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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83화 (283/298)

283화. 세 번의 삶, 그리고…

어디선가 풀냄새가 흘러들어왔다.

상쾌한 자연의 향기였다. 마침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하니 굳어있는 머리를 풀기에 아주 적합한……. 우욱?

“뭐야, 이 비릿한 냄새는?”

풀냄새 뒤에 숨어 코를 찌르고 들어오는 비린내에 나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키고 말았다. 아직 감각이 돌아오지 않아 희미한 시야 너머로, 여전히 불쾌한 냄새가 내 주위를 진동하고 있었다.

이 냄새, 무언가 익숙한데……. 하나는 비료 냄새고 하나는…….

“언놈들이 여기서 막걸리라도 깐 건가?”

눈앞에 펼쳐졌던 장막이 걷히고, 시야에 익숙한 광경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늦은 시각, 어둠이 내린 사이로 저 멀리 보이는 교문, 넓게 펼쳐진 광장과 분수, 그리고 그 다음으로 펼쳐진 잔디밭…….

오른뺨을 가볍게 후려갈겼다. 아프다.

방금까지 경험한 것들이 여전히 머릿속에 생생했지만, 아무래도 진짜 현실은 이쪽이었던 모양이다.

“……말도 안 돼. 그게 전부 꿈이었다고?”

허탈한 목소리를 막을 수 없었다.

아무리 일장춘몽이라는 고사성어도 있다지만, 그렇게 길고 선명한 꿈이 존재할 리가. 애초에 조선에서 여러 일을 겪을 때 고통이나 쾌감도 지금처럼 뚜렷하게 느껴지지 않았던가.

하지만 천천히 머리가 식기 시작하자, 혼돈에 빠졌던 머릿속은 급격하게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혜성을 맞고 조선으로 떨어진다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보다는 꿈이었다는 가설이 훨씬 가능성이 높…….

“저기, 괜찮으세요?”

“히익!”

등 뒤에서 갑자기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잔디밭에 자빠졌던 놈이 홀로 허공에 중얼거리는 꼬락서니를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놀라지 않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수치심으로 얼굴이 슬슬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갑작스레 들려온 사람 목소리에 놀란 것은 둘째 치고, 이 꼴을 본 목격자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려나.

“괜찮으신 거 맞죠? 중앙 광장 지하에 보건소가 있는데 거기라도…….”

하지만 수치스러운 상황과는 별개로,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서는 걱정과 함께 왠지 모를 친밀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물론 경계심도 함께 실려 있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모르는 사람이 이렇게까지 염려해주니, 신경써줘서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해줘야 교양 있는 대학생다운 행동일 거다. 쪽팔리는 건 쪽팔리는 거고.

하지만 깜짝 놀랄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헉……!”

뭐야, 당신이 여기 왜……?

“저기, 그 표정은 뭐예요? 기껏 잔디밭에서 술 먹고 자는 사람을 깨워줬더니…….”

“화…… 화…….”

“축제라고 술 너무 많이 드신 거 아니에요? 이제 말까지 더듬으시네.”

나는 몸을 돌린 자세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익숙한 사람 한 명이 내 앞에 나타나 있었으니까.

그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이.

“너…… 황…… 아니…….”

“찬 데서 잤다고 입이라도 돌아간 건가……. 그리고, 저 황 씨 아니거든요? 선배님, 저 누군지는 아세요?”

“그…… 그게…….”

“딱 보니 호포대 축제 갔다가 술 많이 드셨나 보네요. 떨어지겠어요, 거기 가슴팍에 튀어나온 가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 얼어붙은 채, 홀린 것처럼 가슴을 더듬었다. 셔츠자락 사이로 부드러운 모피 같은 것이 잡혔다.

“……호피 복면?”

“하여튼 남자들이란……. 옛날 그대로 가면 뒤집어쓰고 막걸리 마시는 축제가 뭐 그리 즐겁다고.”

“이게…… 왜?”

“선배님, 괜찮으신 거 맞죠? 저랑 지금 성대병원 응급실 가실래요?”

꿈인 줄만 알았다. 조선에서 겪은 모든 것들은 내 머릿속에서만 이루어진 일인 줄만 알았다.

헌데, 왜 내 손에는 익숙한 가면이 잡혀 있는 건가.

그것도, 내가 평생 애용했던 낡아빠진 호랑이 탈이.

“어, 거기서 뭐가 떨어졌는데요? 이것 봐요.”

“마…… 패?”

“요새는 이런 소품도 만드나? 삼백기 박물관에서 비슷한 걸 본 것 같은데…….”

그녀의 고운 손에는 둥그런 금속조각 두 개가 가로등 불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잔등이 갈라진 말 다섯 마리의 형상, 이것 역시…….

“우…… 우욱……!”

갑자기 눈앞이 핑핑 돌기 시작했다. 그녀가 내민 차가운 마패 조각에 손끝이 닿자마자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제는 숫제 머릿속에 집채만 한 해일이 밀어닥치는 듯했다. 묻혀있던 모든 기억을 끄집어낼 기세로 몰려드는 정체 모를 힘의 위력에, 나도 모르게 한쪽 무릎을 꿇고 말았다.

