이 하문 일대에 미치는 영향력은 여전했다.
“어처구니가 없군. 홍모 놈들……. 아버지에게 빌어 대만 섬으로 쫓겨가는 것을 택했던 놈들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뒤통수를 쳐?”
정지룡이 살아있던 사이 정성공이 네덜란드 쪽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이유가 있었다. 그쪽은 애초에 연줄이 있었던 아버지의 담당이었으니까.
마카오 침공이 실패한 이후 명 조정과 네덜란드 사이를 중재했던 이가 바로 정성공의 아버지, 정지룡이었다. 그 이후 정지룡은 대만에 정착한 네덜란드 세력과 밀월 관계를 유지하며 해적질과 무역을 병행해 세력을 키워나갔다.
꽤 오래된 이야기였다.
정성공이 일본에서 막 태어나 걸음마를 뗄 시절부터의 이야기.
그가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대륙으로 온 직후, 정지룡은 자유무역을 원하던 네덜란드의 무력공세를 꺾고 놈들과 대륙 사이의 교역을 제한했다.
“그랬던 놈들이……, 이제는 조선을 끌어들였다 이거지? 다시 한번 무력 충돌을 일으킬 각오를 하고?”
사가법과 이야기를 할 때까지만 해도, 정성공은 네덜란드와 조선을 단순히 밀무역으로 엮인 관계라고만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조선을 추궁하러 팽호 제도까지 몸소 나갔던 것이었는데…….
하지만 예상과 다른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날 자리에 나온 안한수의 태도를 보면 놈들의 관계는 상상 이상으로 긴밀한 것이 분명했다. 몇만 리나 떨어져 있다는 홍모의 본국까지 사신이 오고갔다는 말을 들으니 더욱 그러했다.
“아버님께서도 너무 마음을 놓고 계셨나보군……. 나 역시 잘못이 크다. 아버님이 생전에 별 언급을 하지 않으셨으니 막연히 별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인데…….”
사실 그동안 정지룡이 정성공에게 네덜란드에 대해 언급한 일 자체가 적었다. 대부분은 무역을 더 열어달라며 그들이 뇌물을 보냈다는 이야기 정도.
네덜란드나 조선이나 지금까지는 정씨 가문에게 사정을 봐달라 애원하던 미미한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헌데 그런 개미들이, 이제는 한데 모여 감히 코끼리를 물어뜯으려 하고 있었다.
정성공의 입가에서 옅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리고 그 미약한 웃음소리는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하, 핫하, 으핫하하!”
광기어린 웃음과 함께 터져 나온 것은 차갑지만 격렬한 분노였다. 몸 주위에서 이글거리기 시작한 그의 분노는 숫제 눈에 보일 듯했다.
“암, 그렇지. 그렇고말고. 개미가 기어오르면 털어버려야지. 땅에 떨어뜨려 짓밟아버려야지.”
감히 오랑캐들 주제에 나, 정성공을 얕보았다 이건가.
놈들의 배가 먼 바다에서 성능이 뛰어난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수가 받쳐주었을 때의 이야기다.
현재 명백히 동방의 바다를 지배하는 이는 정성공이었다. 그의 함대 수백 척이 정성공의 무기였고,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그의 경험이 거대한 함대를 뒷받침했다.
“……모래알 같은 놈들. 몇 번 박살이 나면 다시는 기어오를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다.”
순식간에 정성공의 머릿속에서는 커다란 전술이 짜여졌다.
놈들의 배가 빠르고 민첩하다면, 그 움직임을 봉하도록 강제하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놈들이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고, 놈들의 배가 불리한 지형으로 끌어들여 싸운다.
애초부터 전선의 수는 정성공 측이 절대적으로 많은 상황이었다.
병법의 기본만 지키면 지기 어려운 싸움. 정성공은 앞으로 벌어질 해전을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병법에서는 적보다 아군이 적으면 싸움을 피하라 가르쳤을 텐데. 홍모와 조선에는 마땅한 병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하하.”
곧바로 정성공의 외마디 외침이 방 밖에서 대기 중일 부하에게로 향했다. 명령서를 작성하기 위한 지도와 지필묵을 가져오라는 명령이었다.
저 명령이 발동되면 정성공의 함대는 최전방에 남길 최소한의 병력만 제외하고 이곳 하문 항으로 집결하게 되리라. 그리고 그 이후 일어날 일은 정해져 있었다.
“아무리 날고 기어봐야 내 바다에서는 꼼짝도 못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거친 파도 위에서는 날 수도, 길 수도 없는 법이니까.”
***
그 시각, 대만 남부의 젤란디아 요새에서는 여러 사람들이 앞일을 논하기 위해 원탁에 모여앉아 있었다. 나와 삼도수군통제사 이완, 그리고 바타비아에서 온 네덜란드 선장 하나, 그리고 네덜란드령 대만, 포모사의 총독까지 합쳐 네 사람이었다.
“일단 포모사를 위해 먼 곳까지 와주신 분들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네덜란드의 포모사 총독, 프레데릭 코예트(Frederick Coyett)였다. 그가 이렇게 저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유가 있었다.
