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화. 자금성 침투
“무슨 용건이오. 신분을 밝히시오.”
“정황기 소속의 전령이오. 천진을 수복하러 출격한 우리 구사 어전이 카간께 올리는 급한 보고가 있소. 어서 통과시켜주시오.”
순간 수문장의 뇌리에 방금 자신이 품었던 의심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스쳤다. 전령대장의 입에서 흘러나온 만주어는 유창했고, 복장도 나무랄 데가 없었으니까. 그의 손에 들린 전령의 표식도 문제될 구석이 없었다.
헌데, 눈으로 이런 것들을 확인했음에도 왜 기분 한 구석이 찝찝한 것인가.
수문장은 그제서야 멀쩡한 정황기 전사를 보고 의심이 생긴 이유를 깨달았다. 황성 남문의 방비를 맡는 동안 수많은 팔기군을 접했지만. 지금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전령대장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팔기군 중에 이 정도로 위압감이 흘러넘치는 사람은 구사 어전 중에서도 드물었다. 그런 사람을 자신이 기억하지 못할 리가.
“뭔가 문제라도 있소?”
수문장은 평소부터 직감 하나는 예리하다 자부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앞에 서 있는 낯선 이으로부터 계속해서 마음에 걸리는 부분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다른 전령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는 그들이 메고 있는 조총이 신경 쓰였다. 정황기에 조총수 부대가 있다는 이야기를 수문장도 들었던 것 같기도 한데, 확실하지 않았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전령대장은 여러 자루의 투창까지 메고 있었다.
‘이상하다. 저런 무기를 쓰는 전사는 팔기에 정말로 드문데…….’
수문장의 의미모를 불안과는 달리 의심을 받는 전령대장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무언가 이상한 직감에 지배당한 수문장이 계속해서 시간을 끌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내가 잘못 짚었나? 아무리 자금성을 쥐락펴락하는 오보이가 경계를 강화하라는 명령을 내렸다고는 하나, 정황기가 카간 직속의 부대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과 마찰이 생겨서 좋은 게 있을 리가.
“아니, 아니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소? 내가 무언가 깜빡 잊은 것이 있는 듯해서…….”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 수문장은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기로 결정을 내렸다. 만사는 불여튼튼이라는 말도 있고, 자금성으로 확인할 연락병을 보내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리는 일도 아니니까.
그렇게 결정을 내린 수문장이 자금성 방향을 향해 몸을 돌렸을 때였다.
“어이 거기서 뭘 하고 있나?”
자금성 방향에서 청나라 관료 복장을 입은 사람 하나가 호위병들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그쪽으로 시선을 돌린 탓에, 수문장은 그를 본 전령대장의 얼굴이 밝아지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수문장!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 타스하 잘안 장긴……. 그것이 아니라 전령이라 주장하는 이 전사들의 신원에 조금 문제가…….”
“뭐야? 이 전사들은 분명 내 전우들일세. 정황기로 편입된 지 얼마 안 되어 자네가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구만?”
“아, 그렇습니까? 제가 그만 그것도 모르고…….”
낭패다. 수문장은 자신이 잘못된 선택지를 골랐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엇 하러 지금 카간의 전사들을 세워놓고 있나? 빨리 통과시켜주도록.”
“예, 옛! 알겠습니다!”
“내가 가벼운 부상을 입어 천진에 따라가지 못한 것이 다행이구만. 하마터면 자네나 나나 카간께 실례를 저지를 뻔하지 않았나?”
“죄, 죄송합니다! 잘안 장긴!”
방금 자신이 쓸 데 없는 착각을 한 탓에 내린 결정이, 다른 팔기에게 공격당할 빌미를 주고 만 듯했다. 하지만 그런 수문장을 바라보는 잘안 장긴은 그리 화가 난 것 같지 않았다.
“뭐, 하지만 그럴 수도 있지. 이 친구들이 신입이기도 하고, 자네 또한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려다 그런 것이기도 하니, 이번 일은 불문에 부치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더 심혈을 기울이겠습니다!”
