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두 유부남
“흐음……. 나는 우리 조선이 명국의 함대를 물리치고 해상 패권을 잡았다기에 앞으로 이 나라에 풍파가 불어닥칠 일은 없을 줄만 알았는데…….”
“처음에는 조정에서도 그런 예측을 한 신료들이 대다수였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주상 전하와 영상 대감의 혜안은 언제나 틀리는 일이 없었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 전하와 네 사부님은 조선에 내려진 축복과도 같은 존재들이시다. 그분들이 없었다면 이 나라가 대체 어찌 되었을지…….”
동궁전에서 물러 나온 후, 만중과 길산은 궁을 나와 거리를 걷고 있었다.
석주는 바로 홍문관으로 끌려들어가 옛 스승인 윤휴 밑에서 갈릴 수밖에 없었지만, 비번이었던 길산은 만중의 일을 도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럼 앞으로는 북방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귀를 기울여야겠구나. 나는 영상 대감께서 청국과 깊은 연줄이 있으시기에 앞으로는 그쪽 걱정을 하지 않게 될 줄만 알았다.”
“그분은 늘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라 간의 일에는 영원한 동맹도, 영원한 적도 없는 법이다. 늘 경계하고 실력을 쌓는 일에 게을러서는 아니 된다…….”
“백 번 옳아 마땅한 말씀이다. 헌데 북방의 이변을 대비해 군사력을 증강하는 것은 그렇다 쳐도, 어째서 환곡을 비롯해 식량의 비축량을 늘리시고 보존식까지 연구하시는 걸까.”
“최근 들어 해괴한 날씨가 나타나는 일이 잦아졌다 들었습니다. 청나라에서 황제가 바뀌었던 그 해에도 남도에 폭설이 내려 사람 키보다 높게 쌓이는 일도 있었지요. 아마 혹시라도 닥쳐올지 모르는 기근이라도 걱정하시는 것이 아닐지.”
“그런 일이……. 하긴, 내가 조선을 떠났을 때에 비하면 나라 사정도 꽤나 윤택해졌으니, 훗날 닥쳐올지도 모르는 재앙에 미리 대비를 할 여유가 생겨도 이상하지 않겠구나. 잘 된 일이다.”
만중의 질문에 길산은 막힘없이 대답했다. 세자와 석주가 나랏일로 금방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던 탓에 미처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는 그렇게 마저 만중에게 전해졌다.
그때 문득 어떤 질문거리가 생각났는지, 만중은 길산의 이름을 부르려다가 머뭇거렸다.
어린 시절에야 허물없이 이름을 부르고 지냈다지만, 지금 길산은 어엿한 종6품의 무관이니까. 하지만 정작 당사자는 이름이 불리는 것이 좋다며, 만중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아닙니다. 저하나 형님들에게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더 편합니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도 들고요.”
“그래……. 정녕 네가 그렇다면야. 하지만 언제든지 불편하면 말하거라. 내 어린 시절에 아무 것도 모르고 너를 하인 취급한 것도 미안하거늘.”
“하핫, 언제 적 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괜찮습니다. 헌데, 하시려던 질문이 무엇입니까?”
방금 동궁전에서 네 명이 함께하던 자리. 만중에게는 한 가지 해소되지 않은 의문이 남아 있었다. 별 것 아니긴 한데, 그 자리에서 오가는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만 있던 길산이 짓던 표정이 조금 묘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잘못 보신 것이 아닙니까? 제가 그랬을 리가요.”
“아니야. 내가 먼 이국땅에서 눈치 하나는 엄청나게 늘어오지 않았겠느냐. 분명 전하께서 언급하셨다는 신대륙의 수입품 이야기를 할 때, 너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작해야 종육품 종사관이 그런 중대한 나랏일에 대해 무엇을 알겠습니까. 저는 그저 금군 소속으로 주어진 임무에나 충실히 임할 뿐인데요.”
