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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64화 (264/298)

264화. 국비유학생의 귀국

벽란항에 네덜란드에서 온 연락선이 입항한지 며칠 후의 일이다. 세자가 머무는 동궁에 반가운 손님이 방문했다.

“저하, 참으로 오랜만에 모습을 뵙사옵니다! 그동안 옥체에는 별고가 없으셨는지요?”

“잘 돌아왔다, 김만중. 내 네가 귀국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원 역사에서 훌륭한 하렘 판타지와 아침 드라마를 동시에 저술한 대작가, 김만중이 네덜란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의 글 솜씨는 역사가 바뀌었는데도 변하지 않았는지, 김만중이 세자에게 바친 귀국 선물의 대다수는 자신이 번역해 네덜란드에서 들여온 책과 그 원본이었다.

“이건 하란타 학문 공부에 꽤나 도움이 되겠군. 세자빈도 많이 도와줄 것이고……. 헌데 김 진사. 이것은 무엇이더냐? 하란타어로 ‘아홉 구름 이야기’라?”

“하란타에서 어울리던 시절처럼 제 이름을 부르셔도……. 아, 중전 마마께 드릴 선물이 섞여 들어간 모양이옵니다. 아직 번역도 시작하지 못한 물건이니 이리 주시옵소서.”

“만중 너부터 그 극존대를 폐하는 것이 어떠냐. 세월이 흘렀다고 안 듣던 극존대를 듣자니 소름이 돋는 것 같구나.”

“알겠습니다, 저하. 실은 저도 조금은 어색했던지라…….”

두 사람은 떨어져 있던 세월 동안 쌓인 어색함을 금방 흩어버렸다.

한편, 만중이 번역해온 이론서 사이에 소설이 한 권 섞여있던 모양이었다. 그것을 보고 이맛살을 찌푸린 세자는 만중의 요청대로 책을 건네기는커녕 내용을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모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현지에서 처를 얻었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이 소설에는 네 여인 취향이 잔뜩 반영되어 있지 않느냐. 어째 나오는 여인들마다 죄다 서양의 여인들뿐이고. 혹시…….”

“저하, 지금 동궁전에는 단 둘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제 비밀은 지켜주셔야지요.”

“아 참. 그랬었지. 하란타에서 한 맹세를 내가 어길 뻔했구나. 어차피 그때 교환했던 내 비밀은 그 사람이 세자빈 자리에 올랐으니 이제 온 천하가 다 알고 있지만 말이다.”

“저하, 그 말씀은 제 비밀을 언제든 공개하겠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만…….”

하하하. 동궁전에 여러 사람의 웃음소리가 가득 찼다.

사실 이 자리에는 만중을 맞으러 두 명의 사내가 더 들어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당황한 만중의 눈빛이 세자에게서 벗어나 그들을 향했다. 한때 세자와 함께 궁을 탈출해가며 사고를 치고 다녔던 악동들이 이 자리의 주인공들이었다.

“너희는 무얼 안다고 웃는 게야? 특히 길산이 네놈은…….”

“어허, 중숙(重淑). 이제 예전의 근본 없는 천출 길산이는 없네. 여기 있는 사람은 촉망받는 무관이자 총통위 금군 종사관 안길산이지. 스물이 훌쩍 넘어 가정도 꾸린 사내의 이름을 마구 부르면 쓰나.”

“하지만 사백(斯百) 형. 우리는 관례를 치르기 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 아닙니까. 이제 와서 예의를 안 차린다고 채근하면 조금 섭섭한데요.”

“그래? 그럼 네 뜻대로 해주지. 만중이 네 비밀을 이 자리에서 모르는 사람이 있을 성 싶으냐? 하긴 그러니 저하께 하란타 여인 취향을 전파시켰겠지만.”

“형님!”

지그시 아픈 곳을 찌르고 들어오는 석주의 공격에, 만중은 세자 앞이라는 것도 잊고 기겁을 했다.