“할 말은 차고 넘치게 많습니다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닌 것 같군요. 책임 추궁은 나중으로 미루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부총리님.”
말을 뱉으면서도 이맛살이 잔뜩 찌푸려져 있는 것이 느껴졌다.
이 총독이란 작자가 그동안 남명이 대만을 침공할 이유가 없다며 조선에서 보낸 무수한 경고를 가볍게 흘려보냈기 때문이었다. 조선에 꽤나 협조적이던 전 총독이 그리울 정도였다.
이자가 조금만 더 기민하게 움직였다면 이번 일을 준비할 시간이 조금이나마 더 있었을 것이다. 다행히 별 문제가 없이 끝났긴 한데, 이자가 조금이라도 남명 쪽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면 교역선 나포 건을 더 일찍 알 수 있었을 테니까.
그랬다면 벗들의 자녀가 백년가약을 맺는 자리에서 금군에게 불려나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식은땀을 흘려대는 코예트를 보고 솟구치는 짜증을 꾹 눌렀다.
“그래도 총독께서 실책을 수습하는 방법은 알고 계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뭐, 굳이 지휘권을 전부 위임하지 않으셨더라도 우리가 최선을 다해 도와드렸을 것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겠습니다만.”
“……아닙니다, 조선국 부총리님. 부디 저를 비롯해 포모사에 거주중인 네덜란드인들을 구해주십시오.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네덜란드 본국과 동인도회사로부터 대만 섬에 대한 모든 책임을 위임받은 총독이다. 이곳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바로 위에서 추궁이 날아올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 자리에는 마침 내가 바타비아에서 불러온 지원군도 있었다. 총독 옆에 앉아 내게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이가 그들을 총지휘하는 선장이었다.
이들이 공정한 목격자가 된 이상, 총독은 내게 자비를 구걸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목격자들은 총독보다 내 편을 드는 상황이었으니까.
이대로라면 지금 벌어진 상황이 해결되더라도 포모사 총독은 조선이나 바타비아 본부 측에 아무 발언권도 가지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총독도 그 정도는 알고 있을 것이다.
“솔직히 당장이라도 연락선을 띄워 총독의 실책을 바타비아에 보고하고 싶지만……. 총독, 조선국 부총리께 감사하십시오. 이분의 설득이 아니었으면 이미 당신의 목이 위험했을 것입니다.”
“아이고, 물론이지요, 선장. 제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아마 이번 사태가 잘 끝나도 총독 임기가 끝나면 재판 정도는 감수하셔야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총독의 실책 탓에 포모사를 잃었다면 총독의 죄목은 단순 태업이 아니라 반역죄가 되었겠지만요.”
바타비아에서 온 함대의 대장, 기데온 더 빌트(Gideon de Wildt)가 총독을 을러댔다. 영란전쟁에까지 참전했던 베테랑 선장의 말에, 코예트는 찍 소리도 내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든든한 동맹군이었다.
트롬프 제독의 밑에서 선장으로 근무하던 역전의 용사가 지원을 온 것은 행운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조선 수군은 큰 해전 경험이 전무한 것이 유일한 약점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딱딱한 분위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총독이 백기를 들고 입을 다물자마자 더 빌트는 굳어있던 표정을 풀고 이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게 전할 말이 있는 듯했다.
“참, 부총리님. 이 자리에 오기 전, 안토니 요새에 다녀온 건으로 드릴 보고가 있습니다.”
“아, 오늘의 회합을 준비하느라 잊고 있었군요. 그래, 저희 조총수들은 제대로 요충지에 배치를 받았습니까.”
“물론입니다. 안토니 요새의 지휘관은 한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라 그런지 말이 잘 통하더군요. 안 그래도 요새 방어 병력이 부족했던 것이 문제였는데, 고민을 해결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안토니 요새는 현대로 치면 타이베이 시 인근에 위치한 요새다. 담수(淡水, 단수이) 강의 하구에 지어진 이 요새는 대만 북부를 관할하는 네덜란드의 거점이었다.
정성공 또한 안토니 요새의 존재를 알고 있을 것이다. 제대로 된 공세가 가해지면 그곳에 주둔하는 수백 명의 네덜란드 병력으로는 방어가 불가능할 터. 더 빌트의 네덜란드 함대는 내게 받은 지시대로 총통위 병력 일부와 보급품을 그곳에 내려놓고 막 돌아온 모양이었다.
“헌데, 좌상 대감. 정말로 적이 그곳을 치려 들겠습니까? 대만 섬 북부에는 이곳처럼 대규모로 정착민이 거주하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삼도수군통제사 이완이 말을 꺼냈다. 이제 슬슬 대전략을 논할 시점이 온 것 같았다.
“아니오. 그럴 가능성이 높소, 통제사. 안토니 요새는 크지 않은 거점이지만 전략적 가치는 높은 곳이기 때문이오. 조선에서 출발한 배가 남하하는 길목에 위치한 거점이기도 하고, 적은 남북의 거점 두 곳에 주둔한 병력이 호응하는 것 또한 꺼리고 있을 테니까.”