“그러하냐? 내가 잘못 보았던 것인가……. 아무튼, 오늘 내 일을 도와준다니 고맙구나. 사실 조선은 하도 오랜만인데다, 그동안 많이 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조금 불안했었거든.”
“아우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 심려치 마십시오.”
길산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대답했지만, 만중의 속내는 달랐다.
아무리 명문가의 일원이라고는 하나 만중의 가족은 젊어 과부가 된 홀어머니와 형 한 명뿐이다. 그나마 지금 이조참의로 궐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을 형과는 혼인 일로 사이가 틀어진 상태라, 귀국해 정착할 과정을 도와줄 사람이 마땅치 않은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길산이 마치 친형제처럼 자신을 돕겠다 나선 것이다. 만중은 지금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조용히 옆을 걷고 있는 길산이 내심 고마웠다.
***
“아니, 북촌 기와집 가격이 그리 올랐단 말이냐?”
“언제 적 이야기를 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요새는 그 가격이라면 저어기 남산골까지는 가보셔야 할 겁니다.”
만중과 길산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피맛골에 위치한 가쾌(家儈)의 집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부동산을 거래하는 복덕방쯤 되는 곳이다.
“허어……. 이거 낭패로군.”
“무슨 일이십니까, 형님?”
“아, 그것이……. 어떻게 기와집 한 채 가격이 이토록 비싸진 것이냐? 북촌뿐만이 아니라 청계천 건너 남촌도 이리 집값이 비싸졌을 줄이야.”
“도대체 얼마를 준비하셨기에……. 아, 그 가격이면 어려울 만도 하지요. 도성 내부의 토지는 한계가 있는데, 관료는 늘고 도성 안에 살길 희망하는 사람도 계속해서 늘고 있으니까요.”
만중의 은자 자루를 슬쩍 살펴본 길산이 냉정하게 평가를 내렸다. 길산의 말로는 그 은자의 네 배는 있어야 북촌의 기와집을 구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그마저도 매물이 없어 부르는 것이 값이라고.
“아니, 도대체 조정의 신료들은 이런 상황에서 뒷짐만 지고 있었다는 이야긴가? 해도 해도 너무한 가격이 아니냐?”
“전하께서도 궐내각사 일부를 경복궁 옛 터 근처로 옮기시면서까지 각별히 신경을 쓰시는 부분입니다만……. 북촌처럼 노른자위 땅은 백약이 무효인 모양입니다. 투기에 손을 댄 신료는 삭탈관직까지 해가시며 강경책을 펴신 결과가 겨우 이것이지요.”
“허어, 삭탈관직까지? 북촌에 비하면 도성 내 다른 구역은 상승세가 덜한 것을 보니 효과가 있긴 했나보군.”
“전하께서 그리 격노하신 것은 오랜만이라 들었습니다. 원래는 서소문 일대의 땅값이 폭등한 것이 먼저였거든요. 땅으로 백성의 고혈을 빠는 자들은 용서할 수 없다며 말 그대로 칼자루를 뽑으신 덕분에 도성의 땅값은 진정됐으나 북촌만은 예외였지요.”
길산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입에서 흘러나오는 설명에는 서늘함이 가득 흐르고 있었다. 대신 중 몇은 이 일로 귀양까지 갔다나.
애초부터 북촌은 나라꼴이 엉망일 때도 아무나 집을 구할 수 없던 동네였다. 조선의 국력이 강성해지고, 관료의 수도 대폭 늘어난 지금은 값이 그만큼 뛴 것이 당연했다.
“허어, 이거 큰일인데. 이런 상황은 예측하지 못했었다.”
“문제라도 생기셨습니까? 제가 듣기로는 형님이 하란타에서 소설로 벌어들이신 돈이 웬만한 대갓집 재산만큼은 된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것이…… 내 귀국하기 전에 하란타 인근의 다른 나라들을 견문하고 오느라 상당수를 써 버렸거든. 물론 그만한 보람은 있었던 일이지만,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정말로 몰랐는데.”
