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해상왕의 최후
“정말 직접 가시려는 것입니까, 좌상 대감? 적이 공멸이라도 하려는 것이라면 어쩌려고요!”
“이미 그들은 우리의 요구를 받고 개인의 무장까지 해제해 바다로 던지고 있습니다. 저 정도면 가까이 다가가 적의 진의를 살필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적은 이미 패색이 짙은 상황, 이런 상황에서 어째서 적장이 나를 만나길 요청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에서 필요 이상의 절실함이 묻어나는 것도 사실.
나는 결국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백기가 올라왔다고 전쟁이 끝난 건 아니었다. 적의 기만전술일 수도 있으니, 나는 여전히 포구를 적을 향해 겨눈 채로 함대를 천천히 전진시켰다.
그렇게 조선군의 전열함은 적진으로 향했다.
위험을 무릅쓴 결정이었으나 다행히도 적이 다른 마음을 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전열함이 포문을 열고 접근하는 동안에도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들의 무장을 바다로 던지고 있었다.
“방금까지 전투를 벌였던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갑작스러운 요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선의 정승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내가 조선의 좌의정이오. 내게 무슨 볼일이오?”
사방에서 총이 겨누어진 채로, 적의 배에서 건너온 장수 하나가 내게로 접근했다. 자신을 경계하는 것을 알아챈 것인지, 적장은 오해를 살 행동을 하지 않으려 노력 중인 것 같았다.
“부탁드립니다! 저희 도독님을 한 번만 만나주십시오!”
몸수색을 마치자마자, 굳은 얼굴을 하고 서 있던 장수가 갑자기 내 발밑에 몸을 던져왔다.
도독이라면 정성공을 일컫는 말일 것이다.
고작 그런 말을 하려고 모든 배의 무장까지 바다로 버려가며 이렇게 나왔단 말인가?
지금 상황이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적장이 추진력을 얻어 공격하려고 내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보고 국성야를 만나러 가라고?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가 아닌가. 패장이 승장을 부르는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다. 나를 만나고 싶다면 국성야가 스스로 백기를 달고 우리 대장선으로 오면 되는 일이 아니었나?”
“그것이…… 저희 배에 와 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정승께서는 부디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 콧대 높은 정성공의 부하가 저런 식으로 나온단 말인가?
순간, 머리에 생각 하나가 스쳤다.
저들이 저렇게 저자세를 취해 가며 간청할 이유, 단 한 가지가 남아 있었다.
정성공이 내게 오지 않고, 자신 쪽으로 와달라고 요청할 단 하나의 이유가.
***
“……늦으셨군요. 충분히 성의를 보였다 생각했건만.”
“국성야…….”
내 추측이 맞았다.
정성공은 움직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십시오. 전장에서는 숨 쉬듯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까.”
씁쓸한 웃음을 입가에 띤 정성공이 얼굴을 찌푸렸다. 통증이 올라온 모양이었다.
“잘도 이 주성공의 함대를 기발한 전략을 동원해 박살을 내셨더군요. 대단하십니다.”
“……괜찮으십니까?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할 때가 아닌…….”
“이야기를 하고 말고는 내가 정합니다, 조선국 좌의정.”
이런 상황에서도 기개는 살아 있는가.
주저앉은 자리에 이미 선혈이 낭자했음에도, 오히려 담담히 대화를 이어나가는 것은 정성공 자신이었다. 출혈로 얼굴색까지 변했는데도 어떻게 저리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인지.
“나는 부상자에게까지 자비를 베풀지 않는 냉혈한이 아닙니다. 순순히 항복하시고 치료를 받으십시오, 국성야. 전후 처리는 그 후에 논해도 늦지 않습니다.”
“전후 처리라……. 나도 그러고 싶지만, 이미 늦은 모양입니다. 좌의정도 실은 눈치를 채고 있지 않았습니까?”
정성공이 자신의 다리를 가리켰다.
붕대로 칭칭 감긴 그의 왼쪽 다리엔 발목 아래가 존재하지 않았다. 주력 함대와 갈라져 쾌속선을 타고 후퇴하기로 결정한 것은 저 부상 때문이었나. 아마도 본거지로 빠르게 돌아가기 위해서였겠지.
그것만 해도 쇼크나 과다출혈로 사망할 수 있는 큰 부상이다. 하지만 정성공이 입은 부상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포탄에 박살난 돛대에서 분리된 것으로 추정되는 길쭉한 나무토막이 그의 옆구리를 비집고 나와 있었다. 정성공이 선체에 기대어 주저앉은 채 움직일 수 없었던 이유는 저놈이 원인인 모양이었다.
“이걸 하늘이 도왔다고 해야 하나……. 용케도 즉사는 면했습니다. 물론 죽음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 좌의정과 마지막 대화라도 나눌 수 있게 되었지 않습니까.”
정성공은 담담히 죽음을 입에 올렸다.
