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시대를 초월한 마음
“풀어 보거라.”
임금의 목소리는 묵직했다. 마치 내게 다른 생각은 품지 말라며 윽박지르는 듯했다.
그렇게 내 손에 쥐어진 길쭉한 천 뭉치는 천천히 내용물을 드러냈다.
“이것은…….”
“어떠냐. 네 생각을 바꿀 만한 물건이더냐.”
내 손에 들린 쇠뭉치는 임금의 목소리를 닮아 묵직했다.
조총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꽤나 낯설었다.
내가 개발하라 지시를 내렸던, 뇌홍을 이용한 조총이 아니었다. 하긴, 아무리 신형이라지만 이미 총통위에 보급이 완료된 조총을 임금이 이 자리에 들고 올 이유가 없을 터.
“우리가 심양에서 처음 대의를 품었을 때도 신형 조총 몇 자루와 함께 시작했었지. 그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내가 너를 구할 차례로구나.”
“형님…….”
“꽤 오래된 이야기라 천기를 누설했던 일마저 잊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도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과 다르게, 임금의 눈가는 따스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온통 의문으로 뒤덮여있던 머릿속에서 천천히 과거의 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천기를 누설했다는 임금의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제는 꽤 옛날이 되어버린 시절의 이야기였다. 네덜란드에서 막 돌아왔을 무렵의 이야기.
네덜란드에서 화학자 글라우버를 데려와 조선에 정착시켰을 무렵, 그와 박연과 함께 술을 진탕 마시고 말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 그걸 들은 둘이 합심해 신무기를 몰래 개발하다가 암행 나간 임금과 나에게 딱 걸렸던 일이…… 아, 일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나.
“마음 같아서는 이 위력적인 조총으로 전군을 무장시키고 싶었으나, 그것은 내 다음이나 다다음 대에 맡겨야 할 이야기 같구나. 하지만 이 정도면 네 각오를 다지는 데는 충분할 테지.”
“어떻게 저도 모르는 사이 이런 일을 꾸미신 것입니까? 저는 그날 이후로 완전히 잊고 있었던 일인데…….”
“한수야. 너는 가끔 잊는 모양이지만 나는 조선의 임금이다. 이 정도 일을 최고의 신하 몰래 진행시킬 힘 정도는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것은 지금 기술로는 한계가 있을 물건일진대…….”
“미래를 위해 약간의 효율을 포기하면 무리를 해서 만들 수 있는 물건이기도 하지. 물론, 내 힘으로도 이 정도가 한계였던 것도 사실이다만.”
늦은 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이 될 지경이었다. 이것은 모양만 그럴듯한 물건이 아닐까, 의심을 담아 천천히 움직인 내 손길에 소총의 후미가 찰칵 소리를 내며 부드럽게 돌아가 열렸다.
약실 폐쇄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나 했더니, 어떻게 고무 패킹을 만들어서 해결한 모양이군. 그제서야 임금이 내수사를 통해 2차 영란전쟁에서 승리한 네덜란드에게서 고무를 잔뜩 수입한 기억이 났다. 내구도 문제야 유황을 섞으면 어느 정도 해결됐겠지.
지금 내 손에 쥐여 있는 소총은 시대를 뛰어넘은 물건이었다.
백수십년 쯤 뒤에 나올 후미 장전식 소총. 그 겉모양은 원 역사에서 프랑스 생테티엔 조병창이 제작한 비운의 걸작과 닮아 있었다.
“네가 그랬었지. 미래는 정밀한 기계와 약품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 적지 않은 재물을 들여가며 하란타에서 장인을 들여오고 공방을 확충했던 것이 아니냐.”
“…….”
“쓸 데 없는 사치라 비판해도 좋다. 내 취미를 위해 다른 곳에 귀하게 쓸 은자를 낭비했다 욕해도 좋다. 허나 이것 또한 미래의 밑거름이 될 움직임이라는 것은 분명할 터.”
“이런 수준의 기계와 도구들이 언젠가 팔도를 가득 채울 날을 준비해야 함은 분명합니다만…….”
