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사후 강평과 새로운 적
“안색이 좋지 않구나. 전장에서 몸이라도 상한 것이 아니냐. 그러기에 네가 직접 나갈 필요는 없다 하였거늘.”
다음날, 편전에서 나를 맞아들인 임금은 묘한 미소를 입에서 지우지 않고 있었다. 마치 간밤에 있었던 일을 전부 알고 있기라도 하다는 태도였다.
내가 전장에 나갔다는 정보를 하연에게 흘린 것은 이 양반이었나.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이런 일로 임금에게 반기를 들 수는 없었다. 애초에 최전선에 나가지 않겠다던 약속은 임금과도 한 것이었으니까. 어떻게 보면 임금을 속여 기군망상죄를 저지른 격이다.
“송구합니다, 형님. 하지만 제가 아니면 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무사히 돌아왔으니 더 이상의 책임은 묻지 않겠다. 그만 서 있지 말고 앉거라, 한수야.”
불만 섞인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나는 임금의 명에 따랐다. 임금은 여전히 아무 것도 모른다는 듯 시치미를 떼고 들었다.
‘내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은 당신 때문일 텐데?’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사라졌다.
내가 꼼짝도 못할 대상에게 정보를 흘린 것이 괘씸하긴 했으나, 이 정도 처벌은 달게 받아야 했으니까. 밤새 하연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던 일은 분명 내 잘못 때문이었다.
“잘못한 것은 알고 있는 것 같으니 다행이구나. 다음부터는 절대 어명을 잊지 말도록 해라. 네가 없어지면 이 조선이라는 나라가 흔들릴 지경에 이르렀으니.”
“형님 말씀이 백번 옳습니다만, 이번에 제가 나서지 않았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안다. 그러니 이 정도로 끝내는 것이다. 뭐, 너쯤 되는 신하에게는 기군망상죄를 적용하는 것보다 안사람으로 하여금 벌하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니 이러는 것이기도 하다만.”
서안 옆에 쌓인 서류를 뒤적거리던 임금이 얄미운 표정을 짓고는 덧붙였다. 무언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입을 우물거리는 동안, 임금의 손에는 어느새 내가 대만에서 보낸 보고서 한 장이 들려 있었다.
명과 새로 맺은 조약의 내용이 적힌 보고서였다.
“그래. 놈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준 것은 보여준 것이고, 그에 대한 보상은 이쯤에서 만족해야 할 모양이구나. 이 이상 받아내 봤자 소화시킬 수도 없겠지.”
“옳으신 말씀입니다. 태사쯤 되는 이를 협상 자리에 보낸 것을 보면, 명국도 순순히 조약서에 도장을 찍어줄 생각은 없었던 것 같으니까요.”
“그래도 너는 결국 칙사를 갈아치우기까지 하면서 우리의 요구를 관철하지 않았더냐. 잘 했다. 네가 아니었으면 할 수 없는 일이 맞다.”
“과찬이십니다, 형님.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조성되었으니 가능했던 일입니다. 청이 마침 때맞춰 남방으로 공격을 해온 덕분에 명이 궁지에 몰리게 되었으니까요.”
사가법을 상대로 지지부진하던 협상이 순식간에 풀려나간 이유가 그것이었다. 어차피 시간을 끌었어도 무력으로 바다를 압도 중인 조선의 뜻대로 결말이 지어지는 건 같았겠지만, 그랬다면 나는 지금도 저 남방에서 조선 땅을 그리워하고 있었겠지.
“그래서 요청을 받아 억류하던 명국의 수군을 풀어주어 은혜를 베풀었고, 명국은 그에 응답해 형식상 대국의 아량을 보여주며 협상을 진전시켰다는 것이군. 칙사가 교체된 것도 그 무렵이고.”
“예. 아무리 멀지 않은 곳에 주둔하고 있었다고는 하나, 최전방의 사령관이 잠시 자리를 비우도록 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수군을 풀어주어 그들의 체면을 세워준 것도 협상에 크게 작용했다 생각합니다.”
