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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79화 (279/298)

279화. 우린 어떻게든 무엇이 되어있건

늦은 밤, 저 멀리 북경에서 온 여인이 임무를 마치고 든 처소.

단아한 여인의 눈빛이 달빛처럼 빛났다. 그녀의 쪽찐 머리에 꽂힌 비녀에서는 서릿발 같은 차가움이 묻어났다.

“……당신께서 누구신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서방님이 청국에 계실 적, 당신과 서방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고운 두 손에 들린 붓은 연신 먹 향기를 풍기며 주인들의 의사를 표현하는 중이었다. 이 집의 안주인이 써내려간 문장을 읽었는지, 남장을 한 여인의 소맷자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솔직하게 답해주세요. 설마 서방님 단 한 사람 때문에 여인의 몸으로 이렇게 먼 길을 오가기로 하신 겁니까.”

“……맞아.”

“그 정도로 아직까지 서방님을 잊지 못하신 겝니까.”

“……그래.”

연적을 마주한 하연의 눈이 질끈 감겼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녀의 손에 쥐어진 붓은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서방님을 가지실 생각이십니까.”

***

“아니, 그럴 생각 없어.”

대답은 단호했다. 생각지 못한 대답에, 천천히 품에서 비단주머니를 꺼내놓던 손길이 멎었다.

잠이 부족한 탓에 내가 만주어를 잘못 발음하기라도 한 걸까.

강희제가 고모에 대해 내게 한 말을 생각하면, 황녀가 내 제안을 거부할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무슨 실수를 한 것이 분명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카간의 명을 받아 자가를 정부인으로 받고자 합니다. 허락해주십시오.”

“역시 조카님은 내가 무얼 바라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계셨구나……. 당신도 그걸 아직까지…….”

황녀에게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담담했다. 내 제안 때문인지, 아니면 손에 들린 그녀의 머리끈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따스한 체온이 내 손 위를 머물고 지나갔다. 열일곱이던 그녀가 떨리는 손길로 내 갑주에 묶어주었던 머리끈은 이제야 주인의 손에 되돌아갔다.

“……역시 당신에게 마음을 주길 잘했네. 늦게라도 이런 커다란 선물을 받게 될 줄이야.”

“자가…….”

“하지만 안 장긴, 당신도 알고 있잖아. 그…….”

무언가 말을 이으려던 황녀가 뒷말을 목울대 아래로 꿀꺽 삼켰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명백한 거절의 뜻을 표하고 있었다.

“염치없는 제안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북경을 아니 다녀간 것도, 자가의 소식을 아니 들었던 것도 아닌데, 이제 와서 자가를 받아가겠다는 말을 뻔뻔하게 읊는 사내가 곱게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겠죠.”

“아니, 그건 아니야. 당신도 가정이 있는 사람이고, 그동안 사사로이 북경을 오갔던 게 아니란 것도 알아. 그런 당신이 직접 나를 부인으로 맞겠다는 말을 해줘서 너무나 기쁜걸. 하지만…….”

“…….”

“……하지만…… 아닌 건 아닌 거야.”

또다시 목이 메었던 것일까.

잠시 입술을 열지 않았던 황녀는 괴롭다는 듯 안으로부터 말을 쥐어짜냈다.

“우린 이제 너무나 멀어져 버렸잖아. 그날 이후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는지 보라고, 바보 같긴.”

상복을 입고 마주쳤던 첫 만남부터 피눈물을 흘리며 나를 보내주던 그녀와의 이별까지.

금이 간 채로 내 안에서 깜빡거리던 추억이 다시 산산이 흩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강희제의 제안을 듣고 흩어져 있던 옛 기억의 조각을 애써 맞춘 것이었는데.

“하지만 지금이라도…….”

무릎에 올려져있던 황녀의 손바닥이 부드럽게 나를 가로막았다. 손바닥이 놓여있던 자리, 그 옷자락에는 구김이 잔뜩 가 있었다. 아마도 그녀의 속마음처럼.

그녀의 말이 옳았다. 싱그러운 한 떨기 꽃 같던 젊음은 이제 그녀에게도 마지막 한 자락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이미 딸아이가 시집갈 나이가 된 나는 말할 것도 없었다.

“조카님도 그냥 해본 말일 거야. 당신의 여식을 귀비로 받으려는 뜻은 진심이겠지만, 나와 관련된 이야기는 그저 단순히 고모를 향한 배려일 뿐. 나도 그 정도 염치를 모르는 사람은 아니야.”

“하오나 자가…….”

“내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건 그날 그 순간의 당신이었어. 지옥 같았던 실패한 혼인에서 나를 건져줄 용사님.”

추억의 조각을 애써 그러모아야 했던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허공을 맴돌던 황녀의 눈동자에 천천히 물기가 젖어들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 오래 전 이야기야. 우리가 맺어졌으면 좋았겠지만, 아버님이 하필이면 그때…….”

“늦지 않았다 생각합니다. 자가께서 원하신다면 저는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당신네 고려식 표현으로 하면 강산이 몇 번 변했다고. 카간이 당신 딸을 귀비로 달라고 할 정도잖아. 안 그래?”