눈앞이 다시 암전했다.

비슷한 경험, 겪었던 적이 있었다.

조선에 떨어진 첫날.

***

“……괜찮으세요? 지금이라도…… 부를까요?”

뒷덜미가 이상하게 폭신했다. 꿈결처럼 들려오는 목소리 탓인지 의식이 몽롱했다.

무엇이 진짜인가. 조선인가, 현대인가. 아니면 안개 속에 휩싸였던 그 공간인가.

나비가 된 장자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 장자가 된 나비인가.

“저기, 정신이 들었으면 뭐라 말 좀 해 보세요. 진짜…… 불러야 되나.”

하지만 몽롱한 기운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귓가에 계속해서 들려오는 목소리 덕분인지 점점 정신이 돌아오고 있었으니까.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나는 곧 눈꺼풀을 천천히 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헉!”

“정신이 좀 들어요? 다행이네요. 그럼…….”

눈앞에 보이는 여인이 깨어난 나를 보고 살풋 미소 짓고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지금 그 예쁜 미소가 온전히 들어올 상태가 아니었다.

큰일이다. 굉장히 불경한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귀하신 분께 무릎베개라니.

“황녀 자가! 제가 실례를…….”

이거 실화인가. 방금 내 눈에 들어온 얼굴은 분명 마카타 황녀였다. 그것도 젊은 시절의.

나도 모르게 몸이 저절로 튕겨나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바닥에 엎드린 채였다.

감히 카간의 딸에게 그런 짓을 범하다니. 목숨이 아까우면 일단 엎드리고 봐야 했다. 일단 지금이 언제인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혹시나 지금이 홍타이지가 나를 모르는 때라면…….

“무슨 소리예요. 또 그건? 황녀라니?”

하지만 곧이어 내 귓가를 때린 것은 웬 어처구니없다는 목소리였다.

“……예?”

“저기, 선배님. 아직 술 덜 깨셨어요? 황녀는 경복궁 가서 찾으셔야죠. 왜 저한테…….”

“경복궁……?”

“아니면, 선배 설마…… 유망한 선수라고 벌써 황실과 스캔들이라도?”

바닥에서 전해지는 냉기 때문일까. 그제서야 정신이 완전히 또렷해졌다.

지금 내가 엎드려 있는 바닥, 아스팔트로 되어있다. 그것을 비추는 것은 캠퍼스에 선 가로등이 흩뿌리고 있는 빛이다.

여긴 청나라가 아니었다. 원래 있던 17세기의 조선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들리는 말이 모두 이해되는 것도 아니었다. 머리가 다른 의미로 어질어질했다.

“……선수? 황실?”

“어쨌건, 상태 안 좋으신 것 같은데……. 병원 가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저 누군지 아시죠?”

“어, 그게…….”

“선배님이랑 같이 교양 듣는 후배잖아요! ‘조선 중흥기의 민담과 설화’ 수업이요! 저번에 팀플도 같이…….”

그제서야 기억이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졸업학기, 마지막으로 듣는 필수교양과목, 그 수업에서 어쩌다 만나게 된 다른 과 후배.

그런데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기억들이 무언가 조금 이상했다. 내가 아는 것과 다른 부분들이 일부 섞인 것이…… 마치 내가 아는 세상과 조금 다른 곳에 떨어진 것처럼.

“언제까지 그러고 계실 거예요? 지금 이럴 때가 아니예요! 빨리 일어나세요!”

“어……. 네. 알겠…… 어요.”

당황스러웠다. 분명 내가 아는 그 사람이 맞는데. 외모까지 같은 것을 보니 분명 그런데.

원래는 더 일찍 만났어야 하는 사람이다. 대충 이 년 전쯤, 갓 복학한 선배와 신입생으로.

그리고 원래 지금은…… 그동안 깊은 인연으로 얽혔던 그녀가 이 세상에 없었을 시기. 그리고 갑작스럽게 그녀를 보낸 내가 방황하던 시기.

“근데 어째서 이렇게……?”

내 앞에 있는 여자는 닮았을 뿐, 마카타 황녀가 아니다. 여긴 현대니까.

내가 먼저 떠나보낸 사람도 아니다. 아니, 같은 사람인 것 같지만 있을 수 없는 상황이다.

머리가 복잡했다. 잡힐 듯이 잡히지 않는 진실 탓에, 나는 무릎을 꿇은 채 멍하니 시선을 앞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뭐 해요! 여기 본관 앞이라고요! 누가 보기라도 하면……!”

그런 내가 답답했는지, 벤치에 앉아있던 그녀가 벌떡 일어나더니 내게 다가왔다. 아마도 나를 직접 일으키려는 듯했다.

곧이어 가벼운 발걸음 소리와 함께 따스한 손길이 내 어깨에 날아들었다. 왜인지 모르게 그리운 온기에, 나도 모르게 눈을 감을 뻔했을 때…….

“어……?”

그녀가 멎었다. 방금 내 살갗에 그녀의 손이 직접 닿은 직후였다.