쓸모없는 측근들이 항복 건으로 말다툼을 벌이는 사이 날아든 조선 함대의 포격이 그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했다.
그도, 나도 알고 있었다.
몸을 관통한 나무토막이 당장은 더 이상의 출혈을 막고 있었지만, 저것을 뽑는 순간 정성공은 출혈로 목숨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그런 표정 짓지 마십시오, 좌의정. 이것은 전쟁입니다. 내가 이겼다면 좌의정이 지금 내 모습이 되어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나도 당신의 목을 거둬갈 생각으로 이 전장에 나왔기에. 하지만, 이런 끝맺음을 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 그런 냉정한 말을 입에 담는 것 치고는 표정이 물러터지지 않았습니까. 하긴, 당신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도 조선의 이익이 걸리면 매섭게 변하곤 했었지.”
승기를 잡아 다시 물러터진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냐며, 나를 향해 코웃음을 친 정성공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예전 일을 되짚어보는 듯한 행동이었다.
“내가 당신을 너무 얕봤던 것 같습니다. 길지 않았던 시간 동안 저만한 함대를 양성해서 내 목까지 치러 오다니.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걸 위해서 꽤나 많은 일을 해내야 했지요. 국성야의 목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훌륭합니다. 대명과의 교역에서 이익을 거두지 못하니 다른 판로를 찾고, 홍모와 접촉해 뛰어난 함대를 키우고, 머릿수에서 밀려도 위력적인 병기와 전략으로 승리를 거두고, 이제는 적의 수괴까지 함정에 빠뜨려 제거한다…….”
“…….”
“하하. 해상왕의 목입니다. 당연히 그만큼 얻기 어려워야 정상이 아니겠습니까. 축하합니다, 좌의정. 이제 이 바다에서 조선을 막을 수 있는 나라는 없을 겁니다.”
남의 일을 이야기하듯 축하를 건넨 정성공은 다시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분위기가 일순 바뀐 것이, 아마 지금부터 정성공이 할 말이 그가 나를 이곳까지 부른 이유이지 싶었다.
“좌의정.”
“…….”
“내 당신께 내 목을 순순히 내어드리겠습니다. 이것은 당신의 손으로 당당히 얻어낸 전리품, 마땅히 가져가야 옳은 물건입니다. 하지만 내 목을 온전히 얻는 대신, 좌의정이 작은 부탁 하나만 들어주었으면 합니다.”
“당연히 제 몫으로 주어진 물건에 추가금까지 지불해야하다니, 국성야의 목은 상상 이상으로 비싼 물건이었던 모양이군요.”
“하. 당연한 이야기를. 그래, 내 부탁을 들어줄 마음은 드셨습니까?”
“말씀이나 들어봅시다. 유언을 남겨도 모자랄 시간에 제게 할 부탁이란 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잠시 말을 멈춘 정성공이 옆에 있던 수통을 집어 들었다. 출혈이 심해 입이 말랐던 것일까.
하지만 방금까지 멀쩡하게 움직이던 그의 입과는 달리, 그의 몸은 제대로 말을 듣지 못하는 상태인 듯했다. 연신 떨리는 손은 주인의 입에 물을 제대로 부어넣지 못했다.
“……정말로 글러버린 모양이군. 그래도 이제 말하는 데는 지장이 없어졌으니, 마저 부탁을 전하겠습니다, 좌의정.”
“…….”
“내가 없어지면 당분간 바다에서 조선에게 반기를 들 세력은 사라질 것입니다. 오늘 처참한 패배를 겪은 우리 대명의 함대 역시 당분간은 재기할 수 없겠지요.”
“알고 있습니다. 나 역시 당신이 그랬듯 왕좌에 도전해오는 세력을 가만두지 않을 생각이니까.”
“하. 그 말, 정말 마음에 드는군. 하지만 이번만은 오늘의 승리에 만족하고 돌아가 주십시오. 그것이 내 부탁입니다. 좌의정.”
그 말인즉슨, 자신의 남명 함대를 더는 공격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왔다. 포로로 잡힌 시랑 역시 같은 부탁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부하를 좌천한 우두머리와 그에게 배신당했다 여긴 부하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 하하…….”
“무엇이 그리 우습습니까, 좌의정. 이 정도 부탁도 들어줄 수 없을 정도로 내게 쌓인 원한이 많았습니까?”
“아닙니다. 내게 이런 부탁을 한 것은 당신이 처음이 아니었거든요. 그에게는 몇 가지 조건을 더 덧붙이긴 했지만, 당신의 목을 확보하면 그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었습니다.”
“내가 처음이 아니라면……. 아, 시랑이 홍모와의 전투를 마치고 실종되었었지. 아마도 당신에게 포로로 잡힌 모양이군요. 나를 배신할지언정 대명까지 배신할 놈이 아니니까.”
글쎄. 시랑은 정성공 당신에게 배신당했다 생각하고 있던 것 같은데.