“…….”

“그리고 사실…… 지금이라도 당신과 연을 맺는 것도 가슴 뛰는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안 될 것 같아. 나, 두 번이나 남편을 잡아먹은 계집이거든, 알아?”

알고 있다. 도르곤이 마지막으로 나를 불렀을 때 지나가듯 말해준 이야기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자가, 그건 미신에 불과한 이야기…….”

“무당은 내 팔자에 과숙살(寡宿殺)이란 게 꼈다고 하더라. 알아, 당신은 유학자니까 그런 건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하겠지.”

“…….”

“나도 믿고 싶지 않아. 그런 것 따위 상관없이 당신과 함께하고 싶어. 하지만…… 만약에 남편 잡아먹는 팔자라는 게 정말이라면…… 그것 때문에 당신이 다치게 된다면 내 마음이 어떻게 될 것 같아?”

“…….”

“내가 마음에 품은 사내이기에, 당신은 오히려 나 같은 계집을 만나면 안 돼. 당신은 행복해야 하니까. 앞으로도 지금과 같이 승승장구해야 되니까.”

“자가…….”

“그러니까, 나 같은 헌 계집은 가슴 한 구석에 묻어두고 이대로 살던 것처럼 살아가줘. 부탁이야.”

평온을 가장하려 애쓰던 황녀의 눈가에서 물방울 하나가 굴러 떨어졌다. 아마도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눈물방울.

내 눈가에서도 어느새 같은 것이 흐르고 있었다. 어느새 마카타의 눈가에서 흐르는 물기가 칼날이 되어 내 가슴에 난 옛 흉터를 터뜨려 놓았으니까.

“……왜 당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거야? 사내답지 않게.”

“송구합니다. 자가……. 제가 못난 탓에 자가께서…….”

“하, 당신. 쓸 데 없이 마음만 좋은 사람인 건 여전하구나? 그런 사람이 어떻게 정승 자리까지 올라가 나라를 다스린 거야?”

자신도 온통 눈가를 적신 주제에, 황녀는 나를 타박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모순을 지적할 생각 따위, 들지 않았다.

“하지만, 하지만 그렇다면 자가의 인생이 너무나 가련하지 않습니까……. 제가 그런 냉정한 결정을 어찌…….”

“함부로 날 동정하지 마. 나는 지금까지 꽤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생각해. 카간의 딸로 태어나지 못한 보통 백성들은 더한 삶도 살아가는 걸. 위정자인 당신이 더 잘 알 거 아냐.”

“그건 그렇지만…….”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그녀의 말이 백 번 옳았다.

“내게 그렇게 마음 써줄 필요는 없어. 그렇게 내가 마음에 걸린다면, 북경에 올 때마다 가끔 찾아와 얼굴이나 보여주면 그걸로 족할 것 같아. 아마 조카님이 이따금씩 당신을 북경으로 부를 것 같으니까.”

“정말 그것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고작 그런 지인과 다를 것이 없는 관계에…….”

“자금성으로 시집올 당신 딸도 내가 돌봐줄 수 있을 거야. 낯선 곳으로 시집와 홀로 살아가는 건 보통 힘든 일이 아니거든. 아마 말동무 정도는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조카며느리이자…… 딸처럼.”

딸이라는 말이 내 마음을 더 무겁게 만들었다. 그녀는 두 번의 결혼을 겪었음에도 자식을 갖지 못했으니까.

“당신이 너무 그리워지면 고려로 놀러나 가 볼까. 저번에 밟아본 고려 땅은 꽤나 아름다웠거든. 아마 아버님이 조금만 더 살아계셔서 당신을 따라갈 수 있었더라면 좋았겠다 싶을 정도로.”

“…….”

“아, 그래도 당신 아내랑은 친해질 수 없을 것 같아. 당신의 제안을 거부하는 이유에는 그것도 있거든. 당신에게는 좋은 사람이겠지만 속에는 비수 한 자루를 품고 있더라.”

“……그날 밤,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여인들 사이의 일을 사내에게 말할 수는 없는 법이지. 그리고 나, 내 것을 남이랑은 죽어도 나누지 못하는 성격이거든. 역시 아무래도 우린 안 될 인연이었나 봐.”

어느새 황녀의 얼굴은 평온을 되찾은 상태였다. 예전과는 달리 그녀도 감정을 추스르는데 익숙해진 걸까.

잠시 방안에 정적이 흘렀다. 나도, 황녀도 알고 있었으니까. 이제 오가야 할 말은 전부 오갔다는 사실을.

사람을 대하는 일에는 이골이 났다 생각했는데, 지금 상황은 너무나 대처하기 어려웠다. 자리를 떠야할지, 다른 대화를 이어나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침묵을 깬 것은 황녀였다. 방금까지 축 처져있던 그녀의 말투에 다시 활기가 흐르고 있었다.

“좋아. 그럼 이렇게 하자. 당신의 제안을 걷어차는 대신이라기엔 뭐하지만,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줘.”

