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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 어사, 조선을 뒤흔들다!-285화 (285/298)

외전 2화. 저수지의 흰 그림자

며칠 후, 평안도 철산의 한 주막에 낯선 사내 셋이 들어섰다. 평소에 주위에서 볼 수 없던 이들이었지만, 묘하게 주위 지리에 익숙한 듯했다.

“주모! 여기 국밥 세 그릇과 탁주 석 잔! 톡 쏘는 걸로다가!”

주막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난 낯선 이들을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주모에게 음식을 시키는 모양새도 마치 여느 행상인처럼 능숙했을 뿐더러, 최근 들어 철산에는 외부인이 늘상 들락거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거, 힘이 남아도는구만?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는데?”

“그야 길이 잘 닦여있으니 그런 거지요. 대로가 이렇게 잘 관리되는 건 제가 머리털 나고 처음 보는 일입니다. 도련님.”

둘의 대화가 끝나기 무섭게 주모가 김이 오르는 국밥 소반을 들고 나타났다. 주모의 접객 솜씨가 재빠른 것을 보니 아마도 이 주막을 거쳐 가는 사람은 생각보다 훨씬 많은 듯했다.

철산은 대륙으로 사신을 보내는 길인 사행로(使行路)가 통과하는 곳, 원래도 날랜 이는 도보로도 열흘 남짓이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청과의 교역이 상시 이루어지면서 도로 관리에도 더 많은 인력과 돈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주막이 원 역사보다 빠르게 등장하고, 철산 사람들이 외부인에 익숙한 원인도 같은 데 있었다. 본래 돈이 흐르는 곳에는 사람도 흐르기 마련이니까.

방자들과 함께 국밥을 마시듯 삼키고 있는 충신 역시 같은 분석을 내리고 있었다. 그는 임금이 자신을 철산으로 파견 보낸 첫 번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생각보다 일이 오래 걸리지 않게 되어 매우 아쉽지만…… 그래도 보람 있는 일이 될 것 같군. 참, 행수. 현지 협력자 건은 어떻게 할 셈이야?”

“한양에서 모아온 정보도 있고, 협력자가 될 만한 이들의 신원도 몇 확보해 왔습니다. 그건 그리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래? 정말로 이번 일은 휴가가 될 모양이군. 윗분께 아주 깊은 감사를 드려야겠어.”

“앞일은 모르는 법입니다, 도련님. 전번 호서로 나갔던 첫 번째 임무에서도 그리 방심하시다가 그만…….”

“쉿! 입 밖으로 낼 일이 아니지 않느냐!”

입술에 손가락을 올렸던 충신이 갑자기 머리를 쥐어뜯었다. 무언가 괴로운 기억이라도 떠오른 듯했다. 단순히 행수가 말실수를 저질러 정체가 들킬까봐 그러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왜요. 또 친우분들께 두고두고 놀림 받을 추태를 부리시게요? 정말, 그날은 뒤에서 지켜보던 제가 더 부끄러울 지경이었습니다.”

“거기까지…… 그 이상 아픈 곳을 찌르면 아무리 행수 너라 하더라도 묵과하지 않을 것이야.”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쓴 법이랬습니다. 유학을 공부하셨으면 아랫사람의 충언도 들을 줄 아셔야지요.”

행수가 대놓고 충신에게 면박을 주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처참하게 망하고 만 충신의 첫 번째 암행어사 출두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목격자였기 때문이다.

역졸 따위 필요 없다며 홀몸으로 관아를 습격했다가 가짜 어사로 몰린 충신의 이야기는 한때 중궁전에서 유명했다. 중전마마께 빌고 빈 결과 그 이야기는 겨우 대궐 담장을 넘지 않았지만, 덕분에 충신은 몇 달 동안 임금뿐만 아니라 중전의 노비로도 살아야 했다.

“그때 일을 한수 그놈에게 털어놓는 게 아니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놈이 나를 방해하려고 높으신 분께 흘린 것이 틀림없다.”

“그러게 복면은 잘 챙기신 주제에 제일 중요한 그 쇳덩이를 누가 숙소에 두고 오시랬습니까? 그리고, 그때 일을 그대로 문서로 적어 보고한 분은 도련님이시잖아요.”

