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용맹무쌍
“쏴라! 포가 됐든 불화살이 됐든 전부 쏟아부어라!”
“예! 도독님!”
“손놀림을 멈추지 마라! 지금은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저걸 막아야 한다!”
하지만 공포도 잠시, 정성공은 곧바로 떨리던 신체를 다잡았다.
아무리 거대한 적이 나타났을지라도, 지금까지 숱한 전장에서 단련된 그의 정신력을 무너뜨리기에는 부족했다.
“또 포탄이 날아……! 으아악!”
“다리……! 내 다리가……!”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정성공의 함대가 반격을 시작했지만, 적의 거대한 함선은 흔들림 없이 그들을 유린했다.
마치 어떤 무기도 통하지 않는다는 전설 속 바다괴수 한 마리가 함대 사이를 헤집어 놓는 광경을 보는 듯했다.
“에잇! 포를 어떻게 쏘기에 기껏해야 배 한 척을 제압하지 못한단 말이냐!”
“도독님! 이상합니다! 저 배에는 화포가 통하지 않습니다!”
“시끄럽다! 대낮에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게냐? 비켜라! 내가 직접 시범을 보여줄 테니!”
높은 자리에서 뛰어내린 정성공은 부관의 만류를 뿌리치고 갑판에 거치된 불랑기포를 향해 달렸다. 그 와중에도 외곽에서 버티던 그의 함대는 거선(巨船)에서 쏟아지는 포탄에 계속해서 전투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어어……? 누구……!”
“비켜라! 멍청한 놈들! 화포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놈들이 내 대장선에 타고 있었다니!”
정성공이 들이닥친 곳의 불랑기포는, 마침 자포를 모포에 결합해 장전이 끝나가던 상태였다. 득달같이 달려들어 포수 몇을 밀어낸 정성공은, 직접 조준을 마치고는 불을 붙인 화승을 빼앗아 그것을 포의 꽁무니에 쑤셔 박았다.
쾅!
커다란 폭음과 함께 포탄은 목표를 향해 날아갔다. 귓가에는 삐 소리가 울리고 있었음에도, 정성공은 성공을 직감했다. 포탄의 궤적이 그가 노린 곳으로 정확히 향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명중이군! 이로써 놈들의 포 하나는 처리했다!”
정성공의 입에서 자신감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가 직접 발사한 포탄이 적의 화포가 드러난 포문(砲門)의 하단에 정확히 명중했으니까.
정성공이 바다에서 다년간 겪은 경험상, 이렇게 되면 저 포문은 무력화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화포 자체에는 피해가 없을지언정, 그것을 받치고 있는 바닥이 무너졌을 테니 저 포문으로는 화포를 접근시킬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예상과 달랐다. 포탄이 착탄하며 일어난 연기와 먼지가 곧 가라앉고, 그 사이로 드러난 광경은 정성공이 생각과 어긋나 있었다.
“……아니?”
“도독님?”
“어째서 포탄을 맞은 목선이 저리도 멀쩡한 것이냐! 어째서!”
정성공은 순간 눈을 의심했다.
적의 배가 철갑을 두른 것도 아니었다. 놈들의 배는 분명 평범한 나무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포탄이 먹히지 않는단 말인가.
“아, 그렇군. 내가 포탄 궤도를 잘못 예측한 모양이야. 아니, 먼지 때문에 착탄 지점을 착각한 것이 분명하다.”
수십 년 동안 바다를 누벼온 자신의 상식이 틀릴 리가 없었다. 정성공의 상식에서는 바다에 떠 있는 목재는 포탄에 박살이 나야 정상,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새 정성공의 눈에서는 광채가 사라져 있었다. 그러나 혼란에 빠져있었음에도, 그는 몸에 새겨진 그대로 행동해 자연스럽게 불랑기포를 장전하는데 성공했다.
쾅!
불랑기포에서 다시 한번 포탄이 날아올랐다. 그리고 날아오른 철구는 이윽고 방금 자리에서 그리 벗어나지 않은 지점에 그대로 내리꽂혔다.
“이 무슨……!”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가라앉은 먼지 사이로 또다시 멀쩡한 포문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을 응시하는 정성공의 관자놀이에 혈관이 울룩불룩 솟기 시작했다.
“……놈들은 배에 요술이라도 걸었단 말인가?”
정성공의 얼굴은 허망함을 숨기지 못했다. 자신도 모르게 입이 벌어져 바람이 드나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정도였다.
그리고, 집중하느라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그의 귀에 그제서야 주변의 소음이 와닿기 시작했다.
“제발 그만해……! 이러다가는 다 죽어……!”
“어머니……. 어머니……. 나…… 너무 아파요…….”