방금 실소가 터져 나왔던 이유는 서로 같은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 서로를 배신했다 생각하는 두 사람의 모습 때문이었다.
“알겠습니다. 국성야가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은, 회수와 장강 이북의 적들이 남경을 넘보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겠지요. 맞습니까?”
“당신은 일방적으로 오랑캐 놈들의 편을 들 사람 같지는 않으니까. 좌의정이 염두에 두는 것은 오로지 조선의 이익뿐이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시 첨사는 내게 순망치한의 고사를 들어 설득하려 했는데, 당신도 같은 제안을 할 줄은 몰랐습니다. 진심 여부를 떠나, 그것이 아국의 이익이 될 것 같으니 그 제안을 진지하게 고려해보겠습니다.”
“시랑 그놈도 같은 생각을 했나……. 하.”
허탈하게 쓴웃음을 삼키는 정성공에게서 나는 한 가지 교훈을 얻어가고 있었다.
아무리 같은 뜻을 품고 있을지라도, 의심이 퍼지고 신뢰가 사라지면 그 집단에는 커다란 균열이 생기는 법이다. 조선에서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지게 두어서는 안 될 것이다.
끙. 이윽고 얕은 신음과 함께 표정을 다시 다잡은 정성공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가 남길 말은 이것이 전부가 아닌 듯했다.
“부탁은 그것이 전부입니까, 국성야?”
“아니, 하나가 더 남아 있습니다. 이건 들어주어도, 아니 들어주어도 괜찮은 부탁입니다.”
그의 부탁에 내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서 그런가. 정성공이 방금까지 부여잡고 있던 평정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 느껴졌다.
일단 그의 의지를 멀쩡하게 발음하던 정성공의 혀가 슬슬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면 이미 숨이 끊어지거나 기절해도 모자랐을 상황. 정성공다운 정신력으로 버티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
“……무기 하나만 남겨주고 가십시오, 좌의정.”
이번에는 예상치 못한 부탁이 날아왔다. 갑자기 무기를 달라니?
“무기라니요?”
“포격을 맞고 정신을 차리고 나니 늘 차고 있던 내 검이 사라져 있더군요. 부하들의 무기라도 빌리려고 했으나, 당신이 무장해제를 요청한 탓에 개인 무장 역시 모두 바다에 던져진지 오래였고.”
“아, 설마…….”
“내 끝은 내가 결정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좌의정. 그리고 솔직히…… 많이 견디기 어려운 상태거든, 지금.”
아까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정성공의 호흡도 많이 흐트러져 있었다. 몰아쉬는 그의 숨 사이로 그의 얼굴이 더 새하얗게 변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바닥에 말라붙은 그의 피 위로는 새로운 피가 천천히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정성공 자신 때문에 전쟁에서 상해야 했던 양측 병사들의 고통을 되새기라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만두었다.
정성공 역시 그 정도 사실은 뼈저리게 알고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전쟁이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제가 도와드리는 건 어떻겠습니까?”
“마음은 고마우나, 나 스스로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내 생각엔, 당신은 남의 생명을 빼앗는 것을 즐기는 그런 부류는 아닌 것 같기에.”
정성공은 끝까지 정성공다웠다.
그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방법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나는 허리에 차고 있었던 권총을 뽑아들어 그에게 건넸다.
“총통을? 단도면 충분했는데, 이걸로 당신을 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주는 것입니까?”
그 와중에도 뜻밖의 선물이었는지, 정성공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럴 만했다.
“국성야가 그럴 사람이었으면 건네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당신의 고통을 최대한 줄여주길 바랄 뿐입니다.”
“하, 당신은 정말로 적으로 두기 아까운 사내였습니다. 이런 풍류를 아는 사람을 벗으로 삼았어야 했는데.”
“그럴 수는 없었을 겁니다. 나는 조선의 충신, 국성야는 명국의 충신이니까. 그리고 당신은 스스로의 것을 남과 나눌 사람은 아니지 않습니까.”
“당신은 나를 너무 잘 알고 있군요. 무서운 사람 같으니라고. 하긴, 닮은 사람끼리는 통하는 법이라 했던가…….”
죽어가는 이의 입가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내가 남경에 방문했을 때, 나를 같은 부류의 사람이라 칭했던 정성공의 발언은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석도 같은 극끼리는 반발하는 법인데, 더욱이 그 상대는 바다의 왕좌를 두고 경쟁하는 사람이었으니까.
“마지막 감사의 표현이라 생각하겠습니다, 국성야. 그럼 이만.”
“이제 작별할 시간이군요, 좌의정.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어 고마웠습니다.”
반대쪽 손을 천천히 들어 감사를 표한 정성공을 두고, 나는 몸을 돌렸다.
이미 주위를 모두 물려 이 배에는 나와 정성공만이 남아 있는 상황, 이제 그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탕.
등 뒤에 펼쳐졌던 정적이 총성 한 발에 흩어졌다. 동아시아의 바다에서 정성공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것을 알리는 총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