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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66화 (266/298)

266화. 박사의 무게

“대감! 덕분에 하란타 유학을 무사히 마치고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불초소생 김만중, 늦은 인사 올립니다!”

나랏일을 마치고 퇴궐했더니 웬 손님 하나가 사랑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네덜란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김만중이었다.

“이것은……?”

“아, 중전마마께서 대감께 하사하신 별식입니다. 요사이 고생이 많으시다며 단 것을 드시고 힘을 되찾으라 하시더군요.”

서안 위에는 웬 처음 보는 보자기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요새 청나라 정세와 관련해서 정신이 없는 건 사실이지만, 강 여사님이?

의문을 가득 품은 채 정갈하게 묶여 있는 보자기를 끌러 풀었다. 그 내용물을 보자마자, 나는 이 하사품이 어째서 내게 오게 되었는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전하께서 또 비밀을 들키셨나보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 아닐세. 일단 마마께서 내리신 별식이니, 맛은 보고 물려야겠구먼.”

여사님이 건강을 염려해 음식을 제한하니 이 양반은 매번 잔꾀만 늘어서는.

보자기 안에는 단 것에 대한 임금의 집착이 불러온 괴식이 들어있었다. 궁을 향해 예를 올리고 주전자를 기울여 내용물을 잔에 붓는데, 유난히 굵은 주둥이로 덩어리 몇 개가 차와 함께 빠져나오는 것이 보였다.

아마 이번에도 백성들은 주상 전하께서 나랏일에 몰두하시느라 이런 것으로 식사를 때우신다며 눈물짓게 되겠지. 현실은 식사량이 부족해진 임금이 차는 마셔도 괜찮을 거라며 거기에 우유를 타고 감자 전분으로 빚은 작은 떡을 넣어 마시다가 중전에게 딱 걸린 것이지만.

으윽. 임금은 이런 걸 잘도 매일같이 마셨구만. 흑설탕을 졸여 만든 시럽이 잔뜩 들어간 단맛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질 정도였다. 임금이 이런 걸 마셔대니 강 여사님도 차라면 사족을 못 쓰시면서 철퇴를 내리칠 수밖에 없었던 거겠지.

단맛에 질렸던 것은 만중도 마찬가지였는지, 떡을 씹던 만중의 얼굴이 혈색이 발그레하게 도는 것이 보였다.

“부르셨어요? 어머, 그건…….”

요안이 문밖에 나타난 것은 내가 밀크티에 들어있는 작은 떡을 우물거리고 있을 때였다.

“여긴 웬일이오? 행랑어멈을 부른 것이었는데?”

“사랑채에 웬 손님이 들었다기에 와 봤죠. 이건 제가 언니와 잘 처리하겠습니다. 이따 별채에서 봬요?”

요안이 보자기를 받아들고 안채를 향해 사라진 후에도 만중의 얼굴에 물들었던 홍조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그동안 조선보다 설탕이 귀한 나라에서 유학해서 그런지, 임금 취향이 듬뿍 반영된 파괴적인 단맛에는 익숙하지 않아서일지도 모르겠다.

“조선에서는 사탕이 꽤나 흔해진 모양이군요. 이렇게 차 한 잔에도 듬뿍 쓸 수 있는 것을 보니.”

“대만 섬과 유구국에서 대규모로 재배를 시작한지 꽤 오랜 세월이 흘렀지. 이제 남는 것을 하란타로 팔아 나라 재정에 꽤 큰 도움이 되는 수준까지 이르렀다네.”

“그렇습니까? 하란타에서 불티나게 팔리는 조선 상품은 찻잎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이 찻잔 안에 대(對) 하란타 무역의 정수가 전부 담겨있지. 도자기, 찻잎, 사탕까지 말이야. 그쪽에서는 이런 차가 유행하지 않던가?”

“귀족들의 사교회에서 발효차에 우유와 사탕을 타 마시는 것은 흔하게 봤습니다만, 이렇게 떡을 담가 먹는 방식은 본 적이 없습니다, 대감.”

음료에 떡을 담근다는 것이 이 시대에는 임금이나 할 발상이긴 하지. 후대에는 타피오카 전분으로 빚은 쫀득한 펄과 함께 널리 퍼지는 음식이지만, 지금 당장은 그랬다.