말을 꺼내는 만중의 얼굴에는 난감함과 뿌듯함이 반반 섞여 있었다. 그 와중에도 만중은 네덜란드 주위의 국가들은 전부 방문했다며 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그 와중에도 전쟁이 터지기 직전에 영길리를 방문했던 것이 제일이었지. 그곳에도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라는 훌륭한 태학이 존재하는데, 거기서 웬 천재 하나를 만났단 말이다. 성이 뉴턴이라고 했던가…….”
“형님, 그게 중요합니까? 언제까지 형수를 연희동 하란타 정착촌에 두실 생각은 아니실 테고요.”
“하지만 그와 조금만 더 유럽에 머물 수 있었다면 자연의 이치를 깨달을 수……. 아차, 마르그리트를 잊었구나.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이냐.”
그동안 보지 못했던 사이, 만중은 꽤나 기분파가 된 모양이었다. 그동안 만중에게 실패란 없었으니 사람이 긍정적으로 바뀔 만도 했다.
소설을 팔아 얻은 재력 덕분에 네덜란드 유학 생활은 편안했고, 레이던 대학에서 딴 박사 학위로 사교계에서는 귀족 대우를 받았다. 그리고 그 두 가지 덕분에 이상형과 닮은 여인을 만나 혼인까지 인정받았으니 오죽했겠는가.
하지만 그것들은 이제 조선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일단 출판사를 운영하는 봉림대군이 보낼 인세가 다음 배로 도착하기 전까지, 만중은 더 이상 재물을 구할 곳이 없었다.
그때, 상황을 지켜보던 길산이 조용히 앞으로 나섰다. 그가 작은 한숨과 함께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어엇? 이것은 마포 상단의 백지어음…….”
“방금 저분이 이야기하셨던 북촌의 스무 칸 기와집. 이것으로 셈을 치러 주게. 가격이 일천 냥 남짓이라 했던가?”
“예! 예! 물론입니다! 이걸로 결제해주시면 거간비 정도는 빼 드릴 수 있습니다!”
길산이 아무렇지 않게 꺼내든 어음은 꽤나 대단한 물건인 듯했다. 이 모습을 보고 만중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것은 최대치의 신용과 환금성을 자랑하고, 조선의 물류를 쥐락펴락하는 마포 상단과 거래를 텄다는 증거로도 쓸 수 있는 물건이었다.
거래는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만중이 얼이 빠져 있던 사이 가쾌는 이사 일정을 정해 주고 이삿짐을 옮길 일꾼까지 소개시켜주기에 이르렀다. 이윽고 가쾌가 용건을 마치고 돌아가는 범털 손님에게 깊숙이 허리를 접어 인사할 때까지도 만중의 나간 정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천천히 갚으십시오. 어차피 앞으로도 하란타에서 보내올 재물이 상당할 테니, 형님이 이 돈을 떼먹지는 않으시겠지요.”
“길산이 너……. 종사관 녹봉이 그리 후하지는 않을 테고 어디 가서 도적질이라도 해 온 것이냐? 아니면 영상 대감의 재산을 네 마음대로 쓰는 것은 아닐 테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전부 제 재산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네 재산이라니? 아직 서른도 안 된 네가 어디서 그런 재물이 나서 쌀 수백 섬은 족히 될 값을 단숨에 어음으로 지불할 수 있단 말이냐?”
“이따 천천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저더러 어디 가서든 기죽지 말라며 늘 힘을 실어주는 사람이 보태준 재물입니다.”
이쯤이야 평범한 일이라는 듯이, 길산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만중의 질문에 답했다.
그렇게 가장 큰 문제 하나는 해결되었지만, 만중은 오늘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그가 조선을 비웠던 사이 달라진 것이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어린 티가 풀풀 났던 길산에 관한 일이 제일 궁금했다.
“이따라……. 안 되겠다. 집은 네 덕분에 겨우 구했지만 오늘은 성문이 닫히기 전 아내에게로 돌아가야 하거든. 그러니 지금 당장 이야기를 해 주어야겠다.”
