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전후 처리
조선 함대를 막아 세우던 가장 거대한 벽이 무너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사실상 전쟁은 막을 내렸다.
“보고! 적선의 돛대마다 백기가 올랐습니다!”
“적진으로 보낸 포로들이 일을 잘 해준 모양이군. 한 시름 놓았소.”
“그들의 말에 따르면 적은 이미 우리 함대의 위력에 잔뜩 겁을 먹은 상태라 했습니다. 항복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겁니다, 대감.”
대만해협에 더 이상 포성이 울리는 일은 없었다. 정성공의 시신을 수습해 나포한 함선과 함께 본대로 합류한 직후, 우두머리를 잃은 적은 곧바로 항복 의사를 밝혀왔다.
포로로 잡은 정성공의 부하들이 적진으로 향해 설득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손에 정성공이 투항을 명하며 사망 직전 작성한 친필 명령서가 들려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아쉽습니다, 부총리 님. 적 전원의 ‘벼와 쌀을 분리할’ 수 있었는데요.”
조선어와 네덜란드어를 이상하게 섞어 쓴 빌트의 말에 선실에 있던 모두가 빵 터졌다. 하긴, 적군 입장에서는 온갖 포탄으로 말 그대로 타작을 당했으니 아주 틀린 말도 아닌가.
그와 신무가 탑승한 전열함은 도주하는 적을 추격하는 과정에서도 뜨거운 맛을 보여주며 큰 공을 세웠다. 팽호 열도까지 숨어들어갔던 적이 쉽게 항복한 이유 중 하나였다.
“자비를 베풀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문서는 남경에 계신 사 태사님께 반드시 전하겠습니다,”
“그분과 오 도독님이라면 지금 이 사태를 남경의 조정에서 잘 수습해 주시겠지. 국성야의 시신 또한 가족에게로 고이 돌아가야 할 것이오.”
“알겠습니다. 다시 한번 제 제안을 들어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조선국 정승께서 의도가 본국에 제대로 전달될 수 있도록, 저 또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 역시 더 이상의 희생은 바라지 않소. 허나 일방적으로 싸움이 걸린 것치고는 내가 명국에 요구하는 것이 많지 않다고 생각하오. 그것을 시 첨사가 명국 조정에 제대로 전해주었으면 좋겠소.”
항복한 남명의 함대가 팽호 제도에 억류되던 동안, 정성공의 오른팔이자 조선군의 포로였던 시랑은 사절이 되어 남경으로 향했다. 까다로운 임무겠지만, 남명 함대를 존치하려면 그가 대신 치러야 할 대가는 정성공의 목숨만으로 끝날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정성공의 시신 또한 부하의 인도를 받아 본국으로 돌아갔다. 바타비아에서 들어온 물자까지 동원해 최대한 정중히 장례를 치른 이후였다. 이미 이 전쟁을 마무리하기로 결정한 상황에서 그를 모욕할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내가 자신들의 우두머리를 그렇게 대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일까.
포로로 잡힌 정성공의 부하들도 조선군의 통제에 반항 없이 순순히 따랐다. 덕분에 전후 처리는 나와 정성공의 의도대로 물 흐르듯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
“나는 이 전쟁을 끝내러 왔습니다, 사 태사.”
장강 하구, 현대였으면 거대도시 상하이가 들어서 있었을 자리.
그곳에서 나는 황제의 칙사로 나를 맞으러온 사가법을 마주했다. 문관 서열 1위인 태사쯤 되는 사람이 직접 칙사로 나왔다는 것에서 남명 조정이 이 사태를 어찌 생각하는지 짐작이 갔다.
“전쟁을 끝내러……. 참으로 다행인 말씀입니다만, 등 뒤에 저렇게 거대한 전선을 띄우신 분이 하실 말씀으로는 어울리지 않기도 하군요.”
“그야 전쟁을 끝내는 것과 별개로, 이번 사태는 저희가 반드시 합당한 보상을 받아야 할 일이니까요. 그것은 태사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 긍정적인 대답을 보고 반색하던 사가법의 입이 다시 딱 다물어졌다.
과거 명에게 굴종하던 조선 사신들처럼 내가 물렁하게 넘어갈 것이라 생각했나?
그렇다면 크나큰 오산인데.
그렇기 때문에 굳이 이 먼 곳까지 전열함을 끌고 온 것이었다. 나는 절대 이번 사태를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동안 남명에게 당해온 것이 있기도 했고.
“그 말씀은…….”
“제가 이 자리에 온 것은 무익한 희생을 더 이상 내지 않기 위함이지만, 그렇다고 아국의 군사들이 무고한 목숨을 잃은 일을 어찌 잊겠습니까? 아니 그렇습니까?”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허나 그 일은 주성공 그 자가…….”
“어쨌건 국성야는 명국 수군의 도독이었습니다. 그가 군사를 움직인 것은 황제 폐하의 승인 아래 이루어진 행동이었지요. 이제 와서 그 모든 것을 국성야 혼자만의 잘못으로 몰아가실 생각이십니까?”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숭정제의 초대를 받고 처음 남경에 왔을 때, 사가법 이 작자 역시 교역 재개를 방해하기 위해 개수작을 부렸던 것을.
