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화. 장미와 연꽃에서 향기가 흘러
“너, 이름이 뭐니?”
소년의 질문에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질문은 그날로 끝이 아니었다. 하루, 이틀, 포기하지 않고 매일같이 찾아와 이름을 묻는 소년을 향해 소녀가 입을 연 것은 닷새가 지난 후였다.
“……향이라고 해.”
“예쁜 이름이네! 그런데 왜 나한테 그동안 대답을 안 한 거야?”
“그거야…….”
소년을 바라보는 소녀의 눈동자에 어렴풋한 물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관노비였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어린 시절, 할아비가 역적으로 몰려 삼족이 몰살당한 결과 이런 처지에 놓였다고 했다.
“……그러니까 더는 말 걸지 말아줘. 어디 귀하신 댁 도련님인 것 같은데. 나랑 어울려서 뭘 하려고 그래.”
소년을 밀어내는 소녀의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매정한 말을 듣고도, 소년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가 소녀에게 말을 걸었던 것은, 그녀의 죽어있는 눈이 예전의 그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었으니까.
소녀는 소년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소년이 이따금씩 그의 아비와 함께 관아를 방문하고 나면, 소녀가 걸레질을 하는 사또의 서랍장에는 웬 금붙이가 생겨나곤 했다.
“괜찮아. 나도 할아버지가 역적이라 불린 건 똑같으니까. 너랑 달리, 조금 운이 좋았을 뿐이야.”
“그럴 리가? 너는 양반이고, 너희 아버님은 사또님이랑 친분도 깊잖아?”
“그거야 이 고을 수령이라는 자가 아버지에게 뇌물을 받아 챙기니 그런 거고. 양반들 사이에서 손가락질을 받는 건 똑같아.”
소녀를 향해 소년은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걸 본 소녀는 묘하게 마음이 편안해지고 있었다.
소녀의 마음이 변한 것을 알기라도 한 걸까, 소녀의 눈앞에 손 하나가 쓱 내밀어졌다. 여전히 미소를 거두지 않은 소년이 내민 손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소녀는 그 든든해 보이는 손에 자신의 손을 겹쳐 잡고 말았다.
따뜻했다.
“난 강충신이라고 해. 본관은 진주…… 아니다, 지금의 너한테 이렇게 말하는 건 상처가 되려나.”
소년은 마주잡은 손을 다시 단단히 고쳐 잡으며 따스한 체온을 다시 전해왔다. 그의 얼굴에 서려있는 미소는 점점 환해질 뿐이었다.
“이상하네……. 그런 말을 한 게 너라서 괜찮은 걸까?”
“……정말?”
“나는 이향이야. 이제 와서 성씨와 본관 따위는 아무 소용없지만…….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가 그랬어. 아무리 네가 노비의 몸이라도 뿌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그리고…….”
소녀는 마치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리기라도 할 것 같았다. 하지만 기특하게도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것을 꾹 참아낸 소녀는, 생애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데 성공했다.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광주 이씨라 했어. 그러니 나도 그렇겠지?”
소녀의 첫 비밀을 들은 소년은 뛸 듯이 기뻤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방금, 인생 처음으로 목표라는 것이 생겼다.
지금까지는 대강 흘러가던 대로 살던 삶.
하지만 앞으로의 삶은 꽤나 재미있어질 듯했다.
***
그날 밤, 소녀를 사들여달라고 아버지에게 떼를 썼던 소년은 결국 회초리를 맞고 말았다.
피멍이 시뻘겋게 올라온 종아리를 싸안고, 소년은 그날 밤 결심했다.
아버지가 해주지 않으면 스스로 해낼 수밖에 없다고.
다행히 소년에게는 부모로부터 이어받은 재능이 있었다. 얼마간의 세월이 흘러, 소년은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재물을 손에 넣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는, 그토록 원하던 물건을 사들일 수 있게 되었다.
“고마워. 덕분에 그 음흉한 사또 놈 눈길, 더는 안 받아도 되겠네.”
“고맙긴……. 이제 그렇게 고생할 필요 없어. 그냥 내 집안일만 조금 도와주고. 앞으로는 그…… 신부수업이나 조금 받도록 해.”