“알았으면 얼른 저들을 통과시켜주기나 하게. 그걸로 오늘 일은 특별히 잊어줄 테니.”
수문장은 속으로 괜히 자신이 신경이 날카로웠나 보다 하고 자책했다. 이게 다 아침에 마누라와 싸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마음을 아는 것인지, 타스하 잘안의 장긴은 수문장의 어깨를 툭툭 치고 전령들에게로 향했다. 그런 잘안 장긴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수문장은 머리를 몇 번 거세게 흔들고는 다시 성벽 위로 향하는 계단에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계단을 오르던 수문장은 보지 못했다.
정황기의 잘안 장긴과 그 호위병들이 지금 전령을 향해 모두 왼 팔뚝의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올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들의 팔뚝에 십자로 난 흉터가 새겨져 있다는 사실 또한.
***
천안문의 수문장이 날카로운 눈매를 하고 나를 훑어보았을 때는 일을 그르치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타이밍 좋게 나타난 내 예전 부하 덕분에 그 위기는 싱겁게 끝이 나고 말았다.
“방 장긴, 팔뚝에 난 그것은……?”
“쉿, 카간께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온 것입니다. 일단 자리부터 옮기시지요.”
“카간이?”
내가 강희제에게 이번 작전에 대해 따로 상세히 알린 것이 없었음에도, 황제는 이런 식으로 나를 도울 구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명을 받고 대기하던 방두쇠는 내가 북경성 외곽을 통과했다는 소식을 받자마자 자기 나름대로 작전을 개시했다고 했다.
“대장. 어서 가셔야 합니다. 여기에는 듣는 귀가 많습니다. 아무리 팔기라지만 조선말로 길게 대화를 나누면 의심을 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몸은 청나라에 두었을지언정, 대장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번에 나선 놈들을 이기고 개선하신 자리에서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대장에게 언제고 우리의 의기를 보여드리겠다고.”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방두쇠는 나를 바라보며 씩 웃을 뿐이었다. 호포대 시절의 대원들이 황성 곳곳에서 합류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그런 말을 꺼내는 방두쇠의 품에서 호랑이 가면이 슬쩍 보였다 사라졌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뒷목이 순간 뻣뻣해지더니, 더운 피가 온몸을 도는 것이 느껴졌다.
“대장! 오랜만입니다!”
“이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장!”
자금성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는 동안, 내 뒤를 따르는 병력들은 그렇게 계속 늘어났다. 황성 어딘가에서 나타난 전사들이 속속 나를 찾아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걷어 올린 팔뚝의 십자 흉터를 내게 자랑하듯 드러내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황성 내부를 돌아다니는 척을 하다 작전이 시작되면 내게 합류할 심산인 듯했다.
“청국에 남아 카간에게 충성을 바치는 몸이긴 하나, 저희 역시 고향으로 돌아간 대원들처럼 대장에게 입은 은혜를 잊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저희에게도 은혜를 갚을 기회는 주셔야지요.”
“방 장긴…….”
“사실 귀돌 그놈이 조선에서 일으킨 반정 일을 어찌나 자랑했던지……. 흉터를 새긴 것은 술김에 한 짓이긴 한데, 대장에게 힘이 되고 싶은 마음만은 진짜입니다.”
예전 같았으면 그런 놈들이 청나라에 남았냐며 가볍게 갈궈댔겠지만, 이제는 그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자금성 한가운데에 뛰어들 나를 지키기 위해 옛 부하들이 목숨을 걸고 따르고 있는데, 어찌 내가 꺼낼 말이 있겠는가.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방두쇠는 계속해서 합류하는 대원들을 챙기며 내게 브리핑을 이어갔다. 내 뜨거워진 가슴은 쉽사리 식지 않고 있었다.