물론 그 또한 정성공처럼 남명의 충신이니 국익을 위해 그랬던 것이겠지만, 내가 그걸 지금 이 자리에서 고려해 줄 이유는 하나도 없었다. 그저 같은 전장에서 등을 맞대고 싸웠다는 이유로 내 편을 들어준 오삼계 같은 사람도 있지 않았던가.
“그럼 사절 편으로 보낸 문서에 적혀 있던 내용을 그대로 요구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것은 우리 입장에서도 조금…….”
“뭐, 불편한 것이라도 있으시다는 겁니까?”
“그것이…… 갑자기 교역에 부과하는 세금을 줄이면 국고에 타격이 오는 것도 그러하고…… 제 체면 또한 생각을 조금 해주셨으면…….”
차라리 협상 상대로 죽은 정성공이 나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왜 드는 것일까.
아마 그였다면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고 요구사항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물론 곧바로 뒤로는 다시 날카롭게 발톱을 갈기 시작했겠지만.
“게다가 조선은 그동안 대명에게 재조지은의 은혜를 비롯해 수많은 신세를 진 나라가 아닙니까. 과거를 생각해주십시오, 조선국 좌의정. 조선이란 나라가 대명 없이 아직까지 존재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기세를 잡았다고 생각한 것인지, 사가법은 이때를 틈타 나를 몰아쳤다.
결국 이 사람도 과거에 묶여있는 것은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그럼, 우리나라가 온 국토를 유린당할 때 방관만 한 나라는 다른 나라입니까, 사 태사? 당신들이 오랑캐라 부르는 이들에게 임금이 땅에 머리를 박고, 백성들은 짓밟히고! 그런 치욕을 겪고 있을 때 중화의 종주국이라 자칭하던 대명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
“그…… 그것은…….”
“과거를 생각해 달라 하셨지요. 당연히 명국에게 입은 은혜를 벌써 잊었겠습니까? 허나 불타는 북경성에서 목을 매달기 직전까지 몰렸던 선제 폐하를 구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
“그런 청국과 국경을 맞댔음에도 당신들에게 푸대접을 받아가며 한쪽 편을 들지 않았던 나라는 어디였습니까? 선제 폐하의 명을 받아 일본국의 일개 주에 유린당한 유구국을 구원하려 나선 나라는?”
그놈의 재조지은.
고려천자 만력제가 퍼부어준 은혜는 감사하나, 그걸 언제까지 우려먹을 생각인가. 가뜩이나 조선 조정에서 저 논리를 반복하는 앵무새들을 상대하는 것도 질렸던 판에.
“재미있군요. 일개 도독첨사도 알고 있던 사실을 태사쯤 되시는 분이 놓치고 계신다는 것이. 아니지. 알고 계시면서도 협상에서 우위를 가져가려 일부러 모르는 척을 하셨다는 것이 맞겠군요.”
“좌의정. 내 말 좀 들어보시오. 그게 아니라…….”
“아니면 시랑 그 사람이 약속을 어겼을 리는 없을 테고. 그가 제가 보낸 문서를 전하며 양국 함대 사이에 어떤 싸움이 벌어졌는지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 싸움에서 양국이 손실한 전선은 몇 척이며, 죽은 병사는 몇 명인지도요?”
“…….”
“잊지 마십시오. 나는 지금 일방적으로 선포당한 전쟁의 승장 자격으로 여기에 와 있습니다. 지금 팽호 제도에 사로잡혀있는 명국 수군을 모조리 제거하면, 어느 나라가 그 일을 가장 기뻐하겠습니까?”
어쨌건 조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대륙의 균형은 계속해서 유지되어야 했다. 게다가 해전에서 승리해 바다의 패권을 쥐었다고는 하나, 명의 세력권에 있는 강남의 경제력은 한 입에 삼키기에는 너무 큰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시랑을 통해 남경으로 비교적 관대한 제안을 보냈던 것이다. 정성공에게 이번 전쟁에 관한 모든 책임을 물린다는 조건 아래에서 말이다. 그래도 어찌 보면 커다란 정적을 제거해 준 격이라 사가법이 조금은 호의적으로 나올 줄 알았는데, 오산이었나.
하긴, 사가법쯤 되는 이라도 아직도 대륙을 지배하던 시절의 영광에 취해 있을 법했다. 이제 환갑이 넘은 노인이 갑작스럽게 바뀐 현실을 깨닫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테니까.
“잘 들으십시오, 사 태사. 내가 사절을 통해 이번 일을 적당히 수습해 달라 부탁했던 이유는, 그저 명국이 수군의 우두머리를 잃은 후유증을 잘 수습하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나는 정정당당히 전쟁에서 싸워 이겼을 뿐이지, 딱히 명국에 죄를 지은 것이 아니니까요.”
“…….”
“내가 제시한 요구사항도 꽤나 관대했다고 생각했는데, 명국 입장에서는 그것도 아니었나 봅니다? 이렇게 나오신다면, 포로로 잡혀있는 명국 수군을 전부 수장시키고 그 값을 청국에 청구하는 방법도 고려해 봐야겠군요.”