“그거야…… 그분께 올리는 보고에 거짓을 꾸미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이냐? 헌데 그동안은 아무 일도 없다가, 놈이 돌아오자마자 높으신 분이 그걸로 약점을 잡으시지 않았더냐.”

“그야 그동안은 장안 제일의 작가가 자리를 비웠으니까 당연하지요. 그렇게 아무나 의심하고 들면 못 씁니다.”

“그, 그런가? 하지만 그게 아니면 두 번째 임무가……. 아니다. 여기서 범인을 찾아봐야 무엇하겠냐.”

별것도 아닌 일로 친구를 의심하는 꼴을 보니, 그동안 충신이 중전에게 당했던 수모가 말이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면 두 번째 어사를 나갈 때, 전번에 저지른 실수 때문에 암행을 하지 못했던 것에 한이 맺혔을지도.

두 번째 어사 임무에서 쌓였던 것들을 행수에게 쏘아붙이려던 충신은 목구멍으로 넘어오던 말을 겨우 꿀꺽 삼켰다. 지금까지는 겨우 어떻게 돌려 이야기했지만, 암행이 아닌 어사 일은 더럽게도 재미가 없었으니까.

“행수 너는 모를 거다. 차라리 한양에서 일하던 시절이 더 즐거웠던 그날의 끔찍한 기억을…….”

“수십 번은 족히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인뎁쇼? 뒷구멍이 닳도록 아부를 해대는 자들 때문에 높으신 분 아래에서 갈리던 나날이 차라리 나았었다고 몇 번이고 돌림노래를 부르셨는지, 참…….”

벗의 감언이설의 속아 전답의 크기와 등급을 결정하는 균전사(均田使)로 나갔을 때의 이야기였다. 방전법이 처음 시행되던 시기기도 하고, 무엇보다 충신의 결정에 따라 세금이 달라지니 지방 수령들과 향리들이 어지간히도 들러붙어 왔던 것이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돋는지, 충신은 고개를 몇 번 휘젓더니 진저리를 쳤다. 암행을 나가면 잘못한 놈들을 작살낼 수 있기라도 하지, 공개적으로 어사를 나가는 일은 귀찮은 출장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잘 좀 하십쇼. 매번 남원에서의 이야기를 부러워하시지만 말고요, 예?”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다. 이번만은 반드시…….”

충신의 각오는 남달랐다. 이번 기회마저 놓치면 다음번 암행은 없으리라는 예감이 들어서였다.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뚝배기를 비우던 두 사람이 마지막 국밥 한 술을 입에 물었을 때였다. 아직도 밥을 깨작거리는 방자의 어깨 너머로 웬 낯선 패거리 하나가 주막에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웬 놈들이지?”

“이쪽을 바라보고는 주모한테 무얼 묻는데요……. 대답을 꾸밀 준비를 해야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도련님.”

“전동흘이 철산에서 구린내가 난다며 몸조심하라 하더니, 이런 거였나?”

아무리 봐도 왈패 이상으론 보이지 않는 놈들이었다. 하지만 그래봐야 충신의 인생에서 흔하게 마주쳤던 버러지들. 침착함을 유지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다른 무언가가 충신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꼬아놓고 있었다. 신임 철산 부사로 내정된 전동흘에게서 받은 여러 정보들이 그 원인이었다.

“놈들이 옵니다. 도련님.”

대화를 마친 놈들은 곧장 발걸음을 충신 일행 쪽으로 돌렸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은 모양이었다.

“안녕하십네까. 처음 보는 양반님네. 잠시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습네다.”

“물어볼 것? 니들, 말버릇이 요상타? 그리고, 그 전에 니들이 누구인지부터 밝히는 것이 순서 아니냐? 내 머리에 갓 쓴 거 안 보여?”

두목이라도 되는 듯, 유독 험하게 생긴 자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그러나 충신이 고작 그런 걸로 기가 죽을 사람이던가.

“……아, 실례. 저희는 이 철산 고을의 향청(鄕廳)에서 조직한 자경단입네다. 포졸들을 도와 고을의 치안을 지키는 역할을 하고 있지요.”

“그래서?”

첫 기싸움을 누가 이겼는지는 명확했다.