“그래도 자네 말을 들어보니 차라는 음료 자체가 하란타에 꽤 널리 퍼진 모양이야? 하긴, 하란타가 대만 섬에서 매번 사가는 차의 양이 점점 어마어마해지고 있더군.”

“아닙니다, 대감. 거기서 그치지 않고, 차는 하란타를 넘어 온 유럽에 유행중입니다. 제 눈으로 보고 온 것이니 확실한 이야기입니다.”

“그런가? 이거 참으로 좋은 소식이로군. 걱정 하나를 던 기분이야.”

“귀국하면서 대만 섬에서 들었습니다. 유럽에서 차가 어찌나 많이 팔려나가는지, 명국에서 사온 차와 대만에서 생산되는 차를 전부 유럽으로 보낸다고 하더군요.”

“덕분에 북경이나 심양에 팔 차가 없어서 자네 스승이 남도에 목민관으로 나가서까지 고생하고 있지. 자신이 제안했던 내용을 직접 시행하고 있으니 힘든 줄도 모르는 모양이지만 말일세.”

사절로 방문했던 네덜란드에서 처음 씨앗을 뿌렸던 차 무역은 이제 완전히 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마 내게 독점 거래를 제안했던 공작부인 메리 역시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으리라.

만중의 스승, 유형원이 지금 보성 인근에서 수령으로 근무하며 차 재배에 심혈을 기울이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었다. 대만에 차를 재배한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내게 달려와 계획을 설명하고는 지방 파견을 자처한 그였다.

덕분에 남도에서 생산된 차는 지금 인삼 다음으로 대청무역에서 이익을 안겨주는 효자상품으로 거듭났다. 대운하의 허리가 끊긴 상태라, 대륙의 강남에서 생산된 차에 비하면 북경이나 심양으로 가는 운송비가 탁월하게 낮았으니 가능한 이야기였다.

“세곡과 군포를 차로 대납할 수 있게 하고 조정은 그것을 외국에 처분해 세수로 삼는다……. 실학을 추구하시던 스승님다우신 발상이군요. 백성들의 형편도 많이 나아졌겠습니다.”

“아무렴. 나는 덕부(德夫, 유형원의 자)가 조정에 출사한 이래로 그렇게 표정이 밝았던 것을 본 적이 없었다네. 자신의 개혁책이 그대로 맞아떨어지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을 테지.”

“왜 스승님이 저더러 조정에 출사하지 않으면 연을 끊겠다고 말씀하셨는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참, 대감. 오늘은 이런 일로 대감을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드릴 말씀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이제야 얼굴에 제 색깔이 돌아온 만중이 한껏 진지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길산에게 어제 있었던 일을 대강 보고받았던 터라, 만중이 어떤 이야기를 꺼낼지 대강 짐작이 가고 있었다.

“알고 있네. 자네가 다음에 집필할 서적을 출판하는데 도움을 달라는 이야기겠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대감?”

“내 제자에게 꽤나 많은 재물을 빌렸다고 들었네. 자네가 다른 곳에 신세지지 않고 그것을 갚으려면 이 방법뿐이었겠지. 하란타 유학 도중에도 숱한 서적을 집필해 조선으로 보내지 않았던가.”

“역시……. 영상 대감의 통찰력은 조선 제일이시라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군요. 대감을 찾아오길 잘했습니다.”

뻔했다. 만중이 가장 비싸게 팔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글솜씨일 테니까.

아마 만중은 낮에 들러 별식을 하사받아온 중궁전에서도 강 여사님에게 같은 제안을 건넸을 것이다. 유럽 버전으로 집필했다던 구운몽을 각색해서 다시 쓰겠다는 제안이라도 한 것일까.

“그래. 어떤 책을 쓰고 싶은가? 흥미 위주의 서적도 좋지만 이왕이면 조선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이었으면 좋겠는데.”

“대감께서 최근 들어 청국의 혼란스러운 정세 탓에 격무에 시달리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때문에 머리를 식혀드릴 책을 쓸 생각도 해 봤는데,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역시 원래 생각했던 것을 쓰는 것이 낫겠군요.”