“아니 됩니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우리의 방어 전선이……!”
사가법은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내게 더 이상 허세를 부려봤자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사실 갑이 어디고 을이 어디인지는 진작에 알고 있었을 사람이다.
아니면 대승을 거둔 대가로 고작 이 정도를 요구한 것이 나를 만만하게 보이게 한 것일지도 몰랐다. 어떻게 보면 일방적으로 선전포고를 당한 상태에서 버릇을 고쳐준 격인데, 너무 싼 값을 불렀을지도.
“아니 된다는 걸 아시는 분께서 이런 강경한 태도를 고집하시면 쓰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분명 첫 번째 요구 사항으로 명시하지 않았습니까. 조선과 명국은 앞으로 상국과 번국의 관계를 벗어나 외교를 논의했으면 한다고.”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쌓아온 양국의 관계를 그리 쉽게…….”
“지난 세월 동안 쌓아온 관계를 고려해서 이렇게 관대한 조건을 전달한 것입니다. 그것 외에도 그동안 일방적으로 불리하게 체결되었던 조약들을 공평하게 돌리자는 것이 우리 조선 측 요구가 아니었는지요?”
“…….”
“아니면 선제께서 내려주신 무제한 무역의 효력을 영구적으로 유지시키는 것을 문서로 남기자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것일까요? 정말로 그렇습니까?”
사가법은 반론을 꺼내지 못했다.
전쟁배상금 역시 입은 피해를 근거로 아주 양심적으로 책정한 것이었기에 트집을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장강 하구에서 몇 번이나 교섭이 열린 끝에, 조선과 명 사이에 벌어졌던 해전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조선의 승리로 인해 유리하게 체결된 조약서 한 장과 함께였다.
전쟁의 모든 책임은 정성공에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남명에서 정씨 일족은 쥐고 있던 대부분의 권력을 상실했다. 하지만 자신의 목숨으로 모든 책임을 다한 한 사람 덕분에, 남명은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대륙의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을 수 있었다.
***
“폐하께서 교섭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포로로 잡혀있던 수군을 해방해 준 건에 대해 치하를 전하라 하시더군. 덕분에 내가 오랑캐 놈들과의 싸움을 이겨내고 칙사로 오게 된 것이고.”
“오 도독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건강해 보이시니 다행이군요.”
“우리 사 태사는 다 좋은데 너무 깐깐해서 문제란 말이야. 눈엣가시 같았던 정씨 놈이 저지른 사고를 조선 측에서 이렇게 덮어주겠다는데 무엇이 그리 불만이라고.”
“자국의 이익을 고려하시다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지요. 게다가 태사께서는 지금까지 내정에 힘쓰시던 분, 외교에는 익숙지 않으셔도 이상한 일은 아니니까요.”
“하하. 우리 장군, 아니지 정승께서는 참으로 마음에 드는 분이란 말이지. 내 당신이 천인장(千人長) 자리에 있을 때부터 이렇게 크게 될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소. 얼른 교섭일랑 끝마치고 우리 술이나 한 잔 합시다.”
“그러실 줄 알고 제가 또 조선에서 독주를 구해오지 않았겠습니까. 송령주라는 독주인데, 저기 하란타의 땅에서도 조선의 특산품으로 잘 팔리는 물건입니다.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오삼계 도독님.”
***
전투만큼 협상도 길게 진행된 탓에, 나는 몇 달이 지나서야 조선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었다. 미리 보고를 받은 임금은 늘 그랬듯이 입궐보다는 귀가를 먼저 하라는 어명을 내렸고, 벽란항에 내린 나는 덕분에 곧바로 집으로 향하게 되었다.
“아버지! 어서 오세요! 고생 많으셨어요!”
대문을 열고 들어선 나를 가장 먼저 맞은 것은 딸아이였다. 어느새 훌쩍 자라 열 살이 넘은 우희에게서는 엄마인 하연의 흔적이 짙게 묻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아내가 딸아이에게 남긴 것은 닮은 외모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쪼르르 달려와 가슴팍에 뛰어든 딸아이를 안아들고 사랑채로 향하는데, 우희가 내게 속삭인 귓속말이 내 등골을 서늘케 했다.
“네 어머니는 어디 가셨느냐. 오늘도 중전마마를 도우러 입궐하셨더냐?”
“맞아요. 아버지. 헌데 어머니께서 아버지가 귀가하시면 전해 달라 부탁하신 전언이 있었어요.”
“전언이라? 무엇이냐?”
“그게……. 아버지가 두 분 사이에 맺으셨던 큰 약속을 어기셨다고 하시더라구요? 퇴궐하실 때까지 안채에서 기다리며 반성을 하고 계시라 하시던데요?”
아. 잊고 있었다.
전쟁터에는 나가지 않겠다 그리 다짐하고 대만으로 떠난 것이었는데.
아내의 원망 어린 눈초리가 눈에 잡히는 듯했다. 속이 상해있을 아내를 밤새 달랠 생각을 하니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