부끄러운 말을 뱉은 소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연모로 달아오른 소년의 마음은 소녀에게로 옮겨가, 그녀의 낯빛 또한 붉게 변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소녀의 얼굴빛은 금방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뒤이어 그녀의 입에서는 소년이 상상하지 못한 말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솔깃한 이야기지만…… 그건 조금 뒤로 미루자. 나는 당분간 해야 할 일이 있거든.”
“어째서……?”
“내 몸값, 꽤나 비쌌다며? 그런 큰 재물을 그냥 덥석 받을 수는 없지.”
“무슨 소리야. 너는 그저 나중에 나랑…….”
쉿. 소녀의 부드러운 손가락이 소년의 입술에 얹혔다. 소년은 얼어붙은 듯,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넌 그래도 양반댁 자제잖아. 시전을 물려받을 후계자기도 하고.”
“후계자는 형이지 내가 아냐.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오로지 내 힘으로…….”
“그 말을 하려는 게 아닌 거 알잖아. 지금까지는 순순히 네 뜻에 따랐지만, 혼인은 다른 문제야. 나는 네 정처가 될 수 없어.”
“하지만……!”
“나는 네가 사들인 노비야. 양반댁에서 노비든, 노비 출신이든 정부인으로 들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 아마 너, 그랬다가는 이번엔 정말로 호적에서 파일 걸?”
그날, 소년은 처음으로 소녀에게 큰 소리를 냈다. 하지만 소녀의 단단하게 굳은 마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뀌지 않았다. 결국 소년은 소녀의 마음을 돌리는 것을 뒤로 미루고 그녀가 품은 생각을 묻는 데 그쳐야 했다.
“……그래…… 그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한다 치고. 네가 그런 재물을 어디서 구해오려고?”
“네가 나를 비싸게 사들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잖아. 그걸 조금씩 떼어 팔면, 재물 정도는 어떻게 마련이 되겠지.”
“너…… 설마…….”
소녀는 기생이 되겠다고 했다. 논다니처럼 몸을 파는 삼류 따위가 아니라, 기예와 솜씨를 팔아 재물을 얻는 일패기생.
그것만이 소년에게 빌린 신세를 갚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이야기에, 소년은 잠시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소녀에게서 전해져오는 결의는 그만큼 무거웠다.
“그래도 절대 안 돼.”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그렇게 소녀는 뜻을 접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결국 뜻을 접어야 했던 것은 오히려 소년이었다.
그날 이후로 곡기를 끊은 소녀가 나날이 말라갔기 때문이었다. 보드라웠던 볼이 움푹 들어간 소녀를 앞에 두고, 소년은 차마 그녀의 뜻을 꺾으려 들 수 없었다.
얼마 후, 소녀는 소년이 소개해준 기방에 들어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그날 밤, 소녀는 소년에게 몸을 맡겼다.
“……괜찮아?”
“응…….”
거사를 치르고 자신의 품에 안겨 잠든 소녀를 보며, 소년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소녀의 고집을 절대 꺾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의 소망과 자신의 욕심을 모두 이룰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날, 소년은 소녀를 품에 안은 채 달빛에 잠겨 한 가지 맹세를 했다. 그리고 그 맹세는 약간의 세월이 흐른 후, 훌륭히 이루어졌다.
한양 제일의 기루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리고 한양 제일의 일타기생, 수향(秀香) 또한 그렇게 탄생했다.
***
충신의 표정이 이상했다.
홍련이라 불린 여인에게서 대강의 사정을 전해 듣고 옆방으로 자리를 옮긴 이후였다.
“도련님, 이제 와서 설마 늦장가 생각이 드셨습니까? 저는 찬성입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죠. 상대도 참한 처녀인 것 같긴 한데…….”
“……행수, 나 농담할 기분 아니다.”
주인의 기분을 풀어주려던 행수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오늘따라 충신의 상태가 평소와 꽤나 달라보였기 때문이다. 마치 심양에서 돌아온 직후, 비보를 받아든 그날의 충신을 보는 듯했다.
결국 들끓는 속을 다스리지 못한 충신은 몸을 움직여 잡념을 가라앉히는 방법을 택했다. 늦은 밤 실외로 나가는 일은 위험했지만, 행수도 주인을 차마 잡지 못했다.
“하……. 왜 하필 그때 일이 지금 겹친단 말이냐.”