아무래도 만중은 어려서부터 네덜란드 여인이 취향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니 어린 시절의 벗들이 자초지종을 전부 알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만. 그만. 어차피 이 자리에서 이국의 여인 이야기에 자유로울 수 있는 사내는 여기 김석주 수찬(修撰, 홍문관 정6품)밖에 없느니. 이 이야기는 이쯤 하는 것이 옳지 싶구나.”

“사백 형의 부친께서 벗과 사돈을 맺으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저하, 그게 무슨 말씀…….”

“저기 빙그레 웃고 있는 종사관 본인에게 나중에 술 한 잔이라도 건네면서 직접 물어보거라. 오늘은 다른 해야 할 이야기도 많지 않더냐.”

결국 난장판이 된 동궁전의 분위기는 한참동안 웃음을 흘린 세자가 나서고서야 정리되었다. 네덜란드 현지에서 책을 팔려면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다는 김만중의 비루한 변명과 함께였다.

“그래, 사소한 신변잡기 이야기는 이쯤이면 되었다. 만중, 대략 십오 년 만의 귀국이다. 조선에서 태어나 살았던 시간만큼이나 하란타에서 머문 시간이 많았는데, 그동안 어떤 것을 배워왔느냐.”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워왔습니다, 저하. 레이던의 태학에서 배울 수 있는 지식들은 마치 우리가 하란타까지 도달하기 위해 헤쳐나가야 했던 바다처럼 넓었지요.”

“이상하군. 마치 네가 귀국을 아쉬워했던 것처럼 들리지 않느냐.”

“물론 제 나라, 제가 태어난 땅을 어찌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허나 새로운 학문을 공부하는 즐거움 또한 공자께서 남기신 말씀 그대로였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잊었을 정도였지요.”

방금까지 허탈함을 감추지 못했던 만중의 눈이 열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 열기를 본 세자는 문득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때의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지금 모습은 서점에서 스피노자라는 청년을 마주친 만중이 유학을 결심했던 그날, 만중이 쏘아대던 눈빛 그대로였다.

“하지만 학문은 갈고닦는다고 끝이 나는 것이 아니다. 너도 그것을 알고 있었으니 귀국을 선택한 것이겠지.”

“그 말씀이 맞습니다, 저하. 마음 같아서는 늙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학문에 몰두하고 싶었습니다만……. 결국 제 근본은 유학자고, 수기치인(修己治人)을 실천해야하는 것은 변하지 않으니까요.”

“학문을 닦았으면 그것을 백성을 다스리는 데 써야 옳은 법. 나 또한 그것을 기대하고 너를 하란타에서 불러들인 것이다. 그렇다면 조정에 출사는 언제 할 생각이더냐?”

세자는 만중에게 따로 기대하고 있는 것이 있는 듯했다. 세자의 나이도 어느새 서른을 넘었고, 조정에서 임금의 명을 받아 정무를 돕고 있던 터. 슬슬 차기 임금이 될 자신의 치세를 대비해 지지 세력을 모으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출사라……. 일단 대과부터 급제하고 볼 일이 아니겠습니까? 과거시험이 아무나 통과할 수 있는 시험도 아닐진대…….”

“석주도 장원급제하여 조정에 들어온 지 꽤 시간이 흘렀다. 너라고 못할 것은 없는 법이지.”

“하오나 저하, 그러려면 일단 뒤로 조금 미루어두었던 성리학 공부를 보충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대군 보좌로 파견된 예조정랑 박요운에게 그동안도 계속 배우긴 했으나, 아무리 그래도 대과 초시를 통과하려면 시험공부는 필수겠지요.”

“그래서 일단은 성근학당에서 학관으로 일하겠다고 한 것이냐?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가끔은 대과급제자 수를 성균관보다 많이 내기도 하는 곳이니, 공부에 분명 도움이 되겠지.”