“이 전쟁에 원인 제공을 한 패전국이 아직도 체면을 따지는 것이 괘씸하긴 하나……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앞으로 그들의 인식을 차차 바꿔나가는 수밖에.”
임금의 말이 옳았다. 이제 조선이 동아시아 바다의 패권을 쥐었다고는 하나, 그 힘은 바다에 한정된 것.
아직 조선은 남명과 전면전을 벌일 이유도, 역량도 없었다.
물론 바다를 틀어막으면 남명에게도 작지 않은 타격이 가해지겠지만 조선이 얻는 이득 또한 없다. 오히려 그들을 가둬놓고 마르게 했다가 남명과 청 사이 균형이 무너지는 일이 조선에게는 더 큰 손해였다.
그것을 알고 있으니 사가법도 강경한 태도를 고집했을 것이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마음 같아서는 사가법에게 ‘그럼, 명국이 꼬투리를 잡아 조선 수군을 먼저 치려던 것은 말이 되고?’라고 일갈을 날리고 싶었다.
“사실 어떻게 보면 청국 덕분에 손을 대지 않고 코를 푼 격이긴 합니다. 청 입장에서도 우리 덕분에 벼르고 벼르던 산동을 넘는데 성공했으니 고마워하겠지만요.”
“잔류하던 명 수군을 돌파하고 해안가를 중심으로 남진했다고 했었나. 회수와 황하로 이루어져 있던 자연 장벽이 뚫렸으니 명국 입장에서도 급할 수밖에 없었겠구나.”
“예. 지금은 다시 교착 상태에 빠졌다고는 하나, 남경의 코앞인 양주가 위협받는 상황이었으니까요. 덕분에 억류하고 있던 명국 수군을 비싸게 팔아넘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청의 침공이 사가법의 강경한 태도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지금은 현대와 달리 황하가 산동 반도의 남쪽, 회수 인근을 흐르던 시기, 청군이 그곳을 넘었다는 것은 남경으로 통하는 장강 하구가 위협받는다는 뜻이었으니까.
이런 걸 보면 정치와 외교란 참으로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일이다.
결국 나는 긴급한 상황임을 고려해 억류한 수군을 일부 석방하며 한 수를 물러주었다. 그렇게 급한 불을 끈 남명은 최전방에 나가있던 오삼계를 칙사로 내보내면서까지 성의에 응답했다.
결국 그 이후로 협상은 급진전, 마무리까지 이를 수 있었다.
“결국 얻어낼 것은 얻어냈다고 보아야 하는가……. 교역에 붙던 무거운 세금을 합리적인 선으로 조정한다. 명국 전역의 항구를 조선에 항시 개방한다. 선대 황제가 보장한 혜택은 조약을 파기할 때까지 유지한다. 이번 전쟁으로 조선이 입은 피해를 명국이 배상한다…….”
“그리고 이 문서는 조선이 명국과 대등하게 맺은 최초의 조약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아마 이번 전쟁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 아닐지.”
“태조대왕께서 조선을 개국하셨던 시절부터 우리는 명국에 고개를 숙여왔었다. 그 수백 년의 굴종에 이제야 종지부가 찍혔구나…….”
임금의 얼굴에는 자부심과 만족감이 가득 드러나 있었다. 갈라진 대륙의 정세를 이용했다고는 하나 그동안 어느 왕도 달성하지 못했던 업적이다. 임금이 이런 반응을 보일만도 했다.
“하지만 아직 만족하기엔 이르다. 굴종의 역사를 끝내야 할 곳은 아직 한 군데가 더 남아있으니까.”
“옳으신 말씀입니다. 허나 형님. 제가 말씀드렸던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생각지도 못했던 거대한 적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셔서는 안 됩니다.”