찬바람이 얼굴을 계속해서 스치고 있었음에도 충신의 머릿속은 식지 않았다.
앞에 펼쳐진 저수지에 다시 뛰어들면 이 복잡한 머리를 식힐 수 있을까.
“그럼 그렇지……. 귀신같은 게 있을 리 없지……. 전부 억울한 소문과 사연이 섞여 생겨난 민중의 소망과도 같은 것이지…….”
뜨거운 머릿속과는 달리,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는 충신의 표정은 서늘하게 굳어있었다.
“그런데 하필……. 왜 그 작은 공통점 하나에서 갑자기 네가 떠오른단 말이냐……. 대체 왜…….”
머리를 쥐어뜯으며 괴로워하던 충신의 눈앞에 익숙한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그녀를 정부인으로 맞으려던 충신의 뜻을 꺾기위해 기녀의 길을 택한 사람.
그리고 사주단자가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난봉꾼으로 소문나는 길을 택한 충신이 언제건 자신의 방에 날아들어도 따스하게 안아주었던 사람.
그리고 뜻밖의 선물을 고백하며 무사히 심양에서 돌아오거든 뜻에 따르겠다 눈물과 함께 속삭였던 그 사람.
그리고…….
“하……. 빌어먹을. 이 빌어먹을 마음은 언제쯤 사그라들려나.”
쿵. 쿵.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어 번 두들긴 충신은 계속해서 발걸음을 이어나갔다.
그렇게 크지 않은 저수지 주위를 수십 번은 돌고 난 후에야, 그는 마음의 안정을 찾고 숙소로 복귀할 수 있었다.
***
다음 날, 어사 일행은 아낙에게 홍련을 단단히 부탁하고 길을 나섰다.
충신의 모습은 평소와 그리 다를 것이 없었다. 계획했던 대로 협력자에게 들은 정보원에게 찾아가 세세한 정보를 얻고, 지나다니는 백성들에게 정보의 진위를 판별해가며 현지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예전 일에 신경을 쓸 여유 따윈 없었다. 어사의 임무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니까.
“배 좌수라는 사람이 전세(田稅)를 내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예. 그렇습네다. 거 향청 소속인 양반들은 거진 안 낸다 하웨다. 전 사또 말로는 양반들은 원래 세금을 안 내는 거라고 들었수다.”
“호오…….”
이번에는 토지 문제였다. 충신은 임금이 자신에게 어사 임무를 부여한 두 번째 이유를 슬슬 깨닫고 있었다.
충신이 알기로도 지금 그의 벗들은 조정에서 방전법(方田法)이라는 새로운 방식을 전국에 확대하려 무진 애를 쓰고 있었다. 방전법은 토지를 네모반듯하게 측량하는 제도로, 그동안 조정의 시선에서 땅을 숨겨 탈세를 저지르던 지주들에게 철퇴를 내리치기 위한 것이었다.
그렇게 해가 떠 있는 동안 철산을 샅샅이 뒤지고 다닌 충신은 결론을 내렸다. 확실히 철산은 이 이유만으로도 한번 마패를 들고 조질 필요가 있는 고을이었다.
“후……. 확실히 은결(隱結)이 한두 군데가 아니구만? 이러니 전하께서 나를 보내셨지.”
“은결…… 이요?”
“토지대장에 누락된 땅 말이다. 하긴, 아직 나랏일을 못 해본 너는 모를 만도 하지. 아, 마침 잘 됐다. 너, 혹시 모르니 내가 작성한 문서를 그대로 베끼도록.”
“예……?”
“내가 조사한 내용이 곧 부임할 차기 철산 부사에게 도움이 되지 않겠냐. 안 그래도 전동흘 그 양반한테 받은 소식이 큰 도움이 되었으니, 갚아줄 필요도 있고.”
그렇게 지금까지 식충이 노릇만 하던 방자에게 자신이 모은 정보를 정리하게 시키며, 충신은 어느 기와집을 향해 일행의 걸음을 재촉했다. 목적지는 방금 백성과의 대화에서 나온 배 좌수라는 사람의 집이었다.
한편, 목적지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 충신에게서는 평소와 다른 미묘한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아마 어제 물에서 건진 여인이 원인인 듯했는데, 눈치 빠른 행수는 지금은 입을 다물어야 할 시기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나를 찾으셨다 들었소. 혹시……?”
