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80화 (280/298)

280화. 호랑이 어사 출두야

“……그렇게 해서 황제를 구해낸 호랑이 어사님은 커다란 벼슬과 포상을 하사받았지. 그리고 황제의 스승을 상징하는 황금으로 된 표식과 함께 조선으로 돌아와 행복하게 살았단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조선 어딘가.

공터에 선 커다란 당산나무 아래에는 아이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떠돌며 이야기를 전하는 이야기꾼 하나가 동네 꼬마들을 상대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은 듯했다.

“에이. 뭐 결말이 그런대요? 안선비전 뒷이야기를 들려준다기에 솔깃해서 와봤더니, 순 양반댁 도령 글공부하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드라고.”

“저어기 임진록이라는 이야기는 사명대사님이 왜나라로 건너가서 부랄 석 되에 인피 삼백 장을 받아오던데, 아조씨 말대로라믄 안 선비라는 분이 대단한 것처럼 이야기하더니 청나라 가서 영 해온 게 읎지 않우야.”

“막 아부지따라 춘천 갔을 때 거기 주모가 풀던 이야기가 더 재미있갑소. 한양 말씨만 쓰지 영 맹탕이래요.”

“그, 그러냐? 이 아저씨가 전기수(傳奇叟) 일은 이번이 처음이라…….”

이야기꾼은 잔뜩 주눅이 든 듯했다. 자신 있게 풀어놓은 이야기가 아이들에게 반응이 영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이들 사이에서 한번 봇물 터지듯 흘러나온 불만은 비난이 되어 이야기꾼에게 날아들기 시작했다.

“이걸로 밥 벌어먹으려면 더 그럴듯해야겄소. 그래서, 지금 청나라 천자님이 흉년든 고을들마다 곡식을 풀어주신다, 이 말이래요?”

“에이. 그게 말이나 되는갑소? 여기 순돌이 좀 봅소. 못 먹어서 지금 이렇게 삐쩍 말라빠졌잖소. 몇 년 전에 우리나라랑 전쟁을 치렀다던 나라가 곡식을 보낼 리도 읎고.”

“이 아조씨는 순 거짓부렁만 늘어서는. 마카 뻥을 쳐도 그럴 듯하게 치소. 청나라 천자님이 보낸 곡식 이야기는 이 근방에서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읎사.”

순간, 삐질삐질 땀을 흘리고 있던 이야기꾼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덥석.

순식간에 팔목이 잡힌 아이가 깜짝 놀라 이야기꾼을 쳐다보았다. 너무나 빠른 몸놀림 탓에, 방금까지 조잘거리던 아이는 팔목이 잡히기 전까지 이야기꾼의 움직임조차 느끼지 못했다.

“왜, 왜 이런대요?”

“관아에서 구휼곡을 한 번도 풀어준 적이 없단 말이냐? 벽란항에서 보낸 수입곡이나 남도에서 보낸 어포가 이쪽으로 계속 유입되었을 텐데?”

“아이고, 이 아조씨. 왜 자꾸 어려운 말을 쓰소. 이 고을에 먹을 건 말라비틀어진 마령서 쪼가리뿐이래요. 저어기 춘천도호부에 가면 곡식이 흔하단 얘기는 들었지만…….”

“그 이야기, 자세히 해 보거라. 내 좋은 걸 줄 테니.”

이야기꾼의 소매에서 나온 무언가가 아이의 입으로 사라졌다. 그걸 받아먹은 아이에게서 금세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와! 이 달고 맛난 건 뭐래요?”

“춘천도호부 이야기, 아는 것 있으면 있는 대로 말하거라. 아니면 자세히 알 만한 사람을 대도 좋다.”

“그럼 이 맛난 주전부리를 또 주시는갑소? 아이고, 달아라. 혀가 녹아버릴 것 같으요.”

“물론이지. 이 아이 말고도 관아 일에 대해서 또 아는 게 있는 사람 있느냐? 주전부리는 넉넉하다. 무엇이든 손을 들고 말해주면 이 달콤한 사탕을 주마.”