“아……. 내가 완전히 잊고 있었구나. 네가 누설한 천기 중 가장 중요한 것일진대.”
나 역시 마음 같아서는 이번처럼 병자년의 굴욕 역시 갚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강대한 청나라를 상대하기 이전에, 그보다 더 극복하기 어려울 대적(大敵)이 이미 꼬랑지를 내보이고 있었다.
“제가 스승의 인도를 받고 출사를 결심한 것은 그 대참사를 조금이라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형님과 함께 온갖 고난을 겪었고, 결국 여기까지 왔군요.”
“덕분에 좋은 아우와 최고의 신하를 얻었으니 내게는 행운이었을까. 허나 난 아직도 십 년 후 닥쳐온다는 재앙이 잘 믿기지가 않는구나.”
“그러실 만도 합니다. 저도 마음 같아서는 대륙의 두 나라를 상대로 더한 일이라도 저지르고 싶으나…… 그랬다가는 십 년 후 재앙이 닥쳐와 무방비 상태가 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두렵습니다.”
방금까지 자부심에 가득 차 있던 임금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둡게 변했다. 지존의 자리란 참으로 쉽지 않은 자리였다.
내가 임금에게 누설한 천기, 십 년 후 닥쳐올 재앙, 다가오는 거대한 적, 그리고 대참사. 그것들은 모두 같은 대상을 가리키는 것이다.
경신대기근.
1670년 경술년과 이듬해 신해년까지 2년에 걸쳐 일어난 전례 없는 대재앙.
“하필 국력이 한참 뻗어나갈 시기에……. 네 말이 틀리길 누구보다 절실히 바라고 있지만 그렇지 않을 거라는 게 문제로구나.”
“작년 봄에 동해가 얼어붙었다는 보고가 올라왔었지요. 오 년 전에도 동일한 현상이 벌어졌고, 비슷한 시기에 강원도에서 여름에 서리가 끼었다는 장계를 본 기억이 납니다.”
“나 또한 기억하고 있다. 우리가 심양에 있던 시절 바다 건너 열도에서도 수년에 걸친 대기근이 벌어졌었다지. 자연의 이치는 어떻게 해도 바꿀 수 없는 모양이로구나. 하지만 하필이면 이때…….”
경신대기근의 징후는 이미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17세기, 전 지구를 강타한 소빙하기가 할퀴고 간 곳은 조선뿐만이 아니었으니까. 기상 이변이 그나마 나라마다 돌아가며 나타나고 있었다는 것이 다행일까.
“어쩔 수 없습니다, 형님. 그것 또한 어떻게든 극복해야하는 것이 위정자의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임금 하나만 바라보고 있는 이 땅의 백성들을 떠올리십시오.”
“네 말이 옳다. 백성보다 귀한 것은 이 땅에 없는 법이니까. 내 잠시 무엇이 더 우선인지를 잊고 있었구나. 게다가 그만한 재앙을 모르고 당하는 것도 아니고, 네 덕분에 시간을 벌 수 있었으니.”
다행히 임금은 금세 평정을 되찾았다. 내가 주군으로 모시는 사람다웠다.
“그렇다면 앞으로 남은 십 년, 모든 국력을 쏟아 부어 닥쳐올 재앙을 이겨낼 방법을 강구한다. 답은 그것뿐이로구나.”
“경술년이 닥쳐오면 그때부터 두 해 동안 조선 땅에서 농사로 생산되는 식량은 급격히 감소할 것입니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모든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환곡을 비롯한 식량 비축분을 늘리는 것부터 시작해야겠구나. 재앙이 비껴갈 대만 섬에 더 많은 백성을 이주시키는 것도 고려해야겠고.”
“곡식뿐만 아니라 다른 보존식도 최대한 마련해야 합니다. 주변국들에게 식량을 수입하게 될 가능성이 높은 데다, 조선에 위기가 닥친 틈을 타 다른 마음을 품는 자들이 있을 수 있으니 외교에도 온 힘을 다해야 합니다.”