적의 거선에 앞장서 달려든 부하들 덕분에 아직 대장선에는 포격이 날아들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정성공의 방패가 된 부하들의 배는 포탄의 세례를 받고 너덜너덜한 걸레짝으로 변한지 오래였다. 그들이 머물던 갑판에는 낭자한 선혈과 괴로운 비명이 가득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이쪽에 포탄을 한참 쏟아부은 악마는 천천히 움직여 함대의 후미를 짓밟기 위해 떠나갔다는 것.
그러나 그것이 조선 함대가 들이민 칼날의 전부가 아니었다.
“도독님! 적선의 갑판 위에 이상한 화포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넋을 놓고 있는 정성공의 귀를 부관의 다급한 목소리가 강타했다. 그 악마의 거대한 덩치 뒤에 숨어 접근하던 적 함대는 또 다른 발톱을 숨기고 있었다.
여전히 옆구리에서 수십 줄기의 불줄기를 토해내며 자신의 후방 함대를 박살내는 악마를 뒤로하고, 정성공의 시선은 이제는 익숙해진 조선의 홍모식 전선에 가 닿았다.
‘부관이 말한 이상한 화포는 저것인가.’
적들의 갑판 위에는 포구가 포신보다 두 배는 굵은, 마치 범종처럼 생긴 화포가 올라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아가리마다 철로 만든 것으로 보이는 포탄이 물려 있었다.
잠시 후, 조선의 전선을 박차고 날아오른 철구들은 정성공의 함선마다 사뿐히 내려앉았다. 그리고 이미 한 차례 포탄 세례를 받고 쓸렸던 배들은 폭발과 함께 순식간에 불지옥으로 화했다.
“도, 도독님…….”
이런 압도적인 배, 폭발하는 포탄은 정성공의 상식 안에는 없었다. 언제나 빠르게 돌아가던 그의 두뇌는 정지한 지 오래였다.
마음이 그 상태니 몸이라고 말을 들을 리 없었다. 힘을 잃고 비틀거리던 정성공의 시선이 적을 향해 나아가던 전방을 향해 움직였을 무렵이었다.
“저, 저건…….”
분명 연기 너머 어떤 형태도 보이지 않던 그 자리에, 어느새 적 함대가 들이닥쳐 있었다.
그리고 그 함대의 최선두에는 또 다른 악마가 서 있었다. 지금까지는 멍청한 대장선이라 비웃었지만, 그 배는 크기만 조금 작을 뿐 방금 정성공의 함대를 쓸어버린 거선과 분명 닮아있었다.
“이 자식……! 나를 잘도……!”
정성공은 미처 문장을 끝맺지 못했다.
이런 처참한 패배라니. 생전 처음 당하는 굴욕이었다.
적 대장선은 정성공의 좌측으로 선체를 틀며 화포가 빽빽하게 솟아난 옆구리를 드러냈다. 방금 정성공의 우현 방향 함대를 작살낸 거함보다는 숫자가 적었지만, 아군을 쓸어버리기에는 충분한 화력이었다.
“안한수……! 안한수……!”
지금 이 순간, 가장 증오스러운 이름이 정성공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 부름에 답하듯, 조선 대장선의 옆구리에서 솟아오른 화포에서 수십 줄기의 불길이 솟구쳤다.
***
“왜 좌상 대감께서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걷으려 애쓰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대장선의 좌현에서 쏟아지는 불줄기들을 지켜보던 이완이 운을 떼었다.
적에게 접근하는 과정에서 돌격장 신무와 빌트가 탄 신형 전열함이 적 중군 함대의 옆구리를 찢어발기는 것을 목격한 후였다.
“비싸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지. 명국에는 저 괴물을 상대할 만한 수단이 없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지금 우리가 타고 있는 전열함이야 양국의 우호를 위해 거저나 다름없는 가격에 인수했다고는 하나, 저 배는 이야기가 달랐소.”
“저야 대감과 병판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내려오는 물자를 수령하는 입장입니다만……. 조정에서 고생이 참으로 많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저 배의 값을 치르려면 토호들의 반대를 무릅써가며 추가 비용을 징수할 수밖에 없었소. 애초에 건조 도중에 하란타와 엥겔란드 사이의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면 인수할 수도 없었을 물건이오. 그러니 그쪽에서 요구하는 대로 제값을 다 낼 수밖에.”
이완의 말대로 반대세력을 잠재우고 호포제를 시행한 것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니었다. 아마 그동안 쌓여왔던 개혁책에 대한 반발이 이번 일을 통해 모조리 터져 나왔기 때문일 것이다. 영호남의 유생들이 한양으로 상경해 유소까지 올렸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지금 정성공의 함대를 상대로 그야말로 용맹무쌍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저 최종병기를 보면, 전열함의 도입은 그만큼의 고생을 분명 지불할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물론 양반들에게 뜯어낸 군포가 전부 저 전열함에 들어간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그동안 불공평한 교역과 고압적인 자세로 당해왔던 것이 얼마였던가.