“그것이 세자의 대에 일어날지, 세손의 대에 일어날지, 아니면 그 후에 일어날지는 모를 일이겠지. 하지만 너로 인해 미래를 알게 되었으니, 씨앗은 지금부터 뿌리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
찬찬히 생각해보니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네덜란드 장인들이 조선에 정착한지도 벌써 몇 년이 흘렀던가. 시계 같은 정밀한 기계에 쓰던 부품을 가공하던 장인들은, 이제 무기 공방에서도 숱한 일감을 처리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대장간 하나 크기에 불과했던 공방도, 이제는 하천변을 따라 길게 늘어설 정도로 크게 확장되어 있었다. 수력과 축력으로 돌아가는 원시적인 금속 가공 기구도 완비되었고, 그곳에서 일하는 조선인 숙련공들도 수백에 달했다.
덕분에 그동안 총통위만 사용하던 강선조총과 로렌츠 탄은 순조롭게 조선군 전군에 보급 중이었다. 헌데 임금은 그 와중에도 이런 일을 몰래 꾸며왔단 말인가.
저 작은 소총 하나에 들어간 돈이 얼마나 될까. 기존 조총에 비하면 장인의 손길로만 만들 수 있는 복잡한 부품이 한두 개가 필요한 게 아닐 텐데.
“어쩐지……. 그날 이후로 화포도감까지 신설해가며 이쪽에 관심을 계속 두시는 것이 수상하다 생각은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물건까지 만드실 줄은.”
“화포도감은 그것만을 위한 목적은 아니었지. 앞으로 야전식 충무포라 불릴 신식 화포와, 호총에서 한 단계 진보시킨 개량 조총도 그곳에서 나온 작품이 아니더냐. 비오는 날에도 안정적인 격발이 가능한 조총 말이다.”
“부싯돌 대신 뇌홍을 이용해 격발하는 조총 말씀이시군요. 얼마 전 총통위 전원에 보급이 완료되었었지요.”
“그래. 이 조총도 원래는 내 취미 외에도 금군 일부를 무장시켜 임금의 위엄을 보이려는 목적으로 만든 물건이었다. 하지만 완제품이 막 내 손에 들어왔다는 보고가 들어오자마자 이것을 쓸 일이 생겼구나.”
임금의 얼굴이 일순간에 굳어졌다. 방금까지만 해도 즐거운 일을 회상하듯 풀어진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가던 사람이었다.
“혹시 오늘 조정에서 일어난 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그 건방진 청국 사신 놈…….”
“감히 일국의 정승을……. 감히 조선의 중추를……. 감히 내 아우를……!”
고개를 끄덕이던 임금이 어금니를 씹었다. 고요하던 방 안에 뿌득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이제야 임금이 깊은 밤에 조총을 들고 내 집에 들이닥친 이유를 정확히 알 것 같았다.
“잘 보아라, 한수야. 우리가 심양에서 볼모 생활을 하던 시절 오십 인의 호포대에게 겨우 쥐어줬던 호총은, 지금 전군에 보급을 앞두고 있다. 언젠가 이 후미장전식 조총 역시 조선군 전군에 보급할 날이 오겠지.”
“말씀은 쉽게 하시지만 저희 대에는 힘들 일일지도 모릅니다. 이런 복잡한 장비를 대량으로 생산하고 유지하는 일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니기에.”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일로 청에 휘둘리는 일이 앞으로도 계속되면, 그날은 아마 영원히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렇지 않느냐?”
“…….”
“그렇다면 너와 내가 이토록 힘겹게 반석 위에 올려놓았던 이 나라 조선도, 언제든 다시 원래대로 미끄러질 수 있지 않겠느냐? 네가 누설했던 천기 속의 조선처럼 말이다.”
임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청의 속국 취급을 받았던 원 역사의 조선이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는, 나도, 임금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너란 녀석은……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백성이 눈에 걸려 스스로 주저앉을 녀석이었다. 네 스승에게서 애민심만큼은 철저히 이어받았긴 하나, 중요한 때 모질지 못한 것이 유일한 네 단점이지 않느냐.”
“형님에게는 무엇 하나 숨길 수 없군요. 하하…….”
“그리고…… 이따위 말도 안 되는 개수작으로 내 소중한 아우이자, 유능한 정승이자, 최고의 신하를 이대로 잃을 수는 없다. 내 이것에 굴복한다면 익선관을 쓸 자격조차 없을 것이야.”