오히려 충신의 양반답지 않은 대답에 당황이라도 했는지, 그들 사이에서 잠시 소곤거리는 소리가 퍼져나갔다. 아마 놈들도 이런 막되어먹은 양반은 오랜만에 보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 그것이 저희 향청의 별감님들이 낯선 분들이 나타나면 신원을 확인해오라 하셨습네다. 그래서…….”

“신원? 내가 왜? 어디 탈주한 죄인을 수배하라는 명이라도 받았냐?”

“아니, 그것이 아니라…….”

“그냥 이 고을을 지나갈 뿐인데, 어디 유향소인지 향청인지 거기서 한가락 하시는 분들께서 내 신상을 요구하신다? 니들은 그걸 시킨다고 나 같은 사람까지 붙잡고 앉아있고?”

“그게…… 그렇습네다.”

두목이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반면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한 충신은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래도 도호부사 자리가 비어있는 지금, 향반과 향리가 결탁해서 철산 고을을 좌지우지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작 자경단에 불과한 놈들이 저리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닐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상대는 운이 나빴다.

겉만 보면 멀쩡한 양반처럼 보이는 충신은 어려서부터 이 바닥에서 구르고 또 구른 사람이었으니까.

“나, 참. 오입질 한번 하러 가기도 더럽게 어렵구만?”

“……예?”

“하, 니들은 이제 가는귀도 먹은 거냐? 내 이 고귀한 입에 그런 상스러운 말을 또 담아야 되겠냐?”

“설마 방금 오입질이라 말씀하신 건…….”

“그래, 인마! 저기 의주에 명나라 기녀가 나오는 기방이 있다며? 압록강 너머에서 사신들이 올 때 애용한다던 그곳 말이다!”

충신의 말에 놈들은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듯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잠시 흐르던 어색한 침묵은, 패거리 중 약삭빠르게 생긴 놈이 두목의 귀에 무언가를 속삭이고서야 멈추었다.

충신의 비싸 보이는 옷차림새를 자세히 훑어본 두목의 입가가 그제서야 기분 나쁘게 찌그러졌다. 충신도 질 수 없다는 듯 썩은 내가 물씬 풍기는 미소를 날려주었다.

“아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네다. 어쩐지 예사로운 양반 같지는 않으시더니…….”

“칭찬으로 들으마. 그래서, 이 몸에게 뭐 더 궁금한 거라도?”

“아닙네다. 실례가 많았습네다. 그럼 의주까지 살펴가시라요.”

충신은 그 누구보다 저런 왈패들을 무엇으로 다루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돈, 여자, 아니면 더 강한 힘. 그리고 그것은 대화를 풀어나갈 때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렇게 왈패들이 사라진 자리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국밥을 퍼먹던 방자가 내뱉은 탄성만 희미하게 들릴 뿐.

대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눈알을 굴리던 그의 손에는 아직도 밥숟가락이 들려있었다.

***

“시작부터 아주 재수 옴 붙었구만? 안 그래, 행수?”

“액땜이라 생각하십쇼. 그래도 도련님이 첫 단추부터 잘 꿰어주신 덕분에 문제없이 임무를 수행하는 중 아닙니까?”

“핫핫, 허허실실 전략이 아주 제대로 먹히긴 했지. 헌데…….”

지금 충신의 입꼬리가 귀에 걸린 이유는 행수의 사탕발림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말 그의 말대로 왈패들을 말빨로 내쫓고 난 후부터 일이 잘 풀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행수가 미리 알아본 현지 협력자와도 접선이 성공했고, 그의 입에서 나온 정보를 방금 장터에서 확인까지 했다. 하지만 충신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철산의 상황이 지금 어지러운 이유가 원귀(寃鬼) 때문이라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행수?”

“그…… 그게…….”

“우리 행수도 나무 위에서 떨어지는 날이 있군. 겨우 구해놓은 협력자가 저리 쓸모없는 정보를 들이밀 줄이야.”

“…….”

“게다가 사건을 해결할 방향은 따로 보이질 않으니, 이번 암행은 길어지겠구만? 좋아, 아아주 좋아.”

결국 한양에서 벗어나 농땡이 칠 시간이 늘어나 즐겁다는 이야기였다. 그런 주인을 모시는 행수는 한양으로 돌아갈 날이 멀어진 탓에 어깨에 힘이 쭉 빠진 듯했다.