“부탁이라…….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자가.”

“늦었지만 감히 나를 책임지려 했던 용감한 용사님께 줄 포상이 생각났어. 잠시 눈을 감아줄래?”

황녀의 장난스러운 말투는 예전 그 모습 그대로였다. 무언가 과거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끼며, 나는 나도 모르게 그녀의 명령을 따랐다.

입술에 따스한 무언가가 와닿은 것은 그때였다. 그리고 그것은 지그시 내 입술을 누르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감촉에 깜짝 놀라 눈을 뜨자, 얼굴 가득 미소를 띤 마카타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 내 입술에 닿은 것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황녀님의 손가락이었다.

생각났다. 황녀의 손목을 붙잡고 심양의 뒷골목을 헤매던 그날과 똑같았다.

“쵸쵸. 눈을 뜨면 어쩌자는 거야.”

“마카타…….”

“미안해, 말버릇이 험한 계집이라. 하지만 이 정도는 괜찮잖아? 이미 해봤던 것이기도 하고.”

그때 그녀는 이 손길의 의미를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입이 싼 사형 덕분에 이제 나는 그녀의 손길에 담긴 의미를 대강 알고 있었다. 당시 심양에서 남녀 사이에 유행하던 의식이라 했던가.

하지만 내 입술 위를 천천히 쓰다듬는 황녀의 손짓에는 정말로 신비한 주술의 기운이 담기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때처럼 내 몸은 얼어붙은 것처럼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으니까.

“그때 알려주지 않은 비밀 하나를 가르쳐줄게. 이 의식은 사람의 혼과 혼을 엮는 의식이야. 무당 말로는 여기 인중이 사람의 육체와 영혼이 연결된 지점이라 하더라.”

“…….”

“정말로 효과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라도 하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 잠시만 가만히 있어줘.”

“…….”

“이번 생은 늦어 버렸지만, 다음 생에서는 그러지 않을 거니까…….”

다음 생이라는 말 때문일까. 갑자기 황녀의 얼굴에 누군가가 겹쳐 보인 것 같았다.

기억났다. 정말 오래 전, 아니 오래 후에 있었던 이야기.

“다음번에는 반드시……. 절대 후회 따윈 들지 않도록…….”

천천히, 마치 보물을 쓰다듬듯 소중하게 나를 어루만지는 황녀의 손길은 내 머릿속까지 흩뜨리고 있었다.

감히 넘봐서는 안 될 청나라 황녀에게 처음 본 자리에서부터 흔들렸던 이유가 있었다.

단순한 우연이라기에는 내가 현대에서 먼저 떠나보냈던 사람과 황녀는 지나치게 닮아 있었으니까. 마치 쌍둥이처럼.

하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 떠도는 생각이 사실일 리 없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이야기…….

“됐어. 이제 끝. 하아, 속이 다 후련하네.”

혼란에 빠져있던 사이, 황녀가 진지하게 거행하던 의식은 끝이 난 모양이었다.

천천히 내 입술 위에서 온기가 떨어져 나갔다.

“이제 부탁은 이걸로 끝. 고마워, 마지막 응석까지 받아줘서.”

“아닙니다…….”

“이건 다시 가져가줘. 그걸 보고 가끔씩 나를 떠올려 주라. 당신 부인도 그 정도로는 질투할 생각을 하지 않겠지.”

몽환적인 감각에서 깨어나기 무섭게, 황녀는 소중히 쥐고 있던 비단주머니를 다시 내게 밀어놓았다. 아직 맑아지지 않은 머리 탓인지,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마치 명령을 따르듯 그녀의 지시를 따르고 있었다.

“머리끈……. 알겠습니다. 잘 보관하겠습니다.”

주머니에 묻은 온기는 뜨거웠다. 방금 스쳤던 손끝의 따스함 때문일까, 아니면 주머니에 아직 남아있는 그녀의 체온이 높아서일까.

이제 정말로 물러갈 시간이 온 것 같았다. 하지만 그대로 몸을 일으키려 했던 나를 황녀는 다시 주저앉히고 말았다.

“아, 잠깐.”

“또 무슨 부탁이라도 있으십니까?”

“별 건 아니고, 당신 부인을 생각하니 약이 오르네. 마저 할 일이 하나 더 떠올랐어.”

방금까지만 해도 진지하기 이를 데 없던 황녀의 얼굴에 장난기가 다시 감돌기 시작했다. 마치 탕후루 피자를 앞에 두고 기뻐하던 그날로 시간을 돌린 것 같았다.

“질투라는 말이 나온 김에 질투할 거리나 하나 더 만들어 볼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

황녀의 입꼬리가 지그시 올라갔다. 어느새 그녀의 양손에 덥석 잡힌 소매 탓에 상체가 아래로 끌어내려졌다.

“쉿. 다시 눈 감아 봐. 방금 의식에서 빼먹은 것이 있었던 것 같아.”

입술에 부드럽고 촉촉한 무언가가 다가왔다.

이번엔 손가락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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