“카간은 지금 태화전에서 대신들과 함께 계십니다. 허나 방금 지나온 황성 내부까지는 괜찮지만, 앞으로 지나가야 할 구역은 아무리 카간 직속의 팔기라도 무장해제를 하지 않으면 지나갈 수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거기서부터는 나도 무력으로 돌파를 할 각오를 하고 오는 길일세. 마침 전하께서 장만해주신 신무기가 우리 손에 있거든.”
전방에 나타난 거대한 호수를 보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황성 내부면 몰라도 황제가 머무는 자금성부터는 정황기의 누런 갑주도 효력을 잃는다. 그곳에 나아가려는 모든 이는 몸수색을 받고 황제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물건을 수비대에게 맡겨야 한다.
지금은 별 내색을 하지 않지만, 방두쇠도 지금은 속이 타들어가고 있으리라.
그런 그를 향해,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등에 멘 총을 툭툭 쳐 보였다. 자금성의 해자와 성벽만 기습을 가해 통과하면 된다. 그때부터는 임금이 쥐여 준 후미 장전식 소총의 화력이 소수의 병력으로도 태화전까지 돌파하는데 충분한 힘을 보태 줄 테니까.
“……대장.”
“알고 있다.”
발걸음이 멎었다. 자금성으로 통하는 서쪽 문, 서화문(西華門)에 이르렀을 때였다.
강희제의 밀서에 적힌 그대로 측문인 서화문은 정문인 오문(午門)에 비하면 방비가 허술했다. 그리고 이곳의 해자와 성벽만 통과하면 목표인 태화전까지는 허술한 우익문(右翼門)과 낮은 담장만이 남아있다.
거기까지 가면 곧바로 오보이의 목젖을 찌를 수 있다.
“네놈들은 누구냐? 정황기 병사들인 듯한데, 정체를 밝혀라!”
갑자기 한 무리의 병사가 해자의 다리를 건너오자, 서화문 수비대도 위협을 감지한 듯했다.
하긴, 이만한 규모의 병사들이 떼를 지어 자금성에 접근할 일은 많지 않겠지. 게다가 지금 내 부하들이 걸친 갑옷은 자금성 방위를 맡은 양황기가 아닌, 정황기의 갑옷이다.
“천진성에 나가있는 정황기에서 카간께 보내는 전령입니다. 문을 통과해도 되겠습니까?”
일단은 거리를 좁히기 전까지 시간을 끌어야 한다. 하지만 전령이라는 말로는 수비대가 품은 의문이 완전히 풀리지 않을 것이다. 무장을 해제하지 않은 병사 다수가 궁궐에 접근하는 것 자체를 경계하지 않는 장수는 없을 테니까.
“……신호가 떨어지는 즉시 전투에 돌입한다. 방 장긴을 제외한 타스하 잘안의 대원들은 근접전으로 적을 제압, 총통위 병사들은 총을 장전한 후 성문을 돌파해 적병을 쏘아 넘겨라. 성문 돌파는 신속해야 한다.”
“타스하 잘안은 근접전, 총통위 병사들은 사격전. 신속한 돌파. 알겠습니다.”
해자에 놓인 길지 않은 다리를 건너는 동안, 내가 나직이 내린 명령은 순식간에 물결처럼 퍼져나갔다. 이들과 전투를 치른 것도 꽤 오래 전의 이야기였지만, 이들이 내 수족처럼 움직이는 것은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어어……. 정지, 정지! 더 이상 다가오지 마라! 다가오는 병력은 일단 걸음을 멈추고 통제에 따라라!”
병사들이 계속해서 성문에 접근하자 수비대 쪽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슬슬 구별되기 시작한 수문장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감정이 가득 차 있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 되면 더 이상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된다. 아직 열려있는 성문을 수비대가 닫아걸기 전, 재빠르게 이곳을 돌파해야 하니까.
이제 해야 할 일은 오직 하나뿐.
“……호포대 전원, 전투 개시!”
