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이간책
“고려 놈들이 드디어 미친 것이 분명하구만? 그렇지 않습니까, 카간?”
오만한 목소리가 자금성 무영전을 가득 울렸다. 북경의 남동쪽 항구인 천진에서 날아온 급보 때문에, 예정되지 않았던 긴급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보고가 잘못 올라온 것은 아니겠소, 태사?”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제 아우가 헛것을 보았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고려가 갑자기 대군을 동원해 북경으로 쳐들어올 이유는 없지 않소? 홍모나 포도아, 영길리 놈들의 짓일 가능성은 없소?”
“말씀하신 서역의 오랑캐 놈들은 기껏해야 한조 놈들이 차지하고 있는 남방에서 배 십여 척을 운용하는 것이 전부지요, 후후. 그렇게 많은 병력을 아무런 전조도 없이 곧바로 발해만에 쏟아 부을 수 있는 것은 고려뿐입니다.”
상상도 못한 뒤통수를 맞은 탓에 잔뜩 약이 올라서일까. 평소처럼 콧소리를 섞어 이야기하는 오보이의 목소리는 꽤나 커져 있었다.
그가 황제를 대하는 태도 역시 꽤나 불손하게 변했지만,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숙청을 시작한 이후로 기분이 상한 오보이가 이렇게 구는 것은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카간,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변호하시던 고려국 정승 놈은 다이칭 구룬의 적이 될 놈이라고. 놈은 역심을 품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아직 적의 정체가 확실한 것도 아니지 않소, 태사. 흥분부터 가라앉히시오.”
“흥분이요? 후후, 이 구왈기야 오보이가 고작 만오천의 병력을 상대로 흥분했다는 말씀이십니까?”
강희제에게 반박하는 오보이의 말과 달리, 그의 몸은 꽤나 솔직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고 있었지만, 말하는 도중에도 계속해서 가슴팍 어딘가를 쓰다듬고 있었던 것이다. 늘 몸 어딘가에 차고 있는 단도를 만지작거리는 둣했다.
“그래서, 이번 건에 대한 태사의 의견은 어떻소. 지금은 적의 정체를 두고 왈가왈부하기 이전에, 갑자기 북경 인근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적을 대처해야 할 때가 아니오.”
“옳으신 말씀입니다, 카간. 허나 총명하신 카간께서는 내리셔야 할 결정이 무엇인지 이미 잘 알고 계시겠지요.”
“내가 내려야 할 결정이라……?”
“전 자쿤 구사(팔기)의 지휘권을 이 오보이에게 내려주십시오. 카간의 직속인 정황, 양황, 정람까지 전부 말입니다. 아, 양람기는 지금 고려와의 국경에 나가 있으니 소집할 수 없겠군요. 정친왕은 시킨 대로 지금 고려 국경을 넘었을까, 후후.”
탐욕이 가득 담긴 권신의 눈빛에, 어린 강희제는 하마터면 눈을 질끈 감아버릴 뻔했다. 인간의 날것 그대로의 감정을 그대로 받아내는 것은 갓 친정을 시작한 황제에게는 아직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내 직속 구사를 전부 태사에게 넘기라?”
“아, 제가 말실수를 조금 했군요. 당연히 황실 중 가장 연장자이신 숙친왕께 잠시 지휘권을 위임해달라는 요청을 드리는 겁니다. 감히 제가 어찌 황족만 오를 수 있는 구사 어전 자리를 탐내겠습니까, 후후.”
“이상하군. 적은 많아봐야 일만 오천에 불과하다고 하지 않았소. 숙친왕 호오거 휘하의 구사만 가지고도 능히 이길 수 있는 병력이 아니던가?”
“그야 승리는 당연히 우리 자쿤 구사의 것이겠지만, 최소한의 피해만 내고 이기는 것이야말로 전쟁의 제일가는 덕목이 아니겠습니까. 혹여나 적이 정말로 고려군이라면, 놈들이 나선을 상대로 보여준 전투력을 생각한다면 조심할 필요 또한 있을 것이고요.”
오보이의 논리는 그럴 듯했다. 하지만 강희제는 그의 속내를 환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황제의 친위대를 북경에 둔 채로 자신의 영향력이 닿는 팔기만을 전장으로 보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오보이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이번 일을 계기로 황제의 직속 팔기를 지휘할 권한을 앞으로도 마음대로 위임받으려는 속셈 또한 있을 법했다.