“형님…….”
“민초들 걱정은 잠시 내려놓자꾸나. 이 땅의 백성들도 너로 인해 정해진 운명을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지 않느냐. ……마치 나처럼 말이다.”
임금의 말이 가슴에 날아와 박히는 듯했다.
그는 원 역사에서 소현세자라 불렸다.
이미 수십 년 전 명을 다하고 스러져 역사에서 퇴장했어야 하는 인물.
원래대로라면 지금 왕위에 올라있어야 할 사람은 봉림대군을 따라 네덜란드로 유학을 떠난 그의 장자 이원, 원 역사의 현종이었을 터.
그러나 임금은 지금 살아있다. 그리고 아마도, 내가 미래지식을 이용해 조선을 부강하게 만든 덕에 임금처럼 새 인생을 얻은 백성 역시 조선 팔도에 가득할 것이다.
임금의 짧은 말 한 마디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형님, 제가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가져다주었다 해도, 그것을 빼앗을 자격은…….”
“그럴 때는 네가 없어졌을 때 방향을 잃고 방황할 백성들을 생각하거라. 나라가 원래대로 돌아가 고통 받을 민초들을 떠올리거라.”
“…….”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 황제의 귀하신 따님께서 그 피해를 최대한 줄여줄 방도까지 가지고 행차하셨다. 마치 이 상황이 하늘의 뜻인 것 같지 않느냐.”
임금의 시선이 옆에서 조용히 앉아있던 황녀에게로 향했다. 기다려주어서 고맙다는 말이 임금의 입에서 흘러나옴과 동시에, 사랑방에 흐르는 대화는 만주어로 오가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의 친서는 잘 읽어보았습니다. 황녀 자가. 굳이 그 뜻을 언문으로도 표시해 준 점에서, 폐하의 진심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말씀을 높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제는 친왕보다 서열이 높으신 분이, 굳이 제게 높임말을 쓰실 필요는…….”
“내 아우를 구하기 위한 일념 하나로 이렇게 어려운 일을 자처해주신 분입니다. 지위의 고하를 떠나 어찌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자가.”
임금이 황녀를 향해 살짝 머리를 숙였다. 이 땅에서는 누구에게도 굽혀져서는 안 되는 지존의 고개였다. 임금의 심정이 그 행동에서 뚝뚝 묻어나는 듯했다.
“그럼 몇 가지 묻겠습니다. 북경의 황제와, 나와, 내 아우의 목숨이 걸린 문제입니다. 청국의 정세에 대해, 아시는 대로 소상히 대답해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자금성에서 물러나와 공주부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온 몸입니다. 어찌 시시각각 치열하게 바뀌는 조정의 상황을 상세히 알겠습니까. 제가 아는 것은 무엇이든 말씀드리겠습니다만, 그러나…….”
“그러나?”
“제 조카인 카간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고모가 보기에 고려의 왕이 믿음직하거든 이 밀서를 추가로 건네라고. 이 정보가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했습니다, 전하.”
임금의 결단에 감사를 표하며, 황녀가 앉은 채로 허리를 깊이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녀의 이마가 마치 땅에 닿을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마카타의 허리를 누르고 있는 것은 조카인 강희제에 대한 감사 뿐만은 아닐 것이기에.
곧이어 황녀의 품에서 나온 서신 한 장이 임금에게 전해졌다. 임금이 굳어진 얼굴로 카간의 밀서를 읽는 동안, 나는 무거운 마음으로 자리를 관망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나쁘지 않군.”
“형님, 그 말씀은…….”
“직접 읽어 보거라. 네 생각만큼 많은 희생이 따르지 않을지도 모르겠구나.”
임금의 표정은 처음보다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도대체 저 밀서에 어떤 정보가 담겨 있기에?
건네받은 편지를 보자마자, 나는 그 표정의 이유 한 가지를 바로 알 수 있었다. 강희제의 자필임이 분명한 한문으로 빽빽하게 작성된 밀서에는, 지금 청나라의 상황이 모르는 사람도 한 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상세히 적혀 있었으니까.
“국가 기밀로 취급받아야 마땅할 이런 정보를 이렇게 전하라 하다니. 황제 폐하도 이 일에 꽤나 진심이신 모양이군요.”