“지금 당장 말입니까? 뭐, 큰 문제는 없습니다만…….”
정신이 돌아와 주위를 둘러보던 만중의 눈에, 마침 피맛골 일대의 명물인 유흥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조선술을 제대로 마셔본 것도 오래전의 일. 만중은 연희동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내에게 돌아가기 전, 길산과 술이라도 한잔하며 궁금증을 풀기로 결심했다.
***
“오오……. 이 맛은?”
“입에 좀 맞으십니까? 전하께서도 절찬하신 음식입니다. 조미포계라는 음식인데, 세간에서는 양념 닭튀김이라 부르더군요.”
“이만한 진미는 하란타에서도 맛본 적이 없다. 헌데 조선 음식이 하란타 술인 맥주와 이렇게 잘 어울리다니?”
“파견온 하란타 상관장들도 죄다 그 이야기를 하더군요. 이 음식이야말로 조선과 하란타 우호의 상징이라고 하던가요. 이번에 임기가 끝나 돌아가는 상관장이 거액에 조리법을 사 갔으니, 아마 그쪽에서도 조미포계를 곧 맛볼 수 있을 겁니다.”
만중이 입가에 잔뜩 묻은 양념 소스를 잊었을 정도로, 조선에 구현된 치킨의 맛은 각별했다.
귀국하는 상관장이 조리법을 사갔다는 말도 분명 허언이 아닐 것이다. 네덜란드 사람들도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한 맛이었으니까.
“전하께서 이 맛을 보시고는 온 백성들이 일주일에 한 번은 포계를 먹을 수 있게 힘쓰라며 온 관리들에게 전교를 내리셨을 정도입니다. 아직 그 정도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외국에서 들여온 우수한 닭 품종 덕분에 계란은 꽤 흔해졌습니다.”
“이거, 식어도 맛이 유지되느냐? 안사람에게도 꼭 맛을 보여주고 싶은데.”
“들고 가실 생각이십니까? 그럼 따로 계강정을 주문해놓겠습니다. 조청이 많이 들어간 양념으로 튀김을 바삭하게 굳힌 요리인데, 제 처도 그것을 꽤나 좋아하거든요.”
이상 기후 때문에 내년부터는 당분간 대규모 닭 사육이 금지되니, 이것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것도 올해가 마지막일지 모른다며 길산이 덧붙였다. 양계장이라는 시설에서 대규모로 키우는 닭은 잡곡 사료를 먹기 때문에 규제가 들어간다고 했다.
“아내라……. 그러고 보니 네 혼인 이야기를 듣지 못했구나. 저하께서 하신 말씀대로라면 너도 조선 여인과 혼인한 것은 아닌 모양인데, 이 자리에서 자초지종을 알려줄 수 있겠느냐?”
“별 것 아닙니다. 열 살이 조금 넘고 나서였나, 사부가 청에서 돌아오신 이후로 별채에 누님 한 분이 생겼었는데, 세월이 흐르고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그 누님과 함께 신방에 밀어 넣어져 있었습니다. 그게 답니다.”
“뭐야? 아니, 무언가 건너뛴 것이 너무 많지 않느냐. 그 이야기, 소설로 쓰지 않을 테니 조금만 더 자세히 말해 보거라. 이해가 어려울 정도이니.”
“그 정도로만 알아 두십시오. 아셔서 좋을 것이 없는 이야기니까요. 드문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중매결혼이 대부분인 시절이었으니 길산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예리한 로맨스 레이더로 무언가를 포착한 만중은 정체 모를 아쉬움을 느꼈다.
그 아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현 호조판서 김좌명도 정확히 같은 수법에 당했다며, 길산은 웃으며 맥주 한 잔을 더 권할 뿐이었다.
하긴, 길산은 출신만 빼면 사실상 영의정의 양자 취급에, 빼어난 외모와 신체, 그리고 무관이지만 출셋길에 제대로 올라탄 미래까지, 누구나 탐낼 일등 신랑감이긴 했다.