간악한 놈 같으니.
강희제는 들끓기 시작한 마음을 아무런 낌새 없이 가라앉히느라 애를 썼다. 결국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그리고 황제의 친위대를 잠식하기 위해 오보이는 지금 떼를 쓰고 있는 것이다.
“허락하겠소.”
“예?”
대답은 너무나 쉽게 떨어졌다. 그 오보이마저 의외라는 반응을 보일 정도였다.
“정말이십니까, 카간?”
“짐이 어찌 한 입으로 두 말을 하겠소. 사태가 위급한 듯하니, 허락하겠다고 했소. 기왕 이렇게 된 것, 자금성과 북경성을 방어할 최소한의 병력을 제외하고는 전부 데리고 가도록 하시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카간! 숙친왕과 저를 믿고 맡겨주신 만큼, 철저히 적을 격멸해 카간의 염려를 덜어드리겠습니다!”
오보이가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리는 것을 보면, 강희제가 이렇게 나올 것을 그도 생각지 못한 듯했다. 아마도 단도 패용까지 허용한 어린 황제가 그를 철석같이 믿고 있다 여기는 듯했다.
그러나 강희제는 오보이가 이렇게 나올 것을 알고 있었다. 이것 또한 조선국 정승과 짠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밑거름으로 작용할 것이다.
“단, 조건이 하나 있소, 태사.”
“조건이라니요, 무엇입니까, 카간?”
허리를 굽히고 있던 오보이가 벌떡 고개를 치켜들었다.
고려 속담에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고 하던가. 강희제는 그 모습을 보고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만한 병력이 북경성에서 빠져나간다니, 짐은 자금성을 비롯한 황성의 방어가 조금 걱정되는구려.”
“그러실 것입니다. 허나 북경성은 수비대가 단단히 지킬 것이고, 자금성은 제가 한때 몸담았던 양황기의 정예가 평소처럼 철통같이 방비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나친 걱정을 하시는 것이 아닐지요, 후후.”
그래, 내 직속이라고는 하나 네놈 또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그 양황기가 말이지.
강희제는 자신 혼자만 군대를 손에서 떨어뜨릴 생각이 없었다. 남의 손에서 군대를 떼어놓으려 한다면, 본인 또한 군대로부터 떨어질 것을 각오해야 공평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위험한 전장에 태사가 직접 가는 것 역시 염려가 된다오. 내 무슨 말을 하려 하는지 아시겠소?”
“그 말씀은…….”
“이번 전투는 숙친왕 호오거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태사는 내 옆에서 조정을 지키며 나랏일에 힘써주었으면 하오. 숙친왕에게 태사의 수하 중에서 유능한 장수를 골라 붙여주면 문제는 없지 않겠소?”
오보이의 눈동자가 하늘을 향했다 금세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짧은 시간 안에 계산을 끝마친 듯했다.
“뭐, 저야 상관은 없습니다만……. 제 안전을 염려해주시는 카간의 은혜에 감읍할 뿐입니다, 후후.”
“알았다니 되었소. 어차피 닝구타로 나가있는 양람기와 남방 전선에 남아있는 병력을 제외하더라도 나머지 구사는 육만이 훌쩍 넘는 대병력, 굳이 태사가 친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오.”
“알겠습니다. 그럼 저는 카간의 곁을 비우지 않고 국정에 힘쓰겠습니다.”
강희제와 오보이, 두 사람의 입가에 동시에 웃음기가 새겨졌다. 하지만 그 웃음이 띠고 있는 의미는 각자 다를 터.
“대강 정리가 되었군. 그럼 구왈기야 태사, 카간의 명이오. 북경성에 주둔 중인 전 자쿤 구사에 소집령을 내려 적을 격멸하시오.
“그 명, 엄히 받들겠습니다. 천진에 침입한 적을 격멸하고 카간의 시름 또한 없애드리겠습니다.”
“좋소. 그럼 나는 이만 내 직속인 세 구사에 위임의 뜻을 전하고 따로 격려를 내리러 이만 자리를 비우겠소. 경들도 이만 해산하시오.”