“하긴, 병법에서도 배즉분지(倍則分之, 두 배면 군사를 나누어 친다)는 말이 있지요.”
“게다가 적의 주력은 아직 전부 소집된 상태가 아니오. 소집된 함대가 남하하면서 일부를 나누어 안토니 요새를 친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지.”
“우리가 그쪽으로 원군을 보내 안 그래도 열세인 함대를 쪼개는 것까지 기대하는 것일까요. 하지만 이번에 지원을 간 우리 군사를 합쳐도 그곳에 주둔하는 총 병력은 기껏해야 이천여 명에 불과합니다. 적의 공세에 무사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조선의 해군사령관님.”
그때, 뒤에 서 있던 하멜의 통역을 받아 더 빌트가 끼어들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나와 이완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를 묵묵히 듣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와 동시에, 멀리서 회의록을 기록하고 있던 길산이 재빨리 달려와 이완의 의자 옆에 섰다.
“말씀하십시오, 선장.”
“안토니 요새는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입니다. 큰 강이 흐르고 있긴 하나 접근할 수 있는 경로는 하나에 불과하고, 근방에 상륙할 수 있는 지점도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직접 다녀오신 분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마음을 놓겠습니다만…….”
“게다가 놈들의 배에 실린 작은 불랑기포로는 이십 피트에 달하는 성벽에 금이나 가게 하면 다행일 것입니다. 반면 안토니 요새는 최신형 화포로 무장하고 있고, 조선과 바타비아에서 보급을 받아 물자 또한 넉넉하니, 이제 쉽게 함락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안토니 요새의 모습은 더 빌트의 설명과 다르지 않았다.
네덜란드에서 조선으로 귀국하는 길에 들렀던 그곳에서, 벽돌과 돌, 시멘트를 섞어 건축한 성벽의 견고함에 놀랐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리고 안토니 요새에는 이번에 병력을 지원하면서 네덜란드 야금 장인의 도움을 받아 개량한 신무기도 함께 배치했다. 이제 적들의 함선이 바다를 뒤덮을 정도로 몰려오지 않는 이상, 그곳을 방어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다.
“내 판단 역시 선장의 판단과 동일하오, 통제사. 오히려 공격을 받았을 때 취약할 수 있는 곳은 이곳 젤란디아 요새지. 이곳은 커다란 만의 입구에 길게 형성된 모래톱 위에 지어진 요새니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부총리님. 안토니 요새에 지상 병력만을 보내신 판단은 지극히 옳습니다. 이 근방의 제해권을 장악하지 못하면, 이 젤란디아 요새는 다수의 함대를 가진 적에게 포위공격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흐음……. 좌상대감께서 모든 함대를 이쪽에 집결시키신 이유가 이제 명백히 이해되는군요. 만과 닿아있는 내륙에는 하란타가 새로 건축한 요새도 있고, 우리 조선인들의 정착지 역시 형성되어 있으니까요.”
아군은 젤란디아 요새 근방에 지켜야 할 것이 훨씬 많았다. 이완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게다가 이쪽에 함대를 집중한 이유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렇소, 통제사. 게다가 대만 섬과 대륙 사이에 위치해 기항지로 쓰기 좋은 장소, 팽호 제도는 복건 출신 호족이 다스리고 있지 않소. 아무리 하란타가 그동안 뇌물을 잔뜩 먹여놨다지만 전투가 벌어지면 적의 편에 설 가능성이 높겠지.”
“팽호 제도라면 저번에 주성공이라는 자와 담판을 지으러 갔던 곳이군요. 놈들이 그곳을 거점으로 삼고 공격해온다면……. 아무래도 가까운 이 근방에 주력 함대를 쏟아부을 테고요.”
“아마 대규모 해전은 이 인근에서 벌어지게 될 가능성이 높소. 북부의 방비는 그들 스스로에게 맡기고, 우리는 가장 큰 전장에 모든 전력을 집중해 거대한 적을 상대하는 것이 옳을 것이오.”
펼쳐진 지도 위를 내 지휘봉이 바쁘게 오갔다. 그렇게 큰 전략의 얼개는 확정되었고, 뒤이어 오간 대화들을 통해 함대 배치 등 세부 전략들이 정해지기 시작했다.
***
그리고 얼마 후, 안토니 요새.
두터운 성벽에 기대어 밤을 새며 바다를 경계하고 있던 조선군 병사 둘의 눈에 이상이 감지되었다.
“저기, 저기 좀 보십시오! 저거, 적선 아닙니까?”
“맞다! 어서 뛰어가서 잠들어있는 병력들을 깨워라! 어서!”
희끄무레한 새벽의 바다안개 너머로 바다를 건너오는 함선들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경계병이 낸 것이 분명한 종소리와 나팔 소리가 요새 내부를 뒤흔들었다.
그렇게, 동아시아 바다의 패권을 건 전투는 정성공의 함대가 대만 북부에 위치한 안토니 요새를 기습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