“원래 생각했던 것이라면?”

“저는 십오 년을 하란타에서 살아가면서, 그리고 좋은 기회를 얻어 유럽의 주변국을 돌아다니면서 신기한 경험을 다수 겪었습니다. 그 경험을 상세한 기록으로 남겨, 앞으로 자라날 미래의 인재들에게 전해주고자 합니다.”

“호오, 견문록이라도 저술하겠다는 말인가?”

네덜란드에 아주 뿌리를 박은 봉림대군이 틈만 나면 온 유럽을 유람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었다. 얼마 전에는 교황령까지 방문해 교황도 알현했다던가. 어차피 자기 돈으로 하는 일인 데다, 자발적으로 외교와 조선 상품 홍보까지 더해주니 막을 이유가 없었다.

만중 역시 그런 대군을 본받아 네덜란드에서 자신이 번 돈으로 주변국을 꽤 알차게 여행했던 모양이었다. 여행 도중 만났다던 파스칼, 뉴턴 같은 익숙한 이름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올 때마다 내 흥미도 한 겹씩 더해져갔다.

“지구 반대편에는 조선에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낯선 문물과 풍습을 가진 나라가 많습니다. 게다가 제가 스피노자라는 청년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꼈던 것이지만, 저 멀리 떨어진 서구의 땅에도 진리를 탐구하려는 천재들은 수두룩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들을 한데 모아 책으로 내겠다?”

“예. 그렇습니다. 추구하는 진리가 다를 뿐, 그들이 격물치지(格物致知)의 마음가짐을 갖고 이치를 탐구하는 태도는 유학자들의 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추구하는 자연과학이라는 학문에도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하란타에서 보낸 세월이 헛되지 않은 모양이군. 좋네. 그 제안. 받아들이겠네. 내 그 책이 완성된다면 출판 비용 전액을 지원하지.”

“감사합니다, 대감!”

나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수학 위주의 서양 학문이 교양 차원으로 조선에 주로 받아들여졌다면, 이제부터는 개선된 인식을 바탕으로 동서 학문의 교류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필요가 분명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물질적인 측면에서 역사가 비틀려왔다면, 정신적인 측면에서 본격적으로 역사가 비틀리기 시작한 시점은 이제부터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 앞에 앉은 이 당찬 인재가 갑자기 탐이 나기 시작했다.

“참,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네. 김만중 자네, 레이던의 태학에서 학문을 극한까지 닦았다는 증거로 ‘독터’라는 칭호를 받았다지?”

“예. 대감. 산학(算學)과 사상을 연구하는 학문, 제 식대로 번역해 보자면 철학 부문에서 학위를 받았습니다.”

“학위가 두 개라……. 그만큼 학문을 닦았다면 조정에 출사해도 무리는 없을 터. 어떤가? 바로 관료 생활을 시작하는 것은?”

이 정도면 만중의 과거 급제까지 걸리는 시간이 아까웠다. 하지만 일국의 정승이 건넨 파격적인 제안을 만중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듣자하니 세자와 따로 한 약속이 있는 모양이었다.

“……장원급제를 해오라 하셨다? 저하께서도 꽤나 자네에게 품은 기대가 크신 모양이군.”

“송구합니다, 대감. 아무래도 제게는 저하의 명을 받들어 과거 공부를 하는 것이 우선인지라……. 마음만 감사히 받도록 하겠습니다.”

중전이 맡긴 임무도 있고, 홀어머니를 비롯해 부양할 가족도 있으니 만중이 바로 벼슬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일뿐,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게다가 아직 다음번 과거가 열리기까지는 시간도 꽤 넉넉히 남아있다. 만중의 몸이 한 개라도 두 사람 어치 일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터.

“그 거절은 내가 거절하도록 하겠네. 조만간 이조에서 사람이 나올 테니 직첩을 수령하고 그날부터 궐내각사로 등청하도록.”

“대감……? 그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 정도의 인재라면 충분히 관원 생활을 병행하면서 장원급제가 가능하리라 생각하네. 애초에 나 또한 시강원 관직을 수행하면서 과거에 임했던 사람이 아닌가.”