마치 전기가 흐른 것처럼 찌릿거렸던 무언가가 원인일까.

“이, 이거 왜…… 왜 이래요? 나?”

“…….”

“왜 갑자기 이렇게 눈물이 나지……? 이상하다……?”

순간, 눈가에서 펑펑 흘러내리는 물기를 닦아 내리는 그녀의 손끝에서 무언가가 반짝였다. 아마도 그것은 아주 오래 전, 긴 세월을 뛰어넘은 약속 하나.

이제 분명히 보인다. 내 팔기군 갑주에 묶여있었던 기다란 인연 하나가 그녀의 손가락에 얽혀 빛을 발하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시간을 넘어오느라 모든 힘을 소진했는지, 아니면 그것은 환상에 불과했던 것인지, 시대를 초월한 마음은 곧 반짝이는 가루로 화해 허공으로 흩어졌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계속해서 닦아내느라, 그녀는 미처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입술 언저리에 보이지 않는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진 것은 그때였다. 입술 위, 인중에서 상처라도 난 듯 따끔거리는 감각이 올라왔다.

“아…….”

그 순간, 혼란스럽던 모든 것이 이해가 되고 말았다.

아마도 이번에는, 내가 그녀를 걱정할 차례인 듯했다.

“괜찮아요?”

“네……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자꾸 이렇게 눈물이 흐르는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마음속이 자꾸 이상한 게…….”

기억났다. 조선으로 날아가기 전, 먼저 하늘로 보냈던 사람을 처음 마주했을 때도 그랬었다.

그때는 학과가 달라 모르는 사이였음에도 수업시간에 단번에 눈에 띄었었지. 반대로 그녀 역시도 마찬가지였고.

‘선배님. 우리, 어디서 만났었던가요? 이상하게 어디서 마주쳤던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글쎄요. 저는 과외랑 운동 말고는 하는 게 없어서요. 다른 사람이랑 착각하신 거 아닌가요?’

‘아무렴 어때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 이것도 인연인 것 같으니 알고 지내요. 제 이름은…….’

연애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성에게 대시를 받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왜 이런 사람이 나를?’ 이라고 생각할 틈도 없이 우리는 급격히 가까워졌고, 곧 서로와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하지만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녀가 어째서 그렇게 다가왔는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일까.

“괜찮아요. 괜찮아요. 금방 멎을 거예요. 아무 일도 아니니까.”

“정말인가요……? 저는…… 이상하게 계속 울고만 싶어져서…….”

가슴이 꽉 조여들었다. 갑자기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한 수필의 글귀 때문인 듯했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는 사람이 있다.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사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세 번을 마주치고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라 후회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 문제도 없을 거예요. 눈물이 멎을 때까지 제가 옆에 있어 줄게요. 그러니, 이제 더 그렇게 울지 말아줘요. 부디.”

하지만 나는 알 것 같았다.

우리는 세 번째가 되어서야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는 것을. 지금 이 사람을 스치듯 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소리죽여 눈물 흘리고 있는 그녀에게 무엇을 해 주어야 하는지도.

땅을 향하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이제는 왜인지 눈을 맞출 수 없었던 그녀를 똑바로 바라봐야 할 차례인 듯했다.

“어……?”

본관 앞에 우뚝 서 있는 어떤 것이 눈에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무언가 정체모를 낯섦이 흘러나오는 물체. 어쩌면 저것이 내 추론을 뒷받침해줄 근거가 되어줄지도 몰랐다.

“그렇게 앉아만 있으면 진정이 안 될지도 몰라요. 괜찮으면 잠시 바람이라도 맞으면서 걸어 볼래요?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계속해서 내가 옆에 있어준 탓일까, 그녀가 흘리는 눈물이 점차 줄어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걸로 조금은 진정이 된 것인지, 그녀는 내 말을 듣고 고분고분히 몸을 움직여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천천히 떨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본관 앞, 우뚝 솟아있는 동상을 향해.

“설마, 내 추측이 맞는 것은 아니겠지…….”

교문과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동상은 분명 이 대학교 창립자의 것이다.

본래 내 기억에 남아있는 동상은 중년의 남성이 양복을 입고 선 채로 우상단을 바라보는 형태였다. 하지만 지금 내 눈에 보이는 동상은 얼핏 달라 보였다.

이윽고 어둠이 내린 사이로 동상의 세세한 부분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지금 심장이 목젖을 찌를 듯이 거칠게 뛰는 이유는, 내 옆을 걷고 있는 그녀 때문일까.

아니면 곧 마주하게 될 진실 때문일까.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진실을 마주할 준비는 끝났다.

그리고 나는, 천천히 그 모습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역시…….”

역동적인 움직임에 휘날리는 도포자락.

머리 대신 목에 매달린 흑립.

얼굴을 반쯤 드러낸 채 씌워져 있는 범가면.

그리고…… 전방을 향해 포효하는 이의 오른손에 들려 빛나고 있는 금 간 마패.

나도 모르게, 동상 받침대에 적힌 여덟 글자를 소리 내어 읽었다.

“성근 안한수 선생상…….”

모든 조각이 맞춰졌다.

나는 지금, 이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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