이야기꾼의 손에는 어느새 단내가 풀풀 풍기는 주머니 하나가 들려 있었다. 그러자 방금까지 이야기꾼에게 날아들던 비난 대신, 이제는 아이들의 고사리손이 우후죽순처럼 하늘로 치솟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달콤한 간식의 효과는 확실했다.

반면 이야기꾼의 눈빛은 어느새 잔뜩 날이 서 있었다. 연신 사탕을 아이들 입속에 넣어주며 이야기를 경청하던 이야기꾼이 주위를 조용히 시킨 것은 잠시 후였다.

“잠깐. 너, 그 이야기 다시 해 보거라. 이 고을 사또가 무슨 소리를 했다고?”

“아……. 그기……. 굶는 이웃집 개똥이네를 보다 못한 우리 아부지가 관가에 가서 환곡을 풀어달라 하소연을 하셨는디요……. 아부지가 뭐라 그러셨드라?”

숫기가 없는 탓에 잔뜩 울상을 한 아이 하나가 말을 더듬었다. 다행히 이야기꾼이 하나 더 물려준 사탕 덕분인지 아이는 금세 얼마 전 있었던 일을 떠올려냈다.

“……관아에는 남은 곡식이 없으니 김 부자라는 사람 집을 찾아가라?”

“야. 아부지 말로는 관아에서 작년에도 기근이 들었던 건 마찬가지라 환곡이 읎사고 딱 잡아뗐다 하시드래요. 그러고는…….”

“김 부자를 찾아갔더니, 곡식을 주고 소작을 부치게 해 줄 테니 땅문서를 내 달라고 했겠군. 맞느냐?”

“어째 아셨대요? 아조씨, 전기수가 아니라 점쟁이 아이래요?”

이야기꾼의 입가가 보기 좋게 뒤틀렸다. 그 모습을 본 아이의 마음속에서는 뜻 모를 신뢰감이 싹트고 있었다.

“너희 아버님께 따로 묻고 싶은 것이 있다. 안내를 해주겠느냐.”

“그야 어렵지 않지만…….”

“아, 이 사탕 말이더냐? 네가 좋은 이야기를 알려주었으니, 모두에게 상으로 주겠다. 너희, 여기 순돌이 덕분에 이 사탕을 먹을 수 있게 되었다는 걸 알아 두거라.”

이야기꾼은 아이들의 시선이 온통 사탕 주머니에 쏠려 있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는 아예 주머니의 아가리를 아예 풀어헤치더니, 바닥이 드러날 때까지 자리에 있는 아이들 모두에게 사탕을 나누어주었다.

아이들에게 감사 인사를 잔뜩 받은 아이의 어깨는 마치 하늘로 치솟기라도 한 것 같았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이야기꾼은 잠시 허공을 바라보더니 무릎을 탁 쳤다.

“그럼 이제 네 아버님께……. 아, 잊은 게 하나 있군.”

“잊은 거요? 혹시 까먹은 사탕이라도 또 있으신 건 아이래요?”

“아쉽게도 그건 아니구나, 핫핫. 이제 주위를 살필 필요는 없다. 그만 내려오너라!”

풀썩. 나뭇잎 흩어지는 소리와 함께 웬 사내 하나가 아이들 한가운데 착지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너무 놀란 나머지, 아이들은 그 흔한 비명 하나 내지 못했다.

“이…… 이…….”

“다행히 저희를 수상하게 여기고 접근한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사부. 관아 방향에서도 의심스러운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았고요.”

“그러하냐? 다행이구나. 그래도 이번 고을에서의 일은 쉽게 풀릴 것 같다. 구휼곡을 횡령해 백성들의 토지를 강탈하려는 놈의 증거를 잡은 것 같으니.”

“그럼 사부, 총통위 병사들에게 집합령을 내릴까요?”