“그럼 네가 누님이라 부른 분이 너를 탐내……. 아니다. 네가 그쯤 하라니 다음 기회를 기약하지. 어느 귀하신 분이기에 정체를 꽁꽁 숨기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신혼집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도 그분 덕분인 것 같으니.”
“형님은 여전히 이상한 곳에서 촉이 좋으시군요. 어쨌건, 언젠가 좋은 날이 오면 자초지종을 말씀드릴 수 있을 겁니다.”
“그래. 기대하고 있으마.”
하기야, 제수 씨 정체가 어느 나라의 공주쯤 될 것도 아닌데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괜히 선을 넘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만중은 급하게 건배를 제안했다. 짠 소리와 함께 잔을 비운 길산이 심술궂은 소리를 던져온 것은 그때였다.
“크……. 비번에 마시는 맥주 맛은 언제나 각별하군요. 헌데, 형님은 반대를 무릅쓰고 하란타에서 혼인을 하신 것을 보니, 여전히 첫사랑을 잊지 못하신 모양입니다?”
“이 녀석. 누가 총통위 무관 아니랄까 봐 받아치기가 일품이구나. 그래. 네 말이 맞다. 너희 서모(庶母)님이 좀 고우셨어야지. 게다가 글 솜씨까지 조선 제일이셨으니.”
“군기시(軍器寺)에 계신 금태양 부정(副正)께서 들으셨다가는 경을 치셨을 이야기군요. 어차피 그 두 분은 어린 시절부터 맺어진 거나 다름없었던 인연이라 들었습니다. 지금도 금슬이 두터우시고요.”
그 사실은 만중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어린 시절 설레는 마음을 안고 찾아간 세책점에서, 요안이 자신을 매번 어린애 취급하면서 입에 올렸던 사내가 있었으니까.
어쩔 수 있겠는가. 첫사랑은 원래 슬픈 것이라는데.
갑자기 씁쓸한 맛이 입 안 가득 돌아, 만중은 자신도 모르게 반쯤 차 있던 맥주잔을 전부 목구멍으로 들이부었다.
그래도 길산이 그동안 전해준 이야기에 따르면 만중의 첫사랑은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놓였다. 두 부인이 처첩 구분 없이 사이좋게 한 서방을 모시는 모습이 마치 친자매 지간과 같아 타인의 모범이 될 정도라 했다.
“그리고 형님도 지금은 혼인하신 몸이 아니십니까. 듣기로는 그 혼인도 꽤나 흥미로운 과정을 거쳤다 들었는데요.”
“그래. 첫사랑은 지난 일에 불과하고, 지금은 내 옆에 있는 이가 내 인생에서 훨씬 중요한 사람임이 분명하지. 내가 레이던의 태학에서 받은 ‘독터’ 학위까지 던져가며 구애하지 않았더냐.”
“그쪽에서는 그게 귀족 대우를 받게 해주는 생원 백패쯤 된다고 하셨던가요. 아, 형님. 형님이 제게 진 빚을 금방 갚을 방도가 방금 떠올랐습니다.”
“일천 냥이 넘는 재물을? 그 방도가 무엇이더냐.”
좀처럼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길산의 입가에 미소가 떠 있었다. 분명 그 방도는 그럴 듯한 이야기였지만, 그것이 자신의 사연을 캐물은 데 대한 조그마한 복수였음을 만중은 잠시 후 깨달을 수 있었다.
“형님이 하란타에서 거금을 버신 방도가 있다면, 조선에서도 똑같이 시행하면 될 일이 아니겠습니까. 마침 형님의 재주를 비싸게 쳐 주실 분들이 조선에 계시기도 하고요.”
그 말을 듣자마자, 만중은 내일 자신이 어디를 방문하게 될 것인지 알 수 있었다.
방금까지는 빚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던 녀석이 이렇게 나오는 것을 보면, 아내 이야기가 녀석의 심기를 꽤나 불편하게 만든 것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