그렇게 자금성에서 벌어졌던 긴급회의는 막을 내렸다. 오보이는 지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이 어떻게 변했는지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천진을 침범한 적을 치기 위한 준비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강희제는 곧바로 자신의 세 직속 팔기 지휘관을 자금성으로 불러들여 밀명 하나를 전했다. 조선의 정승과 약속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밀명이었다.
이제 자금성을 비롯한 북경 성내에는 극소수의 병력만이 남게 될 것이다.
구왈기야 오보이와 함께.
***
“내 살다살다 아새끼 시절부터 봐온 종사관을 모시는 날이 올 줄은…….”
“쉿, 목소리를 낮추십시오, 천총 영감. 저기 그림자가 비칩니다.”
여기는 북경성의 조양문(朝陽門) 인근 팔기 거주구역의 화려한 저택.
그 저택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을 한 사내 둘이 어둠이 내린 마당을 맴돌고 있었다. 황녀를 수행해 북경까지 온 조선의 두 밀사였다.
곧바로 한 사람의 지적대로 불이 켜진 문간에 사람 그림자가 비치더니, 안으로 향하는 문이 벌컥 열렸다. 그 안에는 그들에게 익숙한 무장 하나가 서 있었다.
“들어오게. 잘안 장긴께서 접견을 허락하셨네.”
문을 연 무장의 입에서는 만주어가 흘러나왔지만, 조선에서 온 두 사람은 그것을 능숙하게 알아듣고 있었다. 늙수그레한 한 명은 그와 옛 동료였고, 젊디젊은 나머지 한 명은 집에서 만주어를 매일같이 접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곧바로 그들은 저택의 깊숙한 밀실로 안내되었다. 무장의 안내를 받아 들어선 밀실에는 허연 피부에 혈색이 짙게 비치는 만주족 사내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이름.”
촛불을 받아 그늘진 사내의 입에서 단어 하나가 흘러나왔다. 그 분위기는 평범한 사람의 숨을 막히게 할 정도였지만, 전장에서 단련된 두 사내의 입을 다물게 하기에는 부족했다.
“조선군 총통위 정삼품 천총 김귀돌입니다. 과거 다이칭 구룬에 몸담았을 때는 타스하 잘안의 니루 장긴으로 복무했습니다.”
“조선군 총통위 정육품 종사관 안길산입니다. 전 타스하 잘안 장긴 안 아르가투의 제자이고, 전 예친왕 전하의 영애를 배우자로 맞았습니다.”
길산의 소개를 듣던 사내의 이맛살이 꿈틀거렸다. 그것을 본 길산이 천천히 품에서 서찰 한 장을 꺼내 건넸다. 자신의 아내가 전하라 써준 편지였다.
“……네가 동고의 남편이냐? 그 망아지 같던 계집이 잘도 시집을 갔구나.”
“양자로 입적되어 예친왕 전하의 후계를 이으시느라 고생이 많으시다 들었습니다. 공주 자가께서도 걱정이 많으시다고…….”
“진작 내게 몸을 의탁하라 했거늘. 그걸 거부하고 고려로 도망친 사람에게 들을 말은 없다. 너희를 이 자리에 들인 이유는 과거의 인연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아두도록.”
사내의 말은 칼로 공기를 베어내는 듯 서늘했다. 하지만 그의 냉랭한 대답을 들은 길산의 표정은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어린 놈 주제에 담이 크군. 하긴, 동고를 감당하려면 그 정도는 되어야 하겠지.”
“자가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치면 제 앞에 계신 분은 굳이 따지자면 제 처남이 아니십니까. 인척을 앞에 두고 긴장할 이유는 전혀 없지요.”
“나 아이신기오로 도르보(多爾博)는 고려 놈을 매부로 둔 적이 없다. 그리고 어차피 나는 가문의 명을 받아 대를 잇기 위해 명목상 양자로 들어간 몸, 더욱이 네놈과는 관련이 없는 사람이지.”
“그렇습니까? 그렇다 해도 당신이 공주 자가의 사촌동생이신 것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당신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 역시 변하지 않지요.”
핫. 도르보의 코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도르곤의 동생, 도도의 5남으로 도르곤의 후사를 잇기 위해 양자로 입적한 이였다.