“하지만 대감, 저는 성근학당에서 학관 일을 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데다, 방금 말씀드렸던 대로 새로운 서적 또한 저술해야 합니다. 그럴 시간이…….”

“다 하면 할 수 있는 일이네. 지금 하란타에서 유행한다는 ‘조선견문록’을 쓴 하멜도 통역 일을 수행하면서 한편으로는 밤새 있었던 일을 기록하기 바빴지. 그가 한 일을 자네가 못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네.”

만중의 얼굴이 점점 흙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나 때는 말이야. 다 어떻게든 해낸 일이었는데 말이야. 벌써부터 못한다는 말부터 꺼내는 꼴이 괘씸하지 않은가.

나는 세자시강원 자의 직을 수행함과 동시에 청나라에서 부여하는 임무도 수행했고, 그 와중에 조선으로 귀국한지 수개월 만에 열린 증광시에 응시해 당당히 장원급제를 따냈다.

미래가 기대되는 인재라면 이 정도는 수월하게 해내야 정상이지. 암 그렇고말고.

“어차피 태학에서 남의 언어로 공부하는 일도 이만큼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가. 내 말이 잘못되었는가?”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래도…….”

“이후로 변명은 받지 않겠네. 최선을 다해 맡은 일에 매진해 주게나.”

“……대감과 저하는 확실히 사제지간이 맞으시군요……. 살려주십시오…….”

만중은 죽상을 짓고 있었지만 나도 절대 양보할 수 없었다. 훗날 만중의 책을 보고 서양에 유학을 다녀온 인재들을 쉽게 등용할 제도를 마련하려면, 유학생 1기인 만중이 과거제도를 쉽게 통과해 명분을 마련해 주어야 했으니까.

그리고 만중도 마찬가지다. 훗날 열심히 유럽 각지의 대학원에서 구를 후배들이 박사 딱지를 달고 귀국하면, 나랏일에 빨리 참여할 수 있게 명분을 만들어 주는 것이 선배의 역할이 아니겠는가.

그가 조금만 희생해주면, 앞으로 박사 출신들을 관직에서 써먹을 방법이 활짝 열릴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에서도 성리학 외의 학문 연구가 활발해질 것이고, ‘그 학당’을 시작으로 유럽의 대학 제도를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

만중에게는 조금 안 된 일이지만, 조선의 미래를 위해서라면 인생의 좋은 경험이다 생각하고 열심히 해야지, 방법이 없었다.

***

결국 만중은 족쇄 하나를 더 채운 채로 사랑채를 나섰다. 그 모습이 과거의 나를 보는 듯해 기분이 조금 가벼워졌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지금 만중이 짊어진 부담이 한없이 가볍게 느껴질 정도로, 중대한 나랏일이란 상상도 할 수 없는 부담을 위정자의 어깨에 올려놓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중전이 따로 별식을 내려준 이유가 있긴 했다.

“한 달 전 북경에서 온 서신…… 새 황제의 친정이 개시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정대신 중 가장 서열이 높던 허셔리 소닌이 죽었다……. 남은 세 보정대신 사이에 불길한 기류가 감돌고 있다…….”

지금 청나라는 순치제가 요절하고 어리디 어린 강희제가 즉위한 상황, 카간의 전권을 대신 휘두르는 부하들의 전횡이 절정에 이르러 있었다.

그리고 그 상황은 내가 심어놓은 연락책을 통해 한양으로 흘러들어왔다. 지금 손에 쥔 서신들이 바로 그것이었다.

“열흘 전 영고탑에서 머이런 장긴이 보내온 서신…… 보정대신 나라 숙사하가 같은 보정대신 구왈기야 오보이의 탄핵을 받고 전권을 상실, 옥에 갇혀 강도 높은 심문을 받고 있다……. 암반 장긴 구왈기야 샤르후다가 가문의 부름을 받고 북경으로 소환되었다…….”

그동안 수집한 정보는 이제 곧 어떤 중대한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마도 조만간 자금성에 폭풍이 불어닥치겠지.

내 추측은 얼마 후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다만 그 폭풍이 강타한 것은 북경만이 아니었다.

일단의 무리가 압록강을 넘었다는 장계가 국경으로부터 날아들었다.

청에서 보낸 사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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