“내 일단 믿음직한 협력자에게 받은 소문이니 진위를 확인하러 가고는 있지마는……. 이거 완전 헛발질 아냐? 철산에 가뭄이 들고 부사가 급사한 것이 전부 귀신 때문이라니.”

“하지만 도련님……. 귀신이 진짜 나타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그리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하는 사람은 아닌…….”

“허튼 소리! 행수 자네는 그런 괴력난신을 지금 조정 관료 앞에서 논하는 겐가? 귀신 때문에 날이 가물고, 멀쩡하던 사람이 죽었다?”

갑자기 조정에서처럼 점잖은 말투로 일침을 놓은 충신이 낄낄거렸다. 충신은 지금 행수를 놀려먹는 이 상황이 어느 때보다도 즐거운 듯했다. 그중에서도 행수가 믿어 의심치 않던 협력자의 입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나왔다는 게 특히.

‘소인 눈으로 똑똑히 봤수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상한 형체를 목격한 것이 한두 사람이 아니우다!’

‘크흠……. 그래애? 그것 외에 다른 소문은 또 없느냐?’

‘다른 소문이라 하시면 그 원귀의 정체에 관해…….’

협력자 앞에서 충신은 꽤나 표정관리를 잘해냈지만, 그의 미묘한 차이마저 알아차리는 행수는 충신의 콧구멍이 미세하게 벌렁거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만큼 귀신 이야기는 허황된 이야기였다. 하물며 괴력난신을 언급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따르는 유학자에게는 더욱.

“물론 허튼 소리라도 그 정도면 어느 정도 사실에 뿌리를 둔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긴 하지. 그러니 지금 우리가 소문의 그 장소로 가고 있는 것이고.”

“지금 가는 곳이 저수지라고 했던가요? 귀신이 나타난다던 곳이?”

“그래. 주위를 탐문하면 뭐라도 나오겠지. 아무 사건도 없이 원혼 이야기가 떠돌 리가 없다. 물론…… 귀신은 절대 있을 리가 없지만 말이야.”

정말 있었으면 나를 찾아오지 않았을 리가 없지.

충신의 입안에서 맴돈 중얼거림은 노을 진 서쪽 하늘로 흩어져 사라졌다.

그것을 듣고 갑자기 가슴이 콱 막힌 행수는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는 충신의 뒷사정을 아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기에.

“뭐, 어쨌건 눈에 띄지 않을 숙소도 필요하고, 전하께서 철산도호부에 속한 수리시설의 현황도 파악하라는 임무도 주셨으니. 어차피 가봐야 하는 장소임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지, 행수?”

“……예. 도련님.”

하지만 충신은 금세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오히려 지금 상황이 갑갑한 것은 행수인 듯했다.

팡. 충신의 두꺼운 손바닥이 행수의 등짝에 작렬한 것은 그때였다. 행수의 몸이 순간 휘청거릴 정도로 강한 타격이었다.

“왜 죽상이야, 행수? 한양에 두고 온 가족이 갑자기 그리워지기라도 한 거야?”

“아, 아닙니다, 도련님. 하지만 도련님도 애기씨가 한양에 계시지 않습니까. 이전에 저한테 출두 준비를 모두 떠맡기신 건 울며 떼쓰는 애기씨를 달래시려다……. 읍읍!”

“거기까지. 입 놀릴 시간에 걸음이나 더 놀리자고. 뒤에 듣는 사람도 있으니까.”

충신의 즐거운 시간은 그걸로 끝이었다. 말없이 어사를 수행하는데 열중하는 방자의 존재를 자각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그 후, 조용해진 일행은 저수지 근처의 민가에 도착해 숙박을 부탁하고 다시 탐문에 나섰다.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탓에 이번 탐문은 그리 길지 않을 예정이었다.

“어…… 어?”

“행수, 왜 그래?”

행수에게서 괴상한 중얼거림이 새어나온 것은 슬슬 어둠이 저수지 수면에도 내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 근방에서 가장 규모가 작아 얼핏 보면 조금 큰 연못이라고 볼 수도 있는 저수지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도련님, 저, 저기…….”

“뭐야? 장난치는 거 아니…….”

행수는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을 따라간 충신의 표정도 천천히 굳어갔다.

“뭐야, 저거?”

“제가 뭐랬습니까. 그 사람은 허튼 소리 같은 거 할 사람이 아니라니까요.”