“반계(磻溪) 선생님이 네 제자들보다 늦게 급제하면 사제 간의 인연을 끊겠다고 으름장을 놓으셨다. 알아서 잘 해라, 만중아.”

어느새 두 사람 사이 대화에 끼어든 석주가 이죽거렸다.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었지만, 넷만이 있는 자리었기에 세자도 너그럽게 봐주는 듯했다. 그만큼 넷의 사이가 친밀하기도 했고.

“지금 남도에 나가있는 유형원이 그런 이야기를 했단 말이냐? 허어, 내 스승이신 영의정보다 더 독한 스승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구나.”

“말도 마십시오, 저하. 성근학당의 학풍은 원래 그런 것인데, 가르치는 상대가 저하시니 영상 대감도 한 수 접어드린 것일 겝니다. 선비는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강인해진다는 문구 아래 무슨 짓들이 벌어져 왔는지, 원.”

말을 마친 석주는 진저리를 쳐댔다. 말없이 앉아있던 길산도 동시에 진저리를 치는 것을 보니, 둘 다 공부 건으로 어지간히도 당했던 모양이었다.

만중은 대화에서 나온 영의정이 누구인지 잠깐 와닿지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정체를 알아챌 수 있었다. 세자의 진짜 스승은 지금까지 한 명뿐이었으니까. 헤어질 때는 예조판서였던 그분이 어느새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까지 올라가신 모양이었다.

“어쨌건 만중아, 너도 석주와 길산처럼 나를 든든하게 받치는 버팀목이 되어야 할 사람이다. 그깟 대과 정도는 금방 통과하고 내 곁으로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겠다.”

“알겠습니다, 저하. 소인 김만중, 하란타에서 배워온 것을 조선에 펼치고 저하의 치세를 태평성대로 만들기 위해 온 힘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온 힘을 다한다라……. 너 만한 수재가 온 힘을 다한다면 당연히 그 결과는 장원급제겠지?”

“……예?”

덕담 끝에 떨어진 뜬금없는 요구에, 만중은 외마디 대답과 함께 눈만 껌벅거릴 뿐이었다. 그러나 빙그레 웃음 짓는 세자의 표정을 보니, 그가 방금 들은 말은 잘못되지 않았음이 틀림없었다.

“농담이시죠, 저하? 아무리 그래도 장원급제가 쉬운 일은…….”

“이미 나와 함께 나랏일을 하고 있는 네 벗들 모두가 해낸 일이다. 석주는 오 년 전의 증광시 문과의 장원급제자, 길산은 석주보다 더 이르게 무과에서 장원급제를 했지. 심지어 군관도감을 수료하고 현직 군관으로 복무하던 중에 말이다.”

“……저하, 저는 당분간 중전마마께 협조를 드릴 일도 있고, 성근학당에서 학관 일도…….”

“내게는 주상 전하께서 세우신 중흥의 기틀을 단단히 다지고, 앞날을 위한 새로운 발판을 육성해야 할 의무가 있다. 내 심복이 되어 조선을 사상부터 개혁해 나가려면 성리학 분야에서도 남들에게 뒤쳐져서는 절대 아니 될 터.”

“하오나 저하, 그 말씀은…….”

“너 정도면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김만중. 변명은 용서치 않겠다.”

그제서야 만중은 깨달았다. 세자는 성근학당 창시자의 피해자가 아니라 그의 정수를 일대일로 전수받은 수제자였다는 사실을. 그리고 세자가 자신에게 기대하는 것이 생각보다 거대하다는 사실 역시.

갑자기 만중의 눈앞이 깜깜해져왔다. 아직 급제하지도 않은 처지인데도 이럴진대, 조정에 끌려들어 갔다간 도대체 어떤 상황이 벌어진다는 말인가.

뒤늦게 다른 벗들에게 애처로운 시선을 보내봤지만, 그들 역시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만중의 시선을 회피할 뿐이었다. 석주와 길산 역시 이미 같은 요구를 세자에게 받았던 모양이었다.