“그래. 기한은 닷새 후다. 그 정도면 충분하지 싶구나.”

나무 위에서 나타난 사내는 이야기꾼과 대화 몇 마디를 주고받더니 몸을 날려 어딘가로 사라졌다. 그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줄 것은 바닥에 떨어진 나뭇잎 몇 장뿐이었다.

두 사내 사이에서 낮은 목소리로 오가는 말의 뜻을 알아듣기에 아이들은 너무나 어렸다. 잠시 후에야 입을 헤 벌린 채 사탕을 빨고 있던 아이 하나만이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그 아조씨는 또 누구래요? 그리고, 그 당산나무에 함부로 올라가면 경을 친대요. 무당 할미가 그걸 봤으면 지팡이를 휘두르면서 와아악!”

“무당 할미? 아,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 아무리 신통력 좋은 무당이라지만 나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할 것이야.”

“그치만, 그 할미는 용한 신님을 모시고 있어서 점괘도 꽤 잘 맞추지 말이래요. 아조씨가 얘기해준 그 유명한 호랑이 어사신님을 모신다던데…….”

“뭐? 핫핫핫핫핫…….”

이야기꾼의 입에서 지금까지는 들을 수 없었던 호탕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위압감을 갑자기 느끼기 시작했다.

이야기꾼이 뒷사정을 알아채고 웃은 것은 아니었다. 사실 방금 아이가 한 이야기는 어사신을 모신다는 무당이 남원에서 흘러나왔던 어사 이야기를 듣고는 멋대로 꾸며낸 이야기.

벌써 30년 전의 일이다.

보통 어사로 나가는 이들의 나이를 생각하면, 모르는 이가 이야기의 주인공이 명을 다했다 착각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사신님을 비웃으면 큰일 난대요! 그랬다가는 신벌을 받을 거라고 할미가 그랬는데…….”

“비웃은 것이 아니다. 다만 내가 아는 것과 조금 달라서 그런 것이지. 헌데 그거 참 암살을 잘 해낼 것 같은 이름의 신님이로구나. 아주 틀리지는 않기도 하고.”

“짐승머리를 한 수하들을 데리고 나타나셔서 못된 일을 저지른 사또와 아전놈들을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주는 신님이라고 하드래요. 자신을 비웃은 사람들한테도 마찬가지라니 아조씨도 조심하셔야…….”

“괜찮다. 그 무당말대로라면 나도 같은 신을 내림받은 모양이니.”

“네? 그게 무슨 말씀이래요?”

말없이 씩 웃음만 지은 이야기꾼이 몸을 일으켰다. 신벌을 염려해 울상을 짓는 아이의 댕기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은 후였다.

아이는 방금까지 작게만 보였던 이야기꾼의 덩치가 갑자기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아이 몇몇은 사탕을 빠는 것도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만 움직여야겠구나. 순돌이 네가 안내하거라. 이제 몸을 바쁘게 놀릴 때가 되었다.”

“네? 네!”

순돌이라 불린 아이 역시 빠르게 변하는 상황에 넋을 놓고 있던 것 같았다. 멍하니 있던 아이를 앞세우고 이야기꾼이 마을 방향으로 몸을 돌렸을 때였다.

“아조씨! 나도 따라가면 안 되나? 방금 해준 이야기, 사실은 쪼끔은 재밌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나도요! 나도!”

“우리 아부지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것 같소! 우리집에도 한번 들러주래요!”

아이들은 재밌는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법이다. 그런 녀석들의 레이더에 무언가 재밌는 사건의 냄새가 걸려든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을 본 이야기꾼은 무언가 좋은 생각 하나가 난 듯했다. 앞장서 나가던 아이를 잠시 멈춘 이야기꾼은 아이들 방향으로 무릎을 굽혀 몸을 낮추었다.

“안 된다.”

“아, 왜 그런대요? 순돌이만 재밌는 구경 하게 놔둘 수는 읎드라고!”