“예. 주막에서 마주친 패거리가 신원을 요구하기에, 어느 분이 그러셨는지 궁금해서 그만. 하하.”
“아, 그러셨소? 누구신가 했더니 이렇게 풍채가 당당하신 분일 줄이야. 허허.”
배 좌수라 불린 사내가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어제 만난 왈패들처럼 배 좌수 역시 충신을 색을 밝히는 특이한 양반쯤으로 여기는 듯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라더니. 충신은 지금 담도 크게 향청을 총괄하는 우두머리의 집에 잠입해 있었다. 분명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향청이 탈세의 온상이었던 만큼, 어사의 주먹이 그곳을 향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직 어사출두를 나서기에는 이른 시기, 충신이 이곳에 와 있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좌수께서 예정되어 있지 않은 손님도 이리 반갑게 맞아주시니, 감사하기 이를 데가 없군요. 하지만 제가 찾아온 이유는 단순히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인사가 아니라니?”
“제가 따님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어젯밤 저수지에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우연히 구했지요.”
“아…….”
“안타깝게도 따님이 아직 정신이 돌아오지는 않았지만, 사람이라도 보내 데려와 집에서 보살피는 것이 맞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의주로 가기 전 지나치는 길, 그 소식이라도 전할까 해서 들렸습니다.”
말을 잇는 내내 충신의 눈썹 한구석은 미세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딸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배 좌수가 정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그 일 때문이로군. 일단 고맙소. 굳이 이리 발걸음을 해줄 필요는 없는 것이었는데.”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평소에 하지 않던 겸손을 떨고 있던 충신의 뇌리에 ‘그 일’이라는 단어가 지그시 박혔다.
“아, 그럼 지금 따님을 데리러 사람을 보내실…….”
“아니. 그럴 생각은 없소.”
“예?”
역시.
놀란 척 연기를 해가며, 충신은 속으로 어젯밤 홍련이 한 말을 곱씹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인 배 좌수가 그녀와 그녀의 언니를 언젠가부터 사람 취급도 하지 않았다는 말 그대로였다.
“그 아이는 이제 우리 집안사람이 아니오. 혹시 딸년이 깨어나거든 데려가 첩으로 삼으시건, 아니면 다시 저수지에 뛰어들게 하시건 아무 상관 않겠소. 마음대로 하시오.”
“예? 아무리 그래도 혈육을 나눈 따님이 아닙니까. 도대체 어째서…….”
“자세히 말해주기는 어렵지만, 딸년은 집안의 명예를 더럽힐 짓을 저질렀소. 스스로 목숨을 끊어 속죄할 기회를 주었는데, 그러지도 못한 모양이군. 한심한 것 같으니.”
배 좌수의 반응은 격렬했지만 예상 범위 안이었다. 충신은 충격을 받은 표정을 애써 꾸미며, 치밀어 오르는 속을 꾹 삼켰다.
“명예를 더럽힐 짓이라니요. 그리고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죽게 놔두는 것이 어찌…….”
“길손은 방금 지나오면서 보지 못했소? 저택 근처에 열녀문이 서 있는 것을.”
“아…….”
“우리 배씨 집안은 서북 일대에 명망을 떨치는 명문가요. 그리고 딸년의 문제는 우리 가문의 체면이 달린 문제지. 당신도 유학을 공부했고, 열녀문이 가리키는 뜻이 무엇인지를 알면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을 터.”
충신의 얼굴이 어두워졌으나, 배 좌수는 그것을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한 듯했다.
말수를 잃은 충신을 상대로 배 좌수는 호란 때 정절을 잃은 어미가 자결을 택했고, 그 결과 열녀문이 세워졌다며 알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열녀에게 내려진 열녀문이었을까. 충신은 지금 이야기에서 더러운 냄새를 잔뜩 맡을 수 있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길거리에서 들은 소문이 있는데, 그것이 열녀문 덕분이었던 모양이군요.”
“이제야 알아들으셨나보군. 말이 통하는 양반인 것 같으니 이쯤 하겠소.”
“…….”
“아마 딸년을 첩으로 삼아도 나쁘지는 않을 거요. 사대부가 계집의 본분을 잊고 벌써부터 사내와 놀아난 년이라지만 얼굴은 반반하니, 그건 길손이 알아서 하시오. 다만 그렇게 된다면 우리 가문에서는 딸년의 존재를 부정할 것이오.”