“그 와중에도 국방에 쏟는 힘을 줄일 수는 없겠구나. 하긴, 우리는 세 차례의 전란으로 교훈을 충분히 얻을 만큼 얻었지. 평화는 무장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 임금에게서 깊은 한숨이 몰려나왔다. 예고된 재앙이었음에도, 몇 년에 걸쳐 일어날 기근을 방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제 과제 하나를 넘었다 생각했더니 또다시 넘어야 할 것이 산더미처럼 몰려왔구나. 아버님께서 참으로 무거운 익선관을 물려주셨어.”
“그 무게를 버틸 수 있는 사람도 형님뿐이십니다. 언제든 그 무게, 함께 들어드릴 테니 약한 소리 하지 마십시오.”
“그래. 네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겠지. 고맙다, 한수야.”
약한 소리를 늘어놓고 있었음에도 임금의 눈빛은 형형히 살아있었다. 이제 저 눈빛을 하고 경신대기근을 막겠다며 나를 갈아대겠지만, 나도 그 정도 각오는 서 있었다.
뭐, 생각해보면 이렇게 갈린 것이 하루 이틀인가.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이 한 몸 아낌없이 바칠 수 있다. 임금 역시 그럴 것이고.
그 순간, 버틴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임금에게 복수할 사소한 거리가 떠올랐다. 사대부가의 아녀자에게 중대한 군사비밀을 유출했으니, 아무리 임금이라 할지라도 이 정도 벌은 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렇다면 저는 오늘부터 첫 번째 일에 착수해야겠습니다. 대재앙을 막기 위한 일이니 형님께서도 흔쾌히 도와주시리라 믿습니다.”
“첫 번째 일? 벌써부터 이리 시급하게 추진해야 할 건이 있더냐?”
“물론입니다. 아주 시급한 일입니다.”
밤새 마누라에게 바가지 긁히는 고통, 형님도 처절하게 한 번 당해보십시오.
“조선이 일치단결해 닥쳐올 재난을 극복하려면 무엇보다 전하께서 건강하셔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저하가 국정을 돕기 시작하셨다고는 하나, 아직 미숙하신 것도 사실이고요.”
“왜 갑자기 나를 격식을 갖춰 부르느냐? 그리고 그것은 당연한 일…….”
“헌데 소신이 최근 알아본 바로는, 전하의 건강이 염려될 일이 궐 곳곳에서 방치되고 있다고 들었사옵니다. 특히 신체 단련과 식생활에 대해…….”
잠시 후, 편전 안에서는 고성이 터져 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이 정도쯤이야. 나는 임금과 부대낀 지 어느새 이십 년이 넘은 조선 최고의 권신이다.
그러다 보니 왕의 의지를 꺾고 내 의사를 어떻게든 관철시킬 수 있는 치트키 한둘쯤을 아는 것도 당연했다. 치사하게 기습을 가해 온 건 저쪽이 먼저였으니, 단호한 응징을 가해 보기로 할까.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중궁전에서 포고령 하나가 내려졌다.
그것을 받아든 신하들과 궁인들은 어째서 궐내에서 흑두차에 우유와 설탕을 타는 일이 금지되었는지 어리둥절해 할 뿐이었다.
***
“우와. 이게 얼마만의 고향땅인가!”
그로부터 몇 년 후.
얼마 전 두 번째 확장공사를 마친 벽란항의 어느 부두에서는 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막 배에서 내린 것이 분명한, 양반 차림을 한 사내가 바닥에 납작 엎드려 땅에 얼굴을 비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나치는 여행객과 짐꾼들이 이상한 눈길을 보내는 데도 불구하고 사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제서야 흙을 툭툭 털고 일어난 사내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듯했다.
“아차! 지금 이럴 때가 아니로구나! 마르그리트! 미안하오! 내 혼자 귀향의 즐거움에 푹 빠져있었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