“아니, 지금 그런 이야기를 할 때야? 저 희끄무레한 물체, 사람 아냐?”

“사람이 지금 이 늦은 시간에 저수지에 나온다고요? 그것도 소복을 차려입고요?”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귀신같은 게 있을 리가…….”

풍덩.

다시 말싸움을 시작했던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수면으로 향했다. 어느새 희끄무레하게 보이던 물체는 간 데 없고, 고요하던 저수지 수면 위에는 웬 물결만이 감돌고 있었다.

“무, 물귀신……!”

행수의 눈에는 지금 이 상황이 영락없이 귀신에 홀린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상황을 빠르게 파악한 사람도 있었다.

펄럭. 하늘에 도포자락이 나부꼈다.

충신이 저수지를 향해 달리며 벗어던진 옷가지였다.

“도, 도련님!”

“X랄하네! 귀신이 실체가 있을 리가 없잖아!”

풍덩.

행수가 말릴 틈도 없이 충신의 몸은 물살 사이로 사라졌다. 망연자실한 행수는 주인을 말리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 사이 두 사람을 따르던 방자는 충신의 옷을 갈무리해 품에 안았다.

“서, 설마…….”

행수의 머릿속은 주인이 물귀신에 끌려갔다는 생각에 이미 새하얗게 변한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물 아래로 사라졌던 충신은 곧 수면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까지 행수가 귀신이라 생각했던 희끄무레한 형상과 함께.

“푸하! 뭐하고 있어! 행수!”

“사, 사람이잖아? 그것도 어린 처녀…….”

“닥치고 빨리 내 옷가지나 가져와! 몸이 차다! 온기부터 되돌려야 해!”

***

충신이 저수지에서 건져 올린 귀신의 정체는 소복을 입은 웬 어린 여인이었다.

구조대원의 솜씨가 좋았는지 멈추었던 숨은 금방 돌아왔고, 충신의 옷가지에 꽁꽁 싸인 채 옮겨져 아랫목에 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몸도 따스함을 되찾기 시작했다.

“정신이 드네? 말만한 에미나이가 왜 물에 들어가긴 왜 들어가네?”

“…….”

정신을 잃었던 그녀가 눈을 뜨는 데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지만 정신을 차린 것이 분명한 그녀의 입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을 뿐이었다.

“무슨 사연이라도 있는 것 아니겠나. 잠시 자리를 비켜주게.”

“예. 나으리. 알겠디요.”

아낙이 몇 번을 다그쳐도 여인이 입을 열지 않자, 이번에는 충신이 나섰다.

충신을 본 여인의 눈동자가 순간 꿈틀거렸다. 아직도 충신의 몸에서 물기가 채 가시지 않은 것을 보고 그가 생명의 은인인 것을 알아챈 것 같았다.

“몸은 좀 괜찮습니까?”

“…….”

“내외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지금은 긴급한 상황이 아닙니까.”

“…….”

“낭자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어디서 오신 분이십니까.”

“…….”

여인의 입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대체 무슨 사연을 품고 있기에 그런 것인지, 지켜보던 행수의 속이 답답해 터질 지경이었다.

하지만 충신은 여인의 그런 침묵조차 상관이 없는 모양이었다.

마치 이런 일을 처음 겪는 것 같지 않은 태도였다.

“차마 털어놓을 수 없는 사연이라면, 이해합니다. 낭자에 대해서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좋으니 회복에 전념해 주십시오.”

“…….”

“다만 기억하십시오. 낭자의 목숨은 제가 다시 이은 것, 앞으로 살아가시면서 오늘처럼 다른 마음을 품지 않았으면 합니다.”

“…….”

“그럼 오늘은 그만 쉬시지요. 몸이 전부 회복되거든,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여인을 상대로, 충신은 할 말을 전부 끝내고서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다른 방으로 옮겨가는 주인을 따라 몸을 일으키던 행수는, 왠지 충신의 방금 말이 죽다 살아난 여인에게 한 말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여인에게서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은 그때였다.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쏠렸다.

“……폐를 끼쳤습니다. 오늘 일,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낭자……?”

낮은 장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려던 충신이 그대로 정지했다. 여인의 시선은 분명 그런 충신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녀의 이름은 홍련입니다. 나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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