어째 딸년이라고 낳은 것들이 죄다 이 모양이냐며 배 좌수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행동은 홍련의 증언과 그대로 일치하고 있었다. 딸들이 문란하게 굴었다는 후처의 중상모략을 그대로 믿고 자결을 권했다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아비의 모습. 어디서 난지도 모르는 태아의 시신을 가져와 혼전임신을 책망했다던 악마의 얼굴.
하지만 충신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과연 향청에서 좌수쯤 되는 자리를 해먹는 사람이 고작해야 후처의 근거 없는 음해를 듣고 딸들에게 죽음을 명했겠는가.
배 좌수는 더는 대화를 이어가고 싶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에게 들어야 할 정보가 아직 하나 더 남아 있었기에, 충신은 계속해서 솟구치는 불쾌감을 꾹 누르고 입술을 뗐다.
“그…… 혹시 처가에는 말씀을 해 보셨습니까? 혹여나 따님의 외가에서라도 받아줄지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처가? 아, 죽은 전처의 처가 말이로군. 없소.”
“없다니요?”
“전처는 장씨 가문의 유일한 딸, 가문에 남겨진 재산은 전부 사위인 내게 상속되었지. 딸년들의 외가는 뒤를 이을 사람이 없어 단절되었단 이야기요.”
“아…….”
지금, 충신의 마음속에 심증 하나가 굳어졌다. 아주 강한 심증이.
역시, 사람의 탐욕이란 이토록 추악하단 말인가.
충신의 입술이 비틀렸다. 하지만 그것을 본 배 좌수는 충신이 자신의 설명을 납득했다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제 더 나눌 말은 없는 듯하군. 그렇지 않소?”
“……예. 알아야 할 것은 전부 알게 된 듯합니다.”
“말이 통하는 양반이어서 다행이로군. 그럼 좋은 유람되시길.”
충신이 납득한 줄 알았는지, 배 좌수는 그를 두고 유유히 방을 빠져나갔다. 아무래도 이런 일로 시간을 오래 쓰고 싶지 않다는 티가 났다.
충신이 배씨 가문의 저택에서 물러나온 것은 조금 시간이 흐른 후였다. 아마도 그 사이 배 좌수가 빠져나간 빈 방에서 무언가 생각에 잠겼던 듯했다.
“도련님, 무슨 일이라도 있으…….”
“쉿. 잠시 혼자 생각 좀 하게 해줘, 행수. 예상외의 건을 다루어야 할지도 모르겠으니.”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행수와 방자를 따르게 한 채, 충신은 홍련이 머물고 있는 민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지금 떠오른 가설을 검증하려면, 그녀에게 조금이라도 더 정보를 얻어낼 필요가 있었다.
어느 가문에 열녀가 나면 나라에서는 그 증거로 열녀문을 세워주고, 열녀의 집, 그리고 열녀의 아들과 손자에게 부과되는 노역을 감해준다. 그리고 그것은 가문에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져 타의 모범이 되지 못한다 판단되면 언제든지 박탈될 수 있다.
또한, 이 시기 조선은 양란 이후 남존여비 문화가 강하게 자리잡기 시작한 과도기에 해당했다. 조선 초기처럼 시집간 딸에게도 유산이 분배되고, 딸들이 부모의 제사를 맡아 지내던 가문도 아직 존재했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아마도, 배 좌수는 이 두 가지에 모두 해당하는 사람일 것이다. 열녀문과 그것에 따르는 혜택은 배씨 가문의 자랑이었으며, 사위에게도 공평하게 재산을 물려준 것을 보니 홍련과 그 언니는 출가했을 때 유산을 받을 권리가 있었다.
게다가 배 좌수는 방금 분명 거짓을 입에 담았다. 만약 홍련이 근거 없는 일로 음해를 당한 것이 사실이라면, 두 가지 사실은 오직 한 가지 진실만을 가리키게 될 것이다.
“……행수.”
“예. 도련님.”
침묵을 지키던 충신의 입이 열렸다. 홍련이 빠졌던, 그리고 홍련의 언니인 장화가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던 저수지 앞에 당도했을 무렵이었다.
“총통위 병사들을 소집해라. 최대한 빨리.”