“정황기 잘안 장긴의 부탁이라는 게 고작 이런 것일 줄이야. 어이, 설어(쇠)! 지금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해주려고 내 집에 찾아온 것인가? 아주 눈물이 나는구만.”
“옛 주인의 후계자께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늘 제가 모시던 분들을 위해 움직입니다. 지금 모시는 카간께나, 전에 모셨던 예친왕 전하께나, 그 전에 모셨던 타스하 잘안의 우두머리께나 마찬가지였지요.”
“그래. 네가 아니었다면 낯선 고려인들을 내 집에 들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실망인걸. 중대한 전투를 앞두고 설어 네가 내 심경을 어지럽힐 줄이야.”
“이런 일로 심경을 어지럽히셔서는 안 됩니다. 도르보 님은 이제 받아야 할 마땅한 것을 돌려받으러 가셔야 하니까요.”
도르보에게 ‘설어’라고 불린 방두쇠가 공손히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곧바로 그의 품에서 서찰 한 장이 꺼내 도르보에게 건네졌다.
“이건……?”
“카간께서 보내신 밀서입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이 양백기에 끼치는 영향력을 높이 사고 계십니다.”
“양백기에 끼치는 영향력? 그것 때문에 내가 오보이 그놈에게 이용당하고 있지 않나? 구사 어전 자리는 양부의 원수에게 빼앗기고, 놈의 수족이 되어 양백기를 움직이는데 쓰이는 것이 현실이거늘. 어린 카간께서 무엇을 해결해주실 수 있단 말이야?”
“카간께서는 나이는 어리시지만 그 누구보다 총명하십니다. 그리고, 곧 그분께 천군만마와도 같은 아군이 당도할 예정입니다. 예친왕 전하의 제일가는 심복이셨던 분께서 힘을 보태주실 예정이시거든요.”
생각도 못했던 말에 날카로웠던 도르보의 시선이 누그러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김귀돌은 자신이 품고 있던 마지막 서찰 한 장을 그의 앞에 밀어놓았다.
“방 장긴이 말한 분이 예친왕 전하의 후계자께 올리는 서찰입니다. 숭덕문황제 폐하를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모셨고, 이제는 현 카간께서도 도움을 청하는 분이시지요. 고려국의 제일가는 권신이시기도 합니다.”
“아, 설마 말로만 듣던 그…….”
“오는 길에 들었습니다. 천진에 정체불명의 군사들이 나타났다는 보고가 들어왔다고. 이미 그분께서 가까이에 당도해 계신 모양입니다.”
도르보의 눈동자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그에게서 풍기던 단단한 분위기는 무너진 지 오래였다.
그 모습을 본 길산이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얼굴에서 단호한 결의가 물씬 묻어나고 있었다.
“아마 북경까지 보고가 들어왔을 정도면, 지금쯤이면 천진은 이미 그분이 이끄는 고려군의 손에 떨어졌겠군요.”
“……그럴 리 없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나 급박한…….”
“그분은 곧 카간의 명을 받은 군사와 힘을 합쳐, 다이칭 구룬의 올바르지 못한 것을 바로잡으러 오실 것입니다. 이것은 기회입니다, 처남.”
“기회라고?”
“당신이 이어받았어야 마땅한 예친왕 작위와, 양백기의 구사 어전 자리를 다시 올바르게 돌려받을 수 있는 기회 말입니다. 그리고 누명을 쓰고 역적으로 몰리신 당신의 양부께서 억울함을 풀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겠지요.”
이제 도르보는 길산의 처남 소리에 반박할 여유조차 없는 듯했다. 눈에 띄게 치켜뜬 눈썹만이 그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런 도르보를 아랑곳하지 않고, 길산은 한 걸음 더 그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싱그러운 웃음을 띤 채 자신의 처남에게 다시 한번 말을 걸었다.
“이제 마땅히 카간 손에 있어야 할 권력을 돌려드리고, 마땅히 당신이 받았어야 할 작위를 스스로 쟁취할 기회가 눈앞에 당도했습니다. 잘안 장긴임에도 양백기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당신이라면 그 기회를 붙잡을 수 있겠지요.”
“…….”
“어찌하시겠습니까, 처남. 선택은 당신 손에 맡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