“선대 카간의 총애를 받고 오만해진 자가 선을 꽤 여러 번이나 넘었으니까요. 그자가 검을 차고 자금성을 들락거린 것은 제 눈으로도 목격한 사실이고, 이번에 다른 보정대신을 투옥하고 심문한 것은 카간께서 명백히 반대하셨음에도 그자가 강행한 일이랍니다.”
임금 또한 정보의 양과 질에 놀랐는지, 황녀 앞에서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아무리 제국의 정점에 올라있는 소년이라지만, 열다섯 살짜리가 파악한 것치고는 너무나 상세한 정보였다. 아마 임금도 이러한 강희제의 천재성을 보고 조금 마음이 놓였던 것일까.
나 역시 가만히 두뇌를 놀리고 있을 틈이 없었다. 늦은 밤이어서 그런지 머리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조금 나는 듯했지만, 나는 곧 황제의 빽빽한 편지에서 요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다른 부분은 전부 차치하더라도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겠군요. 카간의 손이 닿거나, 오보이에게 반감을 품은 팔기가 여덟 개 구사 중 네 개에 불과하다…….”
“카간의 직속인 정황, 양황, 정람 중에서도 그자의 입김이 강하게 묻은 양황기가 배신의 기미가 짙다고 했어. 추가로 카간에 힘을 보태줄 구사는 숙부께 씌워진 누명 탓에 그동안 푸대접을 받던 정백기와 양백기 정도야.”
“그렇게 팔기를 최대한 끌어 모은다 해도 절반이라……. 정백, 양백 두 구사는 힘이 약해진 상태니 절반도 안 되겠군요. 게다가 북경성 인근 한족 녹영병은 이미 오보이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니, 카간이 왜 황녀 자가를 조선으로 보내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당신이 없었다면 친위병을 직접 양성해서라도 놈을 칠 생각이었다고 하셨어. 하지만, 그것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성패도 장담할 수 없는 일, 확실하고 믿을 만한 수단을 빌리는 게 낫다고도 하셨지.”
“그것이 저와 조선군이었습니까. 아쉽군요. 제가 북경 조정에 남아있었으면 카간께 꽤나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요. 친위대 양성과 반정은 제 주특기인지라.”
임금의 콧잔등이 미세하게 찌푸려졌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내가 홀로 모든 것을 짊어지려 했던 방금 전까지와는 달리, 이제는 이 상황을 헤쳐나가야 할 방향이 보였으니까. 끝없는 어둠 속에서 빛 한 줄기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그럼 고려 국왕 전하, 카간의 뜻을 빌어 부탁드리겠습니다. 여기 바투루 안 아르가투와 고려군을 부디 위태로운 카간께 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다시 한번 황녀가 임금에게 고개를 숙이며 부탁을 전했다. 나와 임금이 속으로 계산을 마친 것을 눈치 챈 모양이었다.
그러나, 임금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예상과는 다른 대답이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임금을 향해 돌아갈 정도였다.
“거절합니다.”
“……네?”
방금까지 풀어져 있던 임금의 표정이 다시 경직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내가 빌려드릴 것은 조선의 영의정 안한수와 조선군입니다. 황제께 그리 전하십시오.”
“아…….”
“다시는 내 아우를 청국에 빼앗길 생각은 없습니다. 황녀 자가.”
***
황녀가 임금의 친서를 품고 북경으로 돌아간 지 몇 달 후, 북경에서 다시 사신이 날아들었다. 전번에 온 사신을 영의정의 건강을 핑계대고 임금이 억지로 돌려보낸 결과물이었다.
“이제 결정을 내려 주실 시간입니다, 고려 국왕 전하. 보정대신 합하의 뜻이 뚜렷하다는 것을 전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핑계를 대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합하의 뜻은 곧 카간의 뜻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감히 다이칭 구룬을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신하 하나를 싸고도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이번에도 목표물인 조선의 영의정이 건강을 핑계대고 자리를 비운 것을 본 청의 사신은 기세등등했다. 아마도 이번 건을 핑계로 조선에서 뇌물이라도 한껏 우려낼 생각인 모양이었다.