속이 말 그대로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뭐, 하란타 입장에서도 조선에 얻어가는 수익이 점점 커지고 있으니 바타비아에 조선소를 커다랗게 증축한 것이고, 제값을 받았다고는 하나 전열함도 팔아준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감.”
“우리를 믿지 않았다면 저만한 병기를 함부로 넘겨주지도 않았을 것이오. 저하께서 반대를 무릅쓰고 국혼을 강행하신 보람이 있었소.”
“저만한 병기가 적의 손에 들어갔다가는 아무리 하란타라도 꽤나 골치가 아팠을 테니까요. 양국 사이의 동맹이 그만큼 굳건하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좌현에서 또다시 발사된 포탄들이 적 함대를 박살내는 것을 보며, 이완이 중얼거렸다. 비교적 덩치가 작고 건조한지 오래된 전열함인 대장선도 정성공 함대의 정크선을 어린 아이 다루듯 제압하고 있었다.
단단함이 철에 비견되는 티크 목재로 건조한 신무의 전열함은 아마 적 포탄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위력이 부족한 불랑기포에서 발사된 탄은 대다수가 튕겨나가기 일쑤겠지.
“개량된 비격진천뢰도 효과가 아주 좋군요.”
“안에 든 것이 새어나오지 못하게 하려고 하란타 장인들이 꽤나 골머리를 썩였었지. 덕분에 일반 포탄처럼 물 쓰듯 쓰지는 못하지만, 적재적소에서 사용할 분량은 생산할 수 있어서 다행이오.”
네덜란드 방문에서 얻은 작열탄 아이디어는 십 년 가량의 세월을 거쳐 훌륭하게 구현되었다.
후대의 작열탄처럼 충격 신관을 써 적 함선과 충돌하자마자 폭발하는 수준까지 이를 수는 없었지만, 시간을 두고 폭발하는 지금의 작열탄도 적의 함선을 불태워버리기에는 충분했다.
바다 한가운데에서 예고도 없이 이렇게 무자비한 화공이 가해질 줄은 정성공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에게 적선은 격멸해야 할 대상으로 보임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나포해 가야 할 은 덩어리로 보였을 테니까.
지금처럼 마주치는 자리에서 다짜고짜 불덩이를 쏟아 붓는 조선 함대는 그의 상식에서 벗어난 존재겠지. 약해빠진 청나라 함대만을 상대하던 만용이 이번에는 그의 발목을 제대로 잡아챌 것이다.
“좌상 대감! 포로가 대감을 뵙고 싶다고 했습니다! 말씀하셨던 그대로입니다!”
전열함 앞에서 종잇장처럼 박살나는 정성공의 중군을 바라보며 이완과 나누던 대화가 뚝 끊긴 것은 그때였다.
부관이 말한 포로란, 안토니 요새에서 포로로 잡힌 시랑이라는 이름의 적장을 일컫는 말이었다. 젤란디아 요새까지 압송된 그는 지금 조선 함대의 대장선에 타고 있었다.
“그동안 제공해주신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패장 시랑, 조선국 정승을 뵙습니다.”
“그래, 이제 순순히 입을 여실 생각이 조금 드셨소?”
인사를 나눈 후 명국어로 던져진 질문에도, 일자로 닫힌 시랑의 입술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강직한 사람이었다.
포로로 잡혔음에도, 이후 진술에서 정성공에게 반쯤 배신당해 안토니 요새를 공격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꺼냈음에도, 그는 그 이상 정성공을 불리하게 만들 정보를 털어놓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그 사이 마음이 바뀔까 대장선에 태운 채로 출항했던 것이었는데, 막상 전투를 바라보니 마음이 변하기라도 한 것일까.
“예. 다만……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조건이라? 무엇이오?”
“정승님도 대명에서 종일품 도독동지 직을 받으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선제 폐하와 두터운 인연 또한 맺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직 이전의 좋은 감정을 기억하고 계신다면, 부디 제 읍소(泣訴)를 들어주십시오.”
젤란디아 요새에서의 첫 대면 이후로 시랑이 내게 입을 연 것은 처음이었다. 굳어진 얼굴로 고개를 깊숙이 숙여 내게 감사를 표한 그는, 천천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움직였다.
“주성공을 제거하기 위한 모든 정보를 제공하겠습니다.”
“국성야를 제거하기 위한 정보라니?”
“당신 같은 분이 대명에 사적인 원한을 가지셨을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주성공이 도주에 이용할 만한 쾌속선의 특징, 팽호 제도에 잠시 정박할 만한 비밀 상륙지, 하문에 위치한 그의 저택, 이 모든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허나 그 조건이라는 게 걸리는데.”
정보를 누설한다는 사실이 영 내키지 않았는지, 시랑은 얼굴 근육을 잠시 움찔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원하시는 모든 정보를 제공할 터이니, 이렇게 부탁드리겠습니다. 부디, 옛 일을 생각해서라도 대명 함대의 숨통을 끊지만은 말아주십시오. 조선국 정승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