“너희들까지 한꺼번에 몰려다니면 아저씨가 돌아다니는데 방해가 되지 않겠더냐. 순돌이네 집에도 민폐가 될 터고.”

“그건 그렇지만…….”

웬일로 아이들이 이럴 때는 또 말을 잘 들었다. 금세 시무룩해진 아이들을 보고 이야기꾼의 입가에 따스한 미소가 배어들었다.

“좋아. 말을 이렇게 잘 들어주니 아저씨가 약속 하나 해 주마.”

“뭔데요? 설마 요 사탕이라는 주전부리라도 더 주실 거래요?”

핫핫.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이야기꾼의 입에서 육성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이들의 순수함이 그리도 마음에 들었는지, 이야기꾼은 한참을 웃고 나서야 다시 말을 이을 수 있었다.

“재미있는 것을 보고 싶거든 닷새 후에 관아 앞으로 나오거라. 시간은 정오쯤이 좋겠구나.”

“닷새 후, 정오요?”

“그래. 이 아저씨가 어디서도 못 볼 좋은 구경을 시켜주마.”

***

“암행어사 출두야!”

대문을 박차고 들어간 이야기꾼, 아니 어사에게서 땅을 뒤흔드는 포효가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관아를 포위하고 있던 얼룩무늬 병사들이 담장을 박차고 관아로 뛰어들었다.

곧이어 관아 안에서는 살점 터지는 소리와 사람 비명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낌새를 눈치 챈 고을 백성들이 관아 주위로 몰려들었을 때, 어사의 초대를 받아 자리에 먼저 도착한 아이들은 관아 앞에 솟은 나무 위 특등석에서 그 모습을 관람하고 있었다.

몇몇 아이들은 이미 어사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얼굴을 동경으로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입을 헤 벌리고 침을 흘리는 아이까지 있었다.

“세상에, 길산 아조씨. 저 아조씨는 대체 뭐하는 분이래요?”

“조선에서 주상 전하를 제외하면 가장 높으신 분이시다. 청나라 황제 폐하도 예를 갖추어 대하시는 분이시지.”

“예?”

원래는 더 뿌듯한 표정으로 스승 자랑에 여념이 없어야 할 길산이었으나, 지금은 조금 불만이 서린 표정으로 아이들의 질문에 대답을 해줄 뿐이었다. 아이들을 통제하기 위해 본인만 관아 밖에서 대기하게 된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지금 스승님이 머리에 쓰신 물건이 보이지 않느냐. 저것이 바로 스승님이 창시하신 조선제일부대 총통위의 상징이자 암행어사라면 필수로 소지해야 할 짐승복면이란다.”

“저거, 호랑이 거죽 같은데……. 설마 아조씨가 해준 호랑이 어사님 이야기가…….”

“그래, 이 어리석은 녀석들아. 스승님께 너희가 얼마나 큰 실례를 저질렀는지, 이제 알겠느냐?”

“그럼 방금 아조씨 손에서 빛나는 그건…….”

“스승님이 너희에게 이야기해주지 않았더냐. 저게 그 유명한 금마패다. 스승님 이야기를 전해들은 청나라 황제께서 직접 내려주신 물건이지.”

저 황금 마패에는 그 이상의 사연이 담겨있었으나, 길산은 입을 꾹 다물었다. 지금 이 이야기를 꺼냈다가는 아이들의 질문공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 분명했으니까.

어사의 손에서 태양빛을 반사하고 있는 마패는 임금이 스승에게 상시 부여한 감찰권의 상징이기도 했다. 굳이 어사 임무를 내려 받지 않더라도 언제든지 지방 수령의 비리를 처벌할 수 있는 강대한 권한 그 자체.

그 권한과 청나라에서 받아온 태사(太師) 칭호가 합쳐져, 스승은 지금 조정에서 태어사(太御師) 대감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스승이 신하 중 으뜸인 영의정 자리에 오른 지도 꽤 오래 전 이야기, 어쩌면 저 별칭이 새로운 명예직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길산의 머리를 스쳤다.