***

만중이 정신을 차린 것은 조금 시간이 흐른 후였다. 진지하게 네덜란드로 도주할, 아니 돌아갈 것을 고려했지만 어차피 그곳에도 조선 왕실의 손길은 곳곳에 뻗쳐있는 상황.

만중에게 도망칠 곳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 그럼 우리 서포 선생께서는 장원급제를 위해 당분간 매진해 주시는 것으로 결정이 되었고……. 궁금한 것이 또 하나 있구나. 지금부터는 내 질문에 대답해 주어야겠다.”

네덜란드어로 ‘아홉 구름 이야기’라 적혀있는 책 표지를 가리키며 세자가 미소 지었다. 세자의 손가락이 향한 자리에는 만중이 네덜란드에서 필명으로 사용하던 별호가 적혀있었다.

“하란타의 정세가 최근 들어 심상치 않았더구나. 보고에 따르면 영길리와 또다시 전쟁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고 하던데, 네가 오기 전까지는 어떠했느냐.”

“아,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전하께도 상세히 말씀드린 부분이라, 저하 역시도 관심을 가지실 줄 알았습니다.”

“내가 세자빈의 모국이자 조선 최대의 동맹국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 어쨌건, 말하거라.”

흠흠. 잠겨있던 목을 가다듬은 만중은 천천히 유럽의 정세를 세자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석주와 길산의 귀도 만중의 입을 향해 쫑긋 서 있었다.

“……영길리가 두 번째로 건 전쟁에서도 참패를 면치 못했다니. 그럼 여전히 그 일대의 제해권은 하란타가 꽉 쥐고 있는 모양이로군.”

“예, 그렇습니다. 저하. 저희가 수출한 진천뢰 기술이 영길리와의 해전에서도 엄청나게 유용했던 모양입니다. 게다가 전 통제사 라위터르 역시 솜씨가 녹슬지 않아, 강을 통해 영길리의 수도에 상륙해 대승리를 거뒀다고 들었습니다.”

“이제는 영길리가 하란타의 상대가 되지 않는 모양이군. 우리에게는 좋은 일이다. 그래서, 하란타는 승전의 대가로 무엇을 얻었느냐?”

“그쪽에서 아메리카라 부르는 신대륙의 영토 다수를 빼앗은 모양입니다. 북쪽 대륙의 뉴암스테르담은 방어에 성공했고, 남쪽 대륙에 쉬리나머(수리남)이라 불리는 거대한 땅덩이를 얻었습니다. 전하께서는 ‘gomm’이란 특산물을 원활히 수급할 수 있게 되었다며 기뻐하시더군요.”

“곰? 홈? 그것이 대체 무엇이더냐?”

그 단어는 네덜란드어에 능통한 세자의 귀에도 낯설었다. 하지만 만중 역시 그것에 대해 더이상 자세히 아는 것은 없는 모양이었다.

“전하께서는 지금까지는 실험용으로 조금씩 구할 수밖에 없던 것이 대량으로 들어올 것이라 좋아하셨습니다만……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하란타 측과 공급 건에 대해서는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던 것 같더군요.”

“흐음. 대체 어떤 계획을 세우신 것일까……. 혹시 최근 급변한 청국의 사정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모르겠구나. 요사이 전하께서 화포도감에서 일하고 있는 하란타 사람들을 방문하시는 일이 잦았거든.”

“청국의 사정 말씀이십니까? 그것은 제가 저하께 질문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세자에게서 대답은 흘러나오지 않았다. 이마에 손을 올린 세자가 말수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그를 대신해 만중의 궁금증을 해결해 준 것은 석주였다.

“지금 청국의 정세가 심상치 않다. 아마 전하와 영상 대감이 가장 신경을 곤두세우고 계실 방향은 저 북방일 것이야.”

“심상치 않다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몇 년 전, 청국의 젊은 황제가 급사하고 새로운 황제가 즉위했다. 고작 여덟 살에 불과한 어린 황제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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