호포대라는 이름을 입에 담은 것도 꽤나 오랜만의 일이었다. 왠지 모르게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이름에 전율을 느끼며, 나는 종이로 포장된 탄약을 꺼내 그대로 열려 있는 약실에 밀어 넣었다. 예전처럼 포장지를 입으로 물어뜯을 필요가 더는 없었다.
“뭐, 뭐냐, 저놈들은? 대체 무슨 짓을……!”
성문 앞으로 내 병력을 점검하려 다가오던 수문장은 채 말을 끝맺지 못했다. 어느새 짐승 탈을 착용하고 뛰쳐나간 대원 하나가 그를 베어 넘겼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서화문은 비명과 고함으로 뒤덮였다. 내 옛 부하들의 칼날이 무방비 상태였던 수비대에게 내리꽂히면서, 성문의 제어권은 순식간에 내 손아귀에 들어왔다.
“준비된 사수로부터…….”
이제 여기서 남은 일은 성벽 위의 병력을 제거하는 것뿐. 찰칵 소리와 함께 약실이 밀폐된 것을 확인한 후, 나는 숨을 들이마시고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성벽 위의 양황기 병사를 향해 가늠쇠를 겨누었다.
심양 시절 그대로인 호총의 총구에 화약을 쏟아 붓던 방두쇠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지는 것이 보였다.
“사격 개시!”
***
탕. 타탕. 탕.
열띤 논의가 오가던 태화전에 순식간에 정적이 감돌았다. 방금까지 다음 전투에서는 반드시 조선군을 전멸시켜버리겠다며 강희제에게 으름장을 놓던 오보이의 입도 딱 다물어졌다.
“이게 무슨 소리요?”
“후후. 황성 내부의 병영에서 오발 사고라도 난 것이겠지요. 하던 이야기나 마저…….”
그러나 오보이는 채 말을 끝맺지 못했다. 총성이 계속해서 서쪽 방향에서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처음 몇 발로 시작된 총성은 이제 셀 수 없을 정도로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근원지 역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것은 대체……?”
오보이를 비롯해 모든 대신들의 표정이 굳었다. 이들은 가까이에서 나기 시작한 총성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이 자리에서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옥좌 위의 강희제, 단 한 명뿐이었다.
“내 검이 드디어 도착한 모양이로군. 할아버님께서 남기신 말씀대로 예리하기가 천하제일이지 않은가.”
“카간, 그 무슨……?”
당황한 오보이가 말버릇조차 잊고 강희제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헐떡이는 소리와 함께 태화전 문이 활짝 열렸다.
“급보입니다! 우익문으로부터 의문의 적습이……!”
말을 잇지 못한 것은 오보이뿐만이 아니었다. 문을 열어젖히고 적습을 고하던 양황기의 병사는 충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갑자기 앞으로 쓰러져 경련하기 시작했다.
그의 등에 웬 짧은 창 하나가 꽂혀 있는 것을 태화전 내부에 있는 모든 사람이 보았다. 그리고 갑작스러운 사태에 모두가 얼어붙은 사이, 사람 그림자 하나가 천천히 문 밖에 모습을 드러냈다.
“웬 놈이냐! 이 자리가 어떤 곳인 줄 알고 무엄하게……!”
벼락같이 호통치는 오보이의 손에는 어느새 날카로운 단도 하나가 빛을 뿌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호통은 태화전 문 앞을 태산같이 버티고 선 이의 포효에 의해 허리가 싹둑 잘려나가고 말았다.
“무엄? 정말로 무엄한 쪽은 나인가, 아니면 그쪽인가?”
“네, 네놈은……?”
이제야 밖에서 쏟아지는 태양광에 익숙해졌는지, 태화전 안에 있던 사람들의 눈에 드디어 낯선 이의 정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햇빛이 반사되어 황금색으로 빛나는 갑주와 머리에 뒤집어쓴 호랑이 탈까지, 이 세상의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차림새였다.
“카간과 주상 전하의 명을 받아 네놈을 단죄하러 왔다! 구왈기야 오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