말투에서 시건방이 한껏 묻어나기 시작한 사신의 말을, 역관은 진땀을 흘리며 통역하기 바빴다. 이제는 사신의 입에서 꽤나 모욕적인 중얼거림까지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임금의 입꼬리가 찌그러졌다. 가벼운 코웃음과 함께였다.
“카간의 뜻을 논하는데 이, 이 무슨 불경한……!”
“……네놈, 내가 청국어에 능통한 것을 모르는 모양이로군. 감히 일국의 국왕 앞에서 불경을 저지른 것은 네놈이니라.”
“전하, 제 말은 그런 것이 아니옵고……!”
“밖에 대기 중인 금군은 들라! 이 반역무도한 자를 즉시 제압하라!”
쾅. 거칠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인정전 앞에서 대기 중이던 줄무늬 군사들이 뛰어들어왔다. 그들의 맨 앞에는 임금이 아끼는 젊은 군관 하나가 서 있었다.
“총통위 금군 종사관 안길산, 전하의 부름을 받고 대령했사옵니다!”
“이 무엄한 자를 당장 끌어내 가둬라! 감히 임금의 위엄을 능멸하고, 황제의 뜻을 거짓되게 꾸민 중죄를 저지른 자이니!”
조선어로 오간 대화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사신은, 자신의 몸에 오랏줄이 채워지고서야 상황을 파악한 듯했다. 아마 상상치도 못했던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 이 무슨……! 저는 카간의 뜻을 받든 사신! 저를 이리 대접한다는 건 카간과 다이칭 구룬을……!”
“정숙을 지켜야 할 정전이 소란스러워지지 않았느냐. 어서 끌고 가라!”
“예, 전하!”
“전하! 후회하실 것입니다! 카간의 자쿤 구사(팔기)가 두렵지 않으십니까? 정묘년, 병자년의 교훈을 정녕 잊으신 것입니까?”
그 말은 효과가 있는 듯했다.
임금이 손을 올리자 종사관 한 명에게 번쩍 들려 끌려 나가던 사신의 몸뚱이가 멈추었다.
역시 고려의 임금이라는 자도 다이칭 구룬의 위엄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법이로구나.
사신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임금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솟아 있는 것은 그의 눈에 미처 들어오지 않았다.
“아, 아니……!”
임금의 손이 올라가자 고요를 되찾았던 인정전 안이 다시 시끌시끌해진 것은 그때였다.
옥좌에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지존이 허리춤에서 웬 쇳덩이 하나를 뽑아들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당황하는 사이, 성큼성큼 끌려가던 이에게 다가간 임금은 뽑아든 권총을 곧바로 사신의 이마에 들이밀었다.
“전, 전하! 그것은……!”
“감히 네놈이 내 앞에서 정묘년과 병자년의 치욕을 논해? 아버님이 흙바닥에 이마를 찧으시고, 나와 아우는 먼 이국의 땅으로 볼모로 끌려가야 했던 그 일을?”
“이, 이건 미친 짓입니다! 나는 다이칭 구룬의 사신! 감히 번국의 왕이 카간의 대리자인 내게 이럴 수는……!”
탕.
임금의 손가락은 지체 없이 움직여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자 길산의 억센 팔뚝에 붙잡혀있던 사신은 그대로 축 늘어지고 말았다.
“어디 그릇도 되지 않는 자가 일국의 임금을 겁박하는가. 종사관, 이 자를 끌고 나가 옥에 가두라!”
“예, 전하! 그 명령, 충실히 시행하겠사옵니다!”
총구에서 탄환은 발사되지 않았다. 임금은 그저 빈 총의 방아쇠를 거칠게 당겼을 뿐. 그러나 점화제인 뇌홍에서 터져 나온 폭발음과 임금이 뿜어내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사신은 부여잡고 있던 정신줄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조선의, 그리고 나의 충성스러운 만조백관은 들으라!”
그리고 임금에게 압도된 것은 좌중의 신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시 적막이 흐르는 인정전에는, 임금의 목소리만이 굳건한 의지를 담고 울려 퍼지고 있었다.
“우리는 결코 그날의 치욕을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이 자리에 있는 모두, 내게 목숨을 맡기고 청국과의 싸움을 결의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