“와…….”

상상도 못한 어사의 정체에 아이들은 전부 혼이 빠져나간 듯했다. 몇몇은 신들린 듯이 무예를 펼치는 얼룩무늬 병사들에게 시선이 꽂혀 있었다.

사실 어사는 지금도 유람을 핑계대고 방문한 강원도에서 갑작스럽게 어사출두를 행한 것이었다. 짐승이나 산적을 방비한다는 핑계로 데려온 총통위 병사들이 이렇게 쓸모 있을 줄은 길산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옆에서 조용히 있던 순돌이 길산의 옷자락을 슬며시 잡아당긴 것은 그때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멍하니 어사가 사또를 향해 몽둥이를 휘두르는 모습을 지켜보던 녀석이었다.

“무슨 일이 있느냐?”

“……가슴이 답답허요.”

“무얼 잘못 먹기라도 한 것이냐. 어제 스승님이 주신 땅콩범벅이 얹힌 겐가?”

“아이래요……. 속이 얹힌 거랑은 다른 것이……. 저 짐승 거죽을 뒤집어쓴 사내들을 보니 가슴 어딘가가 뜨겁고, 근질근질해서 못 견디겄으요.”

길산은 아이가 보이는 증상이 어떤 것인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자신도 한때 어사의 뒷모습을 보고 열병처럼 앓았던 기억이 있었기에.

과거 그보다 더 못한 처지였던 이의 입가에 미소가 앉았다. 이제는 청나라 황실의 사위이자 촉망받는 무관의 손이 아이의 어깨에 얹혔다.

그의 손길에서는 강한 의지가 전해지고 있었다.

“……내가 그 증상의 특효약을 알고 있다.”

“예? 아조씨도 이런 적이 있었더래요?”

“물론이지. 아주 정확한 처방이니, 들어 볼 테냐?”

길산의 처방은 간단했다.

앞으로 힘을 기르고 몸을 단련하는데 온 힘을 쏟을 것. 주위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그 원리를 깨우치려 애쓸 것.

그리고 나이가 차면 자신이 써준 서찰을 가지고 근처에 주둔 중인 총통위 진영을 찾아갈 것.

“정말로 저도 저렇게 될 수 있으까요?”

“물론이지. 나도 너와 다를 것이 없었으니까.”

아이를 바라보는 길산은 어느새 환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줄곧 불만에 가득 차 있던 그가 오늘 처음으로 보인 밝은 표정이었다.

***

17세기 후반, 조선을 강타했던 미증유의 대재앙은 그렇게 역사 속으로 흘러갔다.

원 역사에서 백만 명 이상의 아사자를 냈던 대기근은, 미래를 알고 있는 한 명이 피워올린 날갯짓에 대부분의 위력을 잃고 말았다. 재해를 오래전부터 예상하고 쌓아왔던 준비가 효과를 유감없이 발휘했던 것이다.

피해가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나라에서 으뜸가는 신하가 일선을 뛰어다니며 수습했음에도 불구하고, 웬만한 기근에 필적할 만큼의 피해가 조선에 남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은, 원래 입었어야 할 상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생 많았다, 한수야. 우리가 해냈구나.”

“제가 이 시대에 오게 된 이유는 오늘을 위해서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형님.”

지옥 같은 이상기후가 몰아닥쳤던 경술년과 신해년이 지나고, 다음해 임자년.

만 3년 만에 다시 누런 풍요로 물든 벌판을 바라보며, 수확기 농촌 시찰을 나온 임금과 정승은 서로의 손을 부여잡았다. 지난 세월 동안 이날을 위해 흘려온 땀과 노력이 헛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이 감개무량한 심정을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감격에 휩싸인 두 사내의 얼굴을 서쪽으로 넘어가기 시작한 석양이 비추었다. 마치 불타오르는 듯 온 하늘을 물들인 노을은, 불길처럼 거세게 일어날 조선의